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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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몇 번이나 글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모든 것을 담아보려… 길게, 복잡하게 써 나갔다. 결국 모두 지워 버렸다.
표면적으로는 미하엘 콜하스 계획을 바탕으로 영화를 제작해 나간다는 이야기지만… 이 소설은,

늙음과 생성(창작)의 이야기며
분노와 치유(극복)의 이야기이고
순수와 관능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아직도 뭔가를 할 수 있겠어? 라는 물음에
아직도 이렇게나 할 수 있어. 라는 대답이기도 하다.

오에 스스로에게는 새로운 형식(공동작업으로 작품 쓰기)의 물꼬를 튼 사건이며,
사쿠라 씨(애너벨 리, 롤리타, 리스베트, 메이스케 어머니)에게는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었고,
고모리(영화의 제작자, 오에의 친구, 사쿠라 씨의 애인)에게는 헌신의 길을 가르쳐준 세월이었다.

개인(독자)에 대해
분노의 방법으로 연대를
치유의 방법으로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해석하고 변형할 것을 주문하고 있는 듯 하며

작가가 속한 세계(일본국민)에 대해
안타까움과 연민을…
그리고 이런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심지어
남성에서 여성으로, 혼자에서 여럿으로, 서양에서 자기 것(동양)으로의 이동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리아스식 해안처럼
이 짧은 소설 안에는 구체적인 삶과 알레고리가 구석구석 복잡하게 전개된다.

마지막 버스 안 사쿠라 씨가 메이스케 어머니의 넋두리를 알토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장면에서 그리고 공연의 마지막 연습에 베토벤 노년의 작품. 피아노 소나타 32번의 2악장이 울리는 장면에서는, 소름이 돋는다.

짧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지만
이 작품은 마스터피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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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러스킨의 드로잉
존 러스킨 지음, 전용희 옮김 / 오브제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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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보다는 사물을 관찰하는 시각이 중요,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와 일맥상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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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한나 아렌트 ROUTLEDGE Critical THINKERS(LP) 20
사이먼 스위프트 지음, 이부순 옮김 / 앨피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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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물지 않은 생각으로 리뷰를 쓰느니 나중에라도 참조할만한 문장 몇 개를 적어 놓는 것이 낫겠다. 한나 아렌트의 사상이 궁금했다기 보다는 “스토리텔링”이라는 주제에 끌려 읽었다. 문학 읽기, 삶 읽기에 적지 않은 가르침을 받았다. ‘간결하고 정확한 정리’라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은데, 사이먼 스위프트는 그것을 글자 그대로 여기에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그 자체로 새롭고 독특하다는 생각,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항상 포괄적 세계관에 끼워 맞추려 해서 또는 기성의 이론으로 그 사건을 설명하려 해서 그것이 지닌 새로움과 독특함을 손상시킬 위험이 있다는 생각에 경도되어 있었다. (중략) 덴마크 작가 아이작 디네센에 대한 에세이에서 아렌트는 “스토리텔링은 의미를 규정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고서 의미를 드러내는 동시에, 있는 그대로의 사물들과의 일치와 조화를 가져온다”고 썼다.
: 여기서부터 끌린다. 이러한 생각은 내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같은 편이군’


아렌트가 인용한 아이작 디네센의 표현을 빌리면, “슬픔을 이야기 속에 담아내거나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 모든 슬픔을 견딜 수 있다.” 아렌트는 스토리텔링이 역사에 대처하는 도구로 이해되는 것만큼이나 현대 세계의 악에 저항하는 중요한 도구를 제공한다고 여겼다.
: 악에 저항하는 도구. 거창하다. 하지만 ‘악의 평범성’이라는 아렌트를 대표하는 개념을 대입해 보면 스토리텔링은 그 거창한 것을 실천하는데 있어 가장 기본적이며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수긍하게 된다.


대화와 설득, 타인들의 주장을 인정해야 할 필요성 등을 포함하는 정치를 대부분의 철학자나 이론가들은 성가시고 불명료하며 인간적인 문제로 여긴다. 정치는 철학적 사유에 필요한 조용한 공간을 공적 영역의 소음과 불확실성으로 어지럽힌다.
: 이것은 철학자나 이론가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설득, 정치 이런 과정들을 나부터도 얼마나 성가셔 하는지… 이 문장을 읽고 흠칫 놀랐다.


세계 속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탁자가 그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 사이에 놓여 있는 것처럼, 사물의 세계도 그것을 공동으로 소유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것처럼 세계는 사람들을 관련시키는 동시에 분리시킨다.
: 탁자로서의 세계. 멋진 비유.


공적 삶과 사적 삶 사이의 고대적 구분이 ‘사회’라는 독특한 근대적 현상의 출현으로 붕괴되었다고 생각했다. (중략) 사회란 단지 생활하고자 상호 의존한다는 사실이 공적 의미를 획득하고, 순전히 생존과 연관된 활동들이 공적으로 나타나게 하는 형식이다.
: 순수하게 먹고 사는 문제가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모든 나라의 보수정권이 자주 쓰는 전략이 이거 아닌가. 생존과 연관된 활동들이 공적으로 더 많이 나타나게 하는 것.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닌 더욱 심화시키고 마는 방향 말이다.


인간의 조건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이 조건을 이야기와 서사의 주제로 만들어 준다. 그러나 개별적 삶의 이야기는 그 삶을 사는 바로 그 사람에 의해 얘기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궁극적으로 타인들, 말하자면 그 사람이 죽은 이후에도 살아남아 전체 이야기를 볼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얘기되는 이야기다.
: 나는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내가 속한 공동체의 이야기에 속한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을 읽었을 때 본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의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


아렌트에 따르면 근대성 또한 ‘세계로부터 자아로의 비행’으로 규정할 수 있다. 우주 비행이 인간을 세계에서 멀리 데리고 간다면, 자아로의 비행은 개별 자아들의 공통된 인간 세계를 거부하는 내적 망명의 형태로 일어난다.
: 이러한 생각이 실현 가능하게 된 것은 20세기부터 라고 아렌트는 얘기한다. 고독으로 망명하고 싶어하는 충동. 아. 하지만 말이다. 이 충동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없는걸…


세계는 모든 인간이 세계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 따라서 서로 다른 의견들을 조정해야 한다.


플라톤은 육체를 정치 및 정치적 영역과 동의어로, 영혼을 철학과 동의어로 보았다. 그러므로 철학자가 진정한 철학자가 되면 될수록 “그는 더욱더 자신의 육체와 분리된다.”
: 언어에 집착하면 할수록 도(道)와 멀어진다는 말이 퍼뜩 생각난다.


인간을 규정하는 철학적 방식은 개별적 인간을 개별적이게 만드는 것인 그의 유일성에 대한 본질적 질문, 말하자면 무엇(what) 보다는 누구(who)에 대한 질문을 잃어버린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그의 행위들 속에서 발견되는데, 그 행위들은 그의 삶의 이야기, 즉 전기가 될 때 의미 있는 것이 된다.
: 무엇 보다는 누구. 사람을 대할 때 예술작품을 접할 때, 내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할 포인트.


아렌트에게 죽음은 오히려 공적 소통의 가능성, 그리고 이야기의 시작을 나타낸다.
: 승자독식의 세계, 유명인의 세계, 일등만 기억하는 세계, 쏠림의 세계 안에서… 작은 개별적 인간은 어떤 가능성이 될 수 있을까. 어떤 시작이 될 수 있을까.


아렌트가 칸트를 인용한 바대로, 판단은 “특별함을 사유할 수 있는 능력”


거트루드 스타인은 “장미는 장미인 것이 장미”라고 썼다.


유대인으로 출생했다는 사실이 종교적, 민족적, 사회경제적 의미를 상실할수록, 유대인다움은 더욱 강박적으로 변해 갔다.
: 이건 유대인들한테 하는 얘기가 아니라 딱 현재의 우리들한테 하는 얘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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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크 라이프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노블마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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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바나나의 단편소설들을 아마추어 야구에 빗댄 적이 있었다. 어딘가 서투른 듯 보이지만 요행 같은 건 생각지도 않는 자세 같은 것. 작은 성공에도 선수 전체가 모두 한 마음이 되어 기뻐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어서였다.

요시다 슈이치의 이 소설은 그에 비하면 갑자원 결승전에 오른 팀 같다. 닳고 닳은 프로가 아니라 아마추어라는 점에서는 바나나와 느낌이 비슷하지만, 뭐랄까 훨씬 우수한 선수들이 나와서 경기를 하는 기분.

툭 툭 하고 볼을 던져 주의를 흩트린 후 빡! 하는 소리와 함께 포수의 글로브에 꽉 차게 들어오는 직구 스트라이크. <<파크라이프>> 속 인물들의 대사가 그렇다. 그렇게 빠른 직구를 날릴 때, 거기에는 어떤 시선이, 의지가, 통찰이 뭉뚱그려져 공 안에 꽉 차있다. 통쾌한 반짝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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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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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은 제발트를 가리켜 ‘비탄에 잠긴 정신’이라고 했다.
<<토성의 고리>>는 1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장을 한 컷의 사진으로 친다면 그의 사진은 가장 하얀 부분이더라도 옅은 회색으로 인화된, 그라데이션이 아주 정확한 사진들임을 느낀다. 현대의 많은 훌륭한 소설들이 그 한 구석에라도 윤곽이 흐릿해지며 마치 공중에서 엷게 사라지는 듯한 가벼움 같은 것들을 장치해 두는 반면에 제발트는 가벼울 만한 것에게도 짙은 무게감을 부여한다. 그런 무게감은 확실히 비탄이라고 불릴 만하다고… 끄덕거리게 된다. 더군다나 이 소설은 제목에까지 ‘토성’이 들어가 있다. 멜랑콜리의 상징.

밀란 쿤데라는 ‘커튼을 찢는’ 것에 대해 말했었다.
<<토성의 고리>>의 화자는 영국의 서퍽 지역을 여행한다. 한물간 도시, 잊혀진 저택, 길도 제대로 찾기 힘든 시골, 관광객이 사라진 해변 등등. 제발트는 이런 공간적 물성(物性)에 가리워진 것들을 시간의 지식으로 홀연히 걷어내고 있다. 로우스트로프라는 이젠 잊혀진 항구에서 한 때는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던, 이젠 어획고가 바닥난 청어 얘기를 풀어 가다가 영국의 반역범으로 처형된 로저 케이스먼트 이야기로 이어지고 다시 그와 콩고에서 만났고 로우스트로프 항구를 들락거렸던 조셉 콘래드의 아프리카에서의 끔찍했던 경험들을 전한다. 그리고는 카프카의 삼촌까지 연결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의한 자연과 사람과 장소와 인간성의 파괴를 가감 없이 써 내려간다. 그저 황폐해져 버려 이젠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것들의 역사를 통해 역사책에 흔히 표기된 시대에 따른 제국들의 영토 지도처럼, 진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허상의 지식들을 찢어 버리고 인류가 자행한 비극에 대한 날것의 진실을 접하게 된다.

윤리의식과 잊혀진 진실의 순간을 포착하는 시선, 내가 그의 작품들을 소중히 여기게 된 이유다. 조문객의 신중함이랄까, 극히 애석해하고 진심으로 슬퍼하는 태도가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그런 윤리의식 때문에 그가 말하는 사실과 허구를 모두 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사실 소설이 이런 분위기를 띄면 독서하기엔 대단히 갑갑하고 따분하기 일쑤다. 그런데 그의 작품들은 전혀 그렇지가 않은 데, 그건 그의 시선이 다음에는 어디로 향할지 또 어떻게 새로운 사실과 허구로 연결할지… 호기심을 끊어지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그의 진실 포착 능력이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믿는다.


‘강가를 따라 걸어가면서 패배자들의 투쟁과 깊은 절망의 끔찍함을 이해하지 못한 채 방관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그의 비전은 언제나 영혼을 흔드는 강력한 지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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