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물지 않은 생각으로 리뷰를 쓰느니 나중에라도 참조할만한 문장 몇 개를 적어 놓는 것이 낫겠다. 한나 아렌트의 사상이 궁금했다기 보다는 “스토리텔링”이라는 주제에 끌려 읽었다. 문학 읽기, 삶 읽기에 적지 않은 가르침을 받았다. ‘간결하고 정확한 정리’라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은데, 사이먼 스위프트는 그것을 글자 그대로 여기에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그 자체로 새롭고 독특하다는 생각,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항상 포괄적 세계관에 끼워 맞추려 해서 또는 기성의 이론으로 그 사건을 설명하려 해서 그것이 지닌 새로움과 독특함을 손상시킬 위험이 있다는 생각에 경도되어 있었다. (중략) 덴마크 작가 아이작 디네센에 대한 에세이에서 아렌트는 “스토리텔링은 의미를 규정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고서 의미를 드러내는 동시에, 있는 그대로의 사물들과의 일치와 조화를 가져온다”고 썼다.
: 여기서부터 끌린다. 이러한 생각은 내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같은 편이군’
아렌트가 인용한 아이작 디네센의 표현을 빌리면, “슬픔을 이야기 속에 담아내거나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 모든 슬픔을 견딜 수 있다.” 아렌트는 스토리텔링이 역사에 대처하는 도구로 이해되는 것만큼이나 현대 세계의 악에 저항하는 중요한 도구를 제공한다고 여겼다.
: 악에 저항하는 도구. 거창하다. 하지만 ‘악의 평범성’이라는 아렌트를 대표하는 개념을 대입해 보면 스토리텔링은 그 거창한 것을 실천하는데 있어 가장 기본적이며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수긍하게 된다.
대화와 설득, 타인들의 주장을 인정해야 할 필요성 등을 포함하는 정치를 대부분의 철학자나 이론가들은 성가시고 불명료하며 인간적인 문제로 여긴다. 정치는 철학적 사유에 필요한 조용한 공간을 공적 영역의 소음과 불확실성으로 어지럽힌다.
: 이것은 철학자나 이론가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설득, 정치 이런 과정들을 나부터도 얼마나 성가셔 하는지… 이 문장을 읽고 흠칫 놀랐다.
세계 속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탁자가 그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 사이에 놓여 있는 것처럼, 사물의 세계도 그것을 공동으로 소유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것처럼 세계는 사람들을 관련시키는 동시에 분리시킨다.
: 탁자로서의 세계. 멋진 비유.
공적 삶과 사적 삶 사이의 고대적 구분이 ‘사회’라는 독특한 근대적 현상의 출현으로 붕괴되었다고 생각했다. (중략) 사회란 단지 생활하고자 상호 의존한다는 사실이 공적 의미를 획득하고, 순전히 생존과 연관된 활동들이 공적으로 나타나게 하는 형식이다.
: 순수하게 먹고 사는 문제가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모든 나라의 보수정권이 자주 쓰는 전략이 이거 아닌가. 생존과 연관된 활동들이 공적으로 더 많이 나타나게 하는 것.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닌 더욱 심화시키고 마는 방향 말이다.
인간의 조건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이 조건을 이야기와 서사의 주제로 만들어 준다. 그러나 개별적 삶의 이야기는 그 삶을 사는 바로 그 사람에 의해 얘기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궁극적으로 타인들, 말하자면 그 사람이 죽은 이후에도 살아남아 전체 이야기를 볼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얘기되는 이야기다.
: 나는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내가 속한 공동체의 이야기에 속한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을 읽었을 때 본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의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
아렌트에 따르면 근대성 또한 ‘세계로부터 자아로의 비행’으로 규정할 수 있다. 우주 비행이 인간을 세계에서 멀리 데리고 간다면, 자아로의 비행은 개별 자아들의 공통된 인간 세계를 거부하는 내적 망명의 형태로 일어난다.
: 이러한 생각이 실현 가능하게 된 것은 20세기부터 라고 아렌트는 얘기한다. 고독으로 망명하고 싶어하는 충동. 아. 하지만 말이다. 이 충동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없는걸…
세계는 모든 인간이 세계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 따라서 서로 다른 의견들을 조정해야 한다.
플라톤은 육체를 정치 및 정치적 영역과 동의어로, 영혼을 철학과 동의어로 보았다. 그러므로 철학자가 진정한 철학자가 되면 될수록 “그는 더욱더 자신의 육체와 분리된다.”
: 언어에 집착하면 할수록 도(道)와 멀어진다는 말이 퍼뜩 생각난다.
인간을 규정하는 철학적 방식은 개별적 인간을 개별적이게 만드는 것인 그의 유일성에 대한 본질적 질문, 말하자면 무엇(what) 보다는 누구(who)에 대한 질문을 잃어버린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그의 행위들 속에서 발견되는데, 그 행위들은 그의 삶의 이야기, 즉 전기가 될 때 의미 있는 것이 된다.
: 무엇 보다는 누구. 사람을 대할 때 예술작품을 접할 때, 내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할 포인트.
아렌트에게 죽음은 오히려 공적 소통의 가능성, 그리고 이야기의 시작을 나타낸다.
: 승자독식의 세계, 유명인의 세계, 일등만 기억하는 세계, 쏠림의 세계 안에서… 작은 개별적 인간은 어떤 가능성이 될 수 있을까. 어떤 시작이 될 수 있을까.
아렌트가 칸트를 인용한 바대로, 판단은 “특별함을 사유할 수 있는 능력”
거트루드 스타인은 “장미는 장미인 것이 장미”라고 썼다.
유대인으로 출생했다는 사실이 종교적, 민족적, 사회경제적 의미를 상실할수록, 유대인다움은 더욱 강박적으로 변해 갔다.
: 이건 유대인들한테 하는 얘기가 아니라 딱 현재의 우리들한테 하는 얘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