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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패단의 방문
제니퍼 이건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3월
평점 :
주제는 뒤표지에 커다랗게 인쇄되어 있어 두말 할 필요가 없겠지만, 내 방식대로 정리해 보자면 이렇다. 소설은, 시간이 깡패라는 통찰을 전한다기 보다는 깡패인 시간을 좀처럼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어떤 마음을 담고 있다. 라고. 또는 시간이라는 형식은 인간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시킨다. 라고.
읽는 동안 머리가 바빴다. 그렇지 않아도 머리를 너무 굴리느라 핑핑 돌 지경인데, 머리를 더 굴리게 하는 그런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소설을 읽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알게 됐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난해하다는 뜻은 아니다. 주제는 명확하고 13개의 단편으로 이뤄진(차례를 보면 느끼겠지만 이 소설은 하나의 앨범(LP판)으로, 각각의 단편(혹은 연작소설의 한 챕터)의 제목은 하나의 곡명처럼 사용되고 있다) 것을 그냥 쭉 읽어 나가면 된다. 정보량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읽기에 부담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뭔가가 나를 자극했고 그것은 나로 하여금 책 읽기를 자꾸만 멈추게 만들었다. 스탭퍼를 밟는 것처럼. 하나를 누르면 다른 하나가 반동되어 올라오듯. 두 가지 때문에 뇌가 가동됐다.
첫 번째는 물건들. 첫 단편인 <유실물>에서 사샤가 훔친 물건들은 당연하게도 시간과 연관된다. 사샤의 물건뿐 아니라 13개 단편 구석구석 놓여진 물건이 모두 그렇다. 한 사람이 지니고 다니는 물건들은 그 사람의 삶과 결부되기 때문에 그 물건들에는 삶의 일부가 결정화되어 간직된다. 첫 번째 모호함이 여기서 감지된다. 물건들에는 ‘윤곽선’이 존재할 터이다. 즉 소설의 주제와 연관된 중요 사물에는 질감이라든지 아니면 회화적 의미에서의 윤곽선이 선명하게 느껴져야 하는데, (내 느낌이 어긋난 것일 수도 있지만) 이 소설에서의 물건들은 문장들 사이의 다른 어휘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평범하게 놓여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시 말해 존재감이 두드러지지 않게 느껴졌다(그래야 함에도 말이다).
두 번째는 메시지. 13개의 단편들엔 아주 노골적으로 (심지어 폰트가 굵게 표기된 것들조차 있는데) 메시지가 나타난다. 단발마의 단어나 짧은 문장들로 이뤄진 그 강력한 메시지들은 ‘시간은 깡패’ 라는 것을 계속해서 환기시킨다. 이 메시지들은 무엇인가? 왜 이렇게 노골적으로 각 단편마다 이렇게 유치한 방식으로 계속 나타나는가? 라는 생각이 끊이지 않다가, ‘해골’을 떠올렸다. 서양의 정물화. 그 중 바니타스(Vanitas).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 소설은 ‘헛되고 헛되도다’를 표명하는 소설이 아니라는데 있다. 해골을 그려 넣었는데도 어떻게 ‘헛되고 헛되도다’라고 느껴지지 않은 것일까?
그게 첫 번째로 언급한 윤곽선이 모호한 물건들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 물건들에 윤곽선은 모호하지만 (사샤의 말로 잠깐 언급되듯) 어떤 메아리가 느껴진다. 이것이 두 번째로 언급한 강력한 메시지와 묘한 균형을 이뤄내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이 소설은 다르다.
다른 뛰어난 소설이라면 첫 번째로 언급한 ‘시간의 사물성’을, ‘응축된(단면의) 시간’을 선명하게 또는 만질 수 있게 그려내는 데 초점을 맞췄을 테다(뛰어난 소설이라고 벌써부터 설레발 친 이유는 이것을 제대로 해내는 작가 또한 극소수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허나 제니퍼 이건은 메시지 그 자체, 단발마의 느낌이나 짧은 잠언 같은 메시지. 바로 그 자체의 사물화를 이뤄내고 있다. 즉 메시지(소설을 읽어보면 자연스럽게 눈에 확 띄는 그 문장들)가 해골로서 정물화의 主 정물로 기능하고, 해골 주위에 사물들(응축된 시간으로서의)의 이름을 副 정물로 배열해 놓은 느낌. 소설의 12번째 단편은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로 작성되어 있는데 파워포인트로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작성해 본 사람들이라면 알 테지만, 거기서는 읽혀지는 문장보다 그리기 도형(사각형, 화살표, 삼각형 등) 자체가 그 메시지의 메시지성(메시지의 우선순위)을 나타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바로 그런 것처럼 이 소설의 각 단편에서 노골적으로 나타나는 그 메시지들이 마치 파워포인트 슬라이드의 그리기 도형, 바로 그것처럼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 말로 표현하기 힘드네…
첫 번째 것. ‘시간이 결정화한 사물’을 그려내는 능력(그 중 특히 질감)이 탁월한 작가에 오르한 파묵이 있다. 제니퍼 이건은 사물은 오히려 문장처럼, 문장(중심 메시지)은 사물처럼 표현해 낸다. 이런 형식은 지금껏 읽은 소설에선 처음 보는 것이다(있었는데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소설은 록음악이 처음부터 끝까지 배경처럼 깔려 음악이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느끼기에 이 소설은 회화적이다. 매우 뛰어난 현대 작가의 정물화(포스트모던 한?)를 감상한 느낌. 그러니 이렇게 말해야겠다. 제니퍼 이건은 매우 뻔한 주제를 절대 뻔하지 않은 형식으로 표현해 냈다고.
하지만 새롭다는 것과 좋아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좋아하려다 결국 거리감을 두게 되었다. 이유는 작가가 생각지도 못한 것 때문이다. 시간만큼이나 ‘문화도 깡패’라는 것. 만일 이 소설이 동남아시아나 남미의 어느 나라 소설이었다면 내가 그렇게 열심히 스마트폰으로 검색하고 잘 모르는 문화관련 단어들을 외우려고 하고,,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입맛이 좀 썼다. 미국 문화. 20세기와 21세기의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아직도 알게 모르게 시간만큼이나 깡패인 그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