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침과 기도
시자키 유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1.

검붉은 사막의 바다, 푸른빛의 하늘과 노란빛 대지 그리고 하얀색 풍차, 얼음 속에 갇힌 꽃처럼 선명한 가을 색채의 들판, 원색 벌레가 돌아다니고 너무나 선명한 꽃들이 우거진 녹색 식물 사이로 어른거리는 밀림, 무희처럼 흩날리는 하얀색 눈꽃. 사건이 이뤄지는 장소마다 바뀌는 배경색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원색의 강렬함. 장소를 먼저 정하고 거기에 알맞은 미스터리를 꾸민 것 같은 느낌.

 

 

2.

미스터리는 유쾌했다. 독자를 앞에 두고 간단한 마술을 부린 듯 배경의 색채와 어울려 기묘한 분위기를 낳았다. 배경을 이루는 원색의 강렬함은 일종의 광기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복선처럼 주어진 색채라고 해야겠다. 처음엔 색채가 툭 던져지고 미스터리가 실꾸러미가 되어 독자를 유혹하다가 마지막 한 순간 짧게 드러나는 진실. 옅은 광기와 미스터리가 어우러져 미시적 환상이라고 부를만한 풍경을 보여준다.

 

 

3.

미스터리에서 장소는 아주 중요한 장치다. 이 소설에서는 그것이 사건을 규정하는 구성적 장치이기도 하고, 색채를 위한 무대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색채는 사건의 의미와 인상을 독자의 촉각에 와 닿게 하는(원색의 강렬함은 시각 보다 촉각을 자극한다.) 기능을 하고 있다. 뭐랄까이 소설에서는 장소-색채가 곧 사건인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겔 스트리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2
V.S. 나이폴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던 마침 그때 석양이 지고 있었다. 누렇고 하얀 태양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에스컬레이터가 아래로 내려감에 따라 내 시야에서 태양은 사라져가고, 그때 문득, 읽고 있었던 <<미겔 스트리트>>가 떠올랐다. ‘사람들은 모두 성장하고 있거나 떠나는군.’ ‘해트의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지하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지는 태양을 바라보던 나는 새삼스레 깨달았다. <<미겔 스트리트>>는 회고록이다. ‘회고라는 게 무엇인지. 하나는 저녁나절의 생각들이라는 것. 새벽에 깨어나 옛일을 떠올리든 한낮에 그랬든 상관없이 회고는 근본적으로 저녁나절의 생각들이라는 점. 우주가 그렇게 운행됨으로써 나이 들게 되고, 또 그렇게 해서 경험의 퇴적층이 겹겹이 쌓여지게 되어 생겨난 생각-느낌들. 두 번째는 저것, 내가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이동하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태양이 자연스럽게 대지 위에 눕기 전에, 내가 먼저 석양을 떠나 보내게 되었다는 것, 그러자 무언가 절박한 감정이 내 안에서 꿈틀거렸다는 것. 그러니 회고는 또 하나, ‘떠남의 생각들이라는 것. ‘떠남의 예감 같은 것. 저 저녁나절의 생각들은 노스텔지어로 물들어 있고, 저 떠남의 생각들은 옛일을 다른 시각으로차분하게(또는 무겁게) 보게 한다는 것. 읽는 내내 이 이중의 감정이 나를 휘감았다.

 

 

글의 시작은 나를 완전 포복절도하게 했던 이 인용문으로 하려 했었다.

 

결국 바쿠는 자기 아내를 구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건 말하기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독자 여러분이 바쿠 부인의 생김새를 마음속에 올바로 떠올리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그 축소 모델로 배()를 한 개 생각해야 한다. 바쿠 부인은 하도 살이 쪄서 자기 팔을 옆구리에 붙이면 그 팔이 마치 두 개의 마주 보는 괄호 부호처럼 보였다.

그런데 바쿠 부인이 그 꼴로 싸울 때 지르는 소리란...

해트는 늘 말했다. “축음기 음반을 거꾸로 빨리 돌린다면 저런 소리가 날 거야.”

 

괄호 부호처럼 보였다.’ 라는 말에서 완전히 빵 터졌는데내 글의 첫 문단이 칙칙하다고 해서 이 소설이 칙칙한 내용이라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삼미 슈퍼스타스의 마지막 팬클럽>>이나 <<허삼관 매혈기>>처럼 처음부터 배꼽 잡게 하지는 않지만, 소설 곳곳. 웃음을 멈출 수 없다. 하지만, 저 인용문에서 보듯 순수하게 마냥 웃음지을 수는 없다. 인용한 이 글은 어디까지나 아내를 구타하는장면이기 때문이다. 이 연작소설에 등장하는 사내들은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모두 영락없는 실패자들이다. 한창 인구에 회자되었던 말을 쓰자면 루저들. 바로 이 부분에서 몹시 쓰라렸다. 80년대 시골 소읍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던 나로서는 이 골목의 분위기가 어떤지 대략 감이 왔기 때문이고, 그때 내가 알던 어른들의 모습들이 소설 속 인물들 뒤로 꽤나 많이 겹쳐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고, 그때 내가 그 어른들한테 갖고 있던 감정들을 내가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화자의 심정도 나와 다르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나와는 다르다. 하나는 나이 때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아마 기질의 차이 때문이겠지. 해트가 감옥에 들어갔을 때 화자는 자신의 일부가 죽었다고 말했는데, 그때 나이가 열 다섯이었다. 나는 나의 일부가 죽었다라고 느꼈을 때가 아홉 살이었으니까. 6년의 차이. 동심을 유지한 기간의 차이. 아마 나와 화자의 결정적 차이 중 하나일 것이다. 그 보다 더한 결정적 차이는 적도 부근 카리브 해와 한반도의 분위기 차이겠지. 누가 더 긍정모드인지는 <걸어서 세계 속으로>만 봐도 알 수 있지.

 

 

유쾌하게 보자면, 소설은 트리니다드 섬의 한 빈민가의 모습을 애정을 갖고 회고하는 내용이다. 실제로, 등장하는 인물 중 이름없는 물건을 만드는 자칭 목수 포포와 생긴 것과 다르게 겁쟁이인 빅풋, 꽃불 전문가 모건, 자칭 기계 천재 바쿠, 미친 사람 맨맨 등은 캐릭터 자체가 코믹 만화에 등장할 법하게 웃기다. 반면, 미국문화에 빠진 해트의 친동생 에드워드나 자기 아내를 몹시도 괴롭히는 토니, 혐오스런 조지 같은 인물들을 보면 다시금, 노스텔지어적 마인드 상태에서 차분히 가라앉은 눈으로 변하게 되고 이 루저들 곁에살아야 했던 여인들과 아이들의 처지를 떠올리게 된다.

 

 

지금 내가 아주 이중적이다.

나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 모두를 실제 만난다면 절대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해트와 시인 B. 워즈워스만 빼고. 돈도 못 벌면서 애들은 싸질러놓고 허구한 날 아내와 애들을 패기만 하는 사내들. 바람 피고 들어와 그걸 당연시 여기며 도박과 술에 쩔어 사는 위인들. 정신이 약간은 돈 사람들. 한 편의 에피소드로 읽는다면 그냥 지나칠 것들이지만, 그 에피소드에 하나하나의 디테일을 (상상과 경험으로) 곁들이면 어느새 절대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냉혹한 현실을 만나게 되지. 그 현실에서 나는 이들을 좋아할 수가 없다. 어떠한 권리도 내겐 없지만 용서할 수도 없다.

 

 

허나 나는 화자의 목소리를 따라, 어쩔 수 없이 그 시대에 태어나 트리니다드라고 불리는 작은 섬과 함께 살아야 했던 이 인물들을 보고 어느새 아련함, 가엾음 같은 것들이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살아있는 한 계속해서 몸에서 떨어지는 하얀 각질들 같은.. 어떤 것처럼, 인정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또 어쩔 수 없는 것들. 소설은 정신은 더욱 차갑게, 가슴은 따뜻하게, 얼굴엔 파안대소와 씁쓸한 미소를 동시에 짓게 만들고 있다.

 

 

무엇보다 여기 두 인물의 사소한 행동 같은 것들이 가슴을 울린다. 크리켓 게임의 스코어보드 읽는 법을 화자에게 가르쳐주던 해트의 말 왼쪽에는 타격을 마친 타자의 이름이 나와 있어”… ‘아웃당했어 라는 거친 말이 아니라 타격을 마친타자 라는 멋진(또한 매우 윤리적인) 말을 쓸 줄 알았던 사내 해트와 사랑하던 아내와의 이야기를 짧은 시로 전해줬던, 그러면서도 죽음이 가까이 오자 아직 어렸던 화자에게 그 모든 이야기는 꾸민 이야기,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말했던 B. 워즈워스. 진심의 사내. 찐한 뭔가가 목구멍까지 탁 치올리게 만든 두 남자.

 

 

그대로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 유재하의 노랫말처럼 모든 옛 일들을 매끈하게 인정하기는 어렵지만, 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삶을 보듬어야 할 가슴 정도는 갖고 있어야 하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디자인 불변의 법칙 125가지 - 개정판 디자인 불변의 법칙 시리즈
윌리엄 리드웰.크리티나 홀덴.질 버틀러 공저, 방수원 외 옮김 / 고려문화사 / 201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00자 평만 딸랑 썼다고 해서, 이 책이 별로일 것이라고 생각지 말아요. 심리학적, 과학적, 철학적 개념들이 어떻게 디자인에 적용되는지 그 어떤 책보다 흥미롭게 보여줍니다. 최고 수준의 책입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2-04-16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드림아웃님...정말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으시는 분이시군요! 아...뭔가 배신감 느껴져요. 흑흑. ㅠㅠ 소설을 그렇게 많이 읽으시는 분이 이렇듯 다른 분야도 많이 읽으시다니..배신이에요 배신 ㅠㅠ
 
창조성을 지켜라
프랑크 베르츠바흐 지음, 박정례 옮김 / 안그라픽스 / 201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이에겐 유용하고, 어떤 이에겐 그닥 필요치 않을 겁니다. 내용은요. 하지만 헌책방에 파는 일 따위는 안 생길 겁니다. 카페 테이블 같은 곳에 무심히 올려놓는다면 간지 좀 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마의 테라스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되고 싶던 인물로서 기억되는 작가는 운이 좋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되었던 도스토옙스키, 햄릿이 되었던 셰익스피어, 돈키호테라는 이름으로 살고 싶어 했던 알론소 키하노가 되었던 세르반테스. 더불어 소설가로서의 본성 외에 다른 본성을 소설에 반영할 수 있었던 작가도 운이 좋다. <검은 책>에서 화가 같았던 오르한 파묵. <광대 샬리마르>에서 기자 같았던 살만 루슈디. <이민자들>의 제발트는 고고학자나 역사학자. <로마의 테라스>에서 키냐르는 몸므가 된다. 그리고 판화가로서 소설을 써냈다.

 

몸므는 에칭 판화가다. 에칭, 드라이포인트, 메조틴트 기법을 자유로이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고, 키냐르는 그 음각(陰刻)의 판화 같은 유연하면서도 강한,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문장을 파낸다. 그림을 새기기 위해 온몸으로 밀어내듯 쓴 글이다. 그 문장들이 때때로 전혀 다른 차원을 건너뛰어 내 영혼에 새겨지는 듯 하다. 케테 콜비츠의 <카를 리프크네히트에 대한 추모>와는 확연히 다른 스타일. 여성 판화가가 그린 강렬한 투박함, 남성 판화가가 그려낸 섬세한 관능. 케테 콜비츠를 떠올려서인지 몸므-키냐르의 스타일이 더 짜릿하게 느껴진다.

 

몸므는 떠난다. 다른 남자와 결혼한 나니의 곁을 도주하듯 떠난다. 하지만 그 탈주선은 커다랗게 타원형을 그리며 지구 주위를 도는 달처럼, 언제나 첫사랑을 떨쳐버리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귀환선이기도 하다. 시간이 흘러, 자기를 찾아온 아들을 인정하지 않은 그의 태도에서 탈주와 귀환. 그 강렬한 욕망 사이, ‘사이(간격)’를 잃지 않으려 참아내는 예술가의 한 단면, 고독을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