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씨의 입문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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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의 추상화를 과천현대미술관에서 처음 보았던 날, 유독 그것만 기억에 남았다. 2주 전 갤러리현대에 들러 구상화에서 추상화까지, 그의 작품들을 다시 보고 나서, 역시 추상화. 나는 역시 그의 추상화에 끌렸다.

 

둥글고 네모난 것들. 캔버스 아래 위 중간에 무의식적인 자리에 흩어져 나란히 나란히. 띄엄띄엄 돌다리 같기도 하고 베네치아 곤돌라를 묶어두는 기둥 같기도 하고 흔들흔들 거리며 앞사람을 따라가는 가족들이라거나 탁탁탁 소리를 내며 뛰어가는 아이 같기도 한, 그 귀퉁이가 동그란 네모난 것들. 안은 빨강 밖은 청색 회색으로 칠해져 있는 것들을 보며 기분 좋은 생동감, 약동하는 기운을 느꼈다.

 

황정은은 책. . . 시계소리, . . . . 하고 냉장고가, 유라. . 유라. , 부디. 부디. 대니 드비토, . . . . 펼치고 접고 펼치고 접고, 똥꼬 똥꼬라니 똥꼬 같은 매너, 살살 쓰면 되지 살살 쓰세요, 로베르따 어쩌고 이태리 메이커에, 디디. 도도, 킥킥킥 같은 말의 리듬으로 생동감, 약동하는 기운을 만들어 낸다. 사각형 한 페이지에 색깔을 흔들림을 만들어 낸다.

 

. 그런데, 황정은의 귀퉁이가 동글고 네모난 것들은. 외롭고 두렵고 슬프고,

... 김환기의 그것들도 그랬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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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2-05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알랭 마방쿠'의 소설 [아프리카 술집 외상은 어림없지]의 한 리뷰를 본 적이 있는데요, 그 리뷰는 행간을 띄지않고 씌어져 있었어요. 이 리뷰는 이 책을 읽은 사람만이 쓸 수있고 읽은 사람만이 행간을 띄어달라는 요청을 하지 않을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는데요, 드림아웃님의 황정은 리뷰가 딱 그런 생각이 드는 리뷰네요. 황정은의 이 책을 읽어야만 나올 수 있는 리뷰라는. 전 살살 쓰세요, 이 말이 참 좋더라구요. 훗

dreamout 2012-02-05 22:07   좋아요 0 | URL
아주 정겨운 장면이었죠. ㅎㅎ
 
욕망하는 식물 - 세상을 보는 식물의 시선
마이클 폴란 지음, 이경식 옮김 / 황소자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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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이라는 것도 풀이 나무를 이기려고 사람을 이용해 나무를 베어내게 만드는 전략이라는 새로운 정의가 가능하다.

: 이 책은 새로운 정의에 대한 이야기다. 식물과 사람이 어떻게 공진화하며 서로를 바꿔왔는지 그 기가 막히게 자연적이며 인위적인 선택에 대한 극적인 이야기.

 

 

사과 속에 들어 있는 모든 씨는 이전의 사과와 완벽하게 다를 뿐 아니라 그 안에는 새로운 사과나무를 구성하는 유전자 정보가 들어있다. 그래서 어떤 사과 씨라도 일단 심으면, 그 씨를 담고 있던 나무와 전혀 다른 사과나무가 자란다. (중략) 이런 다양성을 가리키는 식물학적 용어는 이형집합성 heterozygosity’ 이다.

: 과수원에서 접붙이기를 하는 이유를 모른 것은 아니지만, 사과 씨가 그렇게나 다양한 유전적 특징들을 품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존 채프먼(별명은 조니 애플시드)이 미국 서부개척 당시 전 지역에 심고 다녔던 사과 씨들이 오늘날 미국을, 미국의 서부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또한 신선하게 다가왔다. 어쩌면 스티브 잡스가 자기 회사 이름을 애플. 이라고 지은 것도 이런 문화적인 배경이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달콤함은 혀에서 시작되는 욕망이지만, 이 욕망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최소한 과거에는 그랬다. 달콤함에 대한 경험이 워낙 특별하다 보니, ‘달콤함 sweetness’이라는 단어는 완벽함을 뜻하기도 했다. (중략) 19세기의 어떤 시점에서부터인가 이 단어는 문학 작품에서 위선이나 불성실의 의미를 띠기 시작했고, 지금은 역설이나 감상주의의 그림자가 이 단어를 완전히 뒤덮고 있다. 달콤함이라는 단어를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이 썼다는 점도 이 단어의 위력을 떨어뜨리는 데 일조했겠지만, 유럽에서 값싼 설탕이 나타나고 특히 노예가 생산하는 사탕수수 설탕이 등장함으로써 달콤함이라는 단어가 담고 있던 실제의 맛이나 비유의 의미가 결정적으로 퇴색하지 않았을까 싶다.

: 지금은 사과가 달콤함의 상징은 아니다. 책의 목차에서 사과 : 달콤함의 욕망. 이라고 적혀있길래 잉? 사과가 달콤함의 욕망? 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이 설명을 읽고 나니 이해가 된다. 단어의 의미가 현실과 공진화해서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그 생생한 단면을 본 듯 하다.

 

 

야생환경에서는 식물과 해충이, 최후의 승자 없이 공격과 저항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순환 속에서 공진화의 길을 함께 걸어간다. 하지만 접붙이기를 통해서 키운 사과나무만 있는 과수원에서는 이 공진화 과정이 실종된다. 아무리 세대가 흐른다 해도 접붙이기를 통해서 얻은 복제 사과나무의 유전자는 늘 동일하기 때문이다. (중략) 이에 반해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나 해충은 여전히 교접을 통해서 재생산됨으로써, 사과의 저항력을 뚫을 수 있는 유전자 결합을 찾아내기 위해 계속 진화한다. 그리고 결국 사과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유전자 결합을 찾아낸다.

: 이 책을 읽는 내내 식물과 인간과의 관계뿐 아니라, 인간 사회 안에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더 많이 생각하게 됐다. 비슷비슷한 나와 너, 우리들. 그 병리학적 현상에 대해서.

 

 

어린 시절 내가 심었던 트라이엄프는 몇 가지 중요한 점에서 셈퍼 아우구스투스와 달랐던 것 같다. ‘셈퍼 아우구스투스는 꽃잎에 붉고 흰 무늬가 교묘하게 나타나 있던 튤립으로, 튤립 열풍이 한창 거세게 불 때는 한 뿌리 가격이 1만 길더나 되었는데, 그것은 당시 암스테르담에서 최고 수준의 수상 저택을 한 채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 거품, 광기, 투기 등등을 논하는 수많은 경제 관련 서적에 늘 나오는 게 바로 네덜란드의 튤립 광풍이다. 도대체 왜 튤립 따위에 그렇게 목을 메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 책을 통해 상당 부분의 호기심을 해결할 수 있었다. 셈퍼 아우구스투스를 위키피디아를 통해 찾아 봤는데(이 책에는 그림이 없다.), 내 기준으론 아름다워 보이진 않았다. 다시 셈퍼 아우구스투스가 꽃 핀다 할지라도 오늘날의 미적 기준으로는 퀸 오브 나이트 같은 품종이 더 각광받을 것 같았다.

 

 

이미 어릴 때 깨달은 사실이지만, 꽃이 피면 머지 않아 그 식물에 먹을게 열린다. 말하자면 꽃은 수확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전령인 셈이다. 이렇게 보자면, 꽃에 보다 잘 이끌리는 사람, 나아가 여러 꽃들을 분간할 줄 알고 어디에서 그 꽃들을 보았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꽃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 비해 훌륭한 먹이 사냥꾼이 될 가능성이 훨씬 더 많다. 이 같은 이론을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서 설명한 신경과학자 스티븐 핑커는 자연선택은 우리 조상 가운데서 식물학자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 즉 주변에 어떤 식물들이 있는지 알고 그것을 분류하며 또 그것들이 어디서 자라는지 기억하는 사람들 편이었다고 주장한다.

: 그래서 모든 인류가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낀다고 한다. 전 인류가 공통으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들은 극히 적은데 그 중 꽃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본능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밝히는 가설이다. 매우 실용적인 이유라서 조금은 실망하기도 했지만, 살아남고자 한 인류의 생존본능에 목이 메이기도 했다.

 

 

아름다움의 첫 번째 원칙은 색깔로써 주변과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중략) 형태와 무늬는 아름다움의 두 번째 원칙이다. (중략) 그렇기 때문에 색깔만으로 아름다움을 완성할 수 없다. 하지만 대칭성은 그 사물이 형식적으로 완벽하게 구축되어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요소이다. (중략) 대칭성 역시 그 생물체가 건강하다는 기호로 작용한다.

: 그런데 인위적 선택으로 키운 튤립 셈퍼 아우구스투스의 특이한 줄무늬는 결국 바이러스에 의한 일종의 병의 증상이었다고 한다. 사람은 꼭 건강한 것만 좋아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대마초를 금지하자, 대마초 유전자와 대마초 관련 문화에서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금지령이 내려지자 대마초가 보다 강력한 새로운 품종으로 대응했다는 사실은 마약과의 전쟁이 낳은 위대한 모순 가운데 하나이다.

: 생명을 동적 평형 이라고 한다지. 식물과 동물과 인간이 엮여 있는 계()도 마찬가지로 동적 평형이겠지. 모든 순환계는 그럴 것. 그러니 우리는 우리가 접하고 있는 세계가 순환계라는 사실을 깨닫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기억은 경이로움의 적이다. 경이로움은 오로지 현재에만 존재한다.

: 도취의 식물인 대마초의 주요 성분이 이미 우리 뇌에 존재하는 특정 호르몬과 비슷하다는 사실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뇌 속에 있는 카나비노이드가 어떤 작용을 하는지 왜 생겨났는지를 추론하는 부분은 대마초라는 식물 보다 더욱 흥미롭다. 그리고 우리가 도취되는 것망각이 어떻게 엮여 있는지를 알아가는 과정은 니체가 그의 책에서 망각을 강조한 것보다 훨씬 더 흥미로웠다.

 

 

엽권병에 어떻게 대처했느냐는 나의 질문에 엽권병은 러셋 버뱅크(감자 품종)’ 품종에만 나타나는 문제라고 했던 히스의 대답은, 단일 재배의 문제는 바로 농업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문화의 문제임을 암시한다. 농민이나 몬산토 사와 같은 농업 기업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관련된 문제라는 뜻이다. 나는 이런 소재를 다룰 때마다 툭하면 탐욕스런 기업이 만든 사악한 기술이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신문이나 잡지의 기사에 중요한 어떤 요소가 빠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 그리고 지배와 획일성을 갈망하는 우리의 욕망이다.

: 미국산 소고기가 그렇게 문제가 된 이유는, 그것들이 얼마만한 획일성으로 우리 식탁을 점령할 것인가에 대한 무의식적인 두려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전세계적인 획일성에 대한 이런 갈망은 사실 인간으로서 숨기기 어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나라가 힘이 있었다면 아마 우리도 그런 획일성을 꿈꿨겠지. 플랫폼의 전쟁이라는 지금의 경제도 실은 이런 욕망의 표출 아닌가? 인류가 다양성이라는 가치를 어떻게 꽃 피워 나갈지. 그것은 인류라는 종의 문제이기도 하고 내가 다니는 기업, 그리고 작게는 내 가족의 개성을 어떻게 지켜주느냐는 것에까지 연결된 문제다. 아름다움이 그 기준의 하나가 되겠지. 무한의 다양성도 치명적이고 모노컬쳐(단일 재배)도 치명적이다. 그 둘 사이의 어느 경계 즈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정도. 딱 그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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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집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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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젭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말할 수 없다. 그가 스스로를 자기의 입이 아닌 다른 이들의 입으로 드러낸 1장의 그 문장들을 직접 읽지 않는다면, 누구도 그 얘기를 대신할 사람은 없다고 느꼈다. 그건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차분하지만 어두운 그림자가 안개처럼 깔린다. 이 어둠은 잔잔하고 낮은 어둠이다.

 

파트마를 이야기해야 하겠지. 그러자면 셀라하틴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아흔 살 노파가 된 파트마는 이미 죽은 지 오래된 남편 셀라하틴을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자기의 가슴에 새겨진 아픈 상처를 곱씹고 또 곱씹는다. 사랑과 원망의 영원회귀. 셀라하틴은 <<한밤의 아이들>>의 아담 아지즈를 떠올리게 한다. 서양의 지식을 신봉한 서양식 의사였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 자신의 아내조차 계몽시키지 못하고 만다는 점에서 둘은 같은 모습이다. 아마 20세기 초 구라파를 제외한 모든 나라의 초기 계몽적 지식인 상당수가 그러했을 그런 모습. 그런데 셀라하틴은 아담 아지즈와 비교 불가할 정도로 실패한다. 셀라하틴은 보다 경직되어 있고 보다 수줍은 성향이고, 맞다. 파트마의 말마따나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약하다. 그렇기에 폭력적이다. 수십 년간의 결혼생활 동안 파트마에게 지속적으로 끼친 영향은 정신적인 폭력에 다름 아니다. 셀라하틴도 죽고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도안과 며느리도 죽고 이제 고요한 집에서 하인 레젭과 함께 사는 늙은 파트마. 베니션 블라인드가 달린 방에서 장롱에 집착하며 침대에 누워지내는 늙은 몸. 그녀의 회상은 검은 튤립 퀸 오브 나이트처럼 거의 광기에 가까운 마력으로 소설 전체를 휘감는다. 처음에는 혐오로 나중에는 안쓰러움으로 마지막엔 조금은 냉담해진 눈으로 보게 된 사람.

 

소설에는 레젭과 파트마를 포함한 다섯 명의 화자가 등장하는데 모두 공통의 버릇이 있다(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겠지만). 할 말을 미리 마음 속으로 시뮬레이션 하는 것. 중학생 때 읽었던 이현세 만화에서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까치가 마치 영화 대부의 한 장면에서처럼 신부님에게 고해성사를 하는 장면이었다. (정확하게는 기억하고 있지 못하지만) ‘저는 어렸을 적부터 가장 친한 사람들에게도 늘 해야만 하는 말만 했고 하고 싶었던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때 까치가 너무나 고독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도 그러니 모두 고독한 사람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은 곧바로 뒤집힌다.

 

메틴과 하산. 이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한다. 10대 사내아이들. 전혀 다른 배경에 살고 있지만 닮은 데가 있는 아이들. 처음부터 나에게 경멸감을 불러 일으킨 사람들. 이 두 아이들을 보고 먼저 떠올린 단어는 키치였다. 키치라는 단어가 이렇게 딱 들어맞기도 어렵겠다 싶었다. . 하지만, 또 다른 화자인 파룩의 글에서 이런 표현을 만나게 된다. ‘역겨운 표면적인 취기’. 이 표현은 딱 키치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 아닌가. 작가는 내가 경멸할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역겨운 표면적인 취기라고 말해 놓고서는 표면적인 것을 좋아한다.’(모순되는) 말을 한다. 내가(독자가) 어떻게 나올지 대비하고 있었다는 듯.

 

메틴은 부자를 꿈꾼다. 하산은 권력을 꿈꾼다. 이 소설을 읽으며 가장 기분 나빴던 두 순간을 이들이 만들어낸다. 자기의 똑똑함을 자신하는 메틴은 술에 취해 사랑하는 제일란을 강간하려고 한다. 자기는 장차 큰 일을 할 것이라던 하산은 사랑하는 닐귄을, 무리에서 홀로 떨어져 혼자 남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배신(정확히 말하면 닐귄에 대한 배신은 아닐 것이다. 자기 자신을 배신한 것이라고 얘기해야겠지)한다. 그리고 닐귄에게 폭력을 사용하고 만다. 소설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런 상황인데 작가는 파룩의 글을 통해 표면적인 것을 긍정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똑바로 보라는 말이겠지.

 

그래 똑바로 보자. 돈과 권력, 여자의 사랑을 갈구하는 메틴과 하산은, 어느 모로 보나 바보 같은 내 10대 시절과 거의 비슷한 모습이고, 더 화가 치미는 것은 그네들보다 이제 거의 두 배의 나이를 먹은 지금의 나 또한 거기서 그렇게 많이 나아진 점은 없다는, 욕지기 나는 현실이다. 내가 그들을 경멸한다면 그건 나 스스로를 경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럼 그렇기 때문에 긍정해야 하나? 내가 걔네들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아니 그렇진 않을 것이다.

 

레젭과 파트마는 사건을 이끌어 가는 인물들이 아니다. 묘사되는 인물들이지 행위 하는 인물들은 아니다. 사건을 이끌어 가는 것은 키치적 인간, 메틴과 하산이다. 레젭과 파트마가 그 아프고 슬픈 삶으로써 보여주는 것은 어떤 두께지만, 그것은 닻과 같이 사람을 꼼짝도 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종류인 것이다. 역겨운 표면적인 취기에 빠져 있는 메틴과 하산이, 그 한심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역동적으로 만드는 캐릭터라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작가는 경멸해야 할 일면과 긍정해야 할 다른 일면에 대해 똑같이 보라고 말한다.

 

그 이중의 면을 똑같이 보기가 어려웠다. 2권 후반부는 읽는데 괴로웠다. 심중의 저항력이 내가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컸다. 어둠의 두께와 두께를 갖지 않는 표면의 밝음(이건 모리스 블랑쇼의 말에서 차용) 모두를 좌뇌로는 이해해도 우뇌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레젭에 대한 파트마의 폭력, 파트마에 대한 셀라하틴의 폭력, 제일란에 대한 메틴의 폭력, 닐귄에 대한 하산의 폭력. 커뮤니케이션이 사라진 자리에 유일하게 남는 이 (정신적, 육체적, 언어적)폭력의 관계가 고요한 집의 본질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처음의 자세-다섯 명의 화자들에 대한 감정이입-를 고쳐 잡고 조금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들을 보게 됐다.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우리를, 여기를 보게 됐다. . 자신들 밖엔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 . 바로 등신 같은 우리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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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 - 우연적 삶에 관한 문학과 철학의 대화
이유선 지음 / 라티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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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책을 기웃거리는 이유는 내 삶에 어떤 수미일관하는 논리나 체계를 스스로 갖추고 싶었기 때문이다. 혼잡한 인간관계, 던져진 여러 문제들에 대해 내 태도를 분명히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직선과 꺾은선, 곡선을 언제 어디서 어떤 논리로 만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늘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철학자들의 논리, 낱말들은 만져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어렸을 적 자유자재로 갖고 놀았던 큐빅처럼 조작하고 더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가면서 놀이를 하듯 그렇게 맘대로즐길 수 있었으면 했는데 지금까지는 잘 안되고 있다.

 

이유선의 이 책의 부제는 문학과 철학의 대화. 김용규의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보다 어깨에 힘을 빼고 피부에 와 닿는 표현들을 많이 사용해서인지 아주 친숙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표현의 이런 친숙성보다 책을 더 두드러지게 하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하여 지키고 있는 어떤 태도다. 그는 스스로 그런 태도를 아이러니스트의 자세라고 부르고 있었다.

 

최근에 읽은 권혁웅의 <<몬스터 멜랑콜리아>>는 롤랑 바르트의 영향 하에 쓰여진 작품이었고 다치바나 아키라의 <<잔혹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단 한 가지 방법>>은 진화심리학적 발견들에 기대었다면, 이유선의 이 책은 리처드 로티의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의 철학을 기반으로 해서 철학과 문학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아이러니스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지막 어휘가 다른 사람에게서 가지고 온 것이 아닌,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라는 확신이다. 아이러니스트는 자신의 용어로 자신의 삶을 요약할 수 있기를 원한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일차적으로는 아이러니스트 자신의 사적인 완성과 관련이 있다. 자신의 인생이 자신을 넘어선 어떤 것에 의해서 좌우되거나 자신보다 큰 힘에 동화되는 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자기 삶의 우연성을 긍정하는 것, 곧 삶의 자율성을 획득하는 것이야말로 아이러니스트의 관심사이다.

자유주의는 이러한 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완성에 대한 관심을 지켜주는 장치이다. 그렇기 때문에 잔인성에 대해 반대하는 자유주의의 연대는 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완성을 위한 노력보다 앞서야 한다. 플라톤을 계승하는 철학자들은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외쳐대지만, 사실은 자유가 없다면 진리도 없다. 그래서 로티의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는 각자가 저마다의 마지막 어휘를 가지고 고민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밀실을 확보하기 위해 실천적인 연대의 광장에 나서는 것을 우선적인 과제로 삼는다.

 

 

 

이 인용문은 리처드 로티의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과 최인훈의 <<광장>>을 엮어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를 정의 내리고 있다. 요약하면 아이러니스트는 연대에 대한 욕구와 사적 진리에 대한 소망을 병렬적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비슷하면서도 뭔가 차이 나는 개념이 카뮈의 부조리의 인간이라는 말이다. 아이러니와 부조리의 뉘앙스의 차이는 희망또는 기대라는 말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아이러니라는 어휘는 인간이 현실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환상이 필요하다는 심리학적 결과에 긍정하고 있는 반면에 부조리는 미래의 열매를 기대하지 않는 불모의 사고라고 (카뮈는) 말한다. 카뮈가 반항이라는 어휘에 방점을 찍은 반면 로티는 연대라는 데 방점을 찍은 것도 이러한 차이 때문인 것 같다.

 

아직은 내 손안에서 장악되지 않는 단어들이지만, 두 철학적 어휘들의 거리는 매우 가깝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아마도 내가 원했던 나만의 마지막 어휘와 친연성이 높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두 개념에 대한 생각 자체가 내게 득이 되었다. <<시지프 신화>>에서는 약간만 다루고 있는 자기기만자기기만에서 빠져 나오는 법을 알려주는 아빈저연구소의 <<상자 안에 있는 사람 상자밖에 있는 사람>>을 다시 읽어야 하겠다는 생각과 절판된 로티의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을 어서 찾아 읽어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러니와 사적인 진리라는 말에 내가 너무 혹했나... 이 내용 말고도 이 책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철학-문학의 짝들은 아주 흥미로운 데가 많았다. 특히 밀란 쿤데라의 <<느림>>을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와 함께 얘기하는 장과 <<눈먼 자들의 도시>>와 들뢰즈의 철학을 논하는 장은 즐겁기 그지 없었다.

 

진중권처럼 화려하진 않다. 그러나 나는 소박하면서도 깊이 있는 이유선의 사유와 문장이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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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전집 4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9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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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점에 왜 이 책인지 모르겠다. 『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에서 이런 문장을 보았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 이것이 곧 철학의 근본 문제에 대답하는 것이다. (시지프 신화)

 

 

나는 저자 이유선의 명료하고 논증적인 문제는 오히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의 물음이 해명되지 않는 이상 장난에 불과하다는 카뮈의 생각에 나는 동조하고 싶다.”라는 발언에, 맞소, 라고 응답하고 싶었다. 이렇게 해서 시지프 신화를 만났는데 하필 연말연시였다. 그리고 대구 중학생의 자살이 있었다.

 

언젠가 평범해 보이던 하루가 떠올랐다. 같은 부서 직원의 아버님께서 돌아가셔서 대학병원 장례식장에 들렀다. 미처 준비되지 않은 이런 저런 일들을 돕는 중에 다른 직원들도 하나 둘 일손을 보태기 위해 도착했다. 저 장례식장이나 장례식에 와 보는 거 처음이에요. 그 친구가 이런 말을 꺼냈다. 나는 아마 순간 당황했다. 부서 안에서 가장 좋아했던 그 친구가 그 말을 꺼낸 순간, 나중에 생각해 보니 나는 그때 어마어마한 거리감을 느꼈던 것 같다.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 스물 여서 일곱이나 되었는데나는 뭐랄까, 정말 세상을 달리 보게 되었다. 아마 초등학생 때 아주 친한 친구 집에서 검은색 윤기 나는 피아노를 본 이후로 처음으로 부러운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보다 더 한 마음으로 (아마도) 얘를 어떻게 델꼬 살까. 하는 걱정도 했던 것 같다.

 

한참이 지난 지금, 나는 그때보다 더 많은 죽음과 심지어 알고 지내던 여러 사람의 자살까지도 접했다. 다른 문제는 장난에 불과하다는 카뮈의 저 단순한 말이 주는 진동은 쉽사리 멈춰지지 않는다.

 

부조리의 추론의 귀결. 반항, 자유, 열정.

이미 진부한 것들이 되어버린 단어들이지만 카뮈의 글을 읽는 도중 다시금 살아나는 것들. 누군가의 심장에서 다시 살아날 언어들.

 

 

이른 새벽 감옥의 문이 열릴 때 문 앞으로 끌려 나온 사형수가 맛보는 기막힌 자유로움, 삶의 순수한 불꽃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한 그 엄청난 무관심, 죽음과 부조리야말로 단 하나 온당한 자유의 원리, 즉 인간의 가슴이 경험할 수 있고 체현할 수 있는 자유의 원리임을 우리는 분명히 느낄 수 있다.

 

 

量的 자유. 최대한 많이 느끼는 것.

내게는 이게 적시타였다.

 

읽는 사람마다 땅~하고 제대로 때리고 출루할 수 있다면 좋겠다. 스스로의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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