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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하는 식물 - 세상을 보는 식물의 시선
마이클 폴란 지음, 이경식 옮김 / 황소자리 / 2007년 6월
평점 :
농경이라는 것도 풀이 나무를 이기려고 사람을 이용해 나무를 베어내게 만드는 전략이라는 새로운 정의가 가능하다.
: 이 책은 새로운 정의에 대한 이야기다. 식물과 사람이 어떻게 공진화하며 서로를 바꿔왔는지 그 기가 막히게 자연적이며 인위적인 선택에 대한 극적인 이야기.
사과 속에 들어 있는 모든 씨는 이전의 사과와 완벽하게 다를 뿐 아니라 그 안에는 새로운 사과나무를 구성하는 유전자 정보가 들어있다. 그래서 어떤 사과 씨라도 일단 심으면, 그 씨를 담고 있던 나무와 전혀 다른 사과나무가 자란다. (중략) 이런 다양성을 가리키는 식물학적 용어는 ‘이형집합성 heterozygosity’ 이다.
: 과수원에서 접붙이기를 하는 이유를 모른 것은 아니지만, 사과 씨가 그렇게나 다양한 유전적 특징들을 품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존 채프먼(별명은 조니 애플시드)이 미국 서부개척 당시 전 지역에 심고 다녔던 사과 씨들이 오늘날 미국을, 미국의 서부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또한 신선하게 다가왔다. 어쩌면 스티브 잡스가 자기 회사 이름을 애플. 이라고 지은 것도 이런 문화적인 배경이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달콤함은 혀에서 시작되는 욕망이지만, 이 욕망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최소한 과거에는 그랬다. 달콤함에 대한 경험이 워낙 특별하다 보니, ‘달콤함 sweetness’이라는 단어는 ‘완벽함’을 뜻하기도 했다. (중략) 19세기의 어떤 시점에서부터인가 이 단어는 문학 작품에서 위선이나 불성실의 의미를 띠기 시작했고, 지금은 역설이나 감상주의의 그림자가 이 단어를 완전히 뒤덮고 있다. 달콤함이라는 단어를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이 썼다는 점도 이 단어의 위력을 떨어뜨리는 데 일조했겠지만, 유럽에서 값싼 설탕이 나타나고 특히 노예가 생산하는 사탕수수 설탕이 등장함으로써 달콤함이라는 단어가 담고 있던 실제의 맛이나 비유의 의미가 결정적으로 퇴색하지 않았을까 싶다.
: 지금은 사과가 달콤함의 상징은 아니다. 책의 목차에서 사과 : 달콤함의 욕망. 이라고 적혀있길래 잉? 사과가 달콤함의 욕망? 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이 설명을 읽고 나니 이해가 된다. 단어의 의미가 현실과 공진화해서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그 생생한 단면을 본 듯 하다.
야생환경에서는 식물과 해충이, 최후의 승자 없이 공격과 저항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순환 속에서 공진화의 길을 함께 걸어간다. 하지만 접붙이기를 통해서 키운 사과나무만 있는 과수원에서는 이 공진화 과정이 실종된다. 아무리 세대가 흐른다 해도 접붙이기를 통해서 얻은 복제 사과나무의 유전자는 늘 동일하기 때문이다. (중략) 이에 반해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나 해충은 여전히 교접을 통해서 재생산됨으로써, 사과의 저항력을 뚫을 수 있는 유전자 결합을 찾아내기 위해 계속 진화한다. 그리고 결국 사과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유전자 결합을 찾아낸다.
: 이 책을 읽는 내내 식물과 인간과의 관계뿐 아니라, 인간 사회 안에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더 많이 생각하게 됐다. 비슷비슷한 나와 너, 우리들. 그 병리학적 현상에 대해서.
어린 시절 내가 심었던 ‘트라이엄프’는 몇 가지 중요한 점에서 ‘셈퍼 아우구스투스’와 달랐던 것 같다. ‘셈퍼 아우구스투스’는 꽃잎에 붉고 흰 무늬가 교묘하게 나타나 있던 튤립으로, 튤립 열풍이 한창 거세게 불 때는 한 뿌리 가격이 1만 길더나 되었는데, 그것은 당시 암스테르담에서 최고 수준의 수상 저택을 한 채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 거품, 광기, 투기 등등을 논하는 수많은 경제 관련 서적에 늘 나오는 게 바로 네덜란드의 튤립 광풍이다. 도대체 왜 튤립 따위에 그렇게 목을 메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 책을 통해 상당 부분의 호기심을 해결할 수 있었다. 셈퍼 아우구스투스를 위키피디아를 통해 찾아 봤는데(이 책에는 그림이 없다.), 내 기준으론 아름다워 보이진 않았다. 다시 셈퍼 아우구스투스가 꽃 핀다 할지라도 오늘날의 미적 기준으로는 퀸 오브 나이트 같은 품종이 더 각광받을 것 같았다.
이미 어릴 때 깨달은 사실이지만, 꽃이 피면 머지 않아 그 식물에 먹을게 열린다. 말하자면 꽃은 수확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전령인 셈이다. 이렇게 보자면, 꽃에 보다 잘 이끌리는 사람, 나아가 여러 꽃들을 분간할 줄 알고 어디에서 그 꽃들을 보았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꽃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 비해 훌륭한 먹이 사냥꾼이 될 가능성이 훨씬 더 많다. 이 같은 이론을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서 설명한 신경과학자 스티븐 핑커는 자연선택은 우리 조상 가운데서 식물학자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 즉 주변에 어떤 식물들이 있는지 알고 그것을 분류하며 또 그것들이 어디서 자라는지 기억하는 사람들 편이었다고 주장한다.
: 그래서 모든 인류가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낀다고 한다. 전 인류가 공통으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들은 극히 적은데 그 중 꽃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본능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밝히는 가설이다. 매우 실용적인 이유라서 조금은 실망하기도 했지만, 살아남고자 한 인류의 생존본능에 목이 메이기도 했다.
아름다움의 첫 번째 원칙은 색깔로써 주변과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중략) 형태와 무늬는 아름다움의 두 번째 원칙이다. (중략) 그렇기 때문에 색깔만으로 아름다움을 완성할 수 없다. 하지만 대칭성은 그 사물이 형식적으로 완벽하게 구축되어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요소이다. (중략) 대칭성 역시 그 생물체가 건강하다는 기호로 작용한다.
: 그런데 인위적 선택으로 키운 튤립 셈퍼 아우구스투스의 특이한 줄무늬는 결국 바이러스에 의한 일종의 ‘병의 증상’이었다고 한다. 사람은 꼭 건강한 것만 좋아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대마초를 금지하자, 대마초 유전자와 대마초 관련 문화에서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금지령이 내려지자 대마초가 보다 강력한 새로운 품종으로 대응했다는 사실은 마약과의 전쟁이 낳은 위대한 모순 가운데 하나이다.
: 생명을 동적 평형 이라고 한다지. 식물과 동물과 인간이 엮여 있는 계(界)도 마찬가지로 동적 평형이겠지. 모든 순환계는 그럴 것. 그러니 우리는 우리가 접하고 있는 세계가 순환계라는 사실을 깨닫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기억은 경이로움의 적이다. 경이로움은 오로지 현재에만 존재한다.
: 도취의 식물인 대마초의 주요 성분이 이미 우리 뇌에 존재하는 특정 호르몬과 비슷하다는 사실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뇌 속에 있는 카나비노이드가 어떤 작용을 하는지 왜 생겨났는지를 추론하는 부분은 대마초라는 식물 보다 더욱 흥미롭다. 그리고 우리가 ‘도취되는 것’과 ‘망각’이 어떻게 엮여 있는지를 알아가는 과정은 니체가 그의 책에서 망각을 강조한 것보다 훨씬 더 흥미로웠다.
엽권병에 어떻게 대처했느냐는 나의 질문에 엽권병은 ‘러셋 버뱅크(감자 품종)’ 품종에만 나타나는 문제라고 했던 히스의 대답은, 단일 재배의 문제는 바로 농업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문화의 문제임을 암시한다. 농민이나 몬산토 사와 같은 농업 기업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관련된 문제라는 뜻이다. 나는 이런 소재를 다룰 때마다 툭하면 ‘탐욕스런 기업이 만든 사악한 기술’이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신문이나 잡지의 기사에 중요한 어떤 요소가 빠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 그리고 지배와 획일성을 갈망하는 우리의 욕망이다.
: 미국산 소고기가 그렇게 문제가 된 이유는, 그것들이 얼마만한 획일성으로 우리 식탁을 점령할 것인가에 대한 무의식적인 두려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전세계적인 획일성에 대한 이런 갈망은 사실 인간으로서 숨기기 어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나라가 힘이 있었다면 아마 우리도 그런 획일성을 꿈꿨겠지. 플랫폼의 전쟁이라는 지금의 경제도 실은 이런 욕망의 표출 아닌가? 인류가 다양성이라는 가치를 어떻게 꽃 피워 나갈지. 그것은 인류라는 종의 문제이기도 하고 내가 다니는 기업, 그리고 작게는 내 가족의 개성을 어떻게 지켜주느냐는 것에까지 연결된 문제다. 아름다움이 그 기준의 하나가 되겠지. 무한의 다양성도 치명적이고 모노컬쳐(단일 재배)도 치명적이다. 그 둘 사이의 어느 경계 즈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정도. 딱 그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