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프만의 허기
레온 드 빈터 지음, 지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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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로 여행 온 미국인 비만환자(어머어마한 뚱보) 프레디 맨시니는 단지 소설의 처음을 여는 문(), 스릴러적 분위기를 강조하는 증인, 과잉의 20세기 또는 한심한 USA를 표징 하는 기호, 국민을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정보기관의 아이러니한 작태를 비꼬기 위한 장치. 로서만 역할 하는 것이 아니다.

 

간신히 소설을 읽은 후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던 질문들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똑같이 식탐에 빠졌고 똑같이 불행한두 사람(호프만 대사와 프레디 맨시니)의 운명이 왜 갈렸는지.. 어떤 자세때문이었는지. 나로서는 그게 가장 절박했다. 프레디 맨시니는 호프만 대사의 비교대상으로 더욱 중요하다. (소설에서 두 사람은 만나지도 않고 서로 알지도 못하고 끝나버리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비교 대상이 된다.)

 

호프만이 겪은 일들은 말하기조차 힘들다. 글을 읽고 상상을 하고 그 상상이 신체에 직접적인 고통을 주는 경우란 정말 드물다. 이 소설이 그랬다. 토막 살인, 강간 같은 것들.. 욕지기 나는 수많은 범죄 행위들이 난무하는 소설이나 미국 드라마, 영화들도 봤지만 그런 것들조차 신체적 고통까지 느끼게 한 경우는 드물었다. 소설로는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나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 정도만 기억에 남을 뿐. 무언가가 멸실되는 것. 그리고 잔여물로 남는 삶. 보통의 흔한 주제일 뿐이건만.

 

나는 호프만의 허기, 불면, 알코올 중독, 섹스 스캔들에 대해서, 스피노자의 책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다. 틀림없이 그것에 대해 쓰기 시작하면 분석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이 소설을 읽는, 호프만을 만나는, 20세기를 고이 보내는, 자세가 아닐 것 같다. 아니 자세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못 견디겠다.

 

내가 절박하게 궁금했던 것. 똑같이 불행했던 호프만과 프레디의 운명은 왜 다르게 흘러 갔을까?

 

호프만은 상자 뚜껑 위에 책을 얹은 다음 꽤 묵직한 상자를 꽉 쥐었다. 긴장감이 그의 다리를 마비시켰다. 찰기 없는 모래흙처럼 힘없이 후들거리면서도 납덩어리처럼 무겁기만 한 다리를 질질 끌고 밖으로 향했다.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움켜쥐는 것처럼 상자를 꽉 부둥켜안은 채였다. 팔꿈치로 뒷문을 밀었을 때 책이 상자 뚜껑에서 미끄러져 방으로 떨어졌다. 그래도 그는 계속 걸음을 옮겨 낙엽 위를 불안하게 밟았다. 몸무게에 눌려 무릎이 그만 접혀버릴 듯 후들거렸다.”

 

위기라고 느낀 순간. 무엇보다 먼저 찾아 꽉 붙들고 뛰쳐나갔던 저 상자엔 필름이 담겨 있다. (스피노자의 책)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 ‘자신의 인생이라고까지 말한 그것.

 

바로 저 상자가, 저 상자를 꽉 쥐고 도망치려던 호프만의 태도가, 돌이킬 수 없는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었을 것이다이 이상은 말할 수 없다.

 

 

 

 

1968 9 6일 미르얌의 쌍둥이 언니 에스터가 죽었다.

호프만은 1968 9 6일 이후로 줄곧 불면증에 시달려왔다.

 

이 두 문장이 모든 것의 시작이란 것만 간신히 얘기할 수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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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4-03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뭡니까, 제 책장에 얌전히 꽂혀있기만 한 이 책을 저도 이제는 읽어야 한단 말입니까! 읽고 나면 이 리뷰를 아마도 다시 읽으러 올 것 같아요, 드림아웃님.

dreamout 2012-04-03 21:18   좋아요 0 | URL
여성분들은 어떻게 느끼실지 모르겠어요. 저는 그가 겪은 모든 것들이 정말 견디기 어려웠어요.
 
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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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과 가라타니 고진 중 선호하는 쪽은 고진이다. 그들이 하고 싶어하는 말의 내용보다는 문체(Style) 때문이다. 지젝은 각종의 사례들을 자유자재로 사용하여 여기저기 종횡무진 한다. 그로 인한 풍성함은 예기치 않은 섬광 같은 것들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너무 어지러워서 단번에 그의 글을 쫓아가기가 어렵다. 고진은 그에 비하면 범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은데, 매우 잘 조직화되어 있고 깔끔하며 무엇보다 선명하다. 이 정도의 선명함은 글 잘 쓰는 다른 많은 학자들(자연과학자를 포함해서) 사이에서도 두드러지는 것이다.

 

한병철의 이 책이 그렇다. 물론 책이 얇아서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그가 논증하는 바가 분명하고 선()적인 문체로 인해 몰입이 쉽게 된다.

 

 

1. 면역학적 시대와 신경증적 시대를 구분하는 것이 새롭진 않다. 어디서인지는 몰라도 어디선가 많이 듣던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신경증적 시대를 긍정의 과잉, 활동의 과잉으로 규정하면서 면역학적 시대의 처방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말은 내 속의 뭔가를 출렁이게 했다.

 

2. 그의 선()적인 글들이 다른 선, 또는 면과 부딪히는 지점 또한 아주 분명해서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한다. 보드리야드, 아렌트, 세네트, 아감벤을 인용하면서 그들이 제대로 본 것과 보지 못한 것 또는 잘못 본 것들에 대해 논박하는 부분은 챙챙 소리 내며 일대일로 칼 싸움을 하는 무사를 떠올리게 한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들이다.

 

3.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를 해석하는 챕터는 아리까리 했다. 아감벤의 해석, 즉 바틀비를 메시아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 논박하는 대목은 나로서는 좀 묘한 기분을 들게 만들었다. <필경사 바틀비>를 읽었을 때 나는 한병철의 관점도 아감벤의 관점도 모두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감벤은 한병철의 관점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결국 어디에 좀 더 무게중심을 두느냐의 차이 아니었을까? (물론 이건 그냥 감이다. 한병철이나 아감벤처럼 조목조목 파고든 얘기가 아니라) 바틀비를 읽고 내가 남긴 리뷰를 지금 다시 보니, 나는 아감벤에게 한 발 정도 더 무게를 두고 읽었음을 알 수 있었다. 허나, 한병철이 말 한대로 바틀비가 메시아적 희망을 향해 열려(아감벤적 해석)”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나는 바틀비를 메시아적으로 해석했으되, 그 메시아는 도래했어도 희망이 되지 않는, 될 수 없는 존재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한병철은 바틀비를 복종적 주체로 해석한다. 물론 이렇게 해석한 이유도 알겠다. 하지만, 한병철의 바틀비 해석에서 내가 아리까리 하다고 생각한 점은 <필경사 바틀비>의 화자. 즉 바틀비를 고용한 변호사의 관점에 대한 해석이 누락되었기 때문이다. <필경사 바틀비>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중요한 것은 화자의 입장 변화다. 처음에 그는 다른 조수(터키(이 책에서는 칠면조), 니퍼스(이 책에선 니퍼))와 동일하게 바틀비를 대했다. 하지만 결국엔 , 바틀비여! , 인간이여!”를 외치게 된다. 그것은 화자의 어떤 심정적 변화를 보여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탄인 동시에 고발(한병철)”이기도 하겠지만, 화자의 변화이기도 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다만 그런 변화가 희망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게 또한 나의 관점이다. 즉 나의 관점은 바틀비가 메시아복종적 주체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일종의)불가해한 인간 존재의 가능성은 그것을 보는 사람(작품에서는 변호사, 작품 밖에서는 독자)들로 하여금 뭔가 꿈틀거리게 한다는 점이다. ‘먼 별은 그것 자체로는 그냥 불타고 있는 수소나 헬륨에 불과하겠지. 그렇지만 그 별을 보는 나에게는 뭔가 시사점을 주지 않나? 그러니 한병철의 해석은 너무 바틀비에 고정되어 있어서 독자나 화자의 입장 변화를 생각하지 못한 해석 같아 보이고 아감벤의 해석은 바틀비에 너무 종교적, 인류학적 의미를 둔 것 같았다. 내 입장에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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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언어 - 탐나는 것들의 비밀 우리는 왜 어떻게 매혹되는가?
데얀 수딕 지음, 정지인 옮김 / 홍시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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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 ways of seeing을 언급하며 시작한 점, 멋진 디자인의 상품들을 소개해서 호기심을 자극한 점은 좋았다. 헌데 5개의 키워드는 평범했고, 그로인한 통찰은 임팩트 있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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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자의 초상 - 지젝부터 베컴까지 삐딱하게 읽는 서구 지성사 이매진 컨텍스트 7
테리 이글턴 지음, 김지선 옮김 / 이매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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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 유용성을 갖추고 있다는 측면으로 볼 때 이 책을 `디자인`에 비유한다면, 무용성에 가까운 모리스 블랑쇼의 책은 `아트`에 비유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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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 슬라보예 지젝 인터뷰 궁리 공동선 총서 1
인디고 연구소 기획 / 궁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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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어. 단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를 뿐이야라고 말하는 이들에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말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론과 철학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합니다.

: 그렇다. 해답을 찾기 보다는 올바른 질문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나 스스로에게 특히.

 

 

질문을 발명하라.

 

 

제가 보기에 서구사회는 현재 지나치게 나르시시즘적인 사회가 되어가고 있고, 자신의 정체성을 안전 속에 가두려고 하며, 심지어 이런 열정적인 섹스, 사랑을 동반한 섹스, 자신을 상대에게 내어주는 이러한 행위들로부터 멀어지려 하고 있습니다. 섹스는 좋지만, 적절히 조절을 해야만 한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 우리는 모두 위험한 사랑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지젝은 말한다. 사랑조차도 현재의 사람들에게는 공포라고. 사람들은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면 얼른 결혼하라고 하지. 그래.. 아마, 그러면 열정은 곧 식어버릴 테니까. 그래야 자기 주변이 안정적이 될 테니까. 모두들 식어버린 채 말이지. 나는 결혼한 사람들이 미혼인 사람들에게 갖는 불편한 감정을 많이 접했었다. 결혼을 하라고 종용하는 사람들일수록 그들 자신의 결혼이 행복한 경우란 거의 없다는 사실. 스스로가 겪는 공포도 끔찍할 테지만, 바로 옆 직장 동료의 열정적인 사랑과 사랑만 하고 결혼을 안 하는 그런 행위들도 자기들한테는 똑같이 끔찍할 테니까. 아니, 다른 사람들 얘기할 필욘 없겠지. 나부터도 모든 것을 거는 사랑이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겪어봤으니까. 하지만, 맞다. 우리는 정말이지 새로운 질문을 발명해야 한다.

 

 

예이츠의 유명한 시구가 생각납니다. 자신의 시 「재림 The Second Coming」에서 그는 가장 선한 자들은 모든 신념을 잃고, 반면 가장 악한 자들은 격정에 차 있다고 말했지요. 오늘날 정치에 있어 우리는 어디서 열정을 찾을 수 있습니까? 오직 근본주의자들에게서 입니다.

: 정치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집단, 회사들도 마찬가지. 왜 기업들이 50년조차 버티지도 못하고 나가 떨어지는지. 물론 경쟁상황의 격화나 우연적 사건으로 그리 되는 경우가 많겠지만, 내부적인 요인도 무시 못할 것이다. 상층부를 차지한 열정적인 사람들의 자기 반성 없는 의사결정들이 조금씩 쌓여 어느 순간, 팍 하고 주저앉게 되는 것이지.

 

 

예를 들어 이집트 혁명에서 100명이 죽었다고 합시다. 끔찍한 일이지요. 하지만 사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더 많은 사람들이 고문과 테러에 의해 잔혹하게 죽어간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폭력에 대해 말할 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언제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 국무총리실 민간인 불법사찰이나 요즘 한창 투쟁 중인 방송사들의 낙하산 사장들이 방송사 내부에서 했을 그 모든 일들. 그 가시적, 비가시적 폭력들이 그 동안 얼마나 만연됐을까?

 

 

자신들의 권리를 구현하고 사회적 요구를 관철시키는 방식으로써 권력을 무시하는 방법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아주 확실한 무기이며, 점점 더 강력한 무기가 될 것입니다. 나아가 국가는 결코 상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대의나 소명 의식하에, 함께 같은 길을 가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우리에 속하는 겁니다. 그리고는 함께 가자고 외치는 방식. 이것이 진정한 좌파의 기획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결정적인 사건들이 도덕적인 문제로 치부되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합니다. 이런 종류의 종교적 설교가 싫어요. 특히 사회의 변화 과정 중 하나를 개인의 책임이나 욕심 탓으로 돌리는 방식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도덕화의 방식이 아니라 구조를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 학교 폭력에 대한 최근의 방송/신문 기사들을 보며 내가 느낀 게 이거다. 내가 십대 때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언론기사의 수준이라는 게 정말 별로 달라진 게 없다는 이 끔찍한 사실.

 

 

우리는 스스로를 바라볼 때, 이방인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보고 또 상상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인류에게 가장 훌륭한 사유 방식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결코 자신만의 관점에 스스로를 가두어서는 안 됩니다. (중략) 우리는 타인의 다름이나 어리석음에 대한 비판을 통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가 얼마나 이상한 짓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자각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혁명적 과정은 점진적인 진보가 아니라, 반복적인 운동, 몇 번이고 다시 시작을 반복하는 운동이다.

: 회사에서 사용하는 내 이메일 서명, 사무엘 베케트의 “Try Again, Fail Again, Fail Better”. , 또 다시 시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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