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학이란 무엇인가 - 후설에서 메를로퐁티까지 철학의 정원 7
피에르 테브나즈 지음, 김동규 옮김 / 그린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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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투르니에의 <<외면일기>>를 봤을 때 조금은 놀랐었다. 내면에 대한 이야기를 그치고 겉으로 보이는, 관찰할 수 있는 것만을 관찰해서 일기를 쓰겠다고 하고, 써낸 투르니에의 시도가 내 편견의 한 귀퉁이를 찢어발겼다. 나란 인간은 그때까지도 으레 일기란 것은 심리적이고 주관적인 ‘나’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맨날 슬픔이니 외로움이니 실패니 하는 것들만 써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글쓰기가 스스로도 재미없고 심드렁했다. 지금도 글쓰기가 재미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글쓰기가 영 안 풀린다 싶을 때는 나르시시스트로서의 나를 벗어 던지고 겉으로 보이는 것들, 들리는 것들, 만져지는 것들에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이제는 그렇게 하는 편이 훨씬 즐겁다는 것을 얘기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子曰 吾嘗終日不食 終夜不寢 以思 無益 不如學也
공자의 이 말씀이 이제 내게는 투르니에가 ‘외면일기’를 써 보라고 권했던 그 맥락으로 여겨진다.

후설은 의식은 항상 ‘무엇에 대한 의식’이라고 말한다. 의식은 딱딱하고 고정된 핵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어떤 외부 대상과 관계하는 한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 의식과 대상이 관계 맺는 방식을 지향성이라고 하는데, 이 지향성으로 말미암아 의식-대상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한데 묶여 경험이라는 사태를 이룬다. 이렇게 되면 대상은 데카르트의 생각처럼 나 바깥에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의식 안에 현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된다. 그러니 이 주어진 것은 분리시켜 고찰해 봐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현상학적 환원(또는 괄호치기)은 흔히 관찰이라고 하는 행위를 대단히 흥미롭게 만든다. 게임의 법칙이 좀 복잡해졌다고 할까.. 대상만을 그저 관찰하는 것과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하며 대상을 관찰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니까. 이 책은 현상학의 이런 기초 사항들이 하이데거의 DaSein에 사르트르의 자유에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에 어떻게 반영되어 나갔는지를 간명하게 보여 준다.

의식 안에 현상이 드러나는 것을 본다. 는 것이 왜 이렇게 심금을 울리는지 모르겠다. 김훈의 <<흑산>>을 보면 그 화자의 포지셔닝이 아주 묘하다. 초월적인 위치인데, 당대 설움 받는 인간들에게 가깝다. 가까우면서도 실은 한참 멀기도 하다. 김훈이 <<흑산>>을 내놓고 한 인터뷰에서 다윈의 책을 수시로 읽은 것에 대해 얘기했었는데, <<흑산>> 화자의 시선과 의식적 판단의 언어에는 관찰의 대가라고 말할 수 있는 다윈의 어떤 것들이 녹아져 있는 듯 하고, 수학자이기도 한 후설의 현상학적 환원이라는 방법론이 드리워져 있는 것도 같았다. 안셀 아담스의 F64의 시선 같기도 하고 F2.8로 얕게 찍은 사진 같기도 해서.. 뒤죽박죽 주관적으로 느껴지지만, 실은 자기가 판단할 수 없거나 판단하기 싫은 것들 모두에 대해 판단중지를 하고 존재의 어떤 측면을 열어 보인 것들에 대해서만 썼다는 의미에서, 현상학적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내내 들었었다. 그 엄밀함 한 가운데 드러나는 것들이 매우 리얼해서, 그 리얼의 리얼감을 좀 죽이기 위해 이 책에서 소개하는 현상학의 둔한 개념들이 내겐 좀 필요했던 듯도 하다. 어쩌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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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제임스 우드 지음, 설준규.설연지 옮김 / 창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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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었던 것은 아마 겉멋에 들었던 나이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고, 조르바는 소설이라기 보다는 경전 보듯 했고, 바나나의 키친은 우연히 만난 위로였고… 겉멋이었고 경전이었고 위로였던 소설을 좀 다르게 보기 시작했던 것은 어떤 하나의 소설작품이 계기가 된 것이 아니라, ‘생활’의 반작용이었다. 사회의 효과/효율 지상주의는 사람을 한쪽 방향으로만 몰아가 결국 나를 뿔나게 만들었다. 나는 무용(無用)한 것. 그렇지만 의미심장한 무용한 것을 찾아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때 내가 새삼스레 찾아낸 게 소설.

하지만 읽은 소설의 권수가 누적될수록 소설이 무용(無用)하기만 하지는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미묘한 것들을 알아채는 감각. 눈에 띌 정도는 아니지만 이것이 조금씩 발달됨을 확인하게 되었다. 서울대입구역 방향으로 무심한 야간 산책을 나갔던 어느 날에 내가 생각했던 것이 저자가 쓴 글과 딱 떨어졌다.

‘문학이 우리를 좀 더 삶을 잘 알아차리는 사람으로 만들면, 우리는 삶 자체에서 실습하게 되고, 그리하여 이것이 우리를 문학의 세부사항을 좀 더 잘 읽는 독자로 만들면, 그것이 이번에는 우리를 삶을 좀 더 잘 읽는 사람으로 만든다. 이런 과정이 이어지는 것이다.’


2.
강신주의 “철학이 필요한 시간” 에필로그에는 들뢰즈가 말한 독서법이 인용되어 있는데,

‘책을 읽는 또 다른 방식은 책을 어휘나 의미를 찾는 것과는 무관하게 하나의 기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작용을 하는가, 어떻게 작용을 하는가?”하는 것만이 문제가 된다. 그것이 어떤 작용을 하는가? 만일 작용이 없으면, 감응이 없으면, 그럼 다른 책을 집어 들면 된다. 바로 이것이 강렬한 독서이다. 무엇인가 발생하든가 아니면 아니든가. 그뿐이다. 아무런 설명할 것도, 이해할 것도, 해석할 것도 없다.’

리얼리즘(사물의 존재방식에 대한 진실성)을 불러 일으키는 소설 형식에 대한 진지한, 즐거운 설명. 이라고 말하면 너무 압축한 것일 테지만, 현재로는 이정도 말 밖엔 안 나온다. 다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저자가 이 책에 인용한 많은 현대소설의 생생한 문장들이 나를 들뜨게 했다는 것이다. 읽고 싶다. 더 잘 읽고 싶다... 제대로 작용한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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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콘 - 진중권의 철학 매뉴얼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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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에 연재됐던 글이라더니, 역시 주간 단위로 한 편씩 읽는게 나을뻔 했다. 한꺼번에 읽었더니만 확 질리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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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 댄스 댄스 - 상 -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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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도와 영토>>를 읽은 후 한동안 무욕망증이라고 말해야 할지 무기력증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를 그런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읽고 싶은 것도 보고 싶은 것도 듣고 싶은 것도 사고 싶은 것도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반디 코엑스점을 찾았던 10월 중순의 어느 날. 그 넓은 책의 매장이 황무지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책꽂이 사이사이를 무턱대고 걷다가 문득 ‘하루키라면 읽어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장편소설 중에는 <<1Q84>>와 <<댄스댄스댄스>>만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는 상태였으므로, 나는 “댄스댄스댄스”를 선택했다. “1Q84”보다 먼저 나왔기 때문에 읽어야겠다 라는 식의 의무감 때문은 물론 아니었다. “댄스댄스댄스”라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그루브감이 지금 읽어야 할 책은 이 책. 이라고 말해 주고 있었다.

이루카호텔의 꿈을 꾸고 이루카호텔을 찾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이름은 곧 상징이다. 물론 모든 상징을 다 읽어낼 수 없고 사람마다 느끼는 상징코드는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핀호텔이라고 불러도 될 이름을 굳이 이루카호텔이라고 부르고 싶은 화자의 심정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리라 짐작했다. 호텔의 여직원 유미요시를 만나고 그녀의 집까지 배웅했을 때 ‘나(화자)’는 그녀와 잘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느끼는데, 그럼에도 문 앞에서 발을 돌린다. “공정한 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바로 이 말 “공정한 게 아니다”에서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이 소설에 빠져 들 수 있었는데…

“오디세이아”를 읽은 적은 없다. 하지만 오디세우스가 자기의 왕국에 돌아왔을 때 구혼자들의 압박을 받고 있던 페넬로페를 구하기 위해, 바로 등장해서 모든 것들을 일거에 해결하지 않고 ‘시합’을 벌여 자기가 최종 승자가 되어 페넬로페 앞에 나타난다는 에피소드는 알고 있었다. 그 에피소드를 들었을 때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는데, 생각해보니 ‘이타카’의 주인이고 ‘페넬로페’의 남편인 오디세우스가 자기의 권리를 바로 드러내지 않은 까닭은 자기의 아내, 10년간의 전쟁과 다시 또 10년에 걸친 길고 긴 귀환 과정을 겪은 자신보다 어쩌면 더 고생했을 페넬로페 앞에 바로 등장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라고 느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공정한 게 아니다.”라는 문장에서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를 떠올리게 되었고 그러자 ‘이루카호텔’이 바로 “이타카”이고, 유미요시는 페넬로페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댄스댄스댄스”는 현대적 오디세이고, 공정한 게 아니다. 라는 자세, 그런 윤리적 태도가 소설의 어두운 배경이 되는 고도자본주의 사회를 헤쳐 나가는 주인공들의 기준 같은 것이 되지 않겠는가 짐작하게 되었다. 이타카를 먼저 찾아 이타카를 확인한 후 모험을 거쳐 다시 이타카로 리턴하는 것. 소설은 이런 구조다. ‘이타카(고향)’와 ‘모험’, ‘리턴’. 자기계발서와 헐리우드 애니메이션에 진저리 칠 정도로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들. 그런데도 물론, 지루할 리가 없다.


2.
앤서니 스토의 <<고독의 위로>>에 보면 융의 글이 인용된 것이 있는데,

“만일 우리가 무의식도 의식과 함께 공동의 결정 요소로 인식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의식적인 요구와 무의식적인 요구를 가능한 한 함께 고려하며 살 수 있다면, 아마도 개인성 전체의 무게 중심이 달라질 것이다. 더 이상 개인성의 중심은 자아, 그러니까 의식의 중심에 있지 않고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가상 지점에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새로운 중심이 ‘자기’가 될 것이다.”

<<고독의 위로>>의 부제 ‘A Return to the Self’는 그러니 “댄스댄스댄스”의 주제의 어떤 핵심을 똑 떨어지게 말해주는 듯 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자아(ego)’가 아니라 ‘자기(the Self)’로의 리턴 이라는 것.

왜 자기로의 리턴을 해야 하는 걸까.
‘나’는 두 가지의 문제. 또는 두 종류의 상실을 겪고 있다. 친한 친구의 자살과 아내와의 이혼으로 인한 ‘관계’의 상실. 그리고 자기가 하는 일에서 어떤 만족감도 얻지 못한다는 것, 자기 일과 일체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 그가 하는 일은 잡지 같은 것들에 맛집 기사 같은 중요하지 않은 글을 써서 납품(!)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일을 ‘문화적 눈 치우기’ 라고 폄하하듯 말하는 그의 태도에서 일에 대한 불만족을 느낄 수 있다. 행복은 좋은 인간관계에서 온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그렇지만 앤서니 스토는 ‘관계’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개인의 ‘고독’이라고 말한다. 고독을 통해 개인의 개성과 창의성이 발현되고 그것이 일이나 개인의 취미 활동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고 말하고 있다. “댄스댄스댄스”의 ‘나’는 유미요시(미래의 연인)와 유키(모험의 동반자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딸 같은) 그리고 ‘고탄다(오랜만에 만나 새로운 우정을 느끼는 친구)’를 통해 적지만 진실한 인간관계를 회복한다. 그리고 바로 이 소설(댄스댄스댄스)을 직접 씀으로써 눈 치우기가 아닌 창작의 세계에 발을 딛게 된다. 물론 이런 과정을 이처럼 재미없게 설명하진 않는다. 음악에 맞춰 한 발짝 한 발짝 꾹꾹 눌러 스텝을 밟듯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진지하게, 때론 경쾌하게. 누구보다도 잘.


3.
중요한 것은 모험이다. 댄스의 스텝을 밟는 것.
신화 속 모험이라면 괴물들과의 혈투가 되겠지만, 현대의 모험은 이미 상식이 되어버려 누구도 반박하거나 반대하지 않는 가치체계-이 소설에서는 고도자본주의-에 반하는 것이 모험이 될 터이다.

삿포로에서 도쿄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에 도착했는데 눈 때문에 비행기가 연착했을 때, 그가 자동차를 렌트해 유키(雪)를 태우고 함께 공항 주변 도로를 빙글빙글 돌며 드라이브를 하는 장면. 이 장면은 이 모험의 가장 아름다운 상징이고, 내가 제일 좋아하게 된 장면이다. 이 드라이브가 이뤄낸 것들은 놀라운데 1)효과와 효율을 무시하고 (기름을 낭비하며) 그냥 돌고 돈다는 것 자체가 고도자본주의 사회가 최고로 치는 가치체계를 저버리고 있다는 점 2)현재 유행되는 록음악과 옛 음악이 섞이는 것처럼, 폐쇄적인 유키의 마음이 살며시 열리며 그와 유키 사이의 진실한 관계(물론 이것은 아빠와 딸과의 관계 같은 것이다)가 형성되는 계기가 된다는 점 3)이 장면을 공중에서 본다고 상상하면, 이 드라이브 코스는 무한의 표지처럼, 크게 휘둘러 빙글빙글 돌아가는 원심분리기처럼 보인다는 점. 그래서 시시한 것, 사소한 것들을 모두 걸러내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 4)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나’의 곁의 눈-유키(雪), 그리고 빙글빙글 드라이브, 크게 울리는 록음악, 마치 천지가 혼연일체 되는 것 같은 커다란 해방감 같은 것을 불러일으킨다는 점 5)’좋은 것은 적다’는 그의 말이 주는 울림. 진실하지 못한 인간관계,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일 때문에 괴로워하는 소설 속 ‘나’와 독자인 ‘나’의 답답함을 순간적이나마 확 뚫어주고 있다는 점. 소수의 좋은 사람에 인간 관계를 집중하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 한 번 홀딱 빠져보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들게 했다는 점. 이런 기분들을 한꺼번에 환기시키는 힘을 갖고 있는 멋진 드라이브. 나에게는 올해의 한 컷.


4.
소설에 빠지기 시작한 것은 ‘공정한 게 아니다’라는 문장부터였지만, 나의 무욕망증, 무기력증의 해소는

“그녀는 방 한가운데 서더니 밝은 청색의 윗도리를 소리도 없이 쑥 벗고는, 주름이 잡히지 않게끔 라이팅 데스크의 의자 등받이에다 걸쳐놓았다. 그러곤 걸어서 내 곁으로 오더니 다리를 가지런히 하고 앉았다. 상의를 벗고 나니,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약해서 상처받기 쉬운 여자처럼 보였다. 나는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녀는 내 어깨에 머리를 얹었다. 아주 좋은 냄새가 났다. 하얀 블라우스는 말끔하게 다림질되어 있었다. 5분 정도를 그렇게 하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그녀의 어깨를 껴안고, 그녀는 내 어깨에 머리를 얹고 눈을 감은 채 마치 잠들어 있는 것처럼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다. 눈이 거리의 음향을 빨아들이면서 언제까지나 내리고 있었다. 음향이라는 게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라는 장면을 읽고 나서였다. 성욕이 회복됐다. 뭐든 어떠한 욕망이라도 하나가 깨면 다른 것들도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높은 법이다. 이 문장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사운드(침묵의 사운드)가 계기가 된 것이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소설 속 문장은 소설 안에서만 작용되는 법칙은 아닌 것이다. (이 장면을 읽고 나서 ‘사랑의 미래’와 ‘고독의 위로’를 샀다. 읽고 싶고 사고 싶은 마음이 돌아왔다.)


5.
헤닝 만켈의 <<이탈리아 구두>>를 읽고 하루키의 ‘우물’에 대한 것을 떠올렸었는데, 우물만큼이나 ‘전화’가 중요하다. 상대방에게로의 도달 (불)가능성. 사랑의 (불)가능성. 하루키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단어 두 개만 꼽으라면, ‘우물’과 ‘전화’라고. 이제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6.
나는 아내보다는 ‘딸’이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 유키의 어머니 아메(雨)의 남자 딕 노스가 죽었을 때 유키에게 그가 한 말, “사람은 회한이 남지 않도록 사람과 접촉해야 해. 공평하게, 되도록이면 성실하게, 그런 노력은 하지 않고, 사람이 죽으면 간단히 울면서 후회하곤 하는 인간을 나는 좋아하지 않아. 개인적으로.” 이런 말을 나도 내 딸에게 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완전 감정이입 했다. 유키 라는 존재는 관계와 일에서 상실감을 느낀 ‘나(화자)’에게 부과된 큰 책임 같은 존재지만 또한 큰 위로 같은 존재다. 부성애라고 부를 만한 부드럽고 친밀한 감정. 이 흐믓함은 사랑하는 연인에게서도 얻지 못할 것.


두서없이 적어 내려왔다. 하지만 유기적인 이야기보다 순간적인 느낌들이 소중했다. 이 느낌이 이 소설에서 내가 얻은 ‘좋은 적은 것’이다.

하루키는 형태와 이야기. 둘 모두를 잘 다루지만 형태 쪽에 더 무게중심을 둔 작가다. 이루카와 양사나이, 아메와 유키, 유키 엄마의 남자와 유키 아빠의 남자, 쓰바루와 마세라티, 유행하는 음악과 한때 유행했던 음악, 제대로 된 요리와 정크푸드, 전화와 우물, 뼈와 불구, 키키와 메이와 준, 자본주의의 습성을 대표하는 듯한 경비(비용처리)와 매춘, 천재와 범재, 도쿄와 삿포로와 하와이, 고탄다와 나와 양사나이 등등. 어떤 상징성을 내포한 것들로 형태를 구축한다. 그런 것에 능하다.
더 훌륭한 것은 그런 형태들이 그저 굳게 자리나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키스 자렛이 『쾰른 콘서트』 PartⅡ A에서 들려준 것, 오르막길에서 굴러 떨어지는 음표들을 붙잡아 다시 위로 끌고 던지고 올려 붙이는 듯한 격렬함 같은 것을 느끼게 해 준다는 점이다. 어느 순간 나(개인이라는 개념어가 아니라 Only라는 의미에서의 실존적 개인)에게만 딱 맞는 충격과 울림을 전해 주는 느낌. 텍스트와 텍스트 바깥의 나라는 존재 사이의 경계가 순간 사라지는 기분. 줄탁동기(啐啄同機)의 느낌. 갓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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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0-31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를 읽고나니 예전의 저는 <댄스댄스댄스>를 (조금 읽은 부분이나마) 잘못 읽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일큐팔사가 끝나면 다시 도전해 봐야겠어요. 형태와 이야기 모두를 잘 다루지만 형태에 더 무게중심을 둔 작가, 이 평은 저도 공감해요. 예전엔 하루키가 너무 스타일에만 치중하는게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일큐팔사를 읽고있는 지금은 하루키가 다루는 형태나 이야기보다, 환갑을 넘긴 원로작가 하루키의 세계관이 궁금해지고 있어요. 좀 더 확장된 세계를 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요.

<지도와 영토>를 아직 못 끝냈어요 ㅜㅜ


dreamout 2011-10-31 22:28   좋아요 0 | URL
1Q84는 어서 읽어 보라는 얘기를 나올때부터 들었는데, 사놓고 첫문장 조차 안 읽고 있어요. ㅋ

지도와 영토든 어떤 책이든 안 땡기면 내비두는 겁니다~ ^^

다락방 2011-11-01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앗, 저는 [댄스댄스댄스]를 두번이나 읽었는데도 이런식으로 느껴보지 못했을 뿐더러 리뷰는 써볼 생각도 못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리뷰를 읽고나니 저는 이 책을 다시 한번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하루키를 몹시도 애정하고 있고 그의 번역된 모든 작품을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제가 하루키의 모든글을 제대로 이해하고 좋아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물론 제 마음을 움직이는 건 그의 소설속에 숨어 있는 그 모든 유머들이지만-이 책 댄스~ 에서도 초콜렛과 날짜변경선을 좋아하느냐고 되묻는 그런 질문같은 것들- 그것 말고도 더한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요즘에 들고 있어요. 제가 본 것 말고 더한것. 미처 제가 발견하지 못한 어떤 것. 그런게 하루키의 글에 있을 것 같아요. 아, 다시 읽고 싶어요.

dreamout 2011-11-01 21:22   좋아요 0 | URL
전 하루키 소설의 유머를 잘 느끼지 못해요. 틀림없이 그런게 있다는 건 알겠고 그것 자체도 뭔가 환한 부분이 있는 건 알겠는데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저도 그의 다른 소설 읽을 날이 기다려져요. 저에게도 아주 많이 남아 있는 작가예요.
 
사랑의 미래
이광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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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약주문


 

표시를 하고 말하는 게 낫겠다. 1은 저자가 ‘날카로운 가시 같은 문장들’이라고 느꼈던 시어들. 각 글들의 맨 처음에 인용/제시되어 있고 (물리적으로) 왼쪽 페이지에 전시되어 있다. 2는 저자 자신의 문장들. 그와 그녀라는 인물을 통해 에세이 같은 픽션 같은 그렇지만 또한 詩를 갈구한 문장들.

41개의 1, 그 중 몇몇은 전부터 좋아했던 그 중 몇몇은 읽었던 것이었지만 기억나지 않았던 그렇지만 대부분은 알지 못했던, 1은 좋았다. 詩에서 떨궈 나온 몇 줄의 詩 파편은 파편이지만 詩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그러한 파편이었고 나는 순간적으로 멈췄고 파고 들었고 아득했고 먹먹했다. 허수경과 이성복과 쉼보르스카와 김행숙과 등등등.

2에서 자주 보이는 낱말들. 이를테면,
오직, 무력감, 환멸, 영원, 파국, 환상, 절망, 부재, 유일, 확신, 봉인, 완벽, 절연, 주술, 현존, 순수, 악마적, 참혹, 원초적, 미학적, 낭만적, 명멸, 완성, 황폐한, 소멸…
저자의 말대로 ‘낭만적 과장법’이라 부를 만한 단어들. 이는 우리가 사랑을 얘기할 때 어쩔 수 없이 토해내는 말들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1을 빌미로 쓴 2의 언어들은 유리잔의 깨진 파편처럼 날카로워 찌르는 듯한 느낌은 있었지만, 온기와 냉기. 그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좋은 시를 보았을 때 느끼는 정수리에 찬물을 끼얹은 듯한 냉기나 좋은 이야기를 읽었을 때 느끼는 털목도리 같은 온기. 그것이 없었다.

10월의 한가한 토요일에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과 열로 조금은 비닐하우스 같은 답답함을 느꼈던 홍대의 스타벅스. 그곳 창가와 가까운 자리에서 읽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 유리잔의 파편들은 내 맨발에 피를 흘리게 하지는 못했다. 어쩌면 내 발바닥은 이미 쇳덩어리가 되어 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밟고 지나가니 유리파편들은 전부 가루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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