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갈비탕은 결혼식장에서 나오는 그런 갈비탕이다. 나는 그 갈비탕이 제일 좋다. 적당히 고기가 들어있고 적당히 당면도 들어있는 갈비탕. 간간하니 간을 더 하지 않아도 괜찮은 갈비탕의 맛. 똑 그 정도의 맛이 내겐 딱이다. 내가 좋아하는 갈비탕의 모습이다.


맛으로만 따지면 갈비탕 전문점의 갈비탕이 맛있겠지만 이상하게도 너무 맛있어서 나에게는 별로다. 갈비탕 전문점에서 갈비탕은 한 대 여섯 번 정도 먹어봤나? 그 정도 먹었는데 맛은 좋으나 맛이 너무 난다. 간간한 맛이 아니라 육향이 짙고 갈비의 맛이 아주 잘 나는 그런 맛? 이 있다.


갈비탕은 뜨거운 음식이라 추운 겨울에 자주 먹었을 것 같은데 이상하지만 여름에 주로 먹었다. 여자 친구와 밤새 술을 마시고 오전에 문을 여는 갈비탕 집은 전문점이었다. 여름의 오전은 푹푹 찌고, 열을 받은 아스콘은 달아오르고, 숙취는 온몸을 전부 분리하려고 하고, 그때 갈비탕 전문점에 들어가면 시원하니 갈비탕의 그 달큼하고 뜨거운 국물을 한 모금 마시면 숙취가 확 내려가는 느낌이 들곤 했다. 그라나 전문점 갈비탕은 맛이 너무 났다. 맛이 너무 난다고.


초등학교 때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대구에 가서 거기 숙소를 잡아서 하루 묵었다. 가족이 전부 대구에 갔었다. 대구에는 왜 갔을까. 기억이 없다. 대구는 큰집이라 불리는 큰아버지의 댁이 있어서 제사 때 가곤 했었다. 그리고 가면 보통 큰집에서 하루 자고 왔다. 큰집은 방도 많고 가정부도 있었다. 가정부 누나는 청각장애자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때는 벙어리 누나라고 불렀는데 우리만 보면 무섭게 으 하면서 좀비처럼 양손을 앞으로 뻗어서 놀리곤 했다.


그러면 동생이나 다른 친척 아이들은 울곤 했다. 가정부 누나는 큰집에서 아기 때 고아원 같은 곳에서 데리고 와서 키워주는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떻든 대구는 큰집이 있어서 대구에 가면 큰집에서 잠을 잤지 숙소 같은 곳에서 잠을 자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때는 뭣 때문인지 큰집에 간 것은 아니고 숙소에서 하루 자고 이른 아침, 거의 새벽에 숙소에서 나왔다. 잠이 쏟아지는데 겨울에 나와서 아버지가 문을 연 식당에서 갈비탕을 사주었다. 그게 딱 내가 좋아하는 갈비탕의 맛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때 그 입맛에 길들여졌나 보다. 그 뒤로 친척들 결혼식에 가면 결혼식에 딸려 나오는 갈비탕을 맛있게 먹었다.


갈비탕은 갈비로 만든 탕이니까 기본적으로 고깃국이다. 고기가 들어간 국, 탕이 많아서 우리나라 음식은 어떤 면으로는 축복받은 음식들이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탕이나 국으로 먹게 된 건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대부분 못살았던 서민들이 닭 한 마리 잡으면 많은 식구가 다 고기를 배부르게 먹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닭을 삶으면 나오는 국물에 밥을 말아먹으면 모두가 배부르게 한 끼 먹을 수 있었다.


그래서 집안의 행사가 있을 때 고깃국이 우리네 밥상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지난 현재는 이렇게 탕이나 국은 몸에 그렇게 좋지는 않다. 일단 뜨겁기 때문에 빨리 먹게 된다. 뜨거운 음식은 늘 빨리 먹는다. 뜨거우니까 식혀서 천천히 먹는 게 아니라 뜨거운 음식은 식으면 맛이 없다는 인식이 가득해서 뜨거울 때 빨리 먹는 게 맛있다고 느끼고 있다.


국물문화가 발달된 아시아에서도 탕에 밥을 말아먹는 탕반문화는 한국만 발전했다. 그래서 국밥집부터 탕이나 국을 파는 식당이 아주 많다. 보통 국에 밥을 말아서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3 40대가 되면 살이 많이 찐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이 찌지 않는다면 그건 유전자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다. 축복받은 유전자는 그런 마법을 부리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20대 때 아무리 먹어도 날씬하던 사람들도 나이가 들어 국에 밥을 말아먹는 걸 좋아하면 살이 많이 붙는다.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열에 한 명 정도는, 아니 천명에 한 명 정도는 유전자의 영향을 받아서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다.


갈비탕을 좋아하던 아버지, 고모들 전부 일찍 돌아가셨다. 그런 유전자를 달고 태어났다. 정말 너무나 비슷한 모습으로 비슷한 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런 저주받은 유전자를 나 역시 이어받았다. 매일 조깅을 하지만 하루 이틀 조깅을 하지 않고 하루만 평소 양보다 많이 먹어도 살이 쪄 버린다. 1년 내내 관리하며 지냈어도 다 소용이 없다. 예전에는 이런 신체와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서 늘 어딘가를 향해 불만을 토해내고 싶었다. 그건 요즘도 비슷하지만 예전과 다른 건, 그런 몹쓸 유전자 때문에 하루도 쉬지 않고 조깅을 하고 식사량을 조절하려고 노력한다. 이미 이렇게 생활한 지도 오래되어서 이런 루틴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고 지내고 있다.


인간이란 어떤 면으로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대단한 존재이지만 자신의 손톱 모양도 마음대로 정할 수 없는 아주 하찮은 존재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변하는데 어떤 사람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나는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너는 참 많이 변했네]라는 말을 듣기도 하다가 누군가에게는 [넌 변한 게 하나도 없네] 같은 말을 듣는다. 나는 비정상일까.


누군가 나에게 변함이 없어서 참 좋네요,라고 했다. 그 말을 좀 삐딱하게 들으면 변화도 없다는 말로 들린다. 나는 늘 행복하게 보인다고 했다. 사람이 늘 행복할 수 있을까. 그냥 그렇게 보일 뿐이지. 하지만 겉으로는 예예 하며 지나칠 수밖에 없다. 이런 날은 갈비탕 한 그릇이 생각난다. 그러고 보면 국물 있는 음식을 먹지 않은 게 좀 되어서 갈비탕이 먹고 싶은 그 마음만 가지고 저녁이 도리 때까지 끌고 간다. 막상 저녁이 되어 밥을 먹을 때가 되면 먹지 않는다. 국물이 정말 간절하게 당길 때는 컵라면을 먹는다. 작년까지는 끓여 먹는 라면을 먹었는데 욕심이 생겨 라면 속에 이것저것 자꾸 넣어서 끓이다 보니 항상 찌개가 되어서 요즘은 컵라면을 가끔 먹고 있다.


얼마 전에는 오랜만에 체했다. 그렇게 심하게 체한 건 몇 년 만인 거 같다. 소화가 안 되는 경우는 왕왕 있다. 그러면 병으로 된 소화제를 찾아서 마신다. 날 때부터 좋지 못한 위장을 달고 태어나서 위가 부담을 느끼면 생활이 어렵기 때문에 먹는 음식이 위에 부담을 주기 시작했다 싶으면 숟가락을 놓는다. 그랬는데 엊그제는 뭔가를 많이 먹지도 않았는데 심하게 체하고 말았다. 사촌동생이 서울에서 케이크를 하나 사들고 왔는데 그게 아마 속에서 아다리가 된 것 같다. 다음 날 아침부터 체기가 있는 것 같더니 머리도 어지럽고 그 더부룩한 느낌. 거기에 설사까지. 마치 숙취 같은 그 느낌이 나를 괴롭혔다. 몸이 힘이 전부 빠져나가고, 정말 이런 느낌은 오랜만이었다. 몸이 고통스러운 이 느낌은 진짜 별로다. 결국 약국에서 약을 사 먹었다. 다시는 느껴보고 싶지 않은 느낌. 이런 혹독함이 휩쓸고 지나가는 이런 날에는 어릴 때 먹던, 결혼식장의 그런 갈비탕이 먹고 싶다.


어린 시절에는 갈비탕을 먹으러 갈 때 혼자 가지 않는다. 항상 부모님이 함께 했다. 학창 시절에는 친구와 함께 먹었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난 후에는 혼자서 갈비탕이나 국밥을 먹을 수 있다. 그게 외롭다고 느낀 적은 없다. 오히려 편하다는 생각이 더 들었다. 나는 위 때문에 빨리 음식을 먹지 않는데 일행은 대체로 뜨거운 국밥 같은 경우 빨리 먹는다. 그러면 나는 일행의 속도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여자와 함께 먹으면 속도가 얼추 비슷했다. 여자들은 국밥이나 갈비탕이나 그렇게 빨리 먹지 않는다. 이토록 갈비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놓고 막상 식사 때에는 먹지 않는다는 이야기. 인간이란 제 멋대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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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에 젤리비가 내린다. 골목에 내리는 젤리비를 맞으면 똥이 젤리가 되어 나온다. 젤리비는 골목에만 내린다. 몸에서 나온 젤리는 꿈틀꿈틀 움직여 서로 붙어서 새로운 골목을 만든다. 젤리비를 맞은 후 48시간 안에 젤리똥을 누면 괜찮은데 48시간이 지나도 젤리똥이 나오지 않으면 몸이 점점 젤리로 변한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몸이 녹아서 없어진다. 정부는 이 세계에서 골목을 전부 없애려 하고 골목은 전부 사라지는 골목길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골목은 하늘에 물질을 쏘아 올려 먹구름에서 비를 뿌릴 때 젤리비를 내리게 했다. 그렇게 세력을 확장하려 했다. 정부는 애써 막으려 했고 골목은 악착같이 살아남아서 정부에게 위협을 가했다. 어느 비가 오는 날 골목에 내리던 젤리비가 화학반응을 일으켰다 :)



골목이 사라지고 있다. 뭐 당연한 것이겠지만. 어릴 때 골목에서 놀고 시간 가는 줄 몰랐지. 엄마가 몇 번이나 불러야 겨우 집으로 마지못해 들어갔다. 동네 아이들과 골목에서 노는 게, 그게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다. 뭘 하며 놀았냐고 한다면 뛰어다니며 놀았던 것 같다. 보자기 울러 매고 슈퍼맨 놀이를 하기도 했고, 칼 들고 마징가가 되기도 했다. 골목에 있는 집들은 전부 대문을 열어 놨는데, 이 집 저 집 아이들이 나와서 놀다 보니 이 집 저 집으로 마구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가 우르르 몰려다녔다. 대체로 아버지들은 회사에 다 나가고 엄마들이 집에 있었는데 나무라지는 않았다. 간혹 야간하고 들어와서 잠자는 김 씨 아저씨가 이놈들아!라고 큰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아이들은 옥상과 옥상을 건너뛰어 다녔다. 옥상과 옥상은 거의 붙어 있지만 그래도 공간이 있다. 떨어지는 죽는 거지.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떨어질 것 같은 공포가 있었다. 그러나 어디서 나왔는지 용기가 불쑥 올라올 때가 있는데 동네 형들이 다 옥상에서 옥상으로 건너뛰고 나면 우리도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또 보자기를 등에 착용하면 정말 슈퍼맨이 되어서 날아갈 것만 같은 용기가 생겼다. 하지만 꼭 누구 하나가 넘어지거나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지거나 팔이 부러졌다.


봄이 오면 골목에는 표가 확실하게 났다. 블록 사이에서 잡초가 올라오기 때문이다. 저녁에는 집집마다 고등어를 굽고 된장찌개를 끓이는 냄새가 골목에 가득했다. 아버지가 회사에서 퇴근하고 오시면 놀던 아이들도 뿔뿔이 흩어져 집으로 들어가서 밥상에 빙 둘러앉아서 저녁밥을 먹었다.


한 십 년 동안 내가 살던 동네로 조깅을 하면서 돌아왔다. 사람들이 여전히 동네에 빼곡하게 들어앉아서 생활을 했는데, 재개발 구역에 들어가더니, 사람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고, 철거가 찍히고, 집들이 하나 둘 허물어지고, 동네 고양이들도 다 떠나고, 벌판이 되더니 철근이 박히고 아파트 단지가 되는 과정을 지켜봤다. 그래도 갈 때마다 사진을 찍어놔서 점점 변해가는 과정을 기록할 수 있었다.


골목은 감성에 기인한다. 이성적으로 골목의 오래된 집들은 불안해 보인다. 아주 긴 시간 버텨왔기 때문에 담장이 무너질 것 같기도 하고, 장마나 폭설에 위험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화재에 대해서 취약하다.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 놈의 골목 빨리 떠나야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진으로는 운치 있어 보이지만 70년대부터 있던 전깃줄이 신경줄처럼 골목에 널어서 있어서 간당간당하다. 몇 번이나 새 전깃줄로 갈았을까. 아마 한 번도 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골목은 기묘하지만 동네마다 느낌이 다르다. 골목의 분위기? 골목의 스타일이 동네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저 뛰어다니며 놀기 좋은 골목이 있는가 하면 연인끼리 몰래 키스하기 좋은 골목도 있다. 저녁에 동네 아주머니들이 나와서 장판 깔고 소담을 나누기 좋은 골목이 있다.


골목은 상당히 없어졌지만 그럼에도 아직 골목이 많이 남아 있다. 골목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것도 재미있다. 혹시 모르지. 시간이 흘러 신문사에 팔아먹을지도.




여기서부터는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동네다. 21년도에 찍은 사진들인데 마치 오래된 사진처럼 느껴진다. 21년도 초반에는 골목 집집마다 사람들이 살고 있다가 점점 사람들이 빠져나가더니 철거가 시작되고 벌판으로 바뀌고 지금은 몽땅 아파트 단지가 되어간다.




여기 골목은 스타일이 다르다.




여기서부터는 시에서 밀어주는 골목이다. 오래된 골목이기는 하지만 도심지 중앙에 있는 골목이라 없애지는 못하고 사람들이 더 모이게끔 문화의 거리로 만들었다. 꽤 긴 시간 공을 들여서 이쪽 동네는 모든 것이 바뀌어서 골목 어디에서나 사진 찍기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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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구공이 굴러가서 부딪히는 소리는 경쾌했고 짜릿했다. 초크를 문지를 때의 그 기막힌 찰나의 느낌이 좋았고 거울에 비친 그 모습이 아주 멋져 보였다. 한창 당구에 심취해 있을 때, 그래봐야 50에서 80으로 넘어갈 때였다. 자려고 누우면 네모난 천장은 어김없이 꿈틀거리며 당구대로 보였고 그 안으로 당구공이 굴러가는 모습이 아른아른거렸다. 당구는 그런 마력으로 사람을 끌어당겼다.


당구장에 여자는 거의 없었다. 가끔 커피 배달을 오는 나 양이 보였고, 당구를 잘 치는 아저씨가 큐대를 잡으면 그걸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당구장으로 가는 발걸음은 가벼웠고 언제나 내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당구에서 패하면 게임비를 계산해야 한다. 거기에 짜장면을 먹기라도 하면 돈이 왕창 걸려 있기 때문에 정신을 놓을 수만은 없다. 짜장면은 왜 당구장에서 서서 먹을 때가 가장 맛있는지 미스터리다.


당구만큼 재미있는 게임이 있을까. 당구는 가만 서서 그저 큐대를 밀어칠, 뿐인 것 같지만 두 시간 정도치고 나면 다리가 후들거렸다. 당구는 그랬다. 아주 묘한 게임이었다. 자주 가는 당구장에는 자주 오는 사람들이 있었고 자주 보니 자주 인사를 하게 된다. 그러면 자주 오는 아저씨들과 친해져서 당구의 가르침을 한 수 받기도 했다. 그런 날은 우쭐해진다.


당구공에 힘을 얼마나 주는 가에 따라, 당구공의 포인트 어느 지점을 맞히는가에 따라, 공은 180도 다르게 움직였다. 당구는 그야말로 또 다른 세계였다.


친구는 우리가 자주 가는 당구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거기서 먹고 자고 했어. 작은 방에서 잠을 자면서 당구장에서 일을 했는데 친구는 사장님에게 허락을 받았다며 당구장 영업이 끝나면 놀러 와서 밤새도록 당구를 쳐도 된다고 했다.


당구장은 가장 사람들이 북적이는 다운타운의 중심가에 있었다. 그래서 당구장은 문을 열자마자 사람들이 들어와서 문을 닫을 때까지 북적북적거렸다. 당구장에는 매니저가 있었다. 마치 북한 공작원 같은 표정으로 일별 하듯 우리를 보는 사람이었다. 살도 찌지 않고 웃는 모습이 없고 당구장에 일 대 일 게임을 하러 오는 사람들을 다 이겼다.


[저 매니저는 당구 몇 치는데?]

[400]


친구가 말해줬다. 개인 큐대가 있고 절대 빨리 움직이지 않았다. 골초라서 하루에 담배 한 갑은 넘어 피웠다. 당구장 사장님도 매니저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매니저가 사장님의 친척이나 아내의 동생이나, 뭐 그런 사이인 줄 알았지만 친구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했고 그저 직원이라고 했다. 어떤 계약으로 묶여 있는지 모르겠지만 매니저는 매일 당구장으로 출근을 했고 손님들이 오면 당구 상대를 해주고 저녁 8시가 되면 퇴근을 하고 집으로 갔다. 창문으로 보면 그 뒷모습이 눈에 확 들어올 정도로 느릿느릿한 걸음걸이었다. 키도 커서 마른 사람이 느리게 걷는다는 게 기묘하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사장님은 나이가 많은 사람으로 할아버지였다. 친구가 아르바이트를 하니까 친구들이 많이 당구장에 갔다. 친구는 사장님이 없으면 대충 시간을 멋대로 계산해서 우리 게임비를 줄여서 받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사장님은 그런 모든 것들을 다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매니저 역시 무서운 북한공작원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런 우리를 모른 척해주었다. 인간미가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었는데 인간적인 면모가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여름이라 밤에 문을 닫고 당구를 칠 때에는 에어컨을 틀 수 없어서 팬티만 입고 큐대를 들었다. 그저 신났다. 뭐 50, 80 하던 때이니까 신날 수밖에 없었다. 오시, 히끼, 우라마시, 오마시 같은 용어가 입에 짝짝 달라붙었다. 큐대를 들고 날리기 전 까지는 머릿속에서 이렇게 공이 굴러가서 딱 맞을 것 같은데 막상 휘두르고 나면 생각과는 다르게 공이 굴러갔다. 그 몇 번의 휘두름으로 생각과 같게 공이 굴러가서 맞는 그 타격감은 엄청났다.


그렇게 공을 치다가 새벽 2시 정도가 되면 당구장 바로 밑 포장마차에 내려가서 소주를 한 잔씩 했다. 여름인데 포장마차 안은 그렇게 덥지 않았다. 에어컨을 틀어 놓은 것도 아니지만 모두가 앉아서 오징어나 문어, 곰장어 구이에 소주를 한 잔씩 하고, 선풍기가 덜덜 돌아갔지만 시원했다. 차가 다니지 않는 도로로 낮에는 사람들로 항상 가득 차고 밤이 되면 포장마차가 일렬로 죽 늘어선다. 그래서 깨끗할 날이 없다. 새벽 4시가 되면 청소부 아저씨들이 열심히 원상태로 되돌려 놓는다. 그리고 곧바로 거리는 쓰레기로 쌓이고 또 새벽에 싹 깨끗해지기를 반복한다. 누구 하나 그런 반복에 신경을 쓴다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일상은 그렇게 되풀이되고 있었다.


당구를 치다가 내려와서 자주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다 보면 재미있는 모습도 많이 본다. 가장 재미있는 건 스님 둘이 앉아서 소주를 마시는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그게 아무 거리낌이 없었는데 스님들이 술에 취해서 곰장어를 더 주문해서 먹으니까 친구가 어? 스님들이 고기를 먹네? 했다. 그러자 스님들 중 한 명이 합장을 하고 우리를 봤고 친구도 합장을 하고 인사를 했다. 친구 녀석 대학교를 여기서 먼 군산으로 가서 학교를 다니다가 느닷없이 배를 타더니, 그러더니 해외에 나가서 물고기를 잡아오는 배를 타고 나가버렸다.


그렇게 한 달 가까이 나는 친구가 일하는 당구장이 문을 닫고 어두워지면 놀러 가서 밤새도록 당구를 쳤다. 청소도 같이 해 주었다. 무엇보다 당구를 치면서 꼭 담배를 피우고 담배를 당구대에 올려놓는 사람이 있다. 담배가 타 들어가면서 당구대에 표시를 남기기도 하는데 그걸 닦아서 없애야 했다. 가장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이 당구대였다. 녹색천을 물에 적셔 박박 닦았다. 물론 화장실을 깨끗하게 하는 것도 관건이었다. 화장실에서 해야 하는 것 이외의 것들을 하는 사람들이 꼭 있으니까. 그리고 누군가를 그걸 치워야 한다. 누군가는.


그날도 사장님이 집으로 들어가고 당구장 불은 꺼지고 친구는 나를 불렀고 나는 당구장으로 출동을 했다. 늘 그렇듯이 우리는 아직 더운 날 때문에 웃통은 벗고 맥주를 홀짝이며 친구는 당구대에 걸터앉아 담배를 입에 물고 멋지게 맛세이를 찍었다. 80으로 올린 지 일주일 밖에 안 된 놈이. 그날따라 친구 한 명이 더 왔다. 맥주캔은 쌓였고 대환장파티가 이어지고 있었다. 시간은 새벽으로 치달아 갔다. 하루 중 최고의 시간이지. 새벽이라는 시간은 모두에게 주어지는 시간이지만 누리는 자는 몇 명 되지 않는다. 그 몇 명 안 되는 사람들 속에 우리가 속했다. 매일 이렇게 멋진 날들이 이어지다니.


새벽 시간은 3시로 향해가고 있었다. 모두가 알딸딸 취했고 바닥에는 맥주캔과 담배꽁초가 널브러져 있었고 엉망진창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사장님이 들어왔다. 우리는 몸에 얼음을 뒤집어쓴 것처럼 그대로 얼어붙었다. 사장님은 이렇게 쓱 한 번 훑어보더니 카운터에서 뭔가를 꺼내서 이런저런 말도 없이 그냥 나가 버렸다. 마치 나왔던 곳으로 시간을 되돌려 그대로 돌아가는 토끼처럼 말이다.


친구와 나는 큰일이 났다고 감지했다. 친구는 분명 당구장을 잘릴 것이고 우리는 그동안 벌여 놓은 것들에 대해서 변명을 해야 할 것이다. 하필 새벽 3시에 올 것이 뭐람. 4시에 왔다면, 아니 5시에 왔다면 바로 청소라도 하고 사장님을 맞을 텐데. 우리는 일단 누가 보지도 않는데 청소부터 했다. 순진했던 것이다. 이 얼마나 순진한 녀석들인가. 그냥 계속 당구나 치고 놀아도 되었을 것을. 우리는 새벽 3시부터 열심히 청소를 하고 또 청소를 하고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며 청소를 했다. 근데 이놈의 청소하다 보니 잠이 왔다.


나는 밀대 자루를 들고 소파에 앉아서 잠이 들었고 친구는 바닥에 대자로 뻗었고 또 다른 녀석도 어딘가에서 자미 들었다. 하필 그 어딘가가 화장실이었다. 그 녀석은 술이 취하면 온갖 화장실에서 잠이 들었다. 그건 유전일까, 아니면 스타일일까. 스타일은 필시 아닐 것이다. 습관, 무의식의 습관. 어린 시절에 어떤 무엇에 의해 화장실에 대해서 깊은 트라우마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 녀석 군대에서 휴가 때 나와서 같이 술을 마시고 보니 사라졌는데 술집의 화장실에서 잠들어 있었는데 그 모습이 쏘우에서 학대당하다가 죽음으로 간 그런 모습처럼 잠들어 있었다. 누군가가 아아악 군인이 죽었어요, 해서 달려가니 그 녀석이었다. 몸에서 찌든 소변냄새가 계속 났다. 젠장 부축해서 왔다. 다른 녀석들도 있었는데 집이 가깝다는 이유였다. 그 녀석과 나는 집이 버스로 40분은 가야 하는 곳인데.


끝나지 않는 교통체증은 없듯이 밤이 지나 아침은 오고 사장님도 출근을 하고 매니저도 출근을 했다. 아침이 되었고 시간이 지나 10시를 지났고 점심으로 달려가는데도 사장님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나는 슬그머니 당구장을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거기 서!]라고 사장님이 분명하고도 똑 부러지는(아마도 노인네 치고는 그렇게 카랑카랑하게 말을 하다니) 말로 나에게 멈춰라고 했다. 사장님은 화장실에서 잠든 녀석은 집으로 가라고 했다. 왜 하필 나야? 나는 너무나 겁이 났다. 집에 알리려고 그러나. 친구와 나는 세상의 슬픔을 전부 짊어진 것처럼 오전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사장님은 우리를 불러 밥집에서 정식을 시켜 주었다. 그리고 먹으라고 했다. 이게 마지막 만찬인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배고프니까 열심히 야무지게 먹었다.


밥을 다 먹고 나니 사장님의 면담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결과는 60초. 사장님은 나에게도 일을 하기를 권했다. 밤새도록 몇 날며칠이나 당구장에서 논 것도 다 알고 있으니 도망칠 생각 마라. 라며 낮에 일을 하라는 것이다. 그동안 낮에도 당구장에 와서 친구의 아르바이트를 도왔다. 친구가 잠이 온다며 방으로 들어가 잠들면 내가 대신 당구장 일을 했는데 사장님이 눈여겨본 모양이다. 나의 능력 중 하나라면 나도 당구가 80인데 나보다 잘 치는 상대방을 만나면 나는 강했다. 그리고 대부분 나보다 강했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당구를 쳤다. 나의 어떤 면모가 사장님의 마음에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날 이후 나는 당당하게 낮부터 당구장을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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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걸 봤어요. 누구나 여기를 지나가죠. 그러나 자신이 이곳을 지나간다는 의식을 하지 않죠. 그건 아마도 너무 당연해서 일 겁니다. 그것이 너무 당연하면 의식은 그 당연함을 의식에서 배제하죠. 매일 다니는 길을 오늘도 지나쳤죠? 근데 기억이 납니까? 아마 기억이 나지 않을 겁니다. 기억이 안 나는 이유는 너무 당연한 곳을 다녔기 때문에 눈여겨 살펴보지도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늘 다니는 길에 어떠한 이벤트가 일어났다면 그 기억은 꽤 오래갈 겁니다. 당연하다고 여기는 곳에서 당연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너무 깊게 생각지 마세요. 깊게 생각해야 하는 일들이 분명 있거든요. 집중과 선택. 우리는 집중과 선택에 있어서 깊게 생각합시다. 신발을 신을 때 오른쪽 발을 먼저 신을까 깊게 생각하면 몸과 마음은 과부하가 올 겁니다. 아시겠지요.



오늘도 비가 오는데요. 일주일 넘게, 체감상으로는 2주 내내 차가운 비가 오고 날이 흐리고 잿빛 하늘이 지속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술가들은 이런 날을 선호한다는데 저는 맑고 밝은 날이 좋습니다. 비가 오는 날은 그리 반갑지 않습니다. 일단 조깅이 어렵습니다. 비가 와도 일단 강변 조깅 코스로 나가는데 비가 오면 러닝화를 바꿔서 신는데 달리기를 포기하고 비막이가 설치된 곳에서 스쾃이나 팔 굽혀 펴기를 합니다. 실컷 저 먼 곳까지 달리고 싶지만 비가 오면 일단 그게 안 된다. 우산을 쓰는 것도 귀찮고, 비는 차가워서 주위의 기온을 앗아간다. 그래서 2월에 내리는 비는 차갑고 날은 춥다. 그런 날이 2주 동안 계속되고 있어요. 결락감이 깊게 드는 날이 이어집니다. 등에 아이가 올라탄 것 같아요. 어떻게 겨울 장마가 이 시기에 올 수 있죠?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드네요.



어느 영화를 보니 죽음이 임박했을 때 노래를 부르더라구요. 나이 들어 죽음을 맞이하는 게 아니었어요. 데이트 상대를 잘못 만나 구타를 당하고 드럼통에 들어가서 땅에 묻혀 죽음을 맞이하며 벌벌 떨다가 노래를 읊조리듯 불렀어요. 근데요, 그게 가능할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죠? 그것을 아는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는 없는 사람일 테니까요. 죽음을 생각하면 일단 겁이 납니다. 죽음이란 태생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죽음을 맞이하는 것에 있어서 겁보다는 뭐랄까 받아들이는 쪽으로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꿈을 꾸면 꼭 죽기 직전까지 가는 꿈을 꿉니다. 칼이 배에 푹 찔리기 직전이나 배에 들어오는 그 순간 잠에서 깹니다. 어떤 날은 불구덩이에 빠지는 찰나에 깨어납니다. 정말 겁이 납니다. 왜 이런 꿈을 꾸는 것일까요.


우울이란 어째서 때때로 저를 괴롭히는 걸까요. 우울이란 원래 없었는데 제약회사가 세계 곳곳에 생김으로 해서 사람들이 먹는 음식에 우울을 겪게 하는 묘한 물질을 넣어 둔 게 아닐까요. 그러니까 제약회사에서 이런 모종의 계획을 현실화한 거지요. 그래서 우울증에 좋은 약을 처방받도록 유도했습니다. 우울함은 사람을 괴롭힙니다. 이거다 싶은데 느닷없이 저거다 싶게 만들어요. 멍하게 있으면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내 머릿속에 들어와 나 대신 생각을 하는 것 같아서 무섭습니다. 내가 생각을 하지만 내가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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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먹던 컵라면 맛이 있다. 설명은 불가능하지만 만약 그 맛을 본다면 대번에 알 수 있을 거야. 그러나 그 맛이 나는 컵라면을 이때까지 못 봤다. 어릴 때 우리 집은 마당이 있고 마루에 앉아서 엄마와 같이 컵라면을 호로록 먹었다. 후레이크와 함께 국물의 맛, 면발의 맛 역시 아는데 막상 적으려고 하거나 말하려고 하면 이상해진다. 전혀 설명을 할 수 없거나 이상한 방향으로 가버린다. 사실 맛을 설명하는 건 나에게는 무리다. 바다 같은 맛, 봄날의 햇살 같은 맛이라고 표현을 가능하나 진정한 맛에 대한 설명은 못한다.

5학년 때 점심 도시락을 컵라면과 함께 먹었는데 담임선생님이 꼭 라면을 뺐어 먹었다. 깐깐하고 마른 여자 선생님이었는데 컵라면에 물을 붓고 다 익어갈 무렵이면 와서 한 젓가락만 먹자고 하고선 반이나 먹는, 미워죽겠는 담임이었다. 학생의 컵라면을 그렇게도 먹고 싶을까 하는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담임은 아랑곳하지 않고 컵라면을 먹을 때면 뺏어 먹었다. 그 담임 선생님은 내가 가지고 있는 장난감도 자기 아이 준다며 몇 개나 들고 갔다. 또 교실의 커튼교체도 아버지에게 부탁해서 일요일에 학교에서 그 작업을 해주었다. 아니 자기 남편을 시키면 되는데 왜 우리 아빠야? 담임 이름도 생상하게 기억이 나서 구글링을 해봤는데 나오지 않았다.

담임이 내 장난감을 달라고 하면 엄마는 또 그냥 줘 버렸다. 나의 허락도 받지 않고 말이다. 그때는 엄마도 담임도 미워 죽을 것만 같았다. 5학년 담임을 생각하면 으 하게 된다. 또 공부를 못하는 나를 방과 후 나머지 공부까지 시켰다. 다른 아이들은 전부 집으로 가는데 나만 남아서 나머지 공부를 했다. 몹시 창피했다. 공부 못하는 아이가 당시에는 부끄러운 일이었다. 담임은 교실에 남아서 일 대 일로 공부를 시켰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 6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학급위원이 되었다. 학급위원은 성적순으로 되는 계급 같은 건데, 와 내가 학급위원이 되다니. 그렇게 공부 못하던 내가 공부 잘하는 아이들 틈에 끼어 뭔가를 하고 있다니. 이름표 밑에 학급위원 이름표가 하나 더 붙음으로 해서 아이들의 선망이 대상이 되었다.

준우에게 장난감 주는 거 싫지? 근데 네가 이해해라. 준우가 아빠가 없어. 6학년이 되었어도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에게도 잘하고, 인사도 잘하고.

인간의 삶이라는 게 겉으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사람들은 알기 쉽게 설명하거나 1 이거나 2라고 자신의 감정을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감정을 숨기거나 에둘러 말하거나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을 하는 게 나쁜 거라고 배웠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사람들이 전부 올바르고 진실만을 말하면 지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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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다니던 교회 앞에 작은 분식집이 있었다. 거기에서 우리는 라면을 주로 사 먹었다. 라면이 아주 맛있었다. 맵지 않고 반찬이 단무지라 마음에 들었다. 그릇은 요즘 다시 유행하는 레트로 녹색 멜라딘 그릇이었다. 맛도 맛이지만 무엇보다 또래들과 앉아서 라면을 먹는 맛이 좋았다. 초등학생 저학년이라 같이 어울려 식당에 가는 것이 어려웠다. 라면도 고들고들하니 좋았고 하하 호호 이야기를 하면서 먹었다. 그러나 분식집에는 오후가 되면 늘 아저씨들이 앉아서 막걸리를 마셨다. 그래서 잘 갈 수 없었다.

교회 지하는 공부를 할 수 있게 도서관처럼 만들어 놨다. 책도 읽고 그럴 수 있다. 나는 책 읽은 기억은 없는데 지하 도서관에는 늘 있었던 기억은 있다. 선생님과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선생님은 대학생이었다. 나는 막 중학생이 되었고 학교에서 먼지처럼 지내는데 교회에서는 어릴 때부터 다녀서 그런지 조금은 편했다. 완전히 편하지는 않았는데 내가 기도할 차례가 오면 그날은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아이들과 비교되는 게 싫었다. 이 기도라는 게 나는 왜 자연스럽게 술술 안 되는 것일까. 이유는 나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게 사실 없었다. 그게 이유다. 그냥 어릴 때부터 다니다 보니 때가 되면 교회에 나갔지 밑음이라든가 기도라든가 이건 나와 먼 이야기였다. 중학생이 되어서 보니 누나형들은 전부 교회에서 연애하느라 바빴다. 도서관에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앉아서 공부를 핑계로 연애를 했다. 집에는 교회 도서관에 간다고 하면 방학에도 의심 없이 부모님은 보내주었다.

[선생님 하느님이 옆에 온 걸 어떻게 아나요?]

나의 질문에 선생님도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아니 답을 해주었는데 내가 듣기에는 그렇게 와닿지는 않았다.

[선생님 저 장 보러 갔다 와야 해요.]

그래서 선생님은 나와 같이 시장에 갔다. 나는 시장에서 부식물을 몇 가지 샀다. 그리고 정육점에 들러 돼지고기를 이런이런 부위를 달라고 해서 구입했다. 선생님은 나에게 돼지고기 부위를 어떻게 그렇게 설명을 잘하느냐고 물었다. 그런 질문을 처음 들어봐서 나는 적절한 대답을 속으로 찾았다. 돼지고기는 구이용, 찌개용, 조림용 뭐 다르니까 식육점 주인에게 달라고 하면 알아서 주는데 내가 부위를 아는 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설명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선생님은 시장에서 장 보는 게 재미있었던 모양이었다. 나에게 여기저기 구경을 하자고 했다. 그래봐야 그저 전통시장이다. 요즘처럼 먹거리가 다양한 것도 아니었지만 시장은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그러나 중학생에게는 빨리 장 봐서 가고 싶은 곳이었다. 그날 교회에 돌아와서 선생님하고 컵라면을 먹었다. 육개장사발면을 먹었는데 맛있었다. 그날이 생각나는 게 오후의 어스름 햇살이 교회의 두꺼운 유리에 부딪혀 아스라이 들어오는 장면. 그 빛을 보면서 컵라면을 들고 앉아서 먹었던 기억. 선생님이 교회에 자주 나오는 것도 나는 안다. 좋아하는 오빠가 청년부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오빠는 선생님보다는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 안타까운 마음을 간직한 채 오빠를 보기 위해서 교회에 자주 나오는 것이다. 누구도 교회에 오는 것을 나무라지 않는다. 교회는 그런 곳이니까.

선생님 하느님도 컵라면 맛을 알까요?라고 묻지는 않았지만 아마 위대한 하느님이니까 컵라면 따위는 먹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이 아니니까 컵라면에 행복해하며 맛있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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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둘이서 매점에서 컵라면을 사 먹었다. 특히 토요일에는 늘 컵라면을 먹고 집으로 갔다. 토요일에 수업이 일찍 끝나면 매점에 달려가서 컵라면과 도넛을 먹었다. 매점표 도넛인데, 그냥 도넛만 먹으면 맛이 별론데 컵라면과 같이 먹으면 이상하게 꿀맛이었다. 매점 옆에 레슬링부가 있었다. 아이들이 별로 없을 때 매점에 가다가 레슬링부에게 걸리면 돈을 빼앗기기도 했다. 우리도 몇 번 걸렸는데 같은 1학년이라 그런지 라면을 먹고 있을 때에는 기다리다가 레슬링부 선배들이 부르면 돈을 결국 빼앗지 못하고 가버렸다. 그때야 레슬링부가 무시무시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중학생인 것이다.

중학교 때 음악 선생님이 생각난다. 무슨 여자 기숙사 사감 같은 모습으로 늘 검은 원피스 같은 옷만 입었다. 한 반의 담임을 맡고 있었는데 치맛바람이 심한 때여서 물욕에 먹혀 버린 음악 선생님이었다. 뭔가를 받아먹은 아이에게는 아주 잘 대해주고 그렇지 않은 아이에게는 가차 없었다. 차별이 심해서 오히려 상대하기 쉬운 음악 선생님. 음악 선생님이 아주 싫어하는 아이 중에 내가 껴있었다. 음악시간에 노래 부르는 시간이 있는데 나는 노래도 시키지 않았다. 그렇게 앉아있다가 음악시간이 지나가 버린 경우가 꽤 있었다.

미술 선생님은 갓 부임해 온 신입이라 그런지 아무것도 받지 않아도 차별 없이 아이들을 대했다. 미술 선생님은 나를 좋아해 주었다. 나는 어쩌다가 미술은 성적이 늘 좋았다. 그림도 곧잘 그렸다. 다른 아이들이 집의 방을 네모로 그렸을 때 나는 타원형으로 그렸다. 그것도 약간 투시도 형식으로 그렸다. 나는 상상력이 그렇게 없는데 미술 선생님은 나의 상상력을 칭찬했다. 신나는 일이었지. 학교 가는 게 좋았다. 그럴 수 없는데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런데 미술숙제로 한 번은 도형을 그리는 걸 내주었는데 친구 누나가 와서 내가 그려줄게 하더니, 설마 했는데 친구 누나의 도형은 수준이 달랐다. 나는 그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알고 보니 친구 누나는 미대생이었다. 나는 너무 고민을 했다. 친구 누나가 그려준 도형을 내고 싶지만 너무 수준차이가 날 것이다. 미술선생님이 눈치챌 것이다. 내가 새로 그리려고 했지만 시간이 너무 없었다. 결국 유혹에 넘어가서 누나가 그려준 그림을 숙제로 냈는데 그 뒤로 미묘하지만 미술선생님은 나를 대하는 게 달라진 것 같았다.

중학교 때는 먼지 같아서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다. 그래서 친구 한 명과 주로 매점에서 컵라면을 먹거나 혼자서 컵라면을 먹었다. 이름도 기억나는 그 녀석은 나와는 다르게 공부를 아주 잘했다. 학교에서 같이 놀기는 했지만 나에게 미미하게 낙오와 실패가 붙어 있어서 그 녀석과 깊게 같이 놀지는 못했다. 중학생의 나는 공부도 못하고 운동도 못하고 늘 라디오나 듣고 컵라면이나 먹는 먼지 같은 애였다. 어서 빨리 중학교를 벗어나자 그런 생각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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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시립도서관에 가끔 갔는데 시립도서관의 매점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시립도서관까지 가서 공부하기 싫었는데 중학교 3학년에 두 명과 친해지게 되었는데 얘네들은 꼭 시립도서관에 가기를 바랐다. 공부를 하다가 매점에 가서 컵라면을 먹었다. 학교 매점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사람들이 많았다. 다른 학교 학생들, 여고생들, 대학생, 직장인들이 있었다. 다들 컵라면을 먹었다. 컵라면은 도서관을 찾는 사람들의 소울푸드였다. 국수도 팔고, 우동도 말아서 팔았는데 컵라면을 압도적으로 많이 사 먹었다.

시립도서관은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주말에 가곤 했다. 걸어서 가면 대략 한 시간 정도 걸렸다. 가는 길이 재미있었다. 가는 길목에 초등학교가 세 군데나 있어서 문방구가 많았다. 문방구는 앞에 이것저것 유혹하는 것들이 많아서 구경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불량식품도 많았지만 닭발도 팔았다. 애들이 전부 닭발을 입에 물고 다녔다. 하지만 어린이들이 먹기에는 매웠다. 그러나 아이들이 전부 입에 닭발을 물고 문방구에서 놀았다.

가는 도중에 문방구에 가는 기억을 하다 보면 그날 잠에 잠이 들면 꿈에 그런 꿈을 꿨다. 꿈속에서도 그 거리와 문방구들이 나오는 게 신기했다. 고등학교 때 어느 주말에 시립도서관에서 초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이름은 상희. 살이 쪄서 나는 그 애를 알아보지 못했는데 상희가 나를 아는 체했다. 초등학교 때와는 너무나 달리진 모습이었다. 외모도 외모지만 성격이나 말투가 그 어릴 때보다 뭔가 조급하고 전투적으로 바뀌었다. 누군가 시비를 걸면 바로 달려 나갈 그런 모습이었다.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상희는 꽃처럼 조용하고 예쁜 옷을 입는 그런 아이로 기억이 났는데. 사람에 대한 기억이 깨진다는 건 그렇게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상희는 중학교를 거치면서 공부보다는 그 외의 것에 관심을 더 많이 가졌다고 했다. 요컨대 일진이라든가 노는 언니라든가. 그렇게 보였다. 도서관에는 올 것 같지 않았는데 친구를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냥 들어왔다고 했다. 도서관 매점 앞 야외 벤치가 운치가 있고 쉬기에 괜찮았다. 나는 공부도 하지 않으면서 도서관에 왔으니 상희나 나나 거기서 거기였다. 우리는 앉아서 추억에 젖어 초등학교 때 이야기를 했다. 추억을 나누는 건 왜 그런지 재미있다.

너 예전에 그랬잖아, 하하 호호.

추억은 웃음을 짓게 한다. 우리는 두 시간이나 이야기를 하다가 허기가 져 매점에서 컵라면을 먹었다. 하하 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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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 후 피시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밤새도록 했는데 크게 바쁘지는 않았다. 잠이 오면 작은 방에서 잠도 잘 수 있고 새벽에 문 열 때 목욕탕에 제일 처음으로 깨끗한 탕에 몸도 담글 수 있었다. 대학교 앞이라 대학생들이 많이 왔는데 디자인과 학생들이 어쩌다가 꽤 왔다. 그때 친하게 지내던 녀석이 늘 술을 마시고 밤에 정액권으로 게임을 했는데 새벽 한 시 정도 넘으면 주로 앉아서 꾸벅꾸벅 졸았다. 그 녀석은 술이 취해서 오면 컵라면을 먹는데 두 번이나 찬 물을 부어서 앉아서 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는 녀석이었다. 다시 뜨거운 물을 받아서 주고 찬물을 부은 컵라면은 들고 와서 버리려다 아까워서 젓가락으로만 들고 한 입 깨물어 먹었다. 근데 이게 맛이 없어야 할 텐데 또 아작아작 먹다 보니 나름 맛있는 거다. 그래서 찬물에 불은 컵라면을 두 번이나 먹었다. 그 뒤로는 아직 찬물에 컵라면을 부어서 먹을 일은 없지만 컵라면이라는 게 아무튼 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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