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 나서 시간이 조금 흐르면 영화의 끝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영화를 필요 이상으로 너무 많이 봐서 그런 건지 아니면 뇌의 어떤 구간이 끝이라는 걸 애써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인지. 어제도 영화를 두 편 봤는데 역시 하루가 지나니 끝이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끝은 늘 그렇다.


꿈을 꿨는데 나의 꿈은 정말 뒤죽박죽 초현실이다. 그래서 꿈을 꾸고 나면 꿈을 잊어버리기 전에 메모를 해 놓는다. 잠이 까무룩 공격을 해도 꿈의 정경을 메모를 한다. 그래야 꿈 전체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꿈이라는 건 신나게 꾸고 나면 끝은 고사하고 무슨 꿈을 꿨는지, 내용이 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꿈을 꿨다는 기억만 있다. 그래서 초현실 꿈을 꾸면 메모를 해 둔다. 으 하는 얼굴로 미친놈처럼.


아니 그런 꿈 따위 기억이 안 나면 어때?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메모를 해 놓으면 현실에서도 꼭 꿈속에 있는 것 같은 기이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게 꼭 좋은 것은 아니나 나쁘지는 않다. 왜냐하면 초현실이니까. 좋다고만 할 수 없는 이유는 꿈속에서도 불안에 떨고 있거나 무서운 것들이 주위에 도사리고 있어서 이다.


[꿈의 내용]

어제는 나를 잘 안다는 사람이 나를 횟집으로 데리고 갔다. 가면서 나에게 자신의 아내와 신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이 사람을 모르는데 왜 따라갈까, 생각을 했지만 그것도 잠시, 곧 횟집에 들어갔다. 횟집인데 횟집 같지 않고 여느 선술집 같았다. 그 사람은 여기의 술집을 잘 아는 사람 같았다. 직원이 구십 도로 인사를 하고 우리를 한 테이블로 안내를 했다. 뒤돌아 보니 직원은 계속 구십 도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했고 직원은 구십 도로 꺾인 몸으로 나를 안내했다.


안내를 받고 따라가니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나서 이 복도를 타고 가라고 했다. 또 다른 사람은 직원 복장은 아니었다. 복도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앞니가 입 밖으로 튀어나와있고 머리는 아주 짧은 스포츠형에 눈의 초점이 없었다. 예를 들자면 영화 '잭 더 자이언트 킬러'에 나오는 못생긴 거인이나, 영화 '베오울프'에 나오는 그렌델을 닮았다.


나는 복도를 따라 끝까지 갔다. 복도의 끝에는 문이 달려 있고 그 문을 여니 또 다른 횟집(이건 진짜 바닷가에 붙어 있는 횟집 같은 횟집) 같은데 계단을 타고 내려가서 화장실에 가야 했다. 그런데 계단이 동남아 지역의 계단식 논처럼 타원형에 밑으로 한 없이 내려가야 했다. 계단을 내려 내려가니 횟집의 바닥이 나왔는데 화장실은 계단의 중간에 있었다. 그래서 다시 계단을 오르려 하니 내려올 때는 몰랐지만 오를 때는 말 그대로 올라야 했다. 낑낑 거리며 벽을 타듯이 계단을 올라야 이동이 가능했다.


다시 계단을 올라 중간에서 빠져야 화장실로 갈 수 있다. 거기서 화장실용 실내화를 신어야 하는데 신발이 가오리처럼 아주 컸다. 한쪽 신발에 두 발을 다 집어넣어도 될 것 같았다. 가오리 실내화를 신호 기우뚱 거리며 화장실에 가니 소변기가 3개가 있는데 2개는 망가져 있고 하나만 제대로 있었다. 제대로 된 소변기 앞에는 이빨이 사람 같은 개가 변기를 핥고 똥 같은 것을 먹고 있었다.


꿈 해석가님들, 저는 꿈을 꾸면 화장실이 압도적으로 많이 나옵니다. 저의 삶이 더러워서 그런 겁니까. 화장실도 집에서처럼 깨끗한 변기가 아니라 아주 더럽고 움직일 수도 없을 정도로 재래식 화장실에서 무서워 벌벌 떨고 있다가 결국 똥통에 빠지기도 합니다.


나는 할 수 없이 고장 난 두 개의 소변기 중에 하나의 소변기에 오줌을 누려했다. 그런데 소변기가 아예 박살이 나고 시멘트 벽에 소변기가 박혔던 흔적에 소변을 보려 하는데 사람 이빨을 가진 개가 와서 나의 다리를 핥았다. 그 순간 등으로 더럽다는 느낌이 척추를 타고 뇌를 건드렸다. 개는 온몸이 하얀 털을 가졌는데 이빨은 사람 이빨이고 입 주위에는 똥을 먹은 표가 났다. 그리고 화장실에는 또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아주 더러웠는데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묻고 사람 이빨의 개와 그 사람과 함께 사진을 찍고 화장실을 나왔다.


그래서 끝은 어떻게 됐냐고 하면 모른다. 메모를 하다가 잠이 다 달아나버려서 그냥 일어났다. 꿈이라는 게 늘 이런 식이다. 그 시간이 한 6시 30분쯤 된다. 잠은 안 오지만 머리는 몽롱하고 아직 실제로 생리적 현상이 나오는 시간은 아니고, 이렇게 일어나면 애매하다. 예전에는 바닷가에 맥도널드가 24 시간 해서 일찍 일어나면 거기에 가서 커피를 홀짝이며 맥모닝 같은 걸 먹으며 책을 좀 읽고 있으면 사람들이 하나둘 출근을 하고 학교를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버지의 마지막도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마지막을 지켜봤는데, 그래서 그 마지막의 장면을 컴퓨터에 길게 기록을 해 놨는데, 그런데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 세상에 없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왜 그렇게 많이 하냐고 하는데 그렇게 많이 하지 않으며, 또 내 아버지는 너무 하찮아서 나 정도가 이렇게 언급을 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기억하지 않기 때문에 왕왕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하루키도 70이 되도록 언급을 하지 않았던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2019년 문예지 문예춘추 6월호를 통해 꺼냈다. 제목은 ‘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이며 후에 한국에는 단편집으로 출간이 되었다. 나는 코로나가 덮치기 전, 한국 출간이 되기 전 하루키의 신작 에세이가 실린 이 문예지를 구입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서 달랑 이 책 한 권을 사들고 왔다. 그러고 나서 세상에 코로나가 도래했다. 하루키라는 대작가도 아버지를 잊지 않기 위해 어딘가에 자신의 아버지를 언급한다.

 

이 세상의 어떤 유명한 사람, 지도자, 대작가, 배우, 예술가. 세상을 호령했던 자들도 일단 달의 뒤편으로 가고 나면 누구도 애써 기억하려 들지 않는다.

나는 일어를 전혀 읽을 줄 모른다


나와 아버지는 그렇게 좋은 관계도, 그렇다고 안 좋은 관계도 아니었다. 어릴 때 목욕탕에 같이 가던 사이에서 후에 혼자 가게 되면서 사이는 보통의 서먹한 부자지간이 되었다. 누군가 먼저 다가가려 하지도 않았고 으레 그것이 마땅한 것처럼 지냈다.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걸 아버지와 나는 알아서 그랬는지 필요 이상의 말이나 친한 척은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나는 나로서 지냈다. 서로의 영역에 침범하거나 더 멀리 떨어지지 않고 그저 관조하거나 안부를 묻거나.

 


조깅을 하고 오는 길에 이제 잘 볼 수 없는 오래전에 지어진 집과 여인숙과 슈퍼를 봤다. 메타버스 시대에 언제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들이다. 시작은 있지만 언젠가 끝을 맞이하게 되면 그 끝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철거되기 전에 주민은 이곳을 떠날 것이고, 철거를 하는 사람들은 늘 하는 일상이라 특별히 이곳의 끝을 기억하거나 기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끝은 기억에서 배제된다.


매년 반복되는 가을이지만 올해 가을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래서 올해의 가을 끝을 기억하는 사람도 어쩌면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내년에 다시 가을이 오기 때문에 지나간, 그간의 가을의 끝은 그대로 기억에서 사라진다.


얼마 전에 넷플 지옥을 봤다. 연상호의 ‘사이비’를 볼 때가 떠올랐다. 그때 상영관에서 3일인가 상영을 했고 이른 오전과 오밤중이거나 마지막에 영화를 틀어줬다. 마지막 상영을 봤는데 보는 사람은 우리 둘 뿐이었다. 사이비라는 영화를 보면 지옥이 정말 무엇인지, 그 세계관에 대해서 조금 알 수 있다.


지옥 시리즈도 그 속을 살짝 벌리면 그 지옥이 어떤 것을 말하는지 보인다. 내가 구치소에서 근무를 할 때 재소자(죄수)들의 접견(면회)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듣던 소리가 “우리 애는 죄가 없어요, 다 친구를 잘못 만난 겁니다”라는 말이었다.

 

“원래 그런 애가 아니에요, 너무 착해서 그래요”가 결국 죄를 짓고 구치소를 거쳐 교도소로 가기도 한다. 그리고 제대로 그에 타당한 죗값을 받지도 않고 출소되기도 하고, 또 엇비슷한 죄를 짓기도 한다. 죄는 유전자처럼 사람에게 옮겨 붙어 계속 반복하기를 바란다.


아이러니하지만 죄를 짓고 잡혀야 보호를 받을 수 있다. 편하게 잠들 수 있고 밥도 맛있게 잘 먹을 수 있다. 피해자 가족들이 돈을 들여 사람을 사서 가해자를 괴롭힐 수 없고, 아무래도 구치소는 안전한 곳이니까.


모두가 구치소, 교도소, 그곳이 지옥이라고 하지만 그곳은 사실 아주 평온하고 고요하게 흘러간다. 밥도 맛있고, 누구든 들어오면 규칙적인 생활로 인해 살도 찐다. 그래야 교정 시절의 인식이 좋기 때문이다. 진짜 지옥은 구치소 밖이다. 이 세상이, 이 현실이 지옥인 것이다.


밖에서는 자존심 뭉개지며 하하 호호 웃으며 사회생활을 하고 늦은 밤 파김치가 되어서 집에 들어와 잠자는 아이의 얼굴을 보며 눈물을 떨구며 이를 악물고 살아가야 하는 이곳이 지옥인 것이다.


넷플 지옥을 보면서 감독은 형태가 모호한 이 사회에 대한 불만을 등장인물의 대사를 통해 전부 쏟아낸 것 같았다.


친구가 근래에 억울한 일을 당해서 약을 먹으며 겨우 잠을 청하고 있다. 친구는 보스턴에 있다가 요리를 잘해서 자신의 키친을 가지고 열심히 일을 했다. 한국으로 와서 자신의 샵을 차리고 사람들에게 쉽게 요리를 해서 맛있게 먹는 것도 알려줬다. 준비해서 출간한 책은 굉장히 인기가 좋다. 인스타그램의 팔로워도 십만 명이 넘었다. 조금 푼수 끼는 있지만 그래서 사람들이 더 좋아한다. 그런데 얼마 전에 건물주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었다. 서류상으로,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세를 밀린 것도 아니고 계약기간이 2022년까지인데 강제집행 서류가 나와서 당연하게도 법원에 정지를 신청했지만 기각이 나왔다. 황당하게도 이유가 없음이었다. 너무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곧 대법원으로 가고 변호사까지 선임을 했다. 변호사도 너무 이상한 일이라 고심을 하는 것 같았다. 건물주 여자는 부동산업자로 이런 쪽으로 아무래도 잘 아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친구는 어제 잡지사와 인터뷰까지 했다. 거기서는 헤헤 호호하며 해야 하는데 너무 힘든 것이다. 소모하지 말아야 할 일에 에너지를 쏟아붓고 매일 지옥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왜 법은 억울한 사람을 자꾸 나타나게 만드는 것일까. 내년 오늘이 되면 작년 오늘을 웃으며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아이가 없어서 부모 마음은 잘 알 수 없지만 아이에 대한 사건사고의 법 처벌은 늘 사람들과 수직적이다. 정인이 양모 감형에 대한 7가지 이유를 봐도 그렇지만 법은 우리를 지켜준다기보다 억울한 사람을 자꾸 양산해낸다. 힘이 없고 세상의 약자는 법에 의해 보호를 받아야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런 곳이 지옥인 것이다.  


끝은 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영화는 정말 끝이 어떻게 끝났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꿈도 그렇다. 꿈은 끝이라는 게 너무 모호하고 힘들다. 처음이 있으면 끝이 있을 테니까 우리의 인생도 끝이 있을 것이다. 있겠지.









저 안에서 치킨에 맥주를 홀짝홀짝하면 참 맛있겠다.


가을의 색은 아름답지



너도 이제 겨울을 견뎌야 하겠구나


오전에 걷기 좋은 날이다


여기는 어디일까. 우리는 매일 어디로 가는 걸까. 매일매일 이동하는데 도대체 끝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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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12-03 1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래 전 비슷한 꿈을 반복해서 꿨던 적이 있죠.
저는 그게 해소되지 못한 욕구불만이 있어서는 아닐까 싶기도 해요.
생각도 많고. 또 젊었을 땐 잠을 엄청 많이 자게 되죠.
잠과 꿈은 아무래도 비례하는 것 같습니다.
근데 지금은 꿈을 거의 안 꿔요. 안 꾼다기 보다 거의 잊어버리는 거겠죠.
그러니까 화장실 꿈도 거의 안 꾸죠.
잠도 줄어서 꿈 꿀 새도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나이 드니까 그건 좋더라구요.
전엔 꿈을 너무 많이 꿔서 자고 일어나도 개운하지 않을 때도 있었거든요.
쓰고 보니 나이 엄청 많은 거 같죠? 뭐 적지는 않습니다.ㅋㅋㅋ

근데 잡지 사러 일본까지 갔다 오시고.
하루키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맨 밑의 사진은 비틀즈의 그 문제의 앨범 자켓을 패러디...?ㅋㅋ

교관 2021-12-04 11:47   좋아요 1 | URL
저도 꿈을 많이 꿔서 더 피곤한 것 같아요 ㅋㅋㅋ 어제도 5시간 잤는데 꿈 속은 평소에 보지 못하던 인간들이 나타나서 벽짚고 난리 옆차기를 하는 등 꿈 속도 만만찮습니다.

중학교 때 우연찮게 하루키 놀웨이숲을 읽고서는 그만, 발을 빼기가 이젠 어려워졌습니다 ㅠ
 

개좆 같다, 는 말은 표준어다. 우리는 흔히 표준어를 써야 한다고 배운다. 그래서 욕을 할 때에도 이렇게 표준어를 구사하면 표준어가 아닌, 우리가 하위 언어로 인정하는 욕보다 괜찮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개좆 같다. 의 해석도 찰지다. 어떤 대상이나 상황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발음도 표준어니까 표기를 잘해놨다.


개:졷깓따


그래서 상대방이 몹시 마음에 안 들면 개좆 같다,라고 하면 된다. 그리고 몹쓸 짓거리를 하는 상대방이 나보다 나이가 많으면 개좆 같네요.라고 하면 된다. 야, 너는 나보다 나이도 어린 게 얻다 대고 욕질이야,라고 한다면 친절하게 개좆 같다는 말입니다, 표준어거든요, 그러니 당신이 이런 식으로 상식 이하의 짓을 했을 때에는 해도 됩니다.


사전을 보면 괄호 안에 (속되게)라고 되어있다. 속되다, 라는 말은 ‘고상하지 못하고 천하다’라는 말로 욕을 할 때에는 표준어지만 고상 한 건 때려 부숴 버리고 천하게 하는 것이다. 뭐랄까 피자를 먹으며 건강을 생각하지 말자는 말이다. 피자를 먹으면서 왜 몸에 좋은 피자를 찾아? 피자는 짜고, 두툼하고, 끈적끈적한 그 맛, 그 맛으로 먹는데 피자를 먹을 때에는 건강을 버리고 그냥 맛있게 먹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방이 나타났을 때 욕을 할 때에는 표준어인 이 ‘개좆 같다’를 하라고 할 수 있느냐 하면 그게 쉬운 문제가 아니다. 어린이들이 다니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이, 정말 개좆 같네”라고 너도나도 하고 다니면 낭패인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삶이라는 게 이미 만만찮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어린이라고 왜 욕을 하고 싶지 않을까. 억울한 일을 당하면, 친구를 빼앗기면, 누명을 쓰면 욕이 나오지만 어린이라서 그동안 잘도 참고 있다. 어른들은 여기저기서 욕을 똥처럼 싸질러 대면서 아이들에게는 욕을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럼 아이들은 표준어라도 욕을 하지 않는다. 욕이 아무리 하고 싶어도 꾹 참는다. 잘 참는다. 아이들은 제일 먼저 배우는 게 참는 것이다. 어른들은 늘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라고 할 뿐이다. 아이들은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 부모님, 내 형제를 위해서 참는다. 그런데 어른들은 자신을 위해서 참지 않는다. 어른들에게 표준어를 써야 한다고 배운 아이가 이렇게 ‘개좆 같다’를 들고 와서 보여주며 이거 표준언데 왜 쓰면 안 돼요?라고 말한다면 그저 욕이니까 하면 안 된다고 해야 할까. 어렵다. 어려운 문제다. 인생은 이렇게 어렵다.


어린이가 욕을 하면 어른들은 저 아이는 큰일이 난 아이처럼 여긴다. 하지만 어린이 때 욕을 찰지게 한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 이상하게 변해버린 사람이 있냐고 하면 딱히 없다. 그래도 어른들은 아이들 앞에서 욕을 하지 않는다. 아니, 하지 않으려 한다. 어른들이 본보기가 되면 되니까. 그러나 아이들이 친구들에게 들은 욕을 집에서 내뱉기도 한다. 그러면 그 쌍스러운 말을 처음 듣게 된 어른들은 큰일이 난 것이다. 그때부터 머리의 회로가 바빠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보통 입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생존을 바라는 게 아니라 삶을 바란다. 하지만 어느 순간 보면 하루하루를 생존하고 있다. 인간의 삶이라는 게 늘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계획 따위 백날 잡아봐야 계획처럼 되지 않는다. 펜싱 해설위원이 한 말이 있는데 “생각이 길면 용기는 사라지는 법, 걱정할수록 부정적인 생각만 쌓이고 할 수 있는 일도 제대로 못하게 된다. 완벽한 계획 따위 없고 무슨 일이든 하면서 완성되는 법이다. 돈 벌고 싶고 부자가 되고 싶으면 행동하는 것이 제1 과제다. 학습된 무능에서 벗어나라. 스스로 한계를 만들지 마라.”였다. 무슨 일이든 하면서 완성되는 법이다. 우리는 그걸 잘 알고 있다.


매일 울고 싶고 욕하고 싶으면 하면 된다. 개좆 같은 세상인데 개좆 같다고 말하면 된다. 그렇게 욕을 한다고 누가 욕을 할까. 인간관계가 힘들고 복잡한 이유는 단순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스스로 한계를 만들어서 타인의 눈치를 보며 자정작용을 거쳐 검열을 해서 말하고 행동한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어떤 대상을 향해 개좆 같다고 말하면 된다.

개새끼도 표준어다. 주로 남자에게 이른다고 되어 있다. 나는 개들과 인연이 좀 있다. 유기견을 데리고 와서 키울 때 동물 병원에서 일 년도 살지 못한다고 했다. 이전 주인이 그랬는지 가위나 칼로 혀를 좀 잘라놨고 뒷다리가 꼬여서 매일 주물러 주지 않으면 잘 걷지 못했다. 무엇보다 심장이 너무 안 좋아서 데리고 왔을 당시에 동물병원에서 일 년을 못 살 거라고 했다. 집에는 또 이미 오래된 유기견 한 마리가 있었다.


사진을 찍어 전단지를 만들어 동사무소와 근처 동물병원에 뿌리고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는데 3개월인가 4개월인가, 기다려도 주인이 나타나지 않아서 그냥 죽기 전까지 일 년이라도 키우자 해서 그냥 키우게 되었다. 그 뒤로 11년 정도를 살다가 얼마 전에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이 녀석은 내가 집에 오면 그렇게 품에 파고들었다. 내가 앉으면 다리 위에 앉아버렸다. 조카가 어렸을 적에는 내 양반다리로 두 녀석이 서로 앉으려 했다.


다리 위에 기어 올라와 앉으면 그 뒤로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피곤해 죽겠는데 집에 오면 개 두 마리가 자석처럼 달라붙었다.


이렇게 무릎 위에서 잠든 작고 부드러운 생명체를 어루만지고 있으니까, 우리 집으로 온 주인 잃은 강아지가 나를 완전히 신뢰한다는 듯 깊이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까 가슴이 뜨거워졌다. 나는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고 가슴에 손을 대고 심장의 박동을 느꼈다. 작은 강아지의 심장은 희미하면서도 빨리 뛰었다. 나 또한 강아지를 안고 심장이 뛰고 있었다. 우리는 자신의 몸에 맞춰 쉬지 않고 진지하게 뛰는 심장의 시간을 나누고 있었다.


강아지는 꼭 어떤 것을 발견하려는 듯 깊이깊이 잠들어 있었다. 저 바닷가에서 울리는 것 같은 고요한 숨소리를 내며 배가 그에 맞추어 아래위로 조용히 움직였다. 나는 이따금 내게로 온 신비한 생명체가 거기에 있다는 걸 확인하게 위해 손을 뻗어 그 따스한 몸을 만졌다. 하루키의 소설 ‘태엽 감는 새’에도 나오지만, 손을 뻗으면 무엇인가가 만져지고, 그 무엇인가의 따스함이 느껴지는 것, 그것은 멋있는 일이었다. 오늘 문득, 나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상당히 오랫동안 그런 감촉을 상실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표준어인 개새끼도 이런 감촉을, 개에 대해서 이런 감촉을 알고 있는 사람이 썼으면 좋겠다. 작고, 힘없고, 세상의 약자인 아이들에게 신뢰를 받고 있다고 느낀 어른들이 그래서 개좆 같은 세상에서 개좆 같다고 말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지 못한 어른들이 훨씬 많은 이 세상에서 아이들에게 받은 그런 감촉을 알고 있는 어른들이 시원하게 욕을 할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참 좋겠는데 말이야.


고요한 시선 대치 중, 폭풍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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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12-02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11년을...!
정말 그 개는 복을 누렸네요.
개에게 그런 상처를 입히고 안 찾는 걸 보면 버린 거죠.
정말 누군지 개새끼란 욕도 아깝네요.
얼마 전에 무지개다리를 건넜다니 많이 보고 싶으시겠어요.
저는 지난 여름에 18년간 키운 다롱이(요크셔 숫컷)을 보냈습니다.
한 한 달 넘게 밤마다 울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살만큼 살다갔으니 아쉬울 건 없는데 문득 생각이나요.
허전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또 키우자니 그렇고...
애매한 상황이죠.ㅋ

교관 2021-12-03 11:57   좋아요 1 | URL
저 두 마리 다 유기견이었어요. 하얀개도 18년 동안 잘 지내다 갔어요. 잘 지냈다고 믿고 싶어요 ㅋㅋ. 개는 주인에게 마음을 한 번 주고 나면 인간처럼 밀고 당기고를 하지 않으니까, 온통 주인에게로 눈과 마음이 가 있어서 개 입장에서는 잘 모르겠지만 ㅋㅋ 잘 지냈으리라 믿고 싶어요. 동물의 영역에서 빠져나와서 인간의 곁으로 왔지만, 그렇닥고 인간이 되지는 못하고 주인만 있으면 행복충만하지만 그렇다고 24시간 붙어 있을 수는 없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딱한 동물이 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카스테라,라고 쓰면 카스텔라,라고 바꾸라고 나온다. 나는 카스테라다. 카스텔라는 싫다. 나처럼 소심한 사람이 '싫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카스테라는 카스텔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카스테라가 나의 삶에 부드럽고 뻑뻑하게 들어왔지 카스텔라는 머나먼 나라의 금발의 미네르바처럼 생소하기만 하다.


카스테라를 처음 맛본 그날, 그날이 확실하게 기억이 나진 않지만 대단한 일이었다고 기억된다. 카스테라가 가진 그 촉촉한 감촉이라든가 입천장에 달라붙는 느낌이라든가. 왠지 처음에는 텁텁해서 우유와 궁합이 잘 맞다, 라든가.


카스테라를 처음 먹어보기 전의 빵에서 봐왔던 모양에서 벗어난 사각형의 모양에 어린 마음을 몽땅 빼앗겨버렸다. 그동안 카스테라를 모르고 잘도 어린 삶을 헤쳐 왔는지 모를 정도였다. 처음으로 카스테라를 맛 본 그날 루벤스의 그림이 머리 위에 떠오르고 어린 나의 작은 혼이 뭉크의 그림처럼 빠져나갔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지만 그 못지않은 경험이었다.


카스테라라는 이름도 그때 처음 들어서 생소했지만 어느샌가 입으로 카스테라, 카스테라,라고 되네 이다 보면 어느 순간 친구처럼 가까이 와 있었다. 묘한데 자꾸 말하게 되는 미지의 친구 이름 같았다. 이후로 집 앞 구멍가게에 가면 카스테라를 슬쩍 집어 들고 동전을 내밀고 볕이 드는 따뜻한 대문 밑에 앉아서 그것을 제대로 뜯어먹곤 했다.


카스테라는 어쩐지 겨울에 많이 먹었다. 그늘이 아닌 따뜻한 곳에 앉아서 뜯어서 먹고 있노라면 추운 겨울이라도 왠지 따뜻했다. 집에서 먹는다면 우유를 뜨겁게 난로 위에 데워서 같이 먹었다. 그러면 카스테라는 ‘겨울은 말이야, 카스테라와 함께 보낸다면 따뜻할 거야’ 하고 말해주었다. 그 보이지 않는 말에 기대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카스테라는 기억 속에서 점점 멀어지듯이 곁에서 사라졌다. 지금은 손만 뻗으면 카스테라보다 열 배는 맛있고 백배는 예쁜 카스텔라가 세계를 점령했다. 이후로 겨울은 그렇게 따뜻하지 않았다. 덥덥하거나 춥거나. 그런 겨울이었다. 그래서 겨울은 더 이상 기다리는 계절이 아니게 되었다.


겨울을 싫어한다고 해서 마음으로 밀어낸다고 해서 뒤늦게 온다든가, 오지 않거나 하지 않는다. 겨울은 낙엽 지고 비가 오고 나면 어김없이 입에서 입김이 후후 나오면서 옆에 와 있다.


크리스마스가 20여 일 앞으로 다가온 겨울의 밤은 어느 곳이나 반짝반짝 전구와 트리가 빛을 발한다. 언제부터인지 그 반짝거리는 불빛들 앞을 지나칠 때면 빛나는 전구들은 조금은 무서운 얼굴을 하고 ‘넌 행복하니? 그래서 넌 만족하냐? 네가 있는 곳은 어디냐?’라고 자꾸 물어온다. 그 대면이 껄끄러워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반짝이는 전구를 피해서 다녔다.


카스테라 같은 여자가 있었다. 부드럽고 가만히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 부서져 없어져버릴 것 같은 여자. 그녀는 느릿하게 움직이는 나를 달리게 만들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언젠가 그녀의 긴 속눈썹을 본 적이 있다. 달빛이 긴 속눈썹에 내려앉았을 때를 기억한다. 아름다운 모습.


세계는 묘해서 눈앞에 있는 것에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어서 빨리 그녀에게서 졸업하고 싶었다. 카스테라와 같은 그녀는 멀리 떠나가 버렸다.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 것이다. 예고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겨울비에 카스테라는 구멍이 나고 씻겨 비 비린내와 함께 없어졌다.


그녀에게서 졸업을 해버리고 나면 그동안 그녀를 좋아하고, 너무 좋아해서 미워했던 그 마음까지 모두 거짓말이 될까 봐 두려웠다. 가끔 생각한다. 요즘은 카스테라가 어디에 있을까. 다시 카스테라를 손에 움켜쥘 수 있을까. 입으로 다시 카스테라, 카스테라라고 한 없이 불러보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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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12-01 14: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맞아요. 예전엔 카스테라라고 했는데 어느 때부턴가 카스텔라라고 하는데
뭔지 모르게 불만스럽더군요.
요즘엔 그거 먹을 일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특별히 좋아하지 않아서.
그래도 예전에 저 어렸을 때 전기 오븐을 처음 사고 엄마가 계란
잔뜩 넣고 해 주시던 다소 투박한 카스테라가 문득 생각이나기도 합니다.
정말 우유와 함께 먹으면 속이 든든할 텐데.
초등학교 때 점심 도시락 대신 사 가져가기도 했었죠.^^

교관 2021-12-02 12:10   좋아요 1 | 수정 | 삭제 | URL
도시락으로 엄마가 만들ㅇ어주신 카스테라를 들고 가서 점심도시락으로 앉아서 먹으면 얼마나 맛있었을까요. 그 상상만으로도 400자 원고지 10장 정도의 이야기가 나올 것만 같습니다. 오늘 날이 추워서 더 따뜻하게 느껴져요 ㅎㅎ 감사합니다.

교관 2021-12-02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그인 하기 전에 댓글을 달았더니 이렇게나 ㅋㅋㅋ
 

아주 멋지다고 생각해.

이런 마력적인 색을 본 적이 있어?

키위는 아주 냉소적이야.


오래된 멍이 든 것 같은 얼굴로 껍질에 가려져 이 마력적인 색을 전혀 나타내지 않는다. 얄밉게도.

키위의 이 컬러, 이 색, 이 색감을 만나려면 껍질을 까야한다.


이 지정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이 녹색은 흔히 볼 수 있는 색이 아니야.

러브 크래프트의 소설에 나오는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굉장한 힘을 가진 미지의 존재가 뿜어내는 빛처럼 보여.

정말 대단하지.

우리가 눈으로 보는 모든 색에서 벗어난 색이야.

키위를 처음 봤을 때 먹기 전, 이 키위의 색에 빠져서 얼마나 쳐다봤는지 몰라.

이 색감 때문에 말이야.


초록 초록한 색감에 물감 번지듯 퍼져 있는 씨앗의 검은색이 마치 피처럼 흘러내렸다.

키위가 아니면, 키위를 까 보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색이다.


니나가와 미카를 데리고 와도 이런 색감의 사진을 담아내지는 못할 걸.

테리 리차드슨도 마찬가지야.

녹색과 검은색이 이렇게도 퇴폐미를 뿜어내다니.


그 퇴폐미를 씹어 먹는 맛 또한 퇴폐적이다.

그래서 너무 아름답다.


이 세상의 모든 '미' 중에서 퇴폐미를 이길 수 있는 아름다움은 없을 걸.

붉은 립스틱의 입술은 자두를 먹을 때보다 키위를 씹어 먹을 때 더 퇴폐적이다.

아라키 노부요시 영감님 이리 와서 이 키위의 퇴폐를 담아주세요.


껍질을 벗겨보지 않으면 그 안을 전혀 알 수 없다. 키위가 도대체 이렇게 퇴폐적으로 예쁜 색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껍데기만 보고서는 전혀 짐작할 수가 없지. 배우로 치자면 꼭 배두나 같다. 배두나는 퇴폐미를 장착한 몇 안 되는 배우라고 생각된다. 배두나를 보고 앗! 한 영화가 배구 출신의 배두나가 하루 밤 동안에 남편 구하기 우당탕탕 이야기였다.


공기인형을 지나 아이엠 히어까지. 도대체 배두나는 얼굴을 보고 그 속에 어떤 컬러가 있는지 도무지 분간이 가지 않아.

이거다 싶으면 어김없이 빗나가고 저거다 싶으면 더 멀리 가 있다.

표정 없이 있으면 그 거기서 퇴폐미가 키위의 씨앗 색처럼 흘러나오지.


키위 같은 사람이 되어야지.

70년대 지어진 골목의 뒤편 그림자에서 길게, 더 길게 퇴폐적으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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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은 나 같은 인간을 위해 이 세상에 내려준 축복 같은 음식이다. 나 같은 인간이란 음식을 먹을 때 귀찮은 음식을 몹시 싫어하는 인간을 말한다. 상 위에서 지지고 볶고 끓이고 굽고. 이 힘든 일을 하면서 음식을 먹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누군가와, 다 같이 가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먹지만 내가 먼저 저런 귀찮은 음식을 먹으러 가자고 하지는 않는다. 집에서 해 먹는 것도 귀찮고 힘든데 밖에서까지 잡고 뜯고 해야 한다니 맙소사다.


그런 나에게 김밥은 세상의 빛과 같은 음식이다. 나는 오이를 좋아한다. 그리고 김밥을 좋아한다. 그래서 김밥에 오이가 들어가면 소고기가 들어간 김밥보다 더 좋다. 김밥에 오이가 들어가 있단 말이야,라고 임금님 귀처럼 어딘가에 대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을 지경이다. 김밥이라는 음식이 좋은 이유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귀찮지 않다. 일일이 굽고 뒤집어야 하는 삼겹살보다, 쌈을 싸서 먹어야 하는 쌈밥보다, 자르고 살을 발라서 양손을 다 써야 하는 홍게, 대게 같은 갑각류보다 귀찮지 않아서 훨씬 좋다.


김밥이 눈앞에 나왔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을 갖추었기에 그저 손으로 하나씩 들고 입으로 넣으면 된다. 김밥은 멀티를 가능케 하는 음식이다. 김밥을 먹으면서 책을 읽을 수 있고 아이패드 따위를 만지작 거리는데도 어설프지 않다.


그 김밥 할머니는 나의 그런 점을 알고 있다. 80대로 보이지만 팔십 몇 살인지는 알 수 없는 김밥 할머니가 있다. 김밥 할머니는 김밥을 손수 만들어, 손수 만든 것 같은 묘한 짐 꾸러미에 담아서 사무실마다, 상점마다 돌며 김밥을 판다. 김밥 할머니는 늘 무방비 상태에 있을 때 불쑥 문을 열고 들이닥친다.


이봐요, 할머니 막 그렇게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라고 해야 하지만 할머니는 유순한 눈동자와 굽은 등을 무기로 나에게 다가와 짐 꾸러미 속 김밥을 보여준다. 으앗 참기름의 향이 비어져 나온다. 김밥 할머니의 김밥은 달랑 두 종류다. 야채김밥과 참치김밥. 김밥 전문점처럼 다양한 종류의 김밥이 있지 않다. 에게, 고작 야채김밥과 참치김밥이다. 잘라주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주로 참치김밥을 사 먹는 모양이다. 나에게 느닷없이 왔을 때는 늘 야채김밥이 많이 남아있다. 사실 나는 참치김밥보다 야채김밥을 선호하는 편이다. 좋아하는 오이가 들어간 김밥을 원하지만 오이는 금방 상하기 때문에 할머니는 오이를 넣는 경우가 드물었다. 하지만 겨울이 다가오면 오이를 넣는다. 오이가 들어가지 않으면 나는 김밥을 사 먹지 않겠노라며 다짐을 하고 또 다짐했다.


김밥 할머니가 문을 열고 어김없이 다가온다. 할머니가 다가오면 애써 사지 않겠다는 표정을 하고 시선을 피하지만 김밥 할머니는 김밥을 들어 보이며 나에게 권한다. 순간 공기 중으로 퍼지는 꼬숩은 냄새와 금방 말아서 왔는지 탱글탱글한 김밥의 자태가 눈에 들어온다. 게다가 확대기처럼 확대된 채로 눈에 들어온 오이의 뒤 꽁무니.


하지만 나는 이미 결심을 했다. 입안에 아무것도 없지만 마치 입안에 무엇인가를 먹고 있다는 시늉을 하며 턱과 입을 마구 움직였다. 놀랄 정도로 나의 연기는 수준급이다. 진즉에 연기 쪽으로 나가지 않았을까. 너무 놀랍다. 배우가 되어도 손색이 없다. 바로 이런 게 생활연기라는 거다. 배우 놈들아.


이 정도면 김밥 할머니는 그냥 나를 지나쳐 갈 것이다. 깜빡 속을 것이다. 그때 김밥 할머니는 김밥을 내 얼굴 앞에 내민다. 오이가 눈에 들어왔다. 김밥 할머니의 머리는 나보다 한 수 위다. 이 참을 수 없는 욕망.


김밥 할머니는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면 김밥과 함께 된장국을 보온병에 담아 와서 종이컵에 부어서 건네주었다. 된장국에는 시래기가 두드려 맞고 죽은 듯 푹 데쳐져서 된장과 어우러져 있다. 다른 것이 들어가 있지 않음에도 마시면 몸이 녹아내린다. 푸슈.


겨울에는 달랑 종이컵 하나에 마시는 된장국은 정말 사람을 애간장 태운다. 얄미운 된장국이다. 그리고 얄미운 김밥 할머니다. 그렇다고 김밥 할머니에게 한 컵 더 부어 달라는 말을 할 수는 없다. 물론 더 달라고 하면 김밥 할머니가 부어주겠지만 그런 말을 쉽게 꺼낼 수 없게 하는 분위기를 김밥 할머니는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런 된장국, 냄새나고 주면 누가 좋아할 것 같은가 보군, 김밥은 원래 된장국 없이도 잘 먹었어. 흥.


나는 김밥을 먹겠다는 말도 안 했는데 이미 종이컵을 코앞에 내민다. 아아 거부할 수 없는 된장국 냄새. 아아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오이가 들어간 김밥. 된장국 한 컵. 아아.


김밥 할머니가 만 야채김밥은 참 맛있다. 김밥 안의 야채들은 김밥 안에 돌돌 말려 들어가기 전에 미리 무슨 짓을 해 놓은 모양이다. 야채 각각의 맛이 살아있으면서 서로가 잘 어울렸다. 부딪히지 않고 입안에서 조화를 이룬다. 앙상블이 입으로 느껴진다면 바로 그것이다. 김밥 주제에 그것이 가능하다니 욕이 나올 것 같다.


김밥 안에는 김밥에 딱 필요한 야채만 들어있다. 난 본디부터 김밥이라는 음식을 좋아하는 인간인 것이다. 어떤 음식이든 김에 돌돌 말아 싸 놓으면 맛있어했다고 전해 들었다. 김밥 안에 단무지만 들어있어도 난 잘 먹는 그런 인간이다. 이런 인간의 특징은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김밥 할머니가 파는 김밥에는 남들이 싫어하는, 잘 먹지 않는, 내가 좋아하는 오이가 들어있는 김밥을 만드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오이를 넣으면 그날 만든 김밥은 빨리 다 팔아치우지 않으면 곤란한 상황에 처해진다. 하지만 할머니는 머리가 비상한 건지 오이가 들어간 김밥이 팔리지 않으면 내 앞으로 와서 무기를 드러내고 김밥을 내민다.


문제가 있는데 김밥 할머니에게 한 번 김밥을 사면 김밥 할머니는 매일 그 비슷한 시간에 느닷없이 밀어닥쳐서 김밥을 내밀기 때문에 김밥을 구입하는 행동을 끊어야 할 땐 끊어야 하는데 이 머리가 좋은 김밥 할머니는 오이가 잘 보이게 내 앞에 내민다는 것이다.


맛있는 김밥이라도 매일매일 먹는다는 건 힘든 일이다. 누구나 알고 있고 모두가 그걸 피하고 있다. 게다가 나는 천오백 원 하는 김밥을 한 줄만 사지는 않는다. 내가 알고 있는 난 항상 두 줄을 구입한다는 것이다. 남들은 한 줄만으로 모자라서 내가 두 줄을 구입하는지 알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김밥이란 딱 한 줄만 먹으면 포만감이 몰려온다. 나는 그렇다는 말이다. 김밥도 칼로리가 놓아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한 줄만 먹으면 적당함을 넘어서는 상태가 된다. 그런데 어쩌다 누군가와 야외에 갔을 때 그 누군가가 김밥을 싸오면 참 난처하고 난감하다. 그날 저녁은 집으로 가서 소화제를 먹어야 할 지경에 이른다. 그런데도 그 누군가는 김밥을 그렇게나 많이 먹이고(어째서 자기는 먹지 않을까), 그렇게나 사육하는 개처럼 먹이고는 저녁에 스파게티를 먹기를 강요한다. 게다가 야외에서 먹은 김밥은 맛도 지지리도 없는 김밥이다. 소화제가 세상에 개발되지 않았다면 난 정말 배가 펑하고 터져 죽었을지도 모른다.


김밥은 정말 기기묘묘하여 집에서 김밥을 만들라 치면 한 줄이나 두 줄만 만들 수는 없다. 김밥이란 그렇게 생겨먹었다. 김밥이란 태생부터 그런 식인 것이다. 김밥은 어째서 한 줄, 두 줄로 불리는 것일까. 음식만의 고유 조사 격인 한 그릇, 두 그릇도 아니고 한 단, 두 단도 아니고 한 포기, 두 포기도 아니다. 한 줄, 두 줄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오물 같지만 고요하고 평화로운 평일에 먹는 한 줄짜리 야채김밥은 정말 맛있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지만 소풍날 찬합을 가득 채운 김밥이나 산더미처럼 쌓인 뷔페의 김밥은 오 분만 쳐다봐도 소화가 안 된다. 그 자리에서 토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  두 줄을 김밥 할머니에게 구입하는 이유는 한 줄만 구입하기 미안해서 한 줄을 더 구입하는 단순한 이유다. 김밥 할머니는 고단수다. 내가 그리 구입한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다. 용의주도하게 행동을 해도 알아차렸다. 낭패다.


김밥 할머니 할머니가 다가온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책상 위에 약을 늘어트려 놓는다. 그리고 나는 아픈 척 눈을 감고 으으 소리를 내며 의자에 기대어 있다. 큭큭 이건 완벽에 가깝지 않은가. 연극 배우는 저리 가라다. 지난번과는 다르다. 누가 봐도 김밥 같은 건 먹지 못할 정도로 아픈 것이다. 김밥 할머니는 아무런 말도 없이 김밥을 내 앞에 내밀었다.


꼬숩은 냄새, 그리고 된장국. 눈에 보이는 싱싱한 오이. 나는 배우는 절대 되지 못한다.


아니 장사를 이렇게 무례하게 하다니. 아무리 김밥 할머니가 나이가 많지만 “김밥 사세요”라든가 “김밥이 오늘 잘 말렸어”라든가, 암튼 아무 말이나 해야 했다. 하지만 김밥 할머니는 방치된 시골집 마당 같은 얼굴을 하고 내 앞에 김밥을 쓱 내밀었다. 나는 김밥 따위는 이제 먹지 않아요!라고 말해야 했지만 야채 김밥 두 줄이요,라고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친절하게 그렸다. 게다가 시답잖은 말까지 해버렸다. 야채김밥 말고 채소 김밥은 없나요?


결국 오늘도 김밥 할머니의 김밥을 사고 말았다. 실은, 이건 비밀이지만 나는 김밥을 매일 사 먹는다. 무슨 음식이든지 매일 같은 걸 먹을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김밥 할머니가 내미는 김밥을 매일매일 먹는다. 탱글탱글한 밥알이 입안에서 룰루랄라 한다. 김도 분명 싸구려 중국산일 것이다. 입안에서 오이가 씹힌다. 아 상쾌하다. 정말 맛있다. 내 입맛은 참.


무슨 재료를 썼든 간에 그 재료들은 싸구려 저질 중국산이지 싶다. 김밥이 입안에서 노래를 부르듯 움직였다. 그런 움직임이 온몸으로 퍼지면 나는 전자랜드 앞의 인형처럼 양 팔을 옆으로 죽 뻗어 춤을 추었다.


오늘은 김밥 할머니가 단무지를 덤으로 주고 갔다. 젓가락도 주지 않고 단무지를 어떻게 먹으라는 건지. 이런 건 주지 않아도 된다. 나는 김밥을 입에 넣고 단무지를 씹어 먹는다. 단무지가 김밥에 비해 양이 너무 적어서 앞니로 조금씩 배어 물었다. 톡톡 끊어서 먹는 단무지의 맛은 김밥의 맛을 극상시킨다.


김밥 따위는 집에서든 편의점에서든 어디서든 사 먹을 수 있단 말이다. 굳이 표정 없는 김밥 할머니에게 사 먹지 않아도 된단 말이다. 하지만 어쩌다 어딘가에서 사 먹는 김밥은 ‘어쩌다’ 맛이다. 어쩌다, 맛이 뭔가? 그건 나도 모른다. 골목에 밟히는 작은 그루터기의 맛, 해안가 모래 속에 숨어있는 돌멩이의 맛. 뭐 그 정도로 해 두자.


배고플 때 맛없는 음식으로 배 채우는 것만큼 기분이 나쁜 건 없다. 배가 불러도 김밥 할머니의 김밥은, 그러니까 야채김밥은, 오이가 들어간 김밥 할머니의 김밥은 인정하기 싫지만 맛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기분이 나쁘다.


난 지금 한숨을 쉬며 김밥 할머니에게서 구입한 야채김밥을 의자의 등받이에 푹 파묻혀 먹고 있다. 주지 않아도 되는 단무지를 아껴가며 한 손에는 김밥을, 한 손에는 단무지를 들고 야무지게 먹는다. 김밥을 베어 물었다. 내 표정이 조금 밝아졌나? 단무지를 살짝 베어 물었다. 아아 이 기분 좋은 만남. 남아있는 단무지의 양과 김밥의 길이를 재가며 먹는 맛이 있다.


그리고 어비 게일이 나온 ‘리틀 미스 선샤인'을 볼 것이다. 영화 속 데보츠카 노래를 들으며 나는 여행을 떠난다. 김밥 여행을. 무려 오이가 들어간 야채김밥을 먹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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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21-11-29 15: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하도 많이 먹어서 요즘 안 먹고 있는데 오늘은 한 줄 사 먹어야겠네요. 오이 들어간 김밥은 찾기 어려울 것 같지만요. 생생한 김밥 이야기 재밌게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교관 2021-11-30 12:03   좋아요 0 | URL
오늘은 김밥으로 대동단결 ㅋㅋㅋ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