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갈이 그린 라 퐁텐 우화
장 드 라 퐁텐 지음, 최인경 옮김, 마르크 샤갈 그림 / 지엔씨미디어(GNCmedia)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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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여름, 한 신문에 명지대 국문과의 안대회 교수가 중학교 2학년짜리 아들에게 우화책을 권하는 글이 실린 적이 있었다.  그 글에서 안대회 교수는 아들에게 라퐁텐 우화를 읽으라고 권했었는데 아들이 별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면서 그 원인으로 라퐁텐 특유의 장식적인 문체를 이야기 했었다. 그리고는 <끄르일로프 우화집>과 <히또빠데샤>, <칼릴라와 딤나>를 권하고 있었다.  덕분에 세상에 이솝우화 말고도 이렇게 다양한 우화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하나하나 사서 읽어봐야겠다고 다짐해놓고는 <끄르일로프 우화집> 이후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라퐁텐은 17세기 유명한 몽상가이자 시인이며 우화작가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26년에 걸쳐 완성한 우화집은 전 12권에 240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한다. 240개의 이야기가 라퐁텐의 창작은 아니었지만 특유의 화려하고 시적인 문체로 지혜로운 삶에 대한 교훈에 대한 이야기를 남겼다고 한다.

이 책, <샤갈이 그린 라퐁텐 우화>는 책의 비중이 라퐁텐보다는 샤갈 쪽에 더 기울어 있는 것 같다.  1926년~1927년에 걸쳐 라퐁텐 우화를 소재로 샤갈이 그린 100점의 작품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43점에 해당하는 우화만 책에 실은 사실만 보더라도 이 책이 라퐁텐 우화를 위한 책인지, 샤갈의 작품을 위한 책인지 판단하기 어렵지 않다.  샤갈의 그림을 돋보이기 위한 책이라면 인쇄라든가 종이 질에 좀 더 신경을 써야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삽화’이기 때문인지 작품으로서의 완성도는 10년이나 걸려서 완성했다는 ‘아내에게’라든가 ‘탄생일’, ‘에펠탑의 부부’, ‘나와 마을’과 같은 샤갈의 대표작들과 비교하면 상당히 떨어진다는 느낌도 들지만 샤갈 특유의 신비스럽고 환성적인 색감은 이 책의 그림 속에 서도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마 위에서 언급한 우화집들 중에 라퐁텐 우화는 우리와 가장 친숙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그만큼 샤갈의 그림이 빠졌다면 어딘지 심심한 책이 되어버렸을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라퐁텐의 240개의 우화 전부를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말이다. 

안대회 교수가 아들에게 추천한 책이 하나 더 있다.  강희맹의 <훈자오설>이다.  ‘자식을 훈계하기 위한 다섯 가지 이야기’라는데 라퐁텐 우화나 끄르일로프 우화처럼 이야기 수가 많지는 않은 것이 아쉽다.

언젠가 우리나라에도 라퐁텐이나 끄르일로프같은 작가가 등장해서 예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우리의 옛이야기들을 집대성해줄 날이 있을까?  서정오 선생님 같은 분들이 새삼 소중한 모습으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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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글둥글 지구촌 문화 이야기 함께 사는 세상 2
크리스티네 슐츠-라이스 지음, 이옥용 옮김, 안나 침머만 그림 / 풀빛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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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니 어쩌니 말이 무성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아이들에게 단순히 넓은 세상을 보여준다는 것 말고 세계의 다양성을 느끼게 해준다는 의미에서 이 책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세계 여러 나라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지도 하나 실어 놓지 않은 (대륙의 모양을 삽화처럼 실어 놓은 것은 제외하고) 용감함을 충분히 눈감아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대륙의 크기 순서대로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유럽, 오세아니아, 5대륙으로 나누어 소개되는 이야기에는 단순히 어떤 나라가 있고, 인구가 몇이고,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에 대한 지식이 담겨 있는 게 아니라, 그 나라 아이들의 놀이, 공부, 음식, 학교와 일상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친근한 문체로 소개되어 있어 아이들이 세계 각국의 문화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쉽도록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대륙 이야기에서는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정책과 아프리카 대륙에서 부족들 간의 분쟁이 많은 이유, 서구 열강들이 제멋대로 그어놓은 반듯반듯한 국경선이 초래한 비극들, 빈곤과 미성년자의 노동력 착취, 서구 열강의 식민통치의 결과로 생긴 언어의 다양화 등 세계 문화의 어두운 배경까지 아이들 수준에 맞춰 잘 담아냈다는 것 또한 무척 마음에 들었다.

오세아니아 대륙 이야기에서는 뉴질랜드 원주민인 마오리족과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인 아보리진에 대해 비교적 긴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것,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미국과 캐나다처럼 부유한 나라의 아이들과 함께 남미 대륙의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며 꿈을 잃지 않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도 비중 있게 다뤄져 있어서 풍요로운 나라의 아이들이건 제3세계의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이건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소중한 존재들임을 느끼게 해 준다.

우리 아이들이 배워야 할 것들이 바로 그런 것 아닐까? 강대국 앞에서 우리의 자존감을 잃지 않는 것, 제3세계의 어려움에 눈감지 않는 것, 아프리카나 남미 국가들의 분쟁과 가난의 원인이 그들의 무능 탓이라기보다 강대국의 식민통치와 이권유지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세계의 다양성을 차별이 아닌 아름다움으로 바라볼 줄 아는 것 말이다.  지식을 나열한 문화 이야기가 아니라서 오히려 이 책이 세계 각 국의 문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지 않을까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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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바다 - 제12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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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꿔왔던 것에 가까이 가본 적 있어요? 그건 사실 끔찍하리만치 실망스러운 일이에요. 희미하게 반짝거렸던 것들이 주름과 악취로 번들거리면서 또렷하게 다가온다면 누군들 절망하지 않겠어요. 세상은 언제나 내가 그린 그림보다 멋이 떨어지죠. 현실이 기대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일찍 인정하지 않으면 사는 것은 상처의 연속일 거예요. 나중엔 꿈꿨던 일조차 머쓱해지고 말걸요. -7쪽

저는 다시 그곳으로 가고 싶었어요. 지구가 알사탕만하게 보이는 곳으로, 그러니까 제 잘못이나 슬픔도 알사탕의 티끌로 보이는 곳으로요. 엄마, 저는 그 모든 순간을 즐겼고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어요. 이걸 위해서 희생했던 것들, 제가 저지른 실수와 오류들 말이에요. 사는 게 선택의 문제라면 저는 제 손에 있는 것만 바라보고 싶거든요.-11쪽

"내가 아는 매력적인 사람들 중에 거짓말에 서투른 사람은 하나도 없어. 정말이야. 거짓말을 잘하는 순서대로 재미있는 어른이 될 수 있다고나 할까?"
나는 고모를 쳐다봤다. 정말?
"매너만 지킬 수 있다면 말이야."-50쪽

할머니는 여느 처녀들처럼 새 삶에 적응하고 살아가려 애를 썼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삶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색깔이 있었다. 그것은 할아버지와는 완전히 정반대에 있는 색이었다.
할머니가 환상과 꿈, 아름다움, 비극, 무지개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면 할아버지는 적금과 등산, 단골손님, 소갈비, 독감예방주사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할머니는 남편과 삶을 공유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 보일 때마다 모욕과 비웃음을 당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마음을 감추게 되었다. -52쪽

"그애 마음이 지금까지 어떤 전쟁을 치렀는지 누가 알겠니."
드라이브가 길어질수록 분명해지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꽤나 괜찮은 팀이라는 사실이었다. 어떤 사람과 좁은 공간에 오랫동안 함께 있으면 자연스레 알게 된다. 상대방과 내가 한 팀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72쪽

우주정거장에서 지구로 돌아온 뒤 제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커피잔을 하나 깨뜨린 것이었어요.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인 행동이었죠. 그것은 제가 건너온 것을 기념하는 하나의 축하의식이었어요. 그게 어떤 다리였는지는 모르지만 어디든 제가 그곳을 건너온 것만은 분명했죠.-82쪽

과연 이 일로 무엇을 증명하고자 하는가, 에 대한 의문을 갖기 시작하면 그때부턴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게 돼요. 방법은 그저 단순해지는 것뿐이죠. 삶을 최소화시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정확히 분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는 수밖에 없어요. -108쪽

동물이 다시 가길 원치 않았던 우주로, 인간들은 끊임없이 되돌아가요. 우주에 다녀온 뒤 다음 비행을 포기했던 비행사는 지금껏 단 한 명도 없었죠. 그건 인간만이 자기가 선택한 삶을 살기 때문일 거예요. 내가 선택한 대로 사는 인생이죠. 그것마저 없다면 우리의 삶이 무엇 하나 동물보다 나은 것이 있겠어요?-108~109쪽

"저 개를 어릴 때부터 키웠던 주인이 엄청나게 때리면서 훈련을 시켰는데, 결국은 죽기 직전까지 때린 후에 길에다 버렸다는 거야. 그걸 조엘이 데려다 키운 거래. 그런데 그전에 매를 맞으면서 훈련받았던 것은 절대로 고쳐지지가 않는다는 거야."-113쪽

그는 한숨을 쉬듯 웃었다. 그리고 갑자기, 밤의 정적 속에서 천천히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기 시작했다.
"이 배우들은 모두 요정들일세. 이젠 대기 속으로, 엷은 대기 속으로 사라져버렸지. 이 대지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환상의 세계처럼 저 구름 위에 솟은 탑도, 호사스러운 궁전도, 장엄한 신전도, 이 거대한 지구도, 마침내 다 녹아서 지금 사라져버린 환상처럼 흔적조차 남기지 않을걸세. 우리 인간은 꿈과 같은 것으로 되어 있고 이 허망한 인생은 긴 잠으로 막을 내리게 되지."-116쪽

'이렇게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면, 그 일로 돈을 벌어서 밥도 사먹고, 편안한 침대에서 잠을 자고, 따뜻한 옷을 사입을 수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120쪽

".... 그렇게 되면 내가 지나온 그 시간들이 전부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 오기인지는 몰라도, 나는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고 싶었어."
민이는 언제 깨어났는지 말없이 누워서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고모는 밝은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그게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던 것뿐이야."
"왜 할머니한테 가짜 편지를 쓴 거야?"
고모는 미소를 지었다.
"즐거움을 위해서. 만약에 우리가 원치 않는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라면, 그런 작은 위안도 누리지 못할 이유는 없잖니."-126쪽

내 안에 있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증오심이 나를 몰아댔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을 좋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137쪽

"슬리퍼 장사라는 게, 남자로서 너무 야망이 없는 거 아닌가."
"그게 기쁨일 수도 있잖아."
민이는 까딱까딱 걸으면서 말했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차 안에 앉아서 온종일 뜸한 손님을 기다리는 거, 그것만이 저 아저씨의 야망일지 누가 알겠어."-142쪽

"세상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야."
고모는 부드럽게 웃었다.
"생각처럼 나쁘지는 않은데 늘 우리의 밑그림을 넘어서니까 당황하고 불신하게 되는 거야. 이렇게 네가 나를 보러 와준 것처럼 기대 밖의 좋은 일도 잇는 거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는 거고. 고모는 그걸 알기 때문에 세상에 빚진 것이 없어."
"그래서?"
"자유지."-145쪽

누구도 원하는 인생을 살 수 없다는 것이 너무도 분명해서 삶이 영화처럼 멀어 보였다. -154쪽

의사는 민이가 다시 잠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의를 줬다. 나는 민이의 눈꺼풀이 버티고 있을 수 있도록 깜찍한 미니스커트를 입은 어떤 여자, 분홍색 립스틱을 바르고도 유리컵에 입술자국을 묻히지 않는 여자, 칠 센티미터 하이힐을 신고서도 가볍게 오르막길을 올라가는 여자, 새까맣고 긴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 지혜와 부드러움이라는 내면의 광휘를 가진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민이는 입을 벌리고 헤, 웃었는데 순간 그애의 눈꼬리를 따라서 한 방울 눈물이 떨어졌다.-155쪽

달의 진짜 빛깔이 어떨지 그 누가 알 수 있겠어요? 화성에서는 달이 분홍색으로 보일 수도 있고 금성에서는 녹색으로 보일 수도 있죠. 외계인에게는 파란색으로, 물고기들에게는 주황색으로 보일지도 몰라요.
우리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어요. 그저 바라볼 뿐이죠. 하지만 이 세계가 오해 속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를 떠올려보면 분명히 신은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고, 그분을 향해서 큰 소리로 노래라도 불러드리고 싶어요. 지구를 벗어나면 우주, 또 우주를 벗어나면 무엇이 있을지 저는 상상조차 할 수 없거든요. -160쪽

생각하면 엄마의 마음이 즐거워지는 곳으로, 아, 그래요, 다이아몬드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달의 바닷가에 제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밤하늘의 저 먼 데를 쳐다보면 아름답고 둥근 행성 한구석에서 엄마의 딸이 반짝, 하고 빛나는 것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때부터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죠. 진짜 이야기는 긍정으로부터 시작되다고, 언제나 엄마가 말씀해주셨잖아요?-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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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종의 라틴화첩기행 문학동네 화첩기행 5
김병종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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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게 얼마나 될까?  우리와는 지구 정반대편에 위치했다는 아득한 거리감 외에도 생활방식이나 삶에 대한 태도가 우리와는 너무도 다른 곳이라는 막연함이 전부였던 것 같다.  태양의 제국 잉카, 세계에서 가장 큰 폭포 이구아수, 불꽃같은 아름다움을 간직했던 혁명가 체 게바라와 칠레의 슬픈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 기타 줄을 튕기던 손이 으깨지면서도 숨이 끊어질 때까지 저항의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는 빅토르 하라, 울창한 아마존 밀림, 격정의 탱고,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찬찬, 펠레와 호나우드를 키워낸 축구열정, 화려한 리우 카니발, 만년설의 안데스, 제국의 발톱에 처참히 희생된 대륙, 빈곤의 그늘이 짙게 드리운 곳, 억압에 대한 저항과 자유에 대한 갈망이 거센 땅, 해방신학의 모태가 된 슬픈 땅.....  가만히 따져보니 단편적이고 막연한 것들 밖에 없다.

이 책에 끌리며 눈독을 들였던 것도 나의 무지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 혹시라도 라틴과의 아득하고 막연한 거리감을 조금이라도 없앨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부풀었었다.

‘화첩기행’이라는 책제목답게 화가의 그림이 많이 실려 있고, 신춘문예 당선 경력이 있는 작가답게 글이 수려하다.  화가의 손끝에서 살아난 그림들은 라틴의 느낌을 정겹게 전해온다.  글 끝에 TIP처럼 붙은 짤막한 설명글에 간혹 우표만한 크기의 사진이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은 전적으로 글과 그림에 의존해야 하는 여행 이야기이고 사진 한 장 없이도 라틴의 느낌이 가슴으로 전해져오는 책이다.

쿠바,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6개국의 여행기는 단순히 어떤 장소나 유적에 대한 기록이기보다 각 나라의 예술, 문학, 자연, 건축물, 춤, 대표적인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함께 펼쳐져 있고 각 나라의 문화와 그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까지 작가의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냈다. 

무엇보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여행담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1785년에 문을 연 고서점이 시내 한복판에 버젓이 자리를 지키고 150년 역사의 카페 토르토니가 문학과 예술의 태동지로 살아 있는 문화의 도시, 부에노스 아이레스.  우리나라 어느 대학가에 200년이 넘은 고서점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거나 문인들이 자주 모이던 제비다방, 밀다원, 금강다방이나 음악감상실 돌체 같은 곳이 아직도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문화수준은 그 위상을 더 한층 높일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부러움이 함께 일어났다.  갑자기 화재로 소실된 숭례문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만족할만한 개발이익을 얻지 못했다는 이유로 숭례문에 불을 지른 70대 노인은 바로 우리 사회의 상징이며 우리의 숨기고 싶은 자화상이 아닐까. 수준 높은 문화와 예술을 지키고 키워낼 수 있는 토양이 과연 우리에게 있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에 들어있는 라틴국가 사람들의 삶보다 우리의 삶이 조금 더 물질적으로 풍요로울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어떤 삶이 더 찬란할지를 놓고 보면 자신이 없었다.

문화생활을 경제적, 시간적 여유를 가진 자들만의 전유물로 여겨지고, 게다가 그나마도 어디까지나 적극 가담자로서가 아니라 소극적인 관람자로서 향유되는 것이 대부분인지라 어디서나 밴드가 연주되는 쿠바나 길거리에서 탱고의 향연이 벌어지는 아르헨티나, 화가 베니토 킨케라 마르틴의 캔버스가 되어 화려한 색채의 작품으로 거듭난 라 보카의 골목과 낡은 집들,  거리의 악사 마리아치 밴드의 음악이 흐르는 멕시코의 이야기는 너무나 낯선 동시에 동경을 불러 일으켰다.

헤밍웨이, 체 게바라, 프리다 칼로, 보르헤스, 파블로 네루다, 로맹가리 같은 유명인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지만 우리와는 너무나 다른 생활방식으로 살아가는 남미의 평범한 사람들 이야기는 지금의 내 생활을 돌아보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곳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 첫 느낌, 미소, 눈빛의 마주침이 돈이나 열쇠보다 우선이란다.’(p.45)는 작가의 글에서는  태양처럼 밝고 바다처럼 시원시원하게 세상을 향해 활짝 열려있는 그들의 낙천적인 기질이 느껴졌다.  ‘그래도 삶이란 얼마나 즐거운 것인가.  힘든 노동 끝에 아내가 구워준 토르티야와 테킬라를 마실 수 있다면 이 생도 견딜 만하지 않은가. 이파리를 가시로 바꾸며 저 선인장들이 뜨거운 태양을 견뎌내듯, 산다는 건 어차피 무언가를 견뎌내는 것이 아니던가....’(p.128)하는 글은 삶에 대한 체념이나 낙관 따위는 넘어선 민초들의 무엇에도 꺾이는 법 없이 지독하리만큼 강인하고 질긴 삶에 경의를 표하게 만든다.

혹독하고 기구한 역사를 가졌으면서도 과장이 필요치 않는 자연스러움으로 밥 먹고 잠자고 배변하듯 문화와 예술을 생활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흡수하고 표현할 줄 아는 그들의 낭만과 열정이 부러웠다. 

책을 덮고 나니 우리의 삶이 너무 기형적으로 느껴졌다.  원색의 화려함을 가진 그들에 비해 우리의 삶은 지루한 무채색에 가깝단 생각에 답답해져온다.  어둡고 공기 탁한 노래방이 아니라 뜨거운 태양 쏟아지는 탁 트인 장소에서 큰 소리로 노래 한 곡 불러본다면 답답한 속이 뻥 뚫릴 것 같다. 남미의 태양을 훔쳐오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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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의 사물들
김선우 지음 / 눌와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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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하다면 하루에 하나의 사물씩만 마음에 드는 제목부터 건반을 튕기듯 읽어주면 좋을 것 같다’는 그녀의 당부에 말 잘 듣는 착한 학생처럼 하루에 하나 혹은 둘의 사물을 그녀가 내어준 길을 따라 만났다.  그녀가 보여준 사물의 세계는 물(物)의 영토를 넘어 영(靈)의 영토에 닿아있었다.  겉으로는 묵묵한 사물들의 내면, 그 깊고 은밀한 곳까지 맑게 들여다볼 줄 아는 시인의 시선이 따사롭고 눈물겹다.  사물들은 따사롭고 눈물겨운 시인 앞에 기꺼이 자신의 본질을 꽃잎처럼 활짝 펼쳐 보이는 것 같다.

스스로를 ‘꿈꾸는 것을 즐기는 종족’(p.30)이며 ‘바다와 혼인하고 산과 섬과 우주와 혼인’(p.47)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그녀는 은밀한 사물의 내면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천박한 소비의 시대를 살아가느라 어느새 사람도 사물화 되어가는 것을 당연시 보아오던 우리가, 우리 삶의 죽은 배경이며 소비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던 사물들이 시인의 시선을 통해 스멀거리며 살아나 우리가 이루고 있는 긴밀한 관계망 속으로 깊숙이 스며들어오는 것을 느끼는 일은 신비스러운 경험이었다.  거울, 반지, 촛불, 화장대, 소라껍데기, 부채, 잔처럼 낭만적인 멋을 풍기는 사물부터 사진기, 휴대폰, 손톱깎기처럼 차가운 문명의 비릿한 쇠 냄새가 나는 사물들과 지도, 수의, 바늘, 못처럼 비장함이 느껴지는 사물들을 거쳐 쓰레기통, 걸레, 생리대같이 논의의 주인공으로 삼기에 금기시 되었던 사물까지, 시인의 맑은 시선을 받은 사물들은 하나같이 고해성사를 보듯 자분자분 자기의 속내를 털어 놓는 것 같다.

그 비결이 뭘까?  거울에 대한 글에서 시인은 나르키소스를 이야기하며 ‘하나의 풍경에 그토록 오래도록 그토록 지극하게 매료되지 않고서는 풍경의 저편을 깨달을 수 없다’(p.24)고 말한다.  또 걸레에 대한 글에서는 공간을 천천히 훑어가며 자기가 ‘건넬 말을 기꺼이 받아줄 만한 사물과 만나’(p.119)려 애쓰는 시인의 모습이 보인다.  ‘사물의 속내란 그것에 말 거는 내 무의식의 속내이기도 하다. 그것들은 지나치게 예민하거나 수줍거나 완강한 자기 보호벽을 지니기 십상이어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말 거느냐에 따라 글의 운명이 달라지곤 한다.’(p.119)는 시인의 고백은 이 책 속의 글들이 사물과 시인의 무의식이 만나 서로를 오래도록 지극하게 바라본 결정체라는 뜻이리라.

어떤 사물을 지극히 바라봄으로써 내 무의식과 만날 수 있다면 그 순간 사물과 나는 한데 엉기어 ‘나’와 ‘너’가 다름없는 일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김선우 시인의 글에는 ‘연민’이라든가 ‘연대’라는 낱말이 자주 눈에 띈다. 다분히 불가의 향기를 풍기기도 하는데 우주와 자연과 사물과 내가 끊어질 수 없는 인연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서로에게 공양되고 순환하며 결국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의 사유가 곳곳에서 피어나고 있다.

‘저편의 숨결까지 감지하고자 온몸을 기울이는 극진함이 살아있는 세계’(p.225)를 희망하며 ‘갖가지 사물들이 실은 너무도 풍성한 말을 거느린 언어의 마법사들이라는 것을 날마다 새롭게 깨달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p.225)는 그녀는 우리에게 비결 하나를 더 알려준다.  그러기 위해서는 ‘극진하게 잘 들을 수 있는 낮은 무릎이 필요하다.’(p.225)고.

모두가 시인이 될 수는 없겠지만 이제 사물들을 좀 더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건 어떨까. 소용에 닿지 않아지거나 유행에 뒤떨어지거나 단지 싫증이 났다는 이유만으로도 사물은 쉽게 버려질 수 있다는 우리의 오만한 즉물적 사고 때문에 사물은 온기를 잃고 말을 닫는다.  쉽게 얻고 쉽게 버려진다.  쓰레기통에 대한 글에서 시인은, 너무나 즉물적이 되어버린 우리에게 ‘대체 쓰레기란 너의 어디에서 오느냐.’(p,161)고 묻는다. 

어떤 사물이든지 ‘그 어느 것이나 이별의 핏물이 스며 있고 고동치는 따스한 맥박이 번져 있다.’(p.97)는 시인으로서는 별 하나와 눈 맞출 틈도 없이 메마르고 팍팍하게 살아가는 우리네 삶이 참 가련해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이 세계에 우연히 오는 것은 없’(p.184)‘모든 우연은 필연이 몸을 감추는 방식이며 또는 몸을 드러내는 방식’(p.184)이라는 생각으로 자기 앞에 있는 모든 사물과 자연과 우주 앞에 조용히 무릎을 낮추고 그 안에 있는 ‘나’를 찾아 물아일체의 질긴 인연을 아름답게 감싸 안을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꿈꾸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인의 꿈대로 만나고 스치는 인연 모두가 소중해진다면 내세울 것 없이 평범하기만 한 내 삶도 아름답고 귀해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살며시 웃어본다. 

전에 읽었던 <우리 말고 또 누가 이 밥그릇에 누웠을까>(새움, 2007)나 <물밑에 달이 열릴 때>(창비, 2002)보다 시인으로서의 글 향기가 더욱 진한 책이었다. 어쩔 수 없이 자꾸만 그녀의 글에 점점 더 빠져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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