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꿔왔던 것에 가까이 가본 적 있어요? 그건 사실 끔찍하리만치 실망스러운 일이에요. 희미하게 반짝거렸던 것들이 주름과 악취로 번들거리면서 또렷하게 다가온다면 누군들 절망하지 않겠어요. 세상은 언제나 내가 그린 그림보다 멋이 떨어지죠. 현실이 기대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일찍 인정하지 않으면 사는 것은 상처의 연속일 거예요. 나중엔 꿈꿨던 일조차 머쓱해지고 말걸요. -7쪽
저는 다시 그곳으로 가고 싶었어요. 지구가 알사탕만하게 보이는 곳으로, 그러니까 제 잘못이나 슬픔도 알사탕의 티끌로 보이는 곳으로요. 엄마, 저는 그 모든 순간을 즐겼고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어요. 이걸 위해서 희생했던 것들, 제가 저지른 실수와 오류들 말이에요. 사는 게 선택의 문제라면 저는 제 손에 있는 것만 바라보고 싶거든요.-11쪽
"내가 아는 매력적인 사람들 중에 거짓말에 서투른 사람은 하나도 없어. 정말이야. 거짓말을 잘하는 순서대로 재미있는 어른이 될 수 있다고나 할까?" 나는 고모를 쳐다봤다. 정말? "매너만 지킬 수 있다면 말이야."-50쪽
할머니는 여느 처녀들처럼 새 삶에 적응하고 살아가려 애를 썼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삶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색깔이 있었다. 그것은 할아버지와는 완전히 정반대에 있는 색이었다. 할머니가 환상과 꿈, 아름다움, 비극, 무지개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면 할아버지는 적금과 등산, 단골손님, 소갈비, 독감예방주사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할머니는 남편과 삶을 공유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 보일 때마다 모욕과 비웃음을 당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마음을 감추게 되었다. -52쪽
"그애 마음이 지금까지 어떤 전쟁을 치렀는지 누가 알겠니." 드라이브가 길어질수록 분명해지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꽤나 괜찮은 팀이라는 사실이었다. 어떤 사람과 좁은 공간에 오랫동안 함께 있으면 자연스레 알게 된다. 상대방과 내가 한 팀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72쪽
우주정거장에서 지구로 돌아온 뒤 제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커피잔을 하나 깨뜨린 것이었어요.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인 행동이었죠. 그것은 제가 건너온 것을 기념하는 하나의 축하의식이었어요. 그게 어떤 다리였는지는 모르지만 어디든 제가 그곳을 건너온 것만은 분명했죠.-82쪽
과연 이 일로 무엇을 증명하고자 하는가, 에 대한 의문을 갖기 시작하면 그때부턴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게 돼요. 방법은 그저 단순해지는 것뿐이죠. 삶을 최소화시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정확히 분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는 수밖에 없어요. -108쪽
동물이 다시 가길 원치 않았던 우주로, 인간들은 끊임없이 되돌아가요. 우주에 다녀온 뒤 다음 비행을 포기했던 비행사는 지금껏 단 한 명도 없었죠. 그건 인간만이 자기가 선택한 삶을 살기 때문일 거예요. 내가 선택한 대로 사는 인생이죠. 그것마저 없다면 우리의 삶이 무엇 하나 동물보다 나은 것이 있겠어요?-108~109쪽
"저 개를 어릴 때부터 키웠던 주인이 엄청나게 때리면서 훈련을 시켰는데, 결국은 죽기 직전까지 때린 후에 길에다 버렸다는 거야. 그걸 조엘이 데려다 키운 거래. 그런데 그전에 매를 맞으면서 훈련받았던 것은 절대로 고쳐지지가 않는다는 거야."-113쪽
그는 한숨을 쉬듯 웃었다. 그리고 갑자기, 밤의 정적 속에서 천천히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기 시작했다. "이 배우들은 모두 요정들일세. 이젠 대기 속으로, 엷은 대기 속으로 사라져버렸지. 이 대지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환상의 세계처럼 저 구름 위에 솟은 탑도, 호사스러운 궁전도, 장엄한 신전도, 이 거대한 지구도, 마침내 다 녹아서 지금 사라져버린 환상처럼 흔적조차 남기지 않을걸세. 우리 인간은 꿈과 같은 것으로 되어 있고 이 허망한 인생은 긴 잠으로 막을 내리게 되지."-116쪽
'이렇게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면, 그 일로 돈을 벌어서 밥도 사먹고, 편안한 침대에서 잠을 자고, 따뜻한 옷을 사입을 수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120쪽
".... 그렇게 되면 내가 지나온 그 시간들이 전부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 오기인지는 몰라도, 나는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고 싶었어." 민이는 언제 깨어났는지 말없이 누워서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고모는 밝은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그게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던 것뿐이야." "왜 할머니한테 가짜 편지를 쓴 거야?" 고모는 미소를 지었다. "즐거움을 위해서. 만약에 우리가 원치 않는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라면, 그런 작은 위안도 누리지 못할 이유는 없잖니."-126쪽
내 안에 있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증오심이 나를 몰아댔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을 좋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137쪽
"슬리퍼 장사라는 게, 남자로서 너무 야망이 없는 거 아닌가." "그게 기쁨일 수도 있잖아." 민이는 까딱까딱 걸으면서 말했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차 안에 앉아서 온종일 뜸한 손님을 기다리는 거, 그것만이 저 아저씨의 야망일지 누가 알겠어."-142쪽
"세상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야." 고모는 부드럽게 웃었다. "생각처럼 나쁘지는 않은데 늘 우리의 밑그림을 넘어서니까 당황하고 불신하게 되는 거야. 이렇게 네가 나를 보러 와준 것처럼 기대 밖의 좋은 일도 잇는 거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는 거고. 고모는 그걸 알기 때문에 세상에 빚진 것이 없어." "그래서?" "자유지."-145쪽
누구도 원하는 인생을 살 수 없다는 것이 너무도 분명해서 삶이 영화처럼 멀어 보였다. -154쪽
의사는 민이가 다시 잠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의를 줬다. 나는 민이의 눈꺼풀이 버티고 있을 수 있도록 깜찍한 미니스커트를 입은 어떤 여자, 분홍색 립스틱을 바르고도 유리컵에 입술자국을 묻히지 않는 여자, 칠 센티미터 하이힐을 신고서도 가볍게 오르막길을 올라가는 여자, 새까맣고 긴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 지혜와 부드러움이라는 내면의 광휘를 가진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민이는 입을 벌리고 헤, 웃었는데 순간 그애의 눈꼬리를 따라서 한 방울 눈물이 떨어졌다.-155쪽
달의 진짜 빛깔이 어떨지 그 누가 알 수 있겠어요? 화성에서는 달이 분홍색으로 보일 수도 있고 금성에서는 녹색으로 보일 수도 있죠. 외계인에게는 파란색으로, 물고기들에게는 주황색으로 보일지도 몰라요. 우리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어요. 그저 바라볼 뿐이죠. 하지만 이 세계가 오해 속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를 떠올려보면 분명히 신은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고, 그분을 향해서 큰 소리로 노래라도 불러드리고 싶어요. 지구를 벗어나면 우주, 또 우주를 벗어나면 무엇이 있을지 저는 상상조차 할 수 없거든요. -160쪽
생각하면 엄마의 마음이 즐거워지는 곳으로, 아, 그래요, 다이아몬드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달의 바닷가에 제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밤하늘의 저 먼 데를 쳐다보면 아름답고 둥근 행성 한구석에서 엄마의 딸이 반짝, 하고 빛나는 것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때부터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죠. 진짜 이야기는 긍정으로부터 시작되다고, 언제나 엄마가 말씀해주셨잖아요?-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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