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송필환 옮김 / 해냄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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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이름이란 뭘까, 하는 물음부터 풀어야 할 것 같았다.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으며 주제 사라마구의 글이 술술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쉽지는 않다는 걸 알았기에, 이 책을 읽기 전에 좀 각오를 해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만약 ‘나’라는 존재를 외피와 내면으로 구분할 수 있다면 이름이라는 것은 가장 바깥의 것이지 않을까?  나를 기호화하여 나타낸 것, 그러나 그 기호는 우연히 또는 누군가의 취향에 따라, 아니면 잠시 고민은 했겠지만 내 희망과는 전혀 무관한 부모나 친척들의 바람, 기원에 따라 붙여져 평생 나를 따라다니는 표식이 바로 이름이 아닐까.  이름은 ‘나’라는 실체를 대표하는 기호인 동시에 가장 나와 무관한 것, 사람들은 이름 뒤에 감춰져 있는 ‘나’라는 실체나 삶은 볼 수 없는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 주제씨는 중앙호적등기소의 사무보조원으로 일하고 있는 쉰두 살의 남자다.  그가 하는 일은 중앙호적등기소의 관료체계에서 가장 말단의 일로 사람들의 탄생과 죽음을 서류에 기록하는 것이고 그가 일하는 중앙호적등기소가 중시하는 것 또한 종적인 관료체계이며 정확한 기록과 보존이다.  그러나 종적인 관료체계라는 것이 사무적인 메마른 관계만을 만들어 내는 것인지 사라마구가 드러내는 중앙호적등기소의 풍경은 삭막하고 으스스하며 동료간의 정이나 배려는 찾아볼 수가 없다.  중앙호적등기소의 주업무인 기록과 보존 역시 수많은 이름들이 서류에 기록되고, 그것은 다시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로 구분되어있는데 그에 대한 묘사 역시 건조하고 을씨년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중앙호적등기소의 관료체계나 서류상의 기록이란 결국 사람이 겪는 삶의 희노애락의 풍부한 내용이 쏙 빠져나간 무미건조한 현대의 살풍경과 다름이 없다. 

주제씨는 중앙호적등기소의 직원답게 기록과 수집에 대한 집착을 보인다.  주제씨는 유명인들의 기사와 사진등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졌는데 유명인들은 그가 중앙호적등기소에서 다루는 서류상의 사람들과는 달리 그나마 ‘삶이 드러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드러난 삶이 과연 진짜일까? 신문이나 잡지에 오르내리는 유명인들의 프로필이 믿을 만할까? 주제씨는 어느 날 등기소 건물에 붙어 지어진 초라한 자기 집에서 추기경의 서류를 정리하다가 문득 추기경의 출생과 그의 부모와 대부모가 궁금해졌고 주제씨는 그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집과 등기소를 연결하고 있는 통로의 문을 열고 등기소내로 몰래 들어가 추기경의 서류를 빼낸 뒤 똑같이 위조하여 자신의 수집 파일에 꽂아놓는다.  그 때부터 주제씨의 등기소 서류 빼내기가 시작되었는데 어느 날 유명인들의 서류에 한 여인의 서류가 딸려 오게 된다. 그 이후로 주제씨는 유명인들의 삶이 아니라 서른여섯 살의 이 모르는 여인이 궁금해지기 시작했고 그녀의 삶을 추적하게 된다.

특이한 것은 주제씨가 빠르고 편리한 전화번호부 검색이라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고 멀고도 험한 방법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등기소 서류상의 출생 당시의 주소를 찾아가 위조된 서류를 내밀며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을 탐방하고, 그녀가 다니던 학교에 잠입해서 학생 기록을 찾아내 훔쳐 오고, 그녀의 무덤가에서 밤을 지새우는 식이다.  손만 움직이면 되는 편리한 방법인 ‘기록’으로 쉽게 사람들의 삶을 만나던 방법에서 주제씨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자신의 삶을 던져 그녀와 만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과정에서 주제씨는 모르는 여자의 대모이기도 했던 1층의 노부인을 만나게 된다. 이 책에서 가장 따뜻한 온기를 지닌 사람이며 주제씨의 범죄행위(서류위조, 거짓말, 학교잠입, 절도 등등)에 대한 고백을 들을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역겨운 인간 군상들 속에서도 안과의사의 부인을 통해 희망을 보여주었다면 이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에서는 메마르고 삭막한 삶의 살풍경 속에서 1층 노부인을 통해서 삶의 온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요즘 내가 사람을 만나는 방식은 중앙등기소식이 아닌가 하는 반성도 스쳤는데, 나를 드러내기도 싫고 다른 사람들의 삶에 쓸데없이 관여하기도 싫은 관계는 가히 중앙등기소식의 관계라고 할만하다.  누군가의 앞에서 내 눈물을 보인 것도 또 누군가가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린 것도 언제였는지 까마득하다.

이 책에서 공원묘지의 번호판이 뒤섞이듯 진실과 거짓이 뒤섞이고, 등기소의 산 자와 죽은 자의 서류가 뒤섞이듯 삶과 죽음이 뒤섞이는 세상의 단면을 사라마구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공동묘지가 산 자들의 거주지 틈새로 확장되어 섞여들고, 등기소 소장의 지시로 죽은 자들의 기록이 산 자들의 기록과 함께 섞여 보존되는 서류보관체계의 변화는 삶과 죽음의 분명한 경계가 희미해지는 느낌이 들게 한다.  사람들은 삶과 죽음의 그 아득한 간극에 대해 이야기하곤 한다.  나 또한 가족과 친지들의 죽음을 경험했고 그때마다 아득한 간극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주제 사라마구는 어쩌면 삶을 뒤집으면 죽음이고 죽음을 뒤집으면 삶인, 한 짝의 양말 같은 게 바로 삶과 죽음이라고, 인생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는 “삶이란 이상한 거”(p.272)고, “삶에 설명되지 않는 것은 수없이 많”(p.282)으며, “세상은 아무 의미도 없”(p.291)다면서 “결국 죽음이란 다 똑같은 거야.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섞이고 뒤바뀌면 어때, 어차피 세상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을.”(p.291)이라며 시니컬하게 읊조린다.

주제씨가 그렇게 알고 싶었던 모르는 여자의 아파트로 들어가 그녀의 흔적을 조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면서도 일기장 하나도 찾아보지 않고 둘러만 보고 그냥 나왔던 것은 1층 노부인의 죽음이 암시된 상황에서 그녀의 죽음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자기가 무엇을 조사하든지 그것이 쓸데없는 짓이라고 느꼈는지도 모르고, 이미 그녀가 주제씨의 삶 안에 그녀의 흔적이 필요치 않을 만큼 충분히 새겨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상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냉소적인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다 읽은 후에 가슴 한 구석이 훈훈해져 오는 것은, 결국 나의 삶이 기록되어야 하는 곳은 한 장의 서류가 아니라 타인의 삶 안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일 것이다.  1층의 노부인이나 서른여섯 살의 모르는 여자의 삶이 주제씨의 삶 속에 기록되었듯이, 나의 삶 또한 누군가의 삶 안에 기록되어야 하고, 반대로 나의 삶 또한 누군가의 삶의 기록장이 되어야 한다는, 관계의 희망을 본 것 같다.

아직 풀지 못한 수수께끼도 있다.  등기소 소장이 등기소업무규칙을 중대하게 위배한 주제씨의 행동을 눈감아 줄 뿐 아니라 은밀히 동조한 이유를 풀지 못했다.  소장이 모르는 여자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게 아닐까, 의심했지만 마지막까지 그 이유를 선명하게 밝혀주지 않았다.  한 장의 서류상의 기록 너머에 있는 인간의 삶 안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는 주제씨의 모습에서 소장도 나처럼 관계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동조했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이 소설의 원제는 <ALL THE NAMES>, '모든 이름들‘이다. 모든 이름들은 모든 사람들이고, 다양하고 풍부한 빛깔의 스펙트럼을 가진 모든 삶들이다.  서로에게 아름답게 기록되고 온기를 나눌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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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 강원도 강릉과 속초 쪽으로 3박4일간의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떠나기 전에 강릉에 가면 난 꼭 선교장과 오죽헌, 그리고 허난설헌 생가를 가봐야 한다며 다른 가족들의 불만어린 시선을 무시한 채 고집을 피웠었다. 그 중에서도 허난설헌 생가는 꼭 들러봐야 한다며, 요즘 큰아이가 즐겨 보는 드라마 쾌도 홍길동까지 끌어다 대기도 했는데, 결국 돌아오는 마지막 날에 속초에서 다시 강릉으로 나와 세 집을 다 가보았다.





제일 먼저 찾아간 선교장은 효령대군의 후손들이 10대에 걸쳐 현재까지 살아오며 지키고 있는 300년 된 고택이다.  넓은 터에 시원시원하게 자리 잡은 집들의 배치 때문인지 여기에서 살면 집밖에 나가고 싶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이라 나무도 꽃도 무성하지 않아서 아쉬웠지만 활래정 앞 연못엔 여름이면 연꽃이 만발할 것이고 작약이며 목단화까지 만발하면 아흔아홉 칸 권세가의 집다운 풍모를 더욱 아름답게 돋보이게 해줄 것이 분명했다.
기와지붕의 고운 선 너머로  겨울하늘치고는 푸르고 맑은 하늘과 솔숲의 위용이 눈부셨다. 아이들과 아흔 아홉 칸의 어느 집 지붕 아래 툇마루에 걸터앉아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며 봄이나 여름에 왔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타까워했다.  
선교장 이 곳이 영화 식객의 촬영지이기도 한 모양이었다.  식객을 본 유진이와 명보는 영화에서 보았던 곳을 찾아내며 나름 흥겨워하기도 했다.  선교장 입구에 서있는 장승의 무리들도 재미있었다.  어쩌면 그렇게 다양한 표정들을 하고 있는지 새색시처럼 새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장군이 있는가 하면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대장군도 보였다.  해학과 익살의 장승들을 어디서 이렇게 다 모아다 세워놓았을까.  아이들과 장승들을 보며 한참을 키득거리며 서있었다.





두 번째로 들른 집, 오죽헌.  선교장의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느낌에 비해 오죽헌은 역시나 실망스러웠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 당시 충효사상을 드높인답시고 충을 위해 현충사를, 효를 위해 오죽헌을 정비한 탓이다.  정작 신사임당은 그 ‘효’사상과 ‘현모양처’, ‘율곡의 어머니’라는 굴레를 뒤집어쓴 덕에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니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래저래 이용당하고 치이는 듯해서 언짢았다.  곳곳에 5만원권 지폐에 신사임당이 들어가게 되었다며 자축하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고, 한 곳에는 오만원권 지폐를 크게 만들어서 신사임당의 얼굴 부분을 동그랗게 오려놓고는 그 안에 얼굴을 들이밀고 사진을 찍으라고 세워놓은 것도 있었다. 바깥채 방에는 무슨 서예전 입상자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바람에 한옥 방들의 소박하고 정갈한 정취가 사라져 버렸고, 오죽헌과 신사임당이 율곡을 낳았다는 몽룡실에도 자료랍시고 들여놓은 것들이 많아서 방안이 번잡스러웠다.  유진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기가 본 옛날 집들 중에 가장 천박하고 멋없는 집이라나.. 옆지기와 나는 네가 그것만 느낄 수 있어도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다며 위로했다.  오죽헌은 너무 손을 대서, 너무 기념화하는 바람에 아무 정취도 느낄 수 없는 집이 되고 말았다.  유진이는 사진조차도 찍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허난설헌 생가에 들렀다.  오죽헌과 선교장은 곳곳에 안내 표지판이 붙어 있어 찾아가기가 무척 쉬웠는데 초당에 있는 허난설헌 생가는 찾아가기가 쉽지는 않았다.  네비게이션에 ‘허난설헌 생가’를 검색해 봐도 나오질 않았다. 나중에 보니까 네비게이션에는 ‘허균, 허난설헌 생가’라고 입력되어 있었던 거였다.  허난설헌 생가를 꼭 가보고 싶었던 것은 얼마 전에 읽었던 김선우 시인의 <물밑에 달이 열릴 때>라는 산문집에 허난설헌 생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었다. 김선우 시인은 열 살 때 허난설헌 생가를 우연히 찾게 되었고 ‘돌담을 끼고 돌다 대문에 들어서 안채를 지나 또 다른 작은 문을 통과해 뒤꼍에 이르기까지, 열 살배기 아이에게 그 집은 출구와 입구가 분간되지 않는 이상한 정원이었습니다.’라는 글로 그 곳을 표현하고 있었다.  ‘솔숲 언저리에 맞춤하게 자리 잡은 저 단정한 미음자 고택은 당시의 양반집들이 흔히 그러했을 등등한 기세가 없었습니다. 솔숲이 허락하여 내어준 자리에 숲과 하늘을 공경하기 위해 지어진 사당처럼, 아담한 미음자의 담장은 하늘을 향하여 열려 있으나 인간에 대하여는 완고하게 닫혀 있는 듯도 보’였으며 시인에게 쉼터가 되고 기도처가 되었으며 이곳에서 하릴없이 낮잠으로 시간을 보내곤 했다고.
또 <난설헌, 나는 시인이다>를 출간되기 전에 미리 읽은 덕이기도 했고, <조선의 여인들>이라는 책에서도 난설헌 허초희에 대한 부분을 찾아 읽으며 허난설헌 생가에 대한 내 상상력을 자극받았던 것이다.
좁은 주택가 길을 꼬불꼬불 돌아서 찾아낸 허난설헌 생가.  아름다운 솔숲을 배경으로 나지막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입장료도 없었고, 지키고 있는 사람 하나도 없었다.  눈이 녹아 진흙탕이 되어버린 고택 입구에서 잠시 우리가족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난감해 했다. 질퍽이는 땅에 신발을 엉망으로 만들어가며 들어간 고택은 너무 초라하게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야 앞에 언급한 책들을 통해서 허난설헌에 대한 상상력이라도 제공받았다지만 엄마에게 몇 마디 주워들은 게 전부인 아이들은 황당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한편으론 미안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화가 나면서 마늘밭에서 뒹군 것처럼 마음이 아렸다.
선교장이나 오죽헌은 지배자들의 통치이념에 부합한 장소로 그동안 보살핌을 받아온 곳이었다.  선교장은 왕가의 자손들이 터를 잡고 살던 곳이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돈궤가 있음을 자랑하는 곳이며 넓고 시원한 터에 선비들의 풍류가 흐르던 곳이 바로 선교장이다.  오죽헌은 그 유명한 율곡 이이가 낳아 자란 곳이며 현대에 와서는 군부가 내세운 통치이념에 이용되었다고는 하나 그덕에 깨끗하게 보존되고 관리되는 곳이다.  그러나 이 곳은 그 당시에 중국에까지 시인으로 명성을 얻었으나 유교적인 가부장권 사회에서 사대부 남성들의 비난과 놀림을 받다가 스물일곱의 나이로 요절한 비운의 여인 난설헌 허초희와 당시 지배계급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던 허균이 태어난 집이라서 이리도 아무렇게나 내쳐진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허난설헌 생가를 돌아보는 내 표정이 어두워지는 걸 옆지기가 눈치챘나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강릉에 유명한 카페가 있다며 차를 그곳으로 몰았다. 테라로사라는 카페였다. 커피와 빵이 하도 맛있어서 청담동까지 진출(?)한 유명한 카페란다.  강릉 시내에서도 한참을 가서 정말 아는 사람만 찾아올 듯한 장소에 멋진 카페가 있었다.  생커피콩 자루가 잔뜩 쌓
여있고 그 커피콩을 볶는 공장이 카페 안에 있었다.  하우스 브랜드 커피와 함께 마들렌, 독일에선가 크리스마스에 먹는다는 슈톨렌, 이나카를 시켜서 먹고는 기분을 풀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늘에 보름달이 떴다.  저 보름달이 허난설헌 생가를 처연하게 비치고 있겠지, 그 외롭고 쓸쓸하고 슬픈 집.  집에 와서도 한동안 그 집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요즘 햇볕이 따사롭다. 노란 봄햇살을 보며 허난설헌 생가에도 찾아들었을 봄을 상상한다.  조금 덜 쓸쓸하고 초라하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질퍽이던 진흙탕 마당에도 꼬물꼬물 흙을 비집고 작은 들풀 새싹들이 초록빛을 빨아올리고 있을 것이다. 김선우 시인이 말했던 능소화나 백일홍, 왕벚꽃나무도 슬슬 기지개를 켜지 않을까. 언젠가 봄이나 여름에 강릉에 가게 된다면 다시 찾고 싶다.  꼭 그래야 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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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 -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지독한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온화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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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연민’이라는 감정, 사랑이라든가 우정이라든가 또는 질투나 좀 더 고상한 인간애 같은 감정들에 비해 이야깃거리가 그다지 풍성할 것 같지 않은, 어딘지 슬프고 처량한 분위기를 가진 그 감정에 대해서 풀어낼 글이 이렇게도 많을 수 있다는 것에 우선 놀랐다.  처음 책을 펼쳐들고는 페이지마다 촘촘히 박혀있는 활자들이 무척 뜻밖이었던 것도, 제목에서 풍기는 여리고 아련한 분위기와 빽빽한 활자들이 풍기는 분위기가 정반대였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연민이라는 감정을 통해 인간 이중성과 그 내면을 파헤친 이 소설은 기병대 소위인 토니 호프밀러가 주둔지역의 갑부이자 귀족인 케케스팔바의 딸 에디트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에디트가 중추신경계 마비로 걸을 수 없다는 것을 몰랐던 호프밀러는 케케스팔바의 성에 초대되어 무도회가 열렸을 때 에디트에게 춤을 신청한다.  파티를 연 집주인의 딸에 대한 예의를 차린답시고 춤을 신청한 호프밀러의 행동은 에디트에게 히스테릭한 발작을 일으켰고 이 사건을 계기로 호프밀러는 케케스팔바가와 피해갈 수 없는 운명으로 엮이고 만다.

장애를 가진 에디트에게 연민을 느낀 호프밀러는 케케스팔바의 성을 자주 방문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호프밀러가 자기도 모르게 군대라는 건장하고 젊고 씩씩한 남성의 세계를 우울과 극단의 자괴감이라는 먼지를 뒤집어쓴, 깨지기 쉬운 유리로 지은 성과 같이 불안한 케케스팔바가로 끌고 들어갔던 것이었다. 그런 호프밀러 덕분에 늘 어둡고 우울했던 케케스팔바家에는 웃음이 찾아오게 되어, 장애를 가진 딸 에디트 때문에 노심초사하던 케케스팔바는 호프밀러에게 감동하며 감사의 표현을 한다.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공무원 가정에서 태어나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고 성장한 호프밀러는 부유한 귀족인 케케스팔가로부터 받는 남다른 대접과 진정이 담긴 감사의 표현에 감동하면서 케케스팔바가와 인연을 이어가고 연민을 느끼면서 ‘자기 존재의 의미와 사명감’(p.63)을 느낀다. 

그러나 호프밀러가 에디트에게 느끼는 연민의 감정은 그의 영웅주의를 자극하고 자신의 가치를 확인시켜주는 유희적이고 쾌락적이며 가식적이고 미숙한 감정이었다.  더구나 스물다섯 살의 활달한 그는 감정에 치우치고 즉흥적인데다 성급하고 다분히 유아적 성향의 성격이라 자기가 가진 연민의 감정이 장벽을 만날 때마다 도망치고 숨기 바쁘다.  호프밀러에게 소중한 것은 연민의 대상인 에디트가 아니라 영웅스러운 모습으로 연민하고 있는 슈퍼맨 콤플렉스에 빠진 자아도취며 자족감이었던 것이다.  결국 에디트가 자기에게 보내는 집착과 사랑, 그리고 그 자신이 연민의 감정에 취해 과장했던 모든 말과 행동이 올가미가 되어 자신을 짓눌러오자 식은땀을 흘리며 허둥대며 비극적인 결말을 자초하고 만다.

그에 비해 에디트를 치료하는 의사 콘도르는 호프밀러와 대조적인 연민의 모습을 보인다.  콘도르의 원칙적이고도 확고하고 일관될 뿐 아니라 노련하고 치밀한 자기희생적 행동은 그래서 더욱 돋보인다.  콘도르는 ‘반만 행한 일과 반만 내뱉은 암시는 언제나 악의 원인이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악은 어중간하기 때문입니다.’(p.123)라거나 ‘빌어먹을 연민은 양면이 모두 날카로운 칼입니다. 그걸 잘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은 연민에서 손을, 아니 마음을 놓아야 합니다.’(p.222)와 같은 말로 호프밀러의 어중간하고 어설픈 연민이 나쁜 결과를 낳을 것임을 암시하고 경고한다.  그래서 에디트와 케케스팔바에게 완치에 대한 허황된 희망을 불어넣은 것을 후회하면서 호프밀러가 자신의 입을 통해 ‘나는 이 세상에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은 악이나 야만적 행위 때문이 아니라 거의 언제나 우유부단함 때문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기 시작했다.’(p.233)고 고백하는 장면은 더욱 안타깝다. 

호프밀러는 결국 1차 세계대전의 회오리 속으로 도피한다.  자신의 무책임한 연민 때문에 가여운 소녀의 생명이 희생되었다는 자책감을 짊어지고, 참혹한 전쟁터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을 극단으로 몰아갔던 덕에 그는 전쟁영웅이 되고 훈장을 받지만, 그의 훈장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과거를 상징하는 것이기에 세인들의 추앙과 존경을 거부하며 살아가게 된다.  그 자신이 에디트와의 관계 때문에 군대 동기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거나 비웃음을 사게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던 호프밀러는 노인이 되어 이렇게 말한다.
‘어떤 조직에 맞서는 개인의 저항은 조직에 순응하는 것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런 개인적 용기는 모든 것이 조직화되고 기계화된 우리 시대엔 이미 소멸되고 없는 것입니다.  나는 지난 번 전쟁 때 군중의 용기라는 것이 기껏 일렬종대 내에서의 용기임을 깨달았을 뿐입니다.  이를 현미경으로 관찰한 사람은 아주 희귀한 요소들을 발견할 겁니다.  수많은 허영심과 경솔함, 심지어 지루함과 두려움까지도.... 그래요, 뒤처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조소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독단적인 행동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동감 넘치는 다른 무리들과 반대 입장에 서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전투에서 가장 용감하다고 인정받은 사람들의 대부분을 심히 의심스러운 영웅이라고 생각합니다.’(p.13) 라고.

이 책을 읽는 동안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연민하는지, 어떤 책임이나 자기희생의 요구로부터 도피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가 표면에 드러내는 자신감이나 남들보다 우수한 부분이 아픈 죄책감이나 열등감 혹은 상처를 가리려고 안간힘을 쓴 결과가 아닌지, 상처입지 않을 만큼의 선함이나 손해 보지 않을 만큼의 동정심이라는 건 결국 악과 동의어는 아니었는지, 자꾸 질책어린 소리가 들려와 마음이 어수선해졌다.  전쟁이나 기아, 폭력과 권력 앞에 희생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어설픈 싸구려 연민들, 골치 아픈 세상을 향해 적당히 눈감고 고개를 슬쩍 비껴 돌려버린 우리의 어중간한 자세는 콘도르의 말마따나 ‘악’이라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에 부인과 함께 동반 자살했다는 작가의 마지막 모습은 소설의 결말과 함께 애잔함을 더한다.  호프밀러의 갈팡질팡하는 모습과 널뛰는 것 같은 감정의 기복이 반복되는 것이 다소 지루한 감이 없지 않지만, 인간의 이중적인 내면과 위선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작가의 진지한 문장을 만나는 즐거움이 그 지루함을 상쇄하고도 남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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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 -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지독한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온화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07년 12월
절판


어떤 조직에 맞서는 개인의 저항은 조직에 순응하는 것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런 개인적 용기는 모든 것이 조직화되고 기계화된 우리 시대엔 이미 소멸되고 없는 것입니다. 나는 지난 번 전쟁 때 군중의 용기라는 것이 기껏 일렬종대 내에서의 용기임을 깨달았을 뿐입니다. 이를 현미경으로 관찰한 사람은 아주 희귀한 요소들을 발견할 겁니다. 수많은 허영심과 경솔함, 심지어 지루함과 두려움까지도.... 그래요, 뒤처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조소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독단적인 행동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동감 넘치는 다른 무리들과 반대 입장에 서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전투에서 가장 용감하다고 인정받은 사람들의 대부분을 심히 의심스러운 영웅이라고 생각합니다.-13쪽

우리는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의미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는 바로 그 순간, 비로소 자기 존재의 의미와 사명감을 느낀다. -63쪽

일종의 구속이라는 형식이 영혼의 본래적 힘들을 묶어준다는 것을, 그리고 인간의 진정한 도량은 자유로울 때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진심어린 이야기와 장난을 나눴다.-64쪽

새로운 것을 인식할 때마다 흥분하고, 일단 어떤 감정으로 뒤흔들리면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청춘의 특징이다. -68쪽

희생하면 할수록 성장하고, 모든 사람의 운명에 형제애를 느끼고 모든 고통에 연민을 가지면 가질수록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스스로에게 놀라고 있는 내 가슴은, 나도 모르게 마음을 아프게 했던, 그리고 자신의 고통을 통해 창조적인 연민의 마법을 내게 가르쳐준 그 환자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69쪽

열정적인 불륜에 빠진 것처럼 이 미묘한 쾌락에 빠져있는 나를 이해할 수 이단 말인가!-76쪽

진정한 관심을 전류처럼 켰다껐다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남의 운명에 참여한 사람은 자신의 자유를 빼앗긴다는 것을 처음으로 예감했다. -78쪽

가장 기이한 우연이 언제나 운명을 정하고, 가장 사소한 외모가 용기를 주거나 빼앗기도 한다. -118쪽

그러나 아십니까? 불안이 만성이 되고 나면 인내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119 쪽

왜냐하면 비극적이고 위험한 일은 오직 젊은 사람에게만 특별한 매력을 주거든요.-122쪽

반만 행한 일과 반만 내뱉은 암시는 언제나 악의 근원이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악은 어중간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123쪽

열등감보다 더 천한 것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하찮은 일을 하던 동료가 어느 날 갑자기 천사처럼 날개짓하자 신분이 상승되었을 때 사람들이 느끼는 그런 시기질투랍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같은 멍에를 짊어진 운명의 동지보다는 귀족이 엄청난 부를 차지하는 걸 더 편안해 하거든요. -152쪽

당신은 웃을지 모르지만, 광기는 열정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172쪽

어떤 병이든 병은 그 자체로 무정부주의적인 행위이고 자연에 대한 저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병에 대항하여 모든 수단을, 정말 모든 수단을 동원해도 됩니다만 환자에게 연민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환자는 스스로를 '치외법권'으로 만듭니다. 그리고는 법과 질서를 거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자 주위에 질서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그 어떤 항거에도 불구하고 무자비하게 손에 잡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이용해야 합니다. 그것은 선과 진리가 한 명의 인간도 구원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183쪽

모든 감정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행복한 상태에도 언제나 마취적인 면이 있게 마련이다. 집중해서 순간을 즐기면 과거를 잊어버릴 수 있다. -196쪽

당신이 연민 때문에, 그러니까 아주 고상하고 아주 좋은 의도에서 마음이 약해져버렸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내가 이미 당신에게 한번 경고를 했다고 생각합니다만- 빌어먹을 연민은 양면이 모두 날카로운 칼입니다. 그걸 잘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은 연민에서 손을, 아니 마음을 놓아야 합니다. 연민은 모르핀과 같습니다. 처음에만 환자를 위한 위로이고 치료제이며 약이 되지요.
그러나 이걸 정확하게 조제할 줄 모르고, 적당한 시기에 멈출 줄 모르면 독약이 되고 맙니다. (중략) 우리는 연민을 제대로 관리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관심보다도 더 나쁜 해를 끼치게 됩니다. 우리 의사들을 그것을 알고 있고, 판사와 경찰과 전당포 주인까지도 그걸 압니다. 위험한 것이지요. 연민은 위험한 것입니다! -222쪽

연민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연민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으로, 남의 불행을 보고 느낀 괴로운 충격으로부터 가능한 빨리 벗어나려는 조급한 마음입니다. 이것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라 남의 고통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자기 자신의 영혼을 방어하려는 본능적 욕망일 뿐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연민이기도 합니다만- 감상적이지 않은, 창조적인 연민입니다. 이 연민은 인내하며 참으면서 자기의 힘이 한계에 부딪칠 때까지, 아니 그 이상까지 견디기로 결심하는 것, 그것이 자기의 임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최악의 비참한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갈 수 있을 때에만 지치지 않는 인내심을 가지고 있을 때에먄 사람을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까지 희생할 수 있을 때에먄 가능한 것입니다!-223쪽

나는 이 세상에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은 악이나 야만적 행위 때문이 아니라 거의 언제나 우유부단함 때문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기 시작했다. -233쪽

이 순간 우리가 서투른 연민으로 서로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줄 수 있는가에 대해 처음으로, 그리고 뼈저리게 경험했다. 처음으로, 그리고 너무 늦게. -291쪽

우리의 행동에서 허영심은 가장 강력한 추진력 중의 하나이고, 성격이 유약한 사람들은 용기와 결단력처럼 보이는 무엇인가 하자는 유혹에 특히 잘 넘어간다.-310쪽

사랑은 가장 은밀한 본성에 따라 항상 무한한 것을 원하기 때문에 적당한 것이나 절제된 것을 다 역겹게 여길 수밖에 없고, 참을 수도 없다. 사랑은 상대방의 주저함이나 어색함에서 저항을 느끼고, '자기를 완전히 내주기를 꺼려하는 것'을 보면 당연히 저항감을 숨겼다는 것을 안다.-346쪽

예측할 수 없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만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반대로 모든 제한적인 것과 확정적인 것은 시험을 요구하고 우리의 힘의 잣대가 된다.-351쪽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거나 숨겨야 하는 사람은 열리고 자유로운 시선을 잃어버린다.-364쪽

양심이 알고 있는 한 그 어떤 죄도 결코 망각되지 않는다.-4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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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보다 소중한 우리미술가 33 - 오늘의 한국미술대가와 중진작가 33인을 찾아서
임두빈 지음 / 가람기획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현대 미술 작품을 보면 늘 당황하곤 했다.  아마 작품이 전시장 벽에 걸려 있는 게 아니라 어디 바닥에라도 놓여있었다면 상하좌우를 구분하기 어려운 작품들도 허다했다.  오랜 시간과 미술 비평가들이 훌륭하다고 검증해준 유명한 화가와 작품이 아니라면 -박수근이나 이중섭 같은- 현대화가의 이름은 낯설고 그들의 작품은 더욱 난해하기만 했다.

유명한 서양화가들의 전시회를 비싼 입장료를 지불해가며 수많은 인파들 사이에서 감상인지 눈도장인지 모르게 둘러보고 나오면, 어쩐지 ‘이게 아닌데..’하는 느낌, 아무리 유명하고 휼륭하다 해도 내 정서와는 맞지 않는 듯한 느낌에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어정쩡해지곤 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옛 미술작품들은 어떨까 싶어 기웃거려 보기도 했다. 옛 그림들 역시 나 같은 문외한은 누군가의 친절한 설명이 없으면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의 문맹과 다름이 없었다.  게다가 옛 그림들을 보고 있자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선조들의 숨결이 느껴져 뿌듯해지긴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현재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긴 어려웠다.

따라서 누군가 지금 우리와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는 우리 화가와 그의 작품에 대해 가르쳐준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현대 미술의 난해함과 서양화가들의 유명작품과 우리 정서와의 불일치, 우리 옛 그림과 나 사이에 가로 놓인 시간의 두께에 대한 답답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나라의 현역 미술가 33인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이 책이 내 관심을 끌어당긴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다행히도 저자가 내 기대를 배반하지 않아서 우리나라 현대 미술의 대표 화가 33인과 그 작품들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무척 시원시원했다.  아무렇게나 휘두른 듯한 붓 자국이 난무하는 작품 속에서 ‘역동적인 회화미’라든가 ‘작가의 디오니소스적 충동’이라든가 ‘설화적이고 신화적인 정조’ 또는 ‘해방감과 자유의 감정’을 느끼고 발견하는 것은 나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기에 이 책의 가치가 더욱 부각되는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으면서 한 작가를 지켜보는 일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 책은 아무데나 펼쳐도 33인의 미술가들의 작품들을 한두 개쯤은 볼 수 있을 정도로 작품의 사진 자료가 비교적 풍부한 편이다. 그래서인지 작가가 추구해온 미술세계의 커다란 흐름이랄까 분위기랄까 하는 것들이 미약하게나마 느껴지기도 했던 것이다.  어쩌다 한 번 전시회를 구경(?)갔다 와서는 작품을 이해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허무맹랑한 희망사항일 뿐이며 작가의 예술적 열망과 창작의 노고에 대한 모욕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한 작가의 작품이 마음속으로 스며들어올 수 있도록 시간을 두고 오래도록 소중하게 그림을 바라보는 일, 어쩌다 한 번씩이 아니라 애정을 갖고 전시회를 지속적으로 찾아가는 발품과 마음씀을 잊지 않는 일이 현대미술을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저자가 4년여의 시간과 혼탁한 미술계에서 보석을 건져내 그 가치를 재조명하는 공을 들여 세상에 내놓은 책이니만큼 그 의의도 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책을 읽다가 몇 가지 아쉬운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두식 화가에 대한 글에서 마지막 글 마무리가 이상하게 끊겨 있었다. 아무래도 출판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던 것 같은데 2쇄에서는 바로잡아야 할 것 같다.

또 하나는 저자의 글에서 설명하고 있는 작품이 책에 실려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이왕에 작품을 실을 거라면 저자가 글에서 언급하고 있는 작품을 실어주는 편이 독자 입장에서 책을 읽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저자의 작품 설명을 읽고 그 작품 사진을 찾는데 없을 경우 무척 실망스러웠다.  또 하나는 작품 사진에 적어도 작가와 작품명, 작품크기, 재료, 작품제작연도 정도는 빠짐없이 표기해주었으면 좋겠다.  예를 들어 이두식 화백의 작품은 모두 11개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 사진 밑에 모두 ‘이두식’이라고만 되어 있을 뿐 작품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그래서 ‘2005년에 그린 그의 작품을 보자’(p.178)는 저자의 글이 무척 당황스러웠다.  또 임영길 화백에 대한 글에서는 그의 <철학적인 불>이라는 작품에 대한 설명이 강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그 작품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밖에 원문자 화백의 작품은 작품 3개에만 그나마 2004년이라는 작품연도가 적혀 있엇고 나머지 작품에는 <사유공간>이라는 제목 하나만 있을 뿐이다.  심재현 조각가의 작품도 <그늘 날개>를 제외하고는 작품명, 크기, 제작연도가 모두 전무했다.  서승원 화백의 작품들도 <동시성>이라는 제목만 있었고, 작품명이 아예 없는 작품도 하나 있었다. 저자의 노고에 비해 출판의 세심함이 충분히 미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리고 33인의 작가 중 홍익대 출신이거나 홍익대와 관련이 있는 작가가 23명이었고 서울대 출신 화가가 4명, 그 외가 6명이었다.  홍익대 미대의 명성이야 모르고 있는 바가 아니지만 저자의 모교가 홍익대라서 그런지 유난히 홍익대 출신 화가들에 대한 글이 많은 것이 어쩐지 불편했다.  저자가 주창한 것으로 보이는 ‘범생명적 초월주의’에 참여한 듯한 몇몇 작가들에 대한 글들을 읽을 때에도 좀 생뚱맞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적인 느낌이며 이 느낌이 내 치졸하고 못난 의심증에 불과하다고 믿고 싶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아직 소개하지 않은 훌륭한 작가분들이 여러 명 있었는데, 그 분들은 다음에 집필할 책에 반드시 소개할 생각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다음에 나올 책에는 저자의 깊은 심미안과 탁월한 문력(文力)이 더욱 강한 힘을 보이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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