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송필환 옮김 / 해냄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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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이름이란 뭘까, 하는 물음부터 풀어야 할 것 같았다.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으며 주제 사라마구의 글이 술술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쉽지는 않다는 걸 알았기에, 이 책을 읽기 전에 좀 각오를 해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만약 ‘나’라는 존재를 외피와 내면으로 구분할 수 있다면 이름이라는 것은 가장 바깥의 것이지 않을까?  나를 기호화하여 나타낸 것, 그러나 그 기호는 우연히 또는 누군가의 취향에 따라, 아니면 잠시 고민은 했겠지만 내 희망과는 전혀 무관한 부모나 친척들의 바람, 기원에 따라 붙여져 평생 나를 따라다니는 표식이 바로 이름이 아닐까.  이름은 ‘나’라는 실체를 대표하는 기호인 동시에 가장 나와 무관한 것, 사람들은 이름 뒤에 감춰져 있는 ‘나’라는 실체나 삶은 볼 수 없는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 주제씨는 중앙호적등기소의 사무보조원으로 일하고 있는 쉰두 살의 남자다.  그가 하는 일은 중앙호적등기소의 관료체계에서 가장 말단의 일로 사람들의 탄생과 죽음을 서류에 기록하는 것이고 그가 일하는 중앙호적등기소가 중시하는 것 또한 종적인 관료체계이며 정확한 기록과 보존이다.  그러나 종적인 관료체계라는 것이 사무적인 메마른 관계만을 만들어 내는 것인지 사라마구가 드러내는 중앙호적등기소의 풍경은 삭막하고 으스스하며 동료간의 정이나 배려는 찾아볼 수가 없다.  중앙호적등기소의 주업무인 기록과 보존 역시 수많은 이름들이 서류에 기록되고, 그것은 다시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로 구분되어있는데 그에 대한 묘사 역시 건조하고 을씨년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중앙호적등기소의 관료체계나 서류상의 기록이란 결국 사람이 겪는 삶의 희노애락의 풍부한 내용이 쏙 빠져나간 무미건조한 현대의 살풍경과 다름이 없다. 

주제씨는 중앙호적등기소의 직원답게 기록과 수집에 대한 집착을 보인다.  주제씨는 유명인들의 기사와 사진등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졌는데 유명인들은 그가 중앙호적등기소에서 다루는 서류상의 사람들과는 달리 그나마 ‘삶이 드러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드러난 삶이 과연 진짜일까? 신문이나 잡지에 오르내리는 유명인들의 프로필이 믿을 만할까? 주제씨는 어느 날 등기소 건물에 붙어 지어진 초라한 자기 집에서 추기경의 서류를 정리하다가 문득 추기경의 출생과 그의 부모와 대부모가 궁금해졌고 주제씨는 그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집과 등기소를 연결하고 있는 통로의 문을 열고 등기소내로 몰래 들어가 추기경의 서류를 빼낸 뒤 똑같이 위조하여 자신의 수집 파일에 꽂아놓는다.  그 때부터 주제씨의 등기소 서류 빼내기가 시작되었는데 어느 날 유명인들의 서류에 한 여인의 서류가 딸려 오게 된다. 그 이후로 주제씨는 유명인들의 삶이 아니라 서른여섯 살의 이 모르는 여인이 궁금해지기 시작했고 그녀의 삶을 추적하게 된다.

특이한 것은 주제씨가 빠르고 편리한 전화번호부 검색이라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고 멀고도 험한 방법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등기소 서류상의 출생 당시의 주소를 찾아가 위조된 서류를 내밀며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을 탐방하고, 그녀가 다니던 학교에 잠입해서 학생 기록을 찾아내 훔쳐 오고, 그녀의 무덤가에서 밤을 지새우는 식이다.  손만 움직이면 되는 편리한 방법인 ‘기록’으로 쉽게 사람들의 삶을 만나던 방법에서 주제씨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자신의 삶을 던져 그녀와 만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과정에서 주제씨는 모르는 여자의 대모이기도 했던 1층의 노부인을 만나게 된다. 이 책에서 가장 따뜻한 온기를 지닌 사람이며 주제씨의 범죄행위(서류위조, 거짓말, 학교잠입, 절도 등등)에 대한 고백을 들을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역겨운 인간 군상들 속에서도 안과의사의 부인을 통해 희망을 보여주었다면 이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에서는 메마르고 삭막한 삶의 살풍경 속에서 1층 노부인을 통해서 삶의 온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요즘 내가 사람을 만나는 방식은 중앙등기소식이 아닌가 하는 반성도 스쳤는데, 나를 드러내기도 싫고 다른 사람들의 삶에 쓸데없이 관여하기도 싫은 관계는 가히 중앙등기소식의 관계라고 할만하다.  누군가의 앞에서 내 눈물을 보인 것도 또 누군가가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린 것도 언제였는지 까마득하다.

이 책에서 공원묘지의 번호판이 뒤섞이듯 진실과 거짓이 뒤섞이고, 등기소의 산 자와 죽은 자의 서류가 뒤섞이듯 삶과 죽음이 뒤섞이는 세상의 단면을 사라마구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공동묘지가 산 자들의 거주지 틈새로 확장되어 섞여들고, 등기소 소장의 지시로 죽은 자들의 기록이 산 자들의 기록과 함께 섞여 보존되는 서류보관체계의 변화는 삶과 죽음의 분명한 경계가 희미해지는 느낌이 들게 한다.  사람들은 삶과 죽음의 그 아득한 간극에 대해 이야기하곤 한다.  나 또한 가족과 친지들의 죽음을 경험했고 그때마다 아득한 간극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주제 사라마구는 어쩌면 삶을 뒤집으면 죽음이고 죽음을 뒤집으면 삶인, 한 짝의 양말 같은 게 바로 삶과 죽음이라고, 인생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는 “삶이란 이상한 거”(p.272)고, “삶에 설명되지 않는 것은 수없이 많”(p.282)으며, “세상은 아무 의미도 없”(p.291)다면서 “결국 죽음이란 다 똑같은 거야.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섞이고 뒤바뀌면 어때, 어차피 세상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을.”(p.291)이라며 시니컬하게 읊조린다.

주제씨가 그렇게 알고 싶었던 모르는 여자의 아파트로 들어가 그녀의 흔적을 조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면서도 일기장 하나도 찾아보지 않고 둘러만 보고 그냥 나왔던 것은 1층 노부인의 죽음이 암시된 상황에서 그녀의 죽음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자기가 무엇을 조사하든지 그것이 쓸데없는 짓이라고 느꼈는지도 모르고, 이미 그녀가 주제씨의 삶 안에 그녀의 흔적이 필요치 않을 만큼 충분히 새겨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상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냉소적인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다 읽은 후에 가슴 한 구석이 훈훈해져 오는 것은, 결국 나의 삶이 기록되어야 하는 곳은 한 장의 서류가 아니라 타인의 삶 안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일 것이다.  1층의 노부인이나 서른여섯 살의 모르는 여자의 삶이 주제씨의 삶 속에 기록되었듯이, 나의 삶 또한 누군가의 삶 안에 기록되어야 하고, 반대로 나의 삶 또한 누군가의 삶의 기록장이 되어야 한다는, 관계의 희망을 본 것 같다.

아직 풀지 못한 수수께끼도 있다.  등기소 소장이 등기소업무규칙을 중대하게 위배한 주제씨의 행동을 눈감아 줄 뿐 아니라 은밀히 동조한 이유를 풀지 못했다.  소장이 모르는 여자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게 아닐까, 의심했지만 마지막까지 그 이유를 선명하게 밝혀주지 않았다.  한 장의 서류상의 기록 너머에 있는 인간의 삶 안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는 주제씨의 모습에서 소장도 나처럼 관계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동조했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이 소설의 원제는 <ALL THE NAMES>, '모든 이름들‘이다. 모든 이름들은 모든 사람들이고, 다양하고 풍부한 빛깔의 스펙트럼을 가진 모든 삶들이다.  서로에게 아름답게 기록되고 온기를 나눌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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