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 -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지독한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온화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연민’이라는 감정, 사랑이라든가 우정이라든가 또는 질투나 좀 더 고상한 인간애 같은 감정들에 비해 이야깃거리가 그다지 풍성할 것 같지 않은, 어딘지 슬프고 처량한 분위기를 가진 그 감정에 대해서 풀어낼 글이 이렇게도 많을 수 있다는 것에 우선 놀랐다.  처음 책을 펼쳐들고는 페이지마다 촘촘히 박혀있는 활자들이 무척 뜻밖이었던 것도, 제목에서 풍기는 여리고 아련한 분위기와 빽빽한 활자들이 풍기는 분위기가 정반대였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연민이라는 감정을 통해 인간 이중성과 그 내면을 파헤친 이 소설은 기병대 소위인 토니 호프밀러가 주둔지역의 갑부이자 귀족인 케케스팔바의 딸 에디트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에디트가 중추신경계 마비로 걸을 수 없다는 것을 몰랐던 호프밀러는 케케스팔바의 성에 초대되어 무도회가 열렸을 때 에디트에게 춤을 신청한다.  파티를 연 집주인의 딸에 대한 예의를 차린답시고 춤을 신청한 호프밀러의 행동은 에디트에게 히스테릭한 발작을 일으켰고 이 사건을 계기로 호프밀러는 케케스팔바가와 피해갈 수 없는 운명으로 엮이고 만다.

장애를 가진 에디트에게 연민을 느낀 호프밀러는 케케스팔바의 성을 자주 방문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호프밀러가 자기도 모르게 군대라는 건장하고 젊고 씩씩한 남성의 세계를 우울과 극단의 자괴감이라는 먼지를 뒤집어쓴, 깨지기 쉬운 유리로 지은 성과 같이 불안한 케케스팔바가로 끌고 들어갔던 것이었다. 그런 호프밀러 덕분에 늘 어둡고 우울했던 케케스팔바家에는 웃음이 찾아오게 되어, 장애를 가진 딸 에디트 때문에 노심초사하던 케케스팔바는 호프밀러에게 감동하며 감사의 표현을 한다.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공무원 가정에서 태어나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고 성장한 호프밀러는 부유한 귀족인 케케스팔가로부터 받는 남다른 대접과 진정이 담긴 감사의 표현에 감동하면서 케케스팔바가와 인연을 이어가고 연민을 느끼면서 ‘자기 존재의 의미와 사명감’(p.63)을 느낀다. 

그러나 호프밀러가 에디트에게 느끼는 연민의 감정은 그의 영웅주의를 자극하고 자신의 가치를 확인시켜주는 유희적이고 쾌락적이며 가식적이고 미숙한 감정이었다.  더구나 스물다섯 살의 활달한 그는 감정에 치우치고 즉흥적인데다 성급하고 다분히 유아적 성향의 성격이라 자기가 가진 연민의 감정이 장벽을 만날 때마다 도망치고 숨기 바쁘다.  호프밀러에게 소중한 것은 연민의 대상인 에디트가 아니라 영웅스러운 모습으로 연민하고 있는 슈퍼맨 콤플렉스에 빠진 자아도취며 자족감이었던 것이다.  결국 에디트가 자기에게 보내는 집착과 사랑, 그리고 그 자신이 연민의 감정에 취해 과장했던 모든 말과 행동이 올가미가 되어 자신을 짓눌러오자 식은땀을 흘리며 허둥대며 비극적인 결말을 자초하고 만다.

그에 비해 에디트를 치료하는 의사 콘도르는 호프밀러와 대조적인 연민의 모습을 보인다.  콘도르의 원칙적이고도 확고하고 일관될 뿐 아니라 노련하고 치밀한 자기희생적 행동은 그래서 더욱 돋보인다.  콘도르는 ‘반만 행한 일과 반만 내뱉은 암시는 언제나 악의 원인이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악은 어중간하기 때문입니다.’(p.123)라거나 ‘빌어먹을 연민은 양면이 모두 날카로운 칼입니다. 그걸 잘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은 연민에서 손을, 아니 마음을 놓아야 합니다.’(p.222)와 같은 말로 호프밀러의 어중간하고 어설픈 연민이 나쁜 결과를 낳을 것임을 암시하고 경고한다.  그래서 에디트와 케케스팔바에게 완치에 대한 허황된 희망을 불어넣은 것을 후회하면서 호프밀러가 자신의 입을 통해 ‘나는 이 세상에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은 악이나 야만적 행위 때문이 아니라 거의 언제나 우유부단함 때문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기 시작했다.’(p.233)고 고백하는 장면은 더욱 안타깝다. 

호프밀러는 결국 1차 세계대전의 회오리 속으로 도피한다.  자신의 무책임한 연민 때문에 가여운 소녀의 생명이 희생되었다는 자책감을 짊어지고, 참혹한 전쟁터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을 극단으로 몰아갔던 덕에 그는 전쟁영웅이 되고 훈장을 받지만, 그의 훈장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과거를 상징하는 것이기에 세인들의 추앙과 존경을 거부하며 살아가게 된다.  그 자신이 에디트와의 관계 때문에 군대 동기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거나 비웃음을 사게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던 호프밀러는 노인이 되어 이렇게 말한다.
‘어떤 조직에 맞서는 개인의 저항은 조직에 순응하는 것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런 개인적 용기는 모든 것이 조직화되고 기계화된 우리 시대엔 이미 소멸되고 없는 것입니다.  나는 지난 번 전쟁 때 군중의 용기라는 것이 기껏 일렬종대 내에서의 용기임을 깨달았을 뿐입니다.  이를 현미경으로 관찰한 사람은 아주 희귀한 요소들을 발견할 겁니다.  수많은 허영심과 경솔함, 심지어 지루함과 두려움까지도.... 그래요, 뒤처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조소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독단적인 행동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동감 넘치는 다른 무리들과 반대 입장에 서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전투에서 가장 용감하다고 인정받은 사람들의 대부분을 심히 의심스러운 영웅이라고 생각합니다.’(p.13) 라고.

이 책을 읽는 동안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연민하는지, 어떤 책임이나 자기희생의 요구로부터 도피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가 표면에 드러내는 자신감이나 남들보다 우수한 부분이 아픈 죄책감이나 열등감 혹은 상처를 가리려고 안간힘을 쓴 결과가 아닌지, 상처입지 않을 만큼의 선함이나 손해 보지 않을 만큼의 동정심이라는 건 결국 악과 동의어는 아니었는지, 자꾸 질책어린 소리가 들려와 마음이 어수선해졌다.  전쟁이나 기아, 폭력과 권력 앞에 희생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어설픈 싸구려 연민들, 골치 아픈 세상을 향해 적당히 눈감고 고개를 슬쩍 비껴 돌려버린 우리의 어중간한 자세는 콘도르의 말마따나 ‘악’이라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에 부인과 함께 동반 자살했다는 작가의 마지막 모습은 소설의 결말과 함께 애잔함을 더한다.  호프밀러의 갈팡질팡하는 모습과 널뛰는 것 같은 감정의 기복이 반복되는 것이 다소 지루한 감이 없지 않지만, 인간의 이중적인 내면과 위선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작가의 진지한 문장을 만나는 즐거움이 그 지루함을 상쇄하고도 남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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