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강원도 강릉과 속초 쪽으로 3박4일간의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떠나기 전에 강릉에 가면 난 꼭 선교장과 오죽헌, 그리고 허난설헌 생가를 가봐야 한다며 다른 가족들의 불만어린 시선을 무시한 채 고집을 피웠었다. 그 중에서도 허난설헌 생가는 꼭 들러봐야 한다며, 요즘 큰아이가 즐겨 보는 드라마 쾌도 홍길동까지 끌어다 대기도 했는데, 결국 돌아오는 마지막 날에 속초에서 다시 강릉으로 나와 세 집을 다 가보았다.





제일 먼저 찾아간 선교장은 효령대군의 후손들이 10대에 걸쳐 현재까지 살아오며 지키고 있는 300년 된 고택이다.  넓은 터에 시원시원하게 자리 잡은 집들의 배치 때문인지 여기에서 살면 집밖에 나가고 싶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이라 나무도 꽃도 무성하지 않아서 아쉬웠지만 활래정 앞 연못엔 여름이면 연꽃이 만발할 것이고 작약이며 목단화까지 만발하면 아흔아홉 칸 권세가의 집다운 풍모를 더욱 아름답게 돋보이게 해줄 것이 분명했다.
기와지붕의 고운 선 너머로  겨울하늘치고는 푸르고 맑은 하늘과 솔숲의 위용이 눈부셨다. 아이들과 아흔 아홉 칸의 어느 집 지붕 아래 툇마루에 걸터앉아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며 봄이나 여름에 왔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타까워했다.  
선교장 이 곳이 영화 식객의 촬영지이기도 한 모양이었다.  식객을 본 유진이와 명보는 영화에서 보았던 곳을 찾아내며 나름 흥겨워하기도 했다.  선교장 입구에 서있는 장승의 무리들도 재미있었다.  어쩌면 그렇게 다양한 표정들을 하고 있는지 새색시처럼 새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장군이 있는가 하면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대장군도 보였다.  해학과 익살의 장승들을 어디서 이렇게 다 모아다 세워놓았을까.  아이들과 장승들을 보며 한참을 키득거리며 서있었다.





두 번째로 들른 집, 오죽헌.  선교장의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느낌에 비해 오죽헌은 역시나 실망스러웠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 당시 충효사상을 드높인답시고 충을 위해 현충사를, 효를 위해 오죽헌을 정비한 탓이다.  정작 신사임당은 그 ‘효’사상과 ‘현모양처’, ‘율곡의 어머니’라는 굴레를 뒤집어쓴 덕에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니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래저래 이용당하고 치이는 듯해서 언짢았다.  곳곳에 5만원권 지폐에 신사임당이 들어가게 되었다며 자축하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고, 한 곳에는 오만원권 지폐를 크게 만들어서 신사임당의 얼굴 부분을 동그랗게 오려놓고는 그 안에 얼굴을 들이밀고 사진을 찍으라고 세워놓은 것도 있었다. 바깥채 방에는 무슨 서예전 입상자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바람에 한옥 방들의 소박하고 정갈한 정취가 사라져 버렸고, 오죽헌과 신사임당이 율곡을 낳았다는 몽룡실에도 자료랍시고 들여놓은 것들이 많아서 방안이 번잡스러웠다.  유진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기가 본 옛날 집들 중에 가장 천박하고 멋없는 집이라나.. 옆지기와 나는 네가 그것만 느낄 수 있어도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다며 위로했다.  오죽헌은 너무 손을 대서, 너무 기념화하는 바람에 아무 정취도 느낄 수 없는 집이 되고 말았다.  유진이는 사진조차도 찍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허난설헌 생가에 들렀다.  오죽헌과 선교장은 곳곳에 안내 표지판이 붙어 있어 찾아가기가 무척 쉬웠는데 초당에 있는 허난설헌 생가는 찾아가기가 쉽지는 않았다.  네비게이션에 ‘허난설헌 생가’를 검색해 봐도 나오질 않았다. 나중에 보니까 네비게이션에는 ‘허균, 허난설헌 생가’라고 입력되어 있었던 거였다.  허난설헌 생가를 꼭 가보고 싶었던 것은 얼마 전에 읽었던 김선우 시인의 <물밑에 달이 열릴 때>라는 산문집에 허난설헌 생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었다. 김선우 시인은 열 살 때 허난설헌 생가를 우연히 찾게 되었고 ‘돌담을 끼고 돌다 대문에 들어서 안채를 지나 또 다른 작은 문을 통과해 뒤꼍에 이르기까지, 열 살배기 아이에게 그 집은 출구와 입구가 분간되지 않는 이상한 정원이었습니다.’라는 글로 그 곳을 표현하고 있었다.  ‘솔숲 언저리에 맞춤하게 자리 잡은 저 단정한 미음자 고택은 당시의 양반집들이 흔히 그러했을 등등한 기세가 없었습니다. 솔숲이 허락하여 내어준 자리에 숲과 하늘을 공경하기 위해 지어진 사당처럼, 아담한 미음자의 담장은 하늘을 향하여 열려 있으나 인간에 대하여는 완고하게 닫혀 있는 듯도 보’였으며 시인에게 쉼터가 되고 기도처가 되었으며 이곳에서 하릴없이 낮잠으로 시간을 보내곤 했다고.
또 <난설헌, 나는 시인이다>를 출간되기 전에 미리 읽은 덕이기도 했고, <조선의 여인들>이라는 책에서도 난설헌 허초희에 대한 부분을 찾아 읽으며 허난설헌 생가에 대한 내 상상력을 자극받았던 것이다.
좁은 주택가 길을 꼬불꼬불 돌아서 찾아낸 허난설헌 생가.  아름다운 솔숲을 배경으로 나지막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입장료도 없었고, 지키고 있는 사람 하나도 없었다.  눈이 녹아 진흙탕이 되어버린 고택 입구에서 잠시 우리가족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난감해 했다. 질퍽이는 땅에 신발을 엉망으로 만들어가며 들어간 고택은 너무 초라하게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야 앞에 언급한 책들을 통해서 허난설헌에 대한 상상력이라도 제공받았다지만 엄마에게 몇 마디 주워들은 게 전부인 아이들은 황당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한편으론 미안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화가 나면서 마늘밭에서 뒹군 것처럼 마음이 아렸다.
선교장이나 오죽헌은 지배자들의 통치이념에 부합한 장소로 그동안 보살핌을 받아온 곳이었다.  선교장은 왕가의 자손들이 터를 잡고 살던 곳이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돈궤가 있음을 자랑하는 곳이며 넓고 시원한 터에 선비들의 풍류가 흐르던 곳이 바로 선교장이다.  오죽헌은 그 유명한 율곡 이이가 낳아 자란 곳이며 현대에 와서는 군부가 내세운 통치이념에 이용되었다고는 하나 그덕에 깨끗하게 보존되고 관리되는 곳이다.  그러나 이 곳은 그 당시에 중국에까지 시인으로 명성을 얻었으나 유교적인 가부장권 사회에서 사대부 남성들의 비난과 놀림을 받다가 스물일곱의 나이로 요절한 비운의 여인 난설헌 허초희와 당시 지배계급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던 허균이 태어난 집이라서 이리도 아무렇게나 내쳐진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허난설헌 생가를 돌아보는 내 표정이 어두워지는 걸 옆지기가 눈치챘나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강릉에 유명한 카페가 있다며 차를 그곳으로 몰았다. 테라로사라는 카페였다. 커피와 빵이 하도 맛있어서 청담동까지 진출(?)한 유명한 카페란다.  강릉 시내에서도 한참을 가서 정말 아는 사람만 찾아올 듯한 장소에 멋진 카페가 있었다.  생커피콩 자루가 잔뜩 쌓
여있고 그 커피콩을 볶는 공장이 카페 안에 있었다.  하우스 브랜드 커피와 함께 마들렌, 독일에선가 크리스마스에 먹는다는 슈톨렌, 이나카를 시켜서 먹고는 기분을 풀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늘에 보름달이 떴다.  저 보름달이 허난설헌 생가를 처연하게 비치고 있겠지, 그 외롭고 쓸쓸하고 슬픈 집.  집에 와서도 한동안 그 집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요즘 햇볕이 따사롭다. 노란 봄햇살을 보며 허난설헌 생가에도 찾아들었을 봄을 상상한다.  조금 덜 쓸쓸하고 초라하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질퍽이던 진흙탕 마당에도 꼬물꼬물 흙을 비집고 작은 들풀 새싹들이 초록빛을 빨아올리고 있을 것이다. 김선우 시인이 말했던 능소화나 백일홍, 왕벚꽃나무도 슬슬 기지개를 켜지 않을까. 언젠가 봄이나 여름에 강릉에 가게 된다면 다시 찾고 싶다.  꼭 그래야 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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