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처녀의 사랑 옛이야기 그림책 7
강숙인 글, 김종민 그림 / 사계절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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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속의 「김현감호 설화」를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서 펴낸 책이다.  삼국유사를 읽어보지 않았어도 어디선가 들은 듯 친숙하게 여겨지는 이야기다.  신라 원성왕 때 김 현이라는 청년과 어여쁜 아가씨로 둔갑한 호랑이가 흥륜사에서 탑돌이를 하다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인데, 구미호 이야기만큼이나 안타깝고 비극적인 결말이다.  아니다.  구미호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노력하다가 실패했을 뿐이지만, 이 호랑이 처녀는 사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게 되니 구미호보다 더 기구하고 슬픈 운명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재빨리 자기 잇속을 챙기는 게 미덕이 되어버린 요즘의 현실에서 자기를 희생해서 세 오라비를 구하고 사랑하는 남자의 입신양명을 도우려는 이 호랑이 처녀의 사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여성의 희생이 본질적이고 운명적이라는 전통적 여성관을 보여주고 있는 옛이야기들은 폐기처분해야 하는 걸까.  그렇다면 바리데기나 심청이 같은 옛이야기 속 인물들도 함께 지워버려야 하는 걸까.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모든 것을 끌어안는 여성성을 부정한다면 그 대안으로 우리는 어떤 여성성을 아이들에게 보여줘야 하는 걸까. 

옛이야기들 속에 나오는 여성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쉽게 해결되지 않는 문제다.  하지만 무던히 참고 자기를 희생하면서 난관을 이겨내고 가족과 연인을 지켜내는 여성성에는 간단히 폐기처분하기에는 어려운 위대한 힘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그 힘은 여성이라서 본질적이며 운명적으로 타고난 게 아니라 여성이 능동적으로 선택해서 발휘하는 힘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문제는 그런 여성성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희생적인 숭고한 여성성을 너무 당연하거나 너무 하찮고 어리석은 것으로 여기는 우리 시대의 시선이 아닐까. 

책을 덮으며 이 ‘호랑이 처녀의 사랑’을 현대 버전으로 바꾼다면 이야기가 어떻게 달라질까, 궁금해졌다.  세 마리의 오라비 호랑이들은 김 현을 잡아먹으려고 하기 보다는 여동생을 김현에게 시집보낸 뒤 자기들이 인간 세상에 나아가 적응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으려고 하지 않았을까?  요즘의 아이들은 왜 호랑이 처녀가 세 오라비의 잘못을 대신해 벌을 받아야 하느냐며 따지고 들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들었다.  아니, 호랑이인 세 오라비가 인간인 김 현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건 본능인데 왜 그게 벌을 받을 만큼 큰 잘못이냐는 것부터 따지고 들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그런 질문을 받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화려하고 밝은 색채의 그림은 ‘슬프도록 아름다운’이라는 표현을 떠오르게 했다.  그림이 밝고 화려할수록 호랑이 처녀의 죽음은 더욱 비극적으로 다가온다.  밝고 화려한 세상과 비극적인 호랑이 처녀의 처지가 극명하게 대비되기 때문인 것 같다.  호랑이 처녀의 치켜 올라간 눈매와 옅은 눈동자 빛도 인상적이다.  이야기도 재미있었지만 그림 구석구석을 살피고 (곳곳에 놓인 작은 불상과 탑, 그리고 새, 뱀, 토끼, 도마뱀 같은 동물들, 화려한 꽃의 빛깔들...) 감상하는 것으로도 큰 즐거움을 느꼈다. 

그나저나 호랑이 처녀의 죽음을 기려 지은 호원사라는 절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지금은 그 절터만 남아있는데, 그것도 사유지가 되어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불쌍한 호랑이 처녀의 넋은 어쩌나, 하며 잠시 걱정하다가 갑자기 이 그림책이 종이로 지은 작은 호원사라는 생각을 해본다. 자기를 기꺼이 희생하며 세상에 아름다운 가치를 심어온 모든 여성들에 대한 호원사, 아니 여원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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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아요 선생님 - 남호섭 동시집
남호섭 지음, 이윤엽 그림 / 창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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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그냥 이렇게 좀 더 따뜻해질 수도 있는데 말이야.  따끈따끈하고 부드러운 호빵처럼 서로에게 살갑게 다가갈 수도 있을 텐데 말이야.  뭐가 그리 어렵고 복잡한 걸까.  찬 바람 쌩쌩 부는 겨울날 발이 시릴 때는 능청거리며 창을 넘어 들어와 눕는 햇볕 한 자락에도 실없이 웃으며 기분 좋아질 수도 있는 거잖아. 

어제는 산을 올랐어.  정말 오랜만에 내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소리를 들었다니까.  정말정말 아주아주 오랜만에.  내 심장이 마치 오랫동안 갇혀 있다가 풀려난 망아지 같았어.  그동안 늘 조용히 걷기만 해서 답답해 죽는 줄 알았다고, 오랜만에 신나게 뛰니까 정말 살 것 같다고 소리치는 것만 같더라구. 

그러고 보면 산다는 거, 그렇게 복잡할 필요도 없는 거잖아. 가끔 자는 아이 가슴에 귀를 대고 있으면, 기껏해야 귤 하나 크기만 할 작은 심장이 콩콩 뛰는 소리가 들려.  얼마나 열심히 쉬지 않고 뛰고 있는지 살아서 온기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 하나에 감격하게 된다니까.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게 심장 뛰는 소리를 들려주며 살아야 하는 건지도 몰라. 들어봐, 내가 열심히 살고 있는 소리를, 들어봐, 내 피가 뜨겁게 돌아가고 있는 소리를, 들어봐, 네 것과 비슷한 내 소리를.... 하면서 말이야.

봐, 여기.  만우절에 선생님들이 “오늘은 쉽니다.”라는 글을 교무실 문에 붙여 놓고 다 도망간 이야기, 스승의 날에 아이들이 싸준 김밥 도시락을 들고 선생님들이 소풍가는 이야기, ‘코끝에 송골송골 땀방울 맺히도록 / 매운데도 우리는 끝까지 먹었습니다. / 바닥을 박박 긁어 먹었습니다. // 서로 바라보며 웃는데 / 이에 고춧가루가 끼여 있었습니다. / 그래도 안 부끄러웠습니다. / 우리는 한 식구가 된 듯 했습니다.’ 라며 한솥밥 먹고 스승과 제자가 하나 되는 시들을 읽고 나면, 그래, 꼭 지금처럼 팍팍하게 살 필요는 없을 텐데, 이렇게 살 수도 있는 거였는데,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지 않겠냐구. 

우리 손으로
교실을 지을 수 있다면,
먼 산이 보이는 큰 창에는
하늘을 한가득 담아 두고

반대쪽 창에는 숲을 들어앉히고
새잎 나서 단풍 들 때까지
다 볼 수 있을 텐데.

열어 놓은 창으로
이따금 산새 날아들어
공부하던 것도 까먹고
선생님하고 새 잡아라,
새 잡아라 함께 할 텐데.

바닥은 꼭 온돌로 해야지.
책상 밀쳐놓고 스무 명 둘러앉아
놀다가 공부하다가 놀다가 공부하다가
벌렁벌렁 드러누워
잠잘 수 있게 해야지.

우리 손으로
커튼 만들어 드리우듯
교실 지을 수 있다면.

       우리 교실  -간디학교15 중에서

그 까짓 것, 이런 교실 하나 지을 때 슬쩍 거들어주는 일 쯤 해줄 수도 있는 거잖아.  야야, 온돌 파이프 촘촘히 잘 깔어, 하고 잔소리 좀 하면서 수박 한 통 쓱쓱 썰어주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잖아.  점점 몸 쓸 줄 모르고, 마음 쓸 줄도 모르고, 갈수록 머리 쓸 줄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자라나는 요즘 아이들을 등허리에 땀방울 줄줄 흘러내리도록 일하게 내버려두는 것도 교육이라면 교육이지, 뭐. 

- 오늘은 내가 쓴 신데 들어 볼래?
이런 날은 우리가 시의 주인공이 된다.
선생님은 일부러 야단치지 않아도
우리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놓으면
스스로 잘하리라는 걸 아시는 모양이다. 

               시 읽어 줄까 - 간디학교 16 중에서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선생님이 계신다면 아마도 기적이 일어날 거야.  그런 선생님이라면 ‘내 휴대전화에 제 이름 대신 ’내 여자 친구‘라고 버젓이 새겨 놓고’ 졸업해 떠나버리는 여학생 하나 쯤 있는 거야 충분히 가능한 일 아니겠어? 

‘벌의 몸무게도/ 무겁다.’고 느낄 만큼 살아있는 것들이 소중하고, 비 오는 날 동무와 우산을 같이 쓰며 ‘내 왼쪽 어깨와 / 동무 오른쪽 어깨가 / 따스하게 서로 만납니다. // 우리 바깥쪽 어깨는 사이좋게 비에 젖고 있습니다.’처럼 서로의 마음 한 조각 나누는 일이 흐뭇하고, ‘고속철이 씽씽 달리는 요즘 / 느릿느릿 달리는 통일호를 타고 / 한 사람이라도 소중하게 태워 주는 / 작은 역들을 지나면 / 거기 선암사가 있습니다.’라며 느리지만 작은 것도 챙기며 사는 것도 썩 괜찮다는데, 넌 어때?

그렇게 조금 숨통을 풀어놓거나 좀 느리게 걸어보거나,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손을 갑자기 덥석 잡아보거나 하는 것도 좋지 않겠어?  친구랑 밤새 수다를 떨거나 보온병에 커피를 타가지고 공원에 나가 낯모르는 사람이랑 나눠 마시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과자 한 봉지 사들고 놀이터에 나가서 동네 꼬마들이랑 작은 잔치를 벌이며 놀아보는 것도 좋고... 조금만, 아주 조금씩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저 답답한 담벼락에 살살 구멍을 내보는 거, 그래서 아주 작은 바람이라도 흘러들게 하는 거, 그거, 그렇게 불가능한 걸까?  그러다가 와르르 무너져 버리는 걸 꿈꾸면 안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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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섬에서 생긴 일 Dear 그림책
찰스 키핑 글 그림, 서애경 옮김 / 사계절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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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찰스 키핑의 책은 처음이었다.  그림책답지 않은 낯선 분위기 때문에 좀 곤혹스러웠다.  아이들이 선호할만한 그림도 아니고 내용 역시 뚜렷하질 않았기 때문이다.  괴기스러운 느낌의 사람들, 그림책 주제로서는 특이하다고 할 수 있는 도시개발 문제, 그렇다고 개발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에 대한 결론은 유보된 듯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다’는 식으로 느껴지는 결말, 이걸 억지스러운 의도적 오류에 빠지지 않고 어떻게 소화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게 만드는 책이었던 것이다.

몇 번 반복해서 그림책을 읽다보니 어느새 ‘개발’보다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시의 샛강 한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낙원섬이라는 고향에서 터를 잡고 살아가는 소박한 사람들, 채소가게 새러, 정육점 주인 버티, 생선 장수 퍼시, 빵집 베티, 습지에 사는 바르다 할아버지와 낡은 짐배에서 사는 벌리 할머니, 그리고 애덤을 비롯한 아이들, 낙원섬을 가로지르는 유료 고속도로를 건설하기로 결정한 시의원들과 스타 게리 밴디노즈, 그 밖의 다양한 주변 인물들 쪽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개발’은 그들에게 벌어진 공통의 사건이고 이슈였지만 각자에게 전해지는 개발의 의미는 그 양과 질이 달랐을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환경개선과 개발에 따른 수익 창출에 더 큰 가치를 두었을 것이고, 시의원 같은 사람들은 가시적인 성과와 그에 따른 자기만족, 그리고 ‘돈궤에 돈을 쓸어 담는 일’에 더 큰 가치를 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스타 게리 밴디노즈와 주변 인물들에게는 고속도로 건설이 그저 하나의 이벤트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바르다 할아버지와 벌리 할머니에게는 한가롭게 옛일을 추억할 수 있는 자기만의 평화스러운 공간을 빼앗기는 사건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애덤을 비롯한 아이들에게도 섬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고속도로 건설은 익숙한 놀이 공간을 잃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슈퍼마켓의 냉장식품 코너에서 일하게 된 것에 쉽게 만족할 수도 있을 것이고(그러나 정말 만족했을까는 의문이다. 이 그림책에서 냉장식품 코너에 서 있는 새러와 버티, 퍼시, 베티의 표정은 점방거리 가게에 있을 때의 얼굴에 비해 너무 흐릿하고 무표정하다.), 어떤 사람들은 완공된 고속도로를 보고 ‘자부심에 차서’ 만족했을 것이다.  그리고 바르다 할아버지와 벌리 할머니와 애덤 같은 아이들은 개발의 손이 닿지 않는 버려진 땅에 자기만의 안락한 터전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작가는 ‘결과를 놓고 보면, 사람들은 저마다 뭔가 하나씩은 얻은 셈이 되었습니다. (.....) 어쨌건 낙원섬은 관계된 사람들 모두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개발과 발전을 이룬 낙원섬의 모습보다 아이들이 습지에서 새들과 함께 모여 서있는 마지막 장면이 더 거부감 없이 편안하게 느껴지도록 그린 것은, 찰스 키핑이라는 이 작가가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안 그런 척 하면서 은근히 급속한 도시화와 개발을 꼬집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낙원섬의 모습은 나와 비슷하게 닮아 있었다.  온갖 문명의 이익을 누리고 살아가는 처지이면서도(고속도로가 건설되어 개발이익을 얻는 낙원섬처럼) 마음 속 어딘가에선 바르다 할아버지와 벌리 할머니, 그리고 아이들이 습지에 담장을 두르고 자기만의 아늑한 공간을 만들었듯이 복잡한 격식과 도시적인 생활방식에서 벗어나 나만의 공간으로 숨어들고 싶은 그런 바람이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강 위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작은 섬이라니...  어쩌면 작가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가려진 습지를 찾아가라고, 그래서 문명과 발전이라는 손톱에 할퀴어져 만신창이가 된 우리 자신의 인간미를 되찾으라고 말하려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가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은 고속도로 완공식에 몰려든 사람들이 잔뜩 들고 나온 것처럼 피켓에 적어 높이 들어야 하는 말들이 아니라, 흑과 백(버니 블랙과 위니 화이트) 또는 남과 북(SOUTHSIDE와 NORTHSIDE)으로 나뉘어져 등 돌리거나 주먹다짐으로 해야 하는 말들이 아니라, 함께 가까이 둘러앉아 소시지와 감자를 불에 구워먹으며 무성한 습지에서 나누는 것 같은 말이어야 한다는 것도. (내가 듣는 수많은 말들 중에 마음속까지 전달되는 말은 얼마나 되었었나.)

어려운 그림책이다.  아직도 이 책에는 내가 찾아서 잘 씹어 삼켜야 할 것들이 더 남아있는 것만 같다.




*** 페이지가 적혀 있지 않으니 몇 쪽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시의원들이 고속도로를 건설하기로 결정하는 장면에서 (늘 그렇듯이, 베니와 위니는 기권했습니다.)라는 글이 나온다.  여기서 베니는 버니의 오자다.  처음 이 그림책을 읽을 때, ‘베니는 누구지?’ 하고 한참 찾았었다. 혹시 이 그림책을 읽으며 아이들이 나처럼 베니를 찾는 일이 없도록 다음에 책을 찍어낼 때에는 바로잡아 주셨으면 좋겠다.  가뜩이나 쉽지 않은 책인데, 오자 때문에 더 헤매야 한다는 건 너무 잔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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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을 생각하는 개똥클럽 높새바람 20
수지 모건스턴 지음, 최윤정 옮김 / 바람의아이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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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제목보다는 수지 모건스턴이라는 작가에 이끌려서 읽게 된 책이다.  너무나 유명한 <조커>라든가 <공주는 등이 가려워>, <엉뚱이 소피의 못 말리는 패션> 등은 물론이고 <공주도 학교에 가야한다>, <우리 선생님 폐하>, <어느 할머니 이야기>, <0에서 10까지 사랑의 편지>, <딸들이 자라서 엄마 된다>, <중학교 1학년> 등을 읽으며 유쾌하고 즐거웠던 기억이 떠올라 기쁜 마음으로 책을 펼칠 수 있었다.  수지 모건스턴, 쏙 빠져들 만큼 재미있는 이야기를 즐겁게 이어가면서도 할말은 다 하는 작가가 아니던가.

이 책을 다 읽고 덮었을 때 머리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간혹 식당이나 옷가게에 액자처럼 걸려 있는 성경 구절,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였다.  주인공 자크가 너무나 심심한 나머지 친구와 머리를 맞댄 끝에 만들어낸 개똥 클럽이 기대 이상의 성과를 이루어내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즐겁고 유쾌했기 때문이다.  이 책 <개똥 클럽>은 프랑스인들의 유별난 개 사랑의 이면을 살짝 들추면서 환경문제를 언급하고, 어린 친구들의 기발하고 엉뚱하고 야무지고 발랄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이야기는 길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개똥’을 둘러싸고 펼쳐진다.  ‘개똥’, 거리환경을 해치는 불결한 배설물에 불과하다고 보면 그만이지만, “개를 교육시킨다는 건 자기 자신을 교육하기 시작하는 것이며 주인으로서의 책임감을 의식하는 것이며 개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의식하는 거”(p.47)라는 자크의 할머니 말씀대로라면 ‘개똥’은 곧 우리의 버려진 양심과 책임감을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상징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심심함이 클럽 결성의 원동력이었지만 개똥문제를 집요하게 붙잡고 늘어지며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모색하고, 행동으로 직접 부딪치며 새로운 일들을 경험하고 깨달아가는 아이들의 좌충우돌하는 깜찍 발랄한 모습들이 부럽기도 했다. 특히 개똥 문제로 자크와 첨예한 대립을 이루었던 뤼씨가 자기 개를 사고로 잃고 슬픔에 빠지자 자크가 위로하고 다독여주는 장면은 어느새 타인을 이해하고 포용하고 화해할 만큼 성장한 아이들의 멋지고 흐뭇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즐겁다.  “부주의한 어른들을 고발”(p.128)하면서 “어른들에 대해서 지독하게 실망”(p.128)했다는 아이들의 발언에야 구차한 변명이라도 늘어놓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어쩌면 그게 또 보기 싫고 냄새나는 개똥 하나를 보태는 일인 것 같아서 포기하기로 했다.

이제 예순을 넘겼다는 수지 모건스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이제 소위 말하는 ‘감각’을 잃을만한 나이인 것 같은데도 여전히 건재함을 느끼게 한다.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단다. 똑똑하다는 것은 하나의 상황과 그 상황에서 생기는 문제점을 전부 다 이해하고 장기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되 예산을 세우고 집행하는 것까지 제대로 다 해내는 것을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다 ‘꿈’일 뿐이야.”(p.126)같이 다분히 교훈적이고 잔소리스러운 말을 티 나지 않게 슬쩍 이야기 속에 끼워 넣을 줄 아는 재주를 가졌고, 부유한 집안 아들인 티에리를 두고 “그렇지만 애들이 걔를 안 좋아하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게 아니고 걔한테서 보이는 우월감 때문이다.  걔는 돈과 물질적인 것들이 자신을 다른 사람과는 다른 특별한 인간으로 만들어 준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p.23)라며 소비를 과시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속내를 기분 나쁘지 않을 만큼 살짝 꼬집어주는 능력도 지녔다.

그러고 보니 이 얇은 책 속에서 ‘개똥’이라는 글감 하나 가지고 환경, 양심, 책임감,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타인에 대한 이해와 포용, 현대인의 소비 과시, ‘꿈’을 이루기 위한 집요한 노력과 ‘똑똑하다’라는 말의 의미까지 참 많은 문제와 가치들을 만나게 되는 것 같다.  수지 모건스턴의 글들은 대부분 말끔하게 정돈된 세련되고 깨끗한 방보다는 너저분하게 어질러진 산만한 방을 닮았지만, 놀랍게도 우리는 온갖 잡동사니로 어질러진 것 같은 그 방에서 구석구석에 숨겨진 보물들을 찾아내고 그 방의 매력에 빠지게 되는 것 같다.  방주인의 너그럽고 푸근하고 유머러스한 성격에 나도 모르게 편안함을 느끼면서 말이다.  그 느낌이 좋아서 수지 모건스턴의 책을 만나면 반갑고 자꾸 다시 찾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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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아주 큰 고구마
아카바 수에키치 지음, 양미화 옮김 / 창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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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충격적인(?) 그림에 놀랐다. 처음 이 책을 펼쳤을 때, 뭐 이렇게 허술한 그림이 다 있어? 싶어 기막혔기 때문이다.  유난히 그림에 재주가 없는 아들 녀석은 이 책의 그림을 보고는 이렇게 못 그린 그림도 책이 되어 나올 수 있다는 걸 신기하게 여기며 좋아했었다.  아마도 끈끈한 동지의식 내지는 ‘나도 이 정도는 그릴 수 있다’는 난데없는 자신감을 잠시 느꼈었던 것 같다.  그런데 평소에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림책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느끼던 나도 아무라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이 허술하고 엉성한 그림이 그려진 책 앞에서 무장해제를 당한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앉은 자리에서 그림책을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아무 거부감 없이 읽었을 리가 없으니까.  그러고도 모자라 도서관에서 책을 두 번이나 대출받을 리가 없으니까.  완벽하다 싶을 만큼 잘 그려진 그림들, 그림 작가의 정성과 개성이 눈부시게 빛을 발하는 그림들 앞에서 그동안 나도 모르게 긴장하며 부담을 느끼고 있었던 걸까.  검은 윤곽선으로 삐뚤빼뚤 엉성한, 도가 지나치다 싶게 단순화한 이 책의 그림들은 “그냥 나를 즐겨봐!”하며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편해진다.  엉성하게 그려진 이 그림책 속 선생님과 아이들이 사랑스럽고 친근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물론 이 책이 좋았던 게 단지 엉성하고 재밌고 편안한 그림 때문만은 아니었다.  간결하고 짧은 문장, 비가 오는 바람에 고구마를 캐러가지 못하게 된 유치원 아이들이 펼치는 상상들도 내 눈을 사로잡았다.  아이들이 그린 거대한 고구마 그림을 놓고(고구마 그림만으로 14쪽의 지면이 할애될 만큼) “이렇게 큰 고구마 어떻게 캐지?”하며 아이들이 상상의 꼬리를 이어가게 만드는 유치원 선생님도 매력적이고(그림만으로 선생님의 매력을 느끼기는 불가능하다), 그렇게 거대한 고구마가 ‘고구마 우주선’이 되기까지의 상상의 과정들과 아이들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놀이를 꾸려가는 모습, 그리고 변신을 거듭하는 고구마의 모습을 흐뭇하게 들여다보는 것도 재미있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 하는 그림책이 바로 이런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책 앞에서 긴장을 풀고 무장해제 되어 느슨하고 편안한 기분으로 낄낄거렸듯이 아이들도 심각하고 무거운 주제도, 딱딱한 교훈이나 가르침도, 모두 던져버린 책을 바라는 게 아닐까.  아이들을 가볍게 동동 떠있는 알록달록 고운 빛깔의 풍선처럼 만들어 줄 이런 책이 좀 더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단순하고 엉성한 그림들과 거침없이 쭉쭉 시원하게 뻗어가는 고구마 상상을 보며 나도 자유로운 해방감 비슷한 것을 느꼈던 것 같다.

책 뒷면에 적힌 작가 소개글을 찾아 읽다가 이 책이 ‘이찌무라 하사꼬’라는 사람이 낸 ‘쯔루마끼 유치원 활동 보고’를 기초로 만든 그림책이라는 글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일본의 쯔루마끼라는 유치원에서는 이런 식의 활동을 실제로 했었다는 뜻일까?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엉성한 그림을 그린 아까바 스에끼찌라는 작가가 국제 안데르센 상을 비롯해 꽤 많은 상을 받았을 뿐 아니라 이 작가의 그림 6천여 점이 ‘찌히로’라는 미술관에 기증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 그림책의 엉성한 그림은 뛰어난 작가의 엄청난 내공이 담긴 그림으로 밝혀진 셈이다.  게다가 이 그림책이 일본에서 30년이 넘게 아이들의 사랑을 꾸준하게 받아온 그림책이라니, 겉으로는 허술해 보일지언정 결코 만만한 그림책이 아니다.  아무래도 쉽게 아무에게서나 나올 수 있는 그림책은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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