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아요 선생님 - 남호섭 동시집
남호섭 지음, 이윤엽 그림 / 창비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그러게, 그냥 이렇게 좀 더 따뜻해질 수도 있는데 말이야.  따끈따끈하고 부드러운 호빵처럼 서로에게 살갑게 다가갈 수도 있을 텐데 말이야.  뭐가 그리 어렵고 복잡한 걸까.  찬 바람 쌩쌩 부는 겨울날 발이 시릴 때는 능청거리며 창을 넘어 들어와 눕는 햇볕 한 자락에도 실없이 웃으며 기분 좋아질 수도 있는 거잖아. 

어제는 산을 올랐어.  정말 오랜만에 내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소리를 들었다니까.  정말정말 아주아주 오랜만에.  내 심장이 마치 오랫동안 갇혀 있다가 풀려난 망아지 같았어.  그동안 늘 조용히 걷기만 해서 답답해 죽는 줄 알았다고, 오랜만에 신나게 뛰니까 정말 살 것 같다고 소리치는 것만 같더라구. 

그러고 보면 산다는 거, 그렇게 복잡할 필요도 없는 거잖아. 가끔 자는 아이 가슴에 귀를 대고 있으면, 기껏해야 귤 하나 크기만 할 작은 심장이 콩콩 뛰는 소리가 들려.  얼마나 열심히 쉬지 않고 뛰고 있는지 살아서 온기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 하나에 감격하게 된다니까.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게 심장 뛰는 소리를 들려주며 살아야 하는 건지도 몰라. 들어봐, 내가 열심히 살고 있는 소리를, 들어봐, 내 피가 뜨겁게 돌아가고 있는 소리를, 들어봐, 네 것과 비슷한 내 소리를.... 하면서 말이야.

봐, 여기.  만우절에 선생님들이 “오늘은 쉽니다.”라는 글을 교무실 문에 붙여 놓고 다 도망간 이야기, 스승의 날에 아이들이 싸준 김밥 도시락을 들고 선생님들이 소풍가는 이야기, ‘코끝에 송골송골 땀방울 맺히도록 / 매운데도 우리는 끝까지 먹었습니다. / 바닥을 박박 긁어 먹었습니다. // 서로 바라보며 웃는데 / 이에 고춧가루가 끼여 있었습니다. / 그래도 안 부끄러웠습니다. / 우리는 한 식구가 된 듯 했습니다.’ 라며 한솥밥 먹고 스승과 제자가 하나 되는 시들을 읽고 나면, 그래, 꼭 지금처럼 팍팍하게 살 필요는 없을 텐데, 이렇게 살 수도 있는 거였는데,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지 않겠냐구. 

우리 손으로
교실을 지을 수 있다면,
먼 산이 보이는 큰 창에는
하늘을 한가득 담아 두고

반대쪽 창에는 숲을 들어앉히고
새잎 나서 단풍 들 때까지
다 볼 수 있을 텐데.

열어 놓은 창으로
이따금 산새 날아들어
공부하던 것도 까먹고
선생님하고 새 잡아라,
새 잡아라 함께 할 텐데.

바닥은 꼭 온돌로 해야지.
책상 밀쳐놓고 스무 명 둘러앉아
놀다가 공부하다가 놀다가 공부하다가
벌렁벌렁 드러누워
잠잘 수 있게 해야지.

우리 손으로
커튼 만들어 드리우듯
교실 지을 수 있다면.

       우리 교실  -간디학교15 중에서

그 까짓 것, 이런 교실 하나 지을 때 슬쩍 거들어주는 일 쯤 해줄 수도 있는 거잖아.  야야, 온돌 파이프 촘촘히 잘 깔어, 하고 잔소리 좀 하면서 수박 한 통 쓱쓱 썰어주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잖아.  점점 몸 쓸 줄 모르고, 마음 쓸 줄도 모르고, 갈수록 머리 쓸 줄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자라나는 요즘 아이들을 등허리에 땀방울 줄줄 흘러내리도록 일하게 내버려두는 것도 교육이라면 교육이지, 뭐. 

- 오늘은 내가 쓴 신데 들어 볼래?
이런 날은 우리가 시의 주인공이 된다.
선생님은 일부러 야단치지 않아도
우리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놓으면
스스로 잘하리라는 걸 아시는 모양이다. 

               시 읽어 줄까 - 간디학교 16 중에서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선생님이 계신다면 아마도 기적이 일어날 거야.  그런 선생님이라면 ‘내 휴대전화에 제 이름 대신 ’내 여자 친구‘라고 버젓이 새겨 놓고’ 졸업해 떠나버리는 여학생 하나 쯤 있는 거야 충분히 가능한 일 아니겠어? 

‘벌의 몸무게도/ 무겁다.’고 느낄 만큼 살아있는 것들이 소중하고, 비 오는 날 동무와 우산을 같이 쓰며 ‘내 왼쪽 어깨와 / 동무 오른쪽 어깨가 / 따스하게 서로 만납니다. // 우리 바깥쪽 어깨는 사이좋게 비에 젖고 있습니다.’처럼 서로의 마음 한 조각 나누는 일이 흐뭇하고, ‘고속철이 씽씽 달리는 요즘 / 느릿느릿 달리는 통일호를 타고 / 한 사람이라도 소중하게 태워 주는 / 작은 역들을 지나면 / 거기 선암사가 있습니다.’라며 느리지만 작은 것도 챙기며 사는 것도 썩 괜찮다는데, 넌 어때?

그렇게 조금 숨통을 풀어놓거나 좀 느리게 걸어보거나,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손을 갑자기 덥석 잡아보거나 하는 것도 좋지 않겠어?  친구랑 밤새 수다를 떨거나 보온병에 커피를 타가지고 공원에 나가 낯모르는 사람이랑 나눠 마시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과자 한 봉지 사들고 놀이터에 나가서 동네 꼬마들이랑 작은 잔치를 벌이며 놀아보는 것도 좋고... 조금만, 아주 조금씩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저 답답한 담벼락에 살살 구멍을 내보는 거, 그래서 아주 작은 바람이라도 흘러들게 하는 거, 그거, 그렇게 불가능한 걸까?  그러다가 와르르 무너져 버리는 걸 꿈꾸면 안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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