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나지 않게 해 주세요 베틀북 그림책 99
구스노키 시게노리 지음, 고향옥 옮김, 이시이 기요타카 그림 / 베틀북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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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나지 않게 해 주세요’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저거, 내가 읽어야할 책이구나.’했다. 그래서 굳이 아이에게 읽어줘야지, 라는 욕심 없이 순전히 내가 읽으려고 뽑아든 책이었다. 어떤 그림책은 아이보다 어른을 향해 더 강하게 이야기를 던지곤 한다. ‘혼나지 않게 해주세요’라니!! 이건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들이대는 말 아닌가!

학교에서건 집에서건 만날만날 혼나는 주인공 남자 아이의 소원은 무척 소박하다. “참 착하구나”하는 칭찬을 들어보는 것. 하지만 선생님도 엄마도 친구들도 자기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 무척 속상하고 화가 나있다. 사실 그림을 보면 아이는 그저 아이다웠을 뿐인데, 그 이유로 혼이 나는 장면이 나온다. 집에 가는 길에 만난 길고양이를 집에 데리고 와서, 사마귀가 너무 신기해서 잡아다가 친구들에게 보여줬는데 여자 친구들이 기겁을 하고 놀라서, 친구들과 신나게 노래를 불렀을 뿐인데 너무 시끄럽다고, 급식을 너무 많이 퍼줘서.... 가만히 그 속을 들여다보면 동정심도 호기심도 많은 밝은 성격의 한 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어른들의 눈으로는 그게 모두 골치 아픈 말썽으로 보일뿐이다. 그런 어른들 앞에서 아이는 잔뜩 골이 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채 눈물을 꾹 참고 입을 다물어 버린다.

잠자리에서 다섯 살 아이에게 읽어줬다. 아니, 읽어줬다기 보다 내가 다시 읽고 싶어서 아이랑 같이 읽었다. 그런데 아이는 이 그림책에서 공감되는 부분을 찾아냈던 걸까. 아이가 좋아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자꾸만 다시 읽어달란다. 만날만날 혼나지는 않더라도, 혼날 때의 서러웠던 감정의 기억은 이 책 속의 아이와 공감대를 형성하나 보다.

칠월칠석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혼나지 안케 해 주새요.’라고 소원쪽지를 쓴 걸 보고 아이의 선생님은 아이의 속내를 알아차리고는 눈물을 글썽이며 미안하다며 사과한다. 행복한 결말이다. 부디 이 선생님을 닮은 어른들이 많아지기를, 가만히 빌게 된다. 틀림없이 “이 녀석아, 혼나기 싫으면 혼날 짓을 하지 말아야지! 만날 온갖 말썽은 다 부리면서 혼나지 않게 해달라고 빌면 다야!”하며 오히려 핀잔과 창피를 곱빼기로 퍼부을 어른들이 더 많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어른은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데 너무 서툴다.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의 속내를 살펴보는 일에 너무 무심하다.

역시 이 책은 세상의 많은 부모들과 선생님들이 아이와 함께 읽어야 할 그림책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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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노니는 집 - 제9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30
이영서 지음, 김동성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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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성 님의 그림에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  그래서 늘 김동성 님의 그림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터넷 서점 사이트에서 이 책의 표지를 보았을 때, 이런, 또 당하겠군, 싶었다.  어린이 책답지 않은-이건 장점일까, 단점일까?-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표지 그림.  표지에 코를 바싹 대고 후읍~ 숨을 들이마시면 오래된 책들에서 나는 독특한 그 향내가 가슴 속에 꽉 들어찰 것만 같았다.  강력한 마력을 가진 김동성의 그림이다.  게다가 제목까지 ‘책과 노니는 집’이라니....‘책’이라면 마구 친한 척하고 싶은 이 몹쓸 버릇과 막연한 동경심까지 겹쳐 올해는 꼭 인터넷 서점의 일반회원으로 내려가고 말리라는 작심이 흔들리고 말았던 거다.  그렇게 내 의지의 나약함을 확인시키며 내 품에 안겨온 책이다.

1800년대 천주교의 탄압과 박해가 이 이야기의 배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신유, 기해, 병오, 병인의 4대 박해 등 구구절절한 탄압의 내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지는 않는다.  역사동화라고 할 수 있지만 역사적 사건이 지나치게 부각되거나 이야기를 휘어잡고 흐르지도 않는다.  천주학에 관한 책 『천주실의』를 필사했다는 이유로 관에 끌려가 매를 맞고 숨진 필사쟁이 아버지를 둔 장이라는 소년의 성장 쪽의 비중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약계책방 최서쾌와 심부름꾼 장이, 도리원의 미적과 낙심이와 청지기, 서유당의 홍교리는 자기가 몸담은 그 시대를 견디며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격랑의 시대를 운명처럼 지고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비장하다거나 영웅적이지 않다. 그러나 무력하고 소박한, 한없이 작은 사람들의 용기가 역사를 바꾸는 그 시대의 현장이 고스란히 담긴 느낌이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이야기가 그 시대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가슴이 짠해진다.

사건을 일으키는 허궁제비라는 인물의 인상이 좀 흐릿하다는 생각이 들어 좀 아쉬웠다.  만민이 평등하다는 서학의 기준으로 볼 때, 포악무도한 허궁제비도 ‘불쌍히 여겨야 할’ 존재이기 때문일까?  기생 미적이 자신을 괴롭히는 허궁제비를 ‘불쌍하다’고 한 것도 어떤 특정한 사연이 있어서라기보다 성서상의 원죄를 진 인간존재 자체에 대한 가엾게 여김이라는 느낌이 더 크다.  그래서 ‘불쌍한’ 허궁제비는 안개 자욱한 미궁 속을 헤매는 것처럼 뚜렷하게 떠오르질 않는다.

그림도 글도 아름다운 책이다.  개인적으로 서유당 홍교리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책에 대한 말들이 참 마음에 들었다.  이를 테면 『논어』『맹자』같은 책들이 너무 어렵다는 장이의 말에 홍교리는 “어렵고 재미없어도 걱정 마라.  네가 아둔해서 그런 것이 아니니.  어려운 글도 반복해 읽고, 살면서 그 뜻을 헤아려 보면 ‘아, 그게 이 뜻이었구나!’하며 무릎을 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는 어려운 책의 깊고 담백한 맛을 알게 되지.”(p.53)라며 위로한다.  또 다 읽지도 못할 책을 왜 이렇게 많이 사 모으냐고 장이가 묻자 홍교리는 “책은 읽는 재미도 좋지만, 모아 두고 아껴 두는 재미도 그만이다.  재미있다, 유익하다 주변에서 권해 주는 책을 한 권 두 권 사 모아서 서가에 꽂아 놓으면 드나들 때마다 그 책들이 안부라도 건네는 양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지.  어느 책을 먼저 읽을까 고민하는 것도 설레고, 이 책을 읽으면서도 저 책이 궁금해 자꾸 마음이 그리 가는 것도 난 좋다.  다람쥐가 겨우내 먹을 도토리를 가을부터 준비하듯 나도 책을 차곡차곡 모아 놓으면 당장 다 읽을 수는 없어도 겨울 양식이라도 마련해 놓은 양 뿌듯하고 행복하다.”(p.78)고 대답한다.

‘이제 책을 그만 사야지..’하고서도 이 책을 보고는 덜컥 사버린 -그것도 사는 김에 몇 권 더 사버린- 나로서는 정말 따뜻한 다독거림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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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다.  

2MB가 고대스러운 건지, 

아니면 고대가 명박스러운 건지.   

그래도 일류대라든가 명문대라든가 하는  

명함이 붙은 대학인데, 

그런 똥통같은 짓을 하다니.  

아무리 대학들이 동네 사설학원스러워졌다고는 하나 

그래도 양심이 살아있는 지성은 남아있을 거라고  

나도 모르게 기대하고 있었나 보다.  

그런 대학에 들어가려고 기를 써야 한다니, 그것도 기막히다.  

반칙투성이 세상이구나,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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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원래 공부 못해 창비아동문고 244
은이정 지음, 정소영 그림 / 창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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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4학년 때였나?  체육시간에 운동장에 나가보니 한가운데에 뜀틀이 놓여있었다.  아이쿠, 오늘 뜀틀이야? 100M 달리기를 하면 19초의 장벽을 깨뜨리지 못 하는, 그것도 컨디션 좋고 운 좋아야 19초대에 겨우 들어오지 20초를 넘기는 게 자연스러웠던, 타고난 운동치였던 나는 뜀틀을 보고는 뛰기도 전에 먼저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사뿐히, 가볍게, 우아하게 날아서 뜀틀을 넘지 못 하고 훌쩍 뛰어서는 뜀틀 위에 털썩! 그대로 올라타 버리는 나의 흉한 모습이 떠올라서 내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얼마나 괴롭고 불편하던지... 그 날은 유난히 맑고 따뜻한 봄날이었고, 하늘은 그야말로 예술이다 싶을 만큼 파란 빛으로 쨍하게 펼쳐 있었고, 따스한 봄바람은 살랑살랑 가볍게도 불어댔건만, 아니나 다를까, 내 차례가 오자 난 변함없고 한결같이 뜀틀 위에 승마포즈로 털썩! 걸터앉고 말았다.  간절히, 정말 참 간절하게도, 그 순간 뜀틀이 정말 말로 변해서 따그닥따그닥 달려 운동장을 벗어나 주었으면, 하고 바라마지 않았다. 

지금은 작고 펑퍼짐한 아줌마지만 초등학교 시절만 해도 반에서 크고 마른 편이었던지라, 선생님 보시기엔 키 크고 마른 아이가 뜀틀을 넘지 못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으셨나 보다. 힘차게 달려가서 도움닫기를 한 후에 뜀틀 앞부분을 짚고 넘어야 한다고 누누이 반복해서 가르침을 펴신 후, 아이들이 다 보는 앞에서 나만을 위한 개인지도에 들어가신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가르침을 펴고 몇 번을 다시 시켜도 여전히 못하는 나를 도저히 납득하실 수 없던 선생님은 “뜀틀의 높이가 너에게 맞지 않나 보구나.”하시더니 뜀틀 2단부터 시작해보자고 하셨다.  몇몇 아이들이 나와서 뜀틀을 2단으로 낮추는 걸 도왔다. 

난, 그 좋은 봄날 너무나 괴로웠다.  반 친구들은 뜀틀 주변에 조르르 일렬로 앉아서 날 ‘구경’하고 있었다.  몇몇은 즐거워 보였고, 또 몇몇은 따분해 보였고, 또 몇몇은 한심하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  2단부터 한 단씩 뜀틀의 높이를 높여가던 선생님의 노고와 몇 친구들의 수고는 눈물겹게도 실패로 끝났고, 난 선생님의 눈물겨운 실패에 너무나 송구스러웠을 뿐 아니라, 친구들의 얼굴을 마주하기가 너무나 창피했으며, 무엇보다 날렵하고 가볍지 못한 내 몸이 너무나 저주스러웠다.  그리고 내가 내린 결론은 난 ‘원래’ 뜀틀을 못하는 아이라는 것이다. 

우습게도 ‘원래 뜀틀을 못하는 것’은 그 날 이후 사는데 별 지장을 주진 않았다.  ‘원래 달리기를 못한다’거나 또 ‘원래 바느질을 못한다는 것’은 학창시절 체육실기나 가사실기 점수에 약간의 피해를 주었을 뿐, 뭐, 그다지 심각한 사태를 몰고 온 적은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공부에 대해서는 ‘하면 된다’라거나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식의 결사의 비장함이 풍기는 잣대를 들이댔지만 뜀틀과 달리기, 바느질을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교적 너그러웠기에 살기가 고달프진 않았다.  분명히, 내가 수렵생활을 하던 시절에 태어났다면 뜀틀과 달리기를 ‘원래’ 못하는 나는 그 사회의 심각한 문제아가 되었을 것이고, 몇 년을 조금만 거슬러 올라갔어도 바느질을 ‘원래’ 못하는 나는 여자로서 심각한 결함을 가진 사람으로 취급받았을 것이다.  휴우~~~ 얼마나 다행인지...

그런데 이 책 속 ‘찬이’는 ‘원래’ 공부를 못 한다.  중간쯤 못 하면 그나마 좀 괜찮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정말 못 한다.  대신 밝은 성격에 부지런함, 동물을 돌보는 야무진 손끝은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타고났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아이들에게 ‘공부만을’ 최고의 가치로 요구한다는 점이다.  선생님이 되어 처음 담임을 맡은 초보 ‘멋진 연희 샘’은 자기가 맡은 반 아이들이 모두 ‘완벽’하기를 바란다.  그 ‘완벽’이라는 게 순전히 학습에 대한 요구다. ‘멋진 연희 샘’이 펴는 가르침도 순전히 ‘공부’에 올인이다.  그리고 멋진 연희 샘은 그래야 아이들이 ‘행복’해 질 거라 믿는다. 

그러나 선생님의 예상과는 달리 반 아이들은 표정이 점점 어둡고 굳어지고, ‘찬이’는 더욱 암울한 아이가 되어간다.  서로 순진하고 사이좋게 어울려 놀던 아이들은 학교 버스 안에서 선생님의 험담을 늘어놓고 찬이의 뒤통수를 때리며 ‘멍청한 놈!’이라고 비난을 퍼붓는 난폭함을 보이기 시작한다. 

따지고 보면 누구나 ‘원래’ 못 하는 것 몇 가지쯤은 갖고 살지 않나?  그와 더불어 ‘원래’ 좀 잘하는 것 몇 가지쯤 함께 갖고 있고... 도대체, 우리의 어디에서 그런 차이를 만들어내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런 ‘차이’와 ‘다름’ 덕분에 세상은 다양성을 획득하고 다채로운 삶의 재미, 개인의 매력과 개성, 재능들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결말부분을 너무 서둘러 허겁지겁 끝낸 느낌이 없지 않지만 우리 사회의 공부 제일주의(?)와 무한경쟁의 교육제도를 시골학교의 한 학급의 모습을 통해 참 잘 담아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다가 가슴이 찡해지고 콧등이 시큰해지기도 할 만큼.  세상의 많은 ‘찬이’들에게도 뜨거운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아울러 뜀틀을 그 지경으로 못하고도 무사한 나의 인생을 위해서도) 짝짜자자자자자자짜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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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덤 라이터스 다이어리 - 절망을 이기는 용기를 가르쳐 준 감동과 기적의 글쓰기 수업
에린 그루웰 지음, 김태훈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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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캘리포니아주에 롱비치라는 곳이 있다.  그 동네가 얼마나 험악한지 길 가다 언제 총 맞아 죽을지 모르는 살벌한 분위기에 마약과 폭력이 난무하는 무법천지가 따로 없다.  백인과 흑인, 남미계와 아시아계 사람들이 서로 편짜고 총싸움을 벌이고 부모가 마약에 빠져 자녀를 나 몰라라 내팽개쳐두고, 살인과 폭력이 일상의 풍경으로 자리 잡은 곳이다.  아이들도 마약이나 알코올 중독에 빠져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하루를 버텨내며 대학은커녕 고등학교 졸업도 힘든 끔찍한 환경 속에서 자라난다.  바로 그 곳에 ‘윌슨’이라는 고등학교가 있다.  그리고 그 구제불능의 아이들에게 에린 그루웰이라는 신참 선생님이 있었다.

식상한 이야기지만, 변화는 진심이 통하는 데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루웰 선생님은 친구를 놀리려고 인종차별적인 그림을 그리며 좋아하던 아이들을 꾸짖다가 아이들이 ‘홀로코스트’에 대해 모른다는 것을 알고는 공들여 준비한 수업 계획을 포기하고 ‘관용’을 학습목표로 삼고 아이들에게 다가서기 시작한다. (우리 청소년들은 ‘홀로코스트’라는 용어를 알고 있을까?) 부모에게조차 애정 어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자랐던 아이들은 선생님을 통해 격려를 받고 살아갈 힘을 얻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과 정면으로 마주 서서 냉철하게 자기를 돌아보고 자기에게도 희망이 있음을, 그리고 그 희망이 실현 가능하다는 걸, 그리고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걸 깨달아 가는 과정이 일기 형식으로 이어진다. 

아이들이 그린웰 선생님의 국어수업이 진행되는 203호 교실을 ‘진정한 내 집’이라고, 그 교실의 친구들과 선생님을 ‘내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자신들을 믿고 후원해주는 분들에게 기꺼이 감사하고 존경한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속에 들어있는 진심과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의 현장학습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호텔 접수계 일을 하고 백화점에서 란제리를 파는 열정적인 선생님을 아이들이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그 진심에 반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니 아이들의 변화가 단지 독서와 글쓰기 때문이었다고 말하지는 말자.  아이들이 그 ‘진심’을 보지 않았다면 독서와 글쓰기도 불가능했을 게 당연하다.

문제아였던 아이들이 진실한 자아를 스스로 발견하고 인종을 넘어서는 우정과 신뢰를 쌓아가며 옳은 것을 위해 행동하는 ‘자유의 작가들’로 우뚝 서는, 그 대견하고 기특한 과정을 읽고 있노라면 아이들이 진정으로 배워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뿐만 아니라 ‘어른’이라면 아이들을 어떻게 지지하고 격려하며 어른 스스로 아이들에게 어떤 환경이 되어주어야 하는지도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그런 교육이 가능했던 미국의 교육환경이 참 부러웠다. 국어 시간에 국정교과서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선생님과 아이들이 함께 <안네 프랑크의 일기>나 <동물농장>, <호밀밭의 파수꾼>, <컬러 퍼플>등등을 읽고 토론하고 글을 쓰고, 그 책과 연관된 현장을 방문하고, 관련된 인사를 초대해 강의를 듣고, 질의와 응답의 시간을 갖고, 그것을 기꺼이 후원해 주는 사회적 환경이 있고....  일제고사를 보는 날, 체험학습을 허락해줬다는 이유로 선생님들이 해직되고, 일일이 정부에서 나서서 교과서 내용을 점검하고 참견하고 뜯어고치고, 선생님이 학부모에게 편지 한 통 쓰는 것도 교장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우리의 교육 풍토와 달라도 참 많이 달랐다.  에린 그루웰 같은 분이 우리나라에 오셔서 선생님을 하신다면 아마 해직을 당해도 일찌감치 당했을 거란 생각에 씁쓸하기만 했다. 

이 책은 아이와 함께 다니는 어린이 도서관의 선생님께 드리기로 마음먹었다.  자녀 둘을 모두 대안학교에 보내고 계신 그 분은 늘 “부모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좋은 선생님을 만나게 해주는 거”라며 웃으신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그 선생님이 계속 생각난 건, 그리고 이 책은 그 선생님께 가야 더 행복하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 건, 그 선생님 또한 좋은 어른, 좋은 선생님이 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내가 느끼고 봐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 나라에 좋은 어른, 좋은 선생님들이 많아지기를, 그래서 언젠가 우리의 교육환경이 좀 더 자유로워지기를 꿈꾼다.  그 꿈들이 영글어 열매맺을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게다.  그럴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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