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옛이야기 신화편 - 전5권 한겨레 옛이야기 6
문명식 외 지음, 한창수 외 그림 / 한겨레아이들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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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몇 해 전에 아이들 사이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끈 적이 있다.  만화책에서 시작된 그리스 로마 신화 열풍은 한동안 출판시장을 뒤흔들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때 나는 아무리 헬레니즘 문화가 서양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하더라도 이건 좀 너무하다 싶은 마음이 들어 무척 고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도 그 열풍을 비껴가지 못하고 그 때 유행하던 를 사달라고 졸랐다.  마지못해 몇권 사주긴 했지만 그 출판사가 어찌나 원망스럽던지,,, 만화의 내용도 그림도 그 질적 수준이 심히 의심스러운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런 책에 무슨무슨 선정도서라는 딱지를 붙여서 아이들과 그 부모들을 현혹하는 작태가 한심스러워 보이기도 했고.

그리스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어려운 이름들을 척척 대는 아이들을 보면서 "너 우리나라 신화에 대해서는 좀 아니?"하고 물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시기에 발견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옛서적의 맛과 분위기를 그대로 살린 듯한 고운 표지와 튼튼한 제본에서부터 동양화스러운 분위기를 한껏 살린 그림까지 내맘에 쏙 드는 책이었다. 

아이들은 우리나라 신화라고 하면 단군신화나 주몽이나 박혁거세등의 시조 건국신화만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봤자 제주도 선문대 할망 쯤에서 멈추고 만다.  그리고 우리나라엔 창조신화가 없다는 한탄의 목소리도 들은 바가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우리는 천지왕이 세상을 창조한 이야기와 소별왕 대별왕이 두개씩이었던 해와 달을 하나로 만들고 인간세상과 저승세계를 다스리게 된 이야기, 삼신할머니가 된 당금애기 이야기를 비롯해서 저승을 지키는 오구신이 된 바리공주, 북두칠성이 된 강남국 일곱 쌍둥이, 성주신과 터주신이 된 황우양씨와 막막부인 이야기, 농사를 돌보는 신이 된 자청비와 문도령과 정수남이 이야기, 저승사자의 우두머리가 된 강림도령 이야기, 제주도 마을의 수호신이 된 궤네깃또 이야기, 서천꽃밭을 지키며 인간세상에 갖가지 꽃향기를 보내준다는 한락궁이 이야기, 원천강에서 사계절을 인간세상에 보내주는 선녀가 된 오늘이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어릴 적 "김 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하며 장수하는 것들의 이름이라며 재미삼아 부르던 노래를 기억하시는지.. 이 책을 읽다보면 강림도령 이야기 속에서 등장하는 그 문제의 동방삭을 만나게 된다.  동방삭이 뭔지도 모르고 외워 불렀었는데 왜 동방삭이 장수하는 것들의 이름 속에 버젓이 끼게 되었는지도 알수 있게 된다.  그 외에 부엌신이라고 알고 있는 조왕신도 황우양씨와 막막부인 이야기 속에서 한 몫을 하고 있고, 마을 어귀에 서있는 장승의 정체도 알 수 있다.

흥미진진한 우리네 신화가 "미신"이라는 오해와 편견 속에서 홀대를 받도록 버려두는 것은  우리 문화와 전통의 근원을 더럽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째서 그리스 로마의 신들은 미신이 아니라 서양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코드로 받아들이면서 우리나라 신화의 등장하는 이 매력적인 인물들은 무속인들의 전유물로 남겨두어야 하는 것인지 너무 아쉬움이 크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의 아이들이 그리스 로마신화만큼 우리나라 신들의 이야기에도 관심을 가질 수 있길 바란다.  우리나라의 신들도 모르면서 다른 나라의 신들에 대한 지식을 자랑하는 것은 새로운 사대주의로 흐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나라 신화가 아이들에게 충분한 재미와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우리나라 신화의 매력을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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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의 그림읽기 그림책의 그림읽기
현은자 외 지음 / 마루벌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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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에 그림책 원화 전시회를 다녀온 적이 있다.  그 때까지 나는 "책"이 갖고 있는 '판형'이라는 제약조건 안에서만 그림책의 그림을 보아 왔었기 때문에 그림책의 원화의 크기에 대해서도 8절지에서 4절지를 넘어 서지 않을 정도의 크기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막상 전시회장에 들어선 나는 예상을 뒤엎는 그림책 원화의 크기에 놀랐고, 원화가 갖는 살아 있는 빛깔의 화려한 스펙트럼 앞에서 마냥 황홀해 했다.  그림책 속의 그림들은 독자인 우리의 막연한 상상력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인 또다른 세계구나 하는 것을 느꼈던 계기가 되었었다. 

<그림책의 그림읽기>는 제목처럼 그림책에서 "그림"쪽에 더 비중을 두고 저술된 그림책 기본 개념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림책과 관련된 많은 책들이 그림책을 설명할 때 작가론 쪽에 치우치거나, 아니면 그림책의 내용을 소개하는 책들이 대부분이었다면, 이 책은 '그림책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시작하여 그림책 안의 시각언어인 그림을 어떻게 읽고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까지 담고 있다. 사실 그림책 속의

이 책에서 예로 많이 사용하고 있는 앤서니 브라운의 <고릴라>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이 책의 내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림책 안에서의  글과 그림의 상호보완적 역할에 대해 설명하면서 '고정' 역할의 한 예로 한나와 고릴라가 극장에 갔을 때의 장면 (슈퍼맨 복장을 한 고릴라가 하늘을 날고 있는 그림과 그 그림 하단에 영화객석의 모습이 검은 바탕에 흐릿한 선으로 표현된 장면) 에서 글 옆에 있는 "......그래서 둘은 극장에 갔지"라는 글을 통해 객석에 앉은 한나와 고릴라의 뒷모습에 시선을 집중하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 하면서 글은 우리가 어디에 시선을 집중해야 할 지 몰라 망설이며 떠돌때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중계'의 역할에서도 고릴라가 점점 커지는 장면에서 글은 단지 ".... 그런데 그날 밤에 굉장한 일이 일어났어."라고만 적고 있지만 그림은 셋으로 분할된 장면들 속에서 고릴라 인형이 점점 커지는 모습을 시각적으로 표현함으로써 글에서 말한 굉장한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중계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구체적인 예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의 기본요소를 설명하는 장에서도 기본요소 중의 하나인 "색"을 설명하면서도  빨간색 옷을 입은 한나와 파란색 계열로 채색된 아버지의 그림을 예로 들면서 이는 색을 통해서 한나와 아버지의 관계단절을 암시하고 있으며 이는 마지막 장면에서 아버지와 한나가 같은 빨간 스웨터를 입고 등장함으로써 아버지와 하나의 거리적 근접성뿐 아니라 같은 색 계열의 옷을 통해서 둘의 관계가 가까워졌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그림 언어의 문법을 다룬 장에서는 반응자의 시선에 의해 방향선이 형성되는 경우를 설명하면서 앤서니 브라운의 <고릴라>가 바라보기와 응시하기의 훌륭한 예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한나가 책을 읽는 모습이나 신문을 보고 있는 아버지를 마주 대하고 있는 모습, 일하고 있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모습, 커다란 방안에서 텔레비젼을 응시하는 모습 등은 반응자인 한나를 중심으로 묘사되어 있고 이는 한나가 그녀의 주변환경으로부터 고립되고 소외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예라고 제시하고 있다. 

또한 한나와 아버지의 시선이 서로 만나지 못하게 그려진 점과 한나가 아버지를 바라보는 일방향적인 반응과는 대조적으로 한나와 고릴라는 서로 눈을 맞추고 응시하며 같은 선상의 방향성을 형성함으로써 한나가 아버지와 친밀한 유대감을 형성하지 못한 것과는 달리 고릴라는 한나에게 대리 아버지의 모습으로 변형되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그림의 배치에서 위에 배치된 것은 이상적인 인물이나 상황을 의미하고 아래쪽에 배치된 것은 낮은 지위의 사람이거나 약한 존재를 의미한다고 하면서 한나가 방구석에서 쓸쓸히 텔레비젼을 보는 장면에서 한나를 그림의 하단에 배치함으로써 아버지와 의사소통이 단절되어 소외된 한나를 묘하고 있으며 영화관 장면에서 수퍼고릴라를 그림 상단에 배치하여 이상적인 존재로 제시했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

이처럼 그림책의 언어를 읽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을 다양한 예를 제시하면서 설명하고 있어서 그림책을 읽으면서 의식하지 못하고 넘겨버리는 "그림"의 의미들을 새롭게 짚어볼 수 있는 계기를 선물하고 있는 책이다.  사실 요즘에 출판되는 그림책들을 보면 그림이 단순한 '삽화'의 의미를 넘어서 하나의 예술적 쟝르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어린 아이들의 취향을 맞추기에 급급한 듯 보이는 그림책들도 없지 않지만 외국에서 이미 그 가치를 인정받은 훌륭한 그림책들도 많고 국내에도 이제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굵직한 그림작가들이 등장하게 된 것 같다.  이는 훌륭한 그림책을 선정하여 소개해주는 역할을 담당했던 기존 어린이 문학 비평가나  어린이 책 관련 전문가들의 도움도 컸지만 무엇보다 좋은 그림책을 아이에게 골라주려는 부모들의 열망이 이루어낸 성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산더미처럼 쏟아져 쌓여가는 많은 양의 그림책들 중에서 좋은 그림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독자로서의 안목을 갖추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좋은 그림책을 고를 수 있는 안목을 갖출 수 있다면 묻혀있는 훌륭한 그림책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림책 시장에서 질이 낮은 그림책들을 선택에서 제외시킴으로써 추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까지 그림책의 "그림"이 갖고 있는 영향력은 인정하면서도 그에 대한 논의가 부족했던 여건 속에서 <그림책의 그림읽기>는 내게 참신하고 신선한 그림책 이론서로 다가온 책이다.  대부분이 외국 그림책을 예로 들었다는 것이 아쉬웠지만 우리나라 그림책 영역이 더 넓어지고 커지다 보면 그에 대한 논의도 활발해 질 것이라고 믿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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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 (양장)
로버트 뉴튼 펙 지음, 김옥수 옮김, 고성원 그림 / 사계절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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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사춘기라는 터널을 통과할 때 내 곁에 두었던 책들을 생각하면 요즘 청소년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 시절에 읽을 수 있었던 건 소공녀나 비밀의 화원, 키다리 아저씨, 빨강머리 앤 등과 같은 고전이라 불리긴 하지만 기본서에 가까운 책들 뿐이었다.  그나마 내 처지가 조금 나았던 것은 나이 차이가 많은 오빠들을 둔 덕분에 초등학교 고학년 때 쯤부터 <모모>와 <딥스>,<꽃들에게 희망을>과 같은 책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 뿐이다.

요즘 서점가를 둘러보면 황홀할 정도로 좋은 책들이 많아서 어느 책을 먼저 읽을까하고 행복한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런데 좋은 책들은 많아졌건만 우리 아이들이 책 속에 푹 빠져들만한 시간적 여유를 가지지 못하는 것 같아 무척 안타깝다.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은 독실한 세이커교도 집안에서 자라나는 로버트라는 이름의 열두살 짜리 남자아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말이 열두살이지, 내 주변에는 이런 열두살 짜리를 본적이 없다.  성실 그 자체에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지녔을 뿐 아니라 너무 의젓하고 사려깊어서 무늬만 열 두살 짜리 같은 그런 남자 아이다. 

세이커교가 문명의 이기를 멀리하고 근면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외부 사람들과 단절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영화나 TV외화 등을 통해서 본 것 같다.  그래서일까. 로버트의 친구가 등장하지 않는다.  에드워드 새처, 제이콥 헨리, 베키 테이트 등의 같은 또래 아이들의 이름이 잠깐 나올 뿐 구체적인 행동이 드러나질 않는다.  로버트에겐 이웃에 사는 태너 아저씨네 소의 출산을 도운 일에 대한 보상으로 받은 돼지 핑키를 친구로 삼고 마음을 나눌 뿐이다. 

로버트에겐 가난한 현실이 있다.  세이커 교도가 지켜야할 교본대로 행동해야할 규범에 수긍하지 못하는 면이 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을 바라보며 나릅대로 산다는 것에 대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인다.   노동의 가치를 알고 성실하게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로버트를 철부지 아이로 여기질 않는다. 매일 로버트가 책임져야 할 일거리가 있고 로버트는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날마다 돼지를 죽여야 먹고 살 수 있고 자기 이름조차도 쓸 줄 모르는 문맹의 아버지지만 사랑하고 아껴주는 가족에 대한 가치를 알고 임무에 충실한 아버지이기에 로버트는 존경과 애정을 가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친구와 다름없었던 돼지 핑키를 도살할 때도 로버트는 아버지에 대해 미운 생각이 들면서도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아버지를 용서하고 이해하며 아직 피가 잔뜩 묻어있는 아버지의 손에 입을 맞춘다. 아버지에 대한 신뢰가 그만큼 깊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아버지들을 생각해 본다.  그들은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얼마쯤 비켜서있는 듯 하다.  오늘날의 도시 아버지들의 삶은 가족들과도 단절되고 소외되어 있다.  아버지들에겐  아내와 자녀들의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들이 자신들이 밖깥 사회에서 부딪치고 경쟁해야 하는 일에 비하면 시시하고 하찮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고, 그래서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까지 짊어지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휴먼 펙과 같은 아버지가 그립다.  자녀들에게 자기만의 철학을 들려주고, 삶의 지혜들을 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을 만큼의 깊이와 넓이를 가진 그런 아버지가 그립다.  물질적으로 잘 살기 위한 얄팍한 처세술보다 노동과 성실함의 가치를 먼저 가르쳐 줄줄 아는 그런 아버지가 보고 싶다.  가혹한 현실의 모습도 아들과 함께 나눌 용기가 있는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  

아니, 나보다 아이들이 우리 기성세대에게 더욱 간절히 바라는 어른의 모습일 것이다. 나로서는 '어른답다'라는 말의 무거움을 느끼게 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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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속의 그림
이주헌 지음 / 학고재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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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미술사나 사조들에서 약간 비켜나서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그림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책이다. 무려 51명의 작가와 그의 작품들이 걸려있는 전시회에 다녀온 느낌이다. 그것도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유능한 해설자를 독차지하고서.

서문에서 저자가 밝힌 바와 같이 특정한 시대나 사조, 지역, 미술사적 평가 등과 관계 없이 저자 자신의 사적인 기호와 남과 나누고 싶은 작품 등을 먼저 고려해서 선정한 작품들이어서 저자의 생각을 나누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로댕의 <꽃장식 모자를 쓴 소녀>로 시작의 여는 저자의 글은 현재 활동중인 국내 작가에 이르기까지 정말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고 나야 끝을 맺는다. 

개인적으로는 조지아 오키프에 대한 글을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아주 오래전에 미국에 사는 지인으로부터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들이 담겨있는 다이어리를 선물 받은 적이 있다.  그 때가 처음으로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을 접한 것이었는데 기존의 화사하고 아름다운 꽃그림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을 받았었다.  아름답기는 하지만 뭔가 다른 것을 담고 있는 듯한..  저자는 꽃이란 늘 바라봄을 당하는 존재이고 그것을 의식해 더욱 바라봄에 몸을 맡기는 존재라는 점에서 오키프의 꽃그림이 여성성의 정수로 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단순히 오키프의 꽃이 여성의 성적 이미지라고 했던 누군가의 말에 뭔가 찜찜함을 거둬내지 못하고 있던 나로선 만족할 만한 해석을 들었던 것이다.

51명의 작가와 작품에 대한 글들을 읽을 때 굳이 첫글 로댕의 <꽃장식 모자를 쓴 소녀>에서 시작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글의 차례에 따라가지 말고 책장을 넘기다가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이 있으면 그 부분을 읽는 자유로은 방식을 택하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늘 곁에 두고 틈틈이 자주 들춰보고 싶은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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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소녀 카르페디엠 8
벤 마이켈슨 지음, 홍한별 옮김, 박근 그림 / 양철북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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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존중하고, 가지를 꼭 붙들지 않으면, 떨어져 다칠 수 있다. 오래 전이지만, 엄마는 내가 나무를 존중한다는 걸 알았다. 엄마는 그저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가지를 꼭 붙들듯이 네 꿈도 꼭 붙들어라, 가비."
그 때는 너무 어려서 꿈을 잃어버리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느낄 수가 없었다. -10쪽

아빠는 다정하게 웃더니 천천히 이렇게 말했다.
"가비, 넌 마야인이야. 세계는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숨가쁘게 변해 간다. 변화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익히지 않으면 그 안에서 무너져 버릴 거다. 교육을 통해 살아남는 법을 배우는 거야. 널 학교에 보내서 우리 가족도 희망이 생겼다. 앞으로 언젠가는 네가 우리 모두를 가르쳐야 해. 엄마와 아빠한테 그러겠다고 약속하렴."-19쪽

"남자 애한테도 요리하는 법을 가르칠 수 있어요?"
내가 물었다. 엄마는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랑은 치마만 입는 게 아니란다. 재료를 섞는 거나 불을 피우는 건 쉬운 일이지. 그렇지만 사랑을 담아 요리를 해야 좋은 음식이 되는 거야."
엄마가 나에게 준 것이 사랑이었다. (....) 매일 하루가 시작되고 끝날 때까지 엄마가 나에게 가르쳐 준 교훈은 사랑이었다.
엄마는 다정함도 가르쳐 주었다.
"다정함은 사랑보다 더 소중하단다. 다정하다는 건 사랑을 나눈다는 뜻이야."-28쪽

아빠는 한 단어 한 단어를 신중하게 고르며 천천히 말했다.
"존중과 희망이란 건 싸워서 얻을 가치가 있는 거야."
"그래요. 난 이제 열세 살이니까 조금만 있으면 나가서 싸울 수 있어요."
레스테르가 말했다. 아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싸울 준비가 되었다고 할 수 없어. 반군 지도자들 중 상당수는 과테말라 사람도 아니야. 그런 사람들이 너나 나, 조그만 우리 마을 같은 것에 신경이나 쓰겠니? 반군이나 정부군이나 식량과 정보를 얻기 위해 우릴 이용할 뿐이야. 우릴 위해서 싸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39쪽

"에스파냐 어를 안다거나, 다른 것들을 배웠다고 해서 미래를 준비했다고는 할 수 없어. 네 미래는 올바른 질문을 찾아내고 용기 내어 그 질문을 던지면서 찾아 나가는 거다. 좋은 질문은 좋은 대답보다 훨씬 중요한 거야. 그렇지만 질문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지. 가브리엘라, 넌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알겠지. 하지만 왜 사는지도 알겠니?"
마누엘 선생님이 나한테 말하려고 하는 걸 내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알 수 없었다. -46쪽

나는 나무 사이에서 신뢰를 구한다. 공기처럼 고요히 앉아 있으면, 올빼미나 독수리가 내 몸에 부딪힐 정도로 가깝게 스쳐간다. 나는 한 번도 손을 뻗어 새를 잡으려고 해본 적이 없다. 그렇게 하면 숲의 신뢰를 저버리는 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더 신뢰하고 신뢰받을 수 있는 곳이 절실했다. -48~49쪽

"조용히 해, 아가야! 네 목숨을 구하려고 그러는 거야. 살고 싶으면 날 도와 줘야 돼. 난 네 엄마도 아니고, 세상은 언제나 친절하기만 한 건 아냐."
내 말을 알아들었을 리는 없지만, 아기는 딸꾹질을 하더니 울음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아기를 보면서, 군인들도 처음 태어났을 때는 이렇게 작고 연약하고 순진무구한 존재였을까, 정말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무엇이 인간을 그렇게 타락하게 만들었을까?
나는 아기를 가슴에 안고 천천히 흔들면서 엄마가 불러 주던 노래를 불렀다. -108쪽

사람들은 대부분 패쇄적으로 지냈다. 옆에 있는 사람을 믿지 않았고 금방 헤어질 사람과 사귀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각각 기억, 분노, 회한으로 이루어진 작은 세계 안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난민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현실을 회피하려 했다. -153쪽

"공 한 개 구해 주실 수 있어요?"
미국인 구호 요원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여기가 놀이터니? 여긴 난민 수용소잖아."
"아이들은 다시 행복해지는 법을 배워야 돼요."
구호요원이 화를 내지 않을까 겁이 났지만 나는 계속 매달렸다.
"행복해지려면 놀이가 필요해요. 놀기 위해서 제대로 된 공이 필요하고요."
"수용소에 필요한 건 의약품과 식량이야."
요원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이 약이에요. 아이들을 다시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약이오."
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169쪽

사람들은 밤마다 미국으로 탈출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토론은 늘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해서 사실을 일깨워 주며 끝이 났다.
"불법이고 위험해요. 무엇보다 돈이 있어야 하고."
내 생각에, 살아가는 건 이미 언제나 위험했다. 난민 수용소에서 돈을 버는 건 불가능했다. (....) 그리고 희망을 구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희망은 쌀이나 콩처럼 트럭 뒤에서 나눠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73쪽

어느 날 밤 나는 마리오에게 물었다.
"전쟁이 언제 끝날 거라고 생각하세요?"
"어떤 전쟁?"
마리오가 되물었다.
"군대와 반군이 벌이는 이 전쟁말고 다른 전쟁이 또 있어요?"
마리오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여러 전쟁 가운데 하나일 뿐이야. 네 경우에는, 여자라는 것도 평생 치러야 할 전쟁이야. 그리고 우리 둘 다, 인디오이기 때문에 군인들이 등장하기 전부터 전쟁을 해왔다고 할 수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나는 그 전부터 열심히 싸우고 있었다.
......
"우리가 싸워야 할 적, 치러야 할 전쟁은 한둘이 아니야."
마리오가 말했다. -177쪽

"지금으로선 여기가 우리 집이고, 몇 년을 더 있어야 할지 모르잖아요. 아이들은 교육을 받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인디오라는 걸 평생 수치로 여겨야 할 거예요."
마리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긍지와 자부심을 배우지 못하면 아이들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말거야."
그 순간 나는 마리오 살바도르가 훌륭한 선생님이란 걸 알 수 있었다. 훌륭한 선생님은 자기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 아니라 어린 여자 애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는 이유로 그 생각을 무시하지 않는 사람이다. 좋은 선생님은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인다. 마누엘 선생님이 그랬듯이. -180쪽

"나무소녀는, 아주 특별해. 겁쟁이가 아니야.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을 가지고 스스로를 나무라지 않아. 나무소녀는 높이 올라가면 떨어질 수 있다는 걸 알지. 그렇지만 올라가면 새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알아. 아주 강하기 때문에 삶에서 좋은 것을 누리기 위해서 나쁜 일을 겪어야 할지라도 그걸 피하지 않고 마주할 수 있어. 희망을 찾기 위해 어떤 고통에도 굳세게 맞서지. 삶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찾기 위해 추한 것들을 만날 위험도 무릅쓰고. 나무소녀는 다른 사람들은 무서워서 감히 덤비지 못할 때에도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어."
알리시아는 가지 위에 말없이 앉아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 나무소녀는 아주 특별한 존재야. 그렇지만 무서운 것이 있다고 그걸 피해 달아나면 나무소녀가 될 수 없어. 너를 겁에 질리게 하는 것에 당당히 맞서야 나무소녀가 될 수 있어. 그러려먼 먼저 말을 해야 해."
알리시아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언니도 나무소녀냐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195~197쪽

"더 높이 올라가면 안 돼?"
알리시아가 물었다. 들릴락 말락, 갈라지는 듯한 목소리였다.
나는 숨이 턱 막혔다. 내 동생의 목소리에, 온 세상이 순간 정지한 것 같았다. 나는 나뭇가지 위에서 몸을 돌려 알리시아를 숨이 막힐 정도로 꼬옥 끌어안았다. 알리시아의 목소리 뒤에 이어진 평화로운 침묵 속에서, 나는 알리시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래, 더 높이 올라가자. 나무에 오르면, 하늘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어."-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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