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소녀 카르페디엠 8
벤 마이켈슨 지음, 홍한별 옮김, 박근 그림 / 양철북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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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존중하고, 가지를 꼭 붙들지 않으면, 떨어져 다칠 수 있다. 오래 전이지만, 엄마는 내가 나무를 존중한다는 걸 알았다. 엄마는 그저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가지를 꼭 붙들듯이 네 꿈도 꼭 붙들어라, 가비."
그 때는 너무 어려서 꿈을 잃어버리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느낄 수가 없었다. -10쪽

아빠는 다정하게 웃더니 천천히 이렇게 말했다.
"가비, 넌 마야인이야. 세계는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숨가쁘게 변해 간다. 변화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익히지 않으면 그 안에서 무너져 버릴 거다. 교육을 통해 살아남는 법을 배우는 거야. 널 학교에 보내서 우리 가족도 희망이 생겼다. 앞으로 언젠가는 네가 우리 모두를 가르쳐야 해. 엄마와 아빠한테 그러겠다고 약속하렴."-19쪽

"남자 애한테도 요리하는 법을 가르칠 수 있어요?"
내가 물었다. 엄마는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랑은 치마만 입는 게 아니란다. 재료를 섞는 거나 불을 피우는 건 쉬운 일이지. 그렇지만 사랑을 담아 요리를 해야 좋은 음식이 되는 거야."
엄마가 나에게 준 것이 사랑이었다. (....) 매일 하루가 시작되고 끝날 때까지 엄마가 나에게 가르쳐 준 교훈은 사랑이었다.
엄마는 다정함도 가르쳐 주었다.
"다정함은 사랑보다 더 소중하단다. 다정하다는 건 사랑을 나눈다는 뜻이야."-28쪽

아빠는 한 단어 한 단어를 신중하게 고르며 천천히 말했다.
"존중과 희망이란 건 싸워서 얻을 가치가 있는 거야."
"그래요. 난 이제 열세 살이니까 조금만 있으면 나가서 싸울 수 있어요."
레스테르가 말했다. 아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싸울 준비가 되었다고 할 수 없어. 반군 지도자들 중 상당수는 과테말라 사람도 아니야. 그런 사람들이 너나 나, 조그만 우리 마을 같은 것에 신경이나 쓰겠니? 반군이나 정부군이나 식량과 정보를 얻기 위해 우릴 이용할 뿐이야. 우릴 위해서 싸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39쪽

"에스파냐 어를 안다거나, 다른 것들을 배웠다고 해서 미래를 준비했다고는 할 수 없어. 네 미래는 올바른 질문을 찾아내고 용기 내어 그 질문을 던지면서 찾아 나가는 거다. 좋은 질문은 좋은 대답보다 훨씬 중요한 거야. 그렇지만 질문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지. 가브리엘라, 넌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알겠지. 하지만 왜 사는지도 알겠니?"
마누엘 선생님이 나한테 말하려고 하는 걸 내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알 수 없었다. -46쪽

나는 나무 사이에서 신뢰를 구한다. 공기처럼 고요히 앉아 있으면, 올빼미나 독수리가 내 몸에 부딪힐 정도로 가깝게 스쳐간다. 나는 한 번도 손을 뻗어 새를 잡으려고 해본 적이 없다. 그렇게 하면 숲의 신뢰를 저버리는 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더 신뢰하고 신뢰받을 수 있는 곳이 절실했다. -48~49쪽

"조용히 해, 아가야! 네 목숨을 구하려고 그러는 거야. 살고 싶으면 날 도와 줘야 돼. 난 네 엄마도 아니고, 세상은 언제나 친절하기만 한 건 아냐."
내 말을 알아들었을 리는 없지만, 아기는 딸꾹질을 하더니 울음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아기를 보면서, 군인들도 처음 태어났을 때는 이렇게 작고 연약하고 순진무구한 존재였을까, 정말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무엇이 인간을 그렇게 타락하게 만들었을까?
나는 아기를 가슴에 안고 천천히 흔들면서 엄마가 불러 주던 노래를 불렀다. -108쪽

사람들은 대부분 패쇄적으로 지냈다. 옆에 있는 사람을 믿지 않았고 금방 헤어질 사람과 사귀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각각 기억, 분노, 회한으로 이루어진 작은 세계 안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난민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현실을 회피하려 했다. -153쪽

"공 한 개 구해 주실 수 있어요?"
미국인 구호 요원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여기가 놀이터니? 여긴 난민 수용소잖아."
"아이들은 다시 행복해지는 법을 배워야 돼요."
구호요원이 화를 내지 않을까 겁이 났지만 나는 계속 매달렸다.
"행복해지려면 놀이가 필요해요. 놀기 위해서 제대로 된 공이 필요하고요."
"수용소에 필요한 건 의약품과 식량이야."
요원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이 약이에요. 아이들을 다시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약이오."
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169쪽

사람들은 밤마다 미국으로 탈출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토론은 늘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해서 사실을 일깨워 주며 끝이 났다.
"불법이고 위험해요. 무엇보다 돈이 있어야 하고."
내 생각에, 살아가는 건 이미 언제나 위험했다. 난민 수용소에서 돈을 버는 건 불가능했다. (....) 그리고 희망을 구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희망은 쌀이나 콩처럼 트럭 뒤에서 나눠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73쪽

어느 날 밤 나는 마리오에게 물었다.
"전쟁이 언제 끝날 거라고 생각하세요?"
"어떤 전쟁?"
마리오가 되물었다.
"군대와 반군이 벌이는 이 전쟁말고 다른 전쟁이 또 있어요?"
마리오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여러 전쟁 가운데 하나일 뿐이야. 네 경우에는, 여자라는 것도 평생 치러야 할 전쟁이야. 그리고 우리 둘 다, 인디오이기 때문에 군인들이 등장하기 전부터 전쟁을 해왔다고 할 수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나는 그 전부터 열심히 싸우고 있었다.
......
"우리가 싸워야 할 적, 치러야 할 전쟁은 한둘이 아니야."
마리오가 말했다. -177쪽

"지금으로선 여기가 우리 집이고, 몇 년을 더 있어야 할지 모르잖아요. 아이들은 교육을 받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인디오라는 걸 평생 수치로 여겨야 할 거예요."
마리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긍지와 자부심을 배우지 못하면 아이들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말거야."
그 순간 나는 마리오 살바도르가 훌륭한 선생님이란 걸 알 수 있었다. 훌륭한 선생님은 자기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 아니라 어린 여자 애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는 이유로 그 생각을 무시하지 않는 사람이다. 좋은 선생님은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인다. 마누엘 선생님이 그랬듯이. -180쪽

"나무소녀는, 아주 특별해. 겁쟁이가 아니야.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을 가지고 스스로를 나무라지 않아. 나무소녀는 높이 올라가면 떨어질 수 있다는 걸 알지. 그렇지만 올라가면 새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알아. 아주 강하기 때문에 삶에서 좋은 것을 누리기 위해서 나쁜 일을 겪어야 할지라도 그걸 피하지 않고 마주할 수 있어. 희망을 찾기 위해 어떤 고통에도 굳세게 맞서지. 삶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찾기 위해 추한 것들을 만날 위험도 무릅쓰고. 나무소녀는 다른 사람들은 무서워서 감히 덤비지 못할 때에도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어."
알리시아는 가지 위에 말없이 앉아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 나무소녀는 아주 특별한 존재야. 그렇지만 무서운 것이 있다고 그걸 피해 달아나면 나무소녀가 될 수 없어. 너를 겁에 질리게 하는 것에 당당히 맞서야 나무소녀가 될 수 있어. 그러려먼 먼저 말을 해야 해."
알리시아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언니도 나무소녀냐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195~197쪽

"더 높이 올라가면 안 돼?"
알리시아가 물었다. 들릴락 말락, 갈라지는 듯한 목소리였다.
나는 숨이 턱 막혔다. 내 동생의 목소리에, 온 세상이 순간 정지한 것 같았다. 나는 나뭇가지 위에서 몸을 돌려 알리시아를 숨이 막힐 정도로 꼬옥 끌어안았다. 알리시아의 목소리 뒤에 이어진 평화로운 침묵 속에서, 나는 알리시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래, 더 높이 올라가자. 나무에 오르면, 하늘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어."-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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