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모모 ㅣ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모모를 처음 읽은 건 내가 초등학교 5,6학년 무렵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이차가 많은 오빠들을 둔 덕에 만날 수 있었던 책이다. 그 때는 모모의 이야기가 그저 환타지 동화의 재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도 어린 내 기억에 깊은 인상을 남겼더랬는지, 그 후로 몇 번을 더 꺼내 읽기도 하고 주변에 선물을 해야 할 경우가 생기면 내가 좋아하는 책이라며 선물을 하기도 했었다.
모모의 이야기에는 참 독특한 개성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일단 모모, 원형극장에서 혼자 살아가는 여자 아이다. 자기가 몇살인지도 모르는 아이다. 그러나 주변의 따뜻한 이웃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아이다. 모모의 가장 탁월한 재능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다. 진정으로 귀를 기울여 사람의 말을 들어 줄 줄 아는, 그래서 모모에게 뭔가 두서없이 말을 늘어 놓던 사람은 자신도 깜짝 놀랄 만큼 지혜로운 생각을 떠올리게 만드는 신기한 재주가 있는 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모를 알게 된 것이 행운이라고 여기며 혹시라도 모모가 자기들을 떠날까봐 걱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또 한 사람 모모의 친구 베포할아버지. 직업은 거리의 청소부다. 신중한 성격의 그는 '진실이 아닌 이야기를 하지 않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자기 일을 천천히 하지만 쉬지 않고 해 나가는 사람이다. 베포는 말한다. "한꺼번에 도로 전체를 생각해서는 안돼. 알겠니? 다음에 딛게 될 걸음, 다음에 쉬게 될 호흡, 다음에 하게 될 비질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계속해서 바로 다음 일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그러면 일을 하는 게 즐겁지. 그게 중요한 거야. 그러면 일을 잘 해낼 수 있어. 그래야 하는 거야. 한 걸음 한 걸음 나가다 보면 어느새 그 긴 길을 다 쓸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도 모르겠고 숨이 차지도 않아. 그게 중요한 거야."라고.. 어린 나이에 들은 베포의 말은 내가 어떤 일에 조급해질 때나 서두르게 될 때 내 마음 속에 메아리처럼 울리고 했다.
다른 한 사람 기기, (어릴 적 읽던 책에는 이름이 '지지'라고 되어 있었다)관광 안내원 일을 하고 있지만 늘 꿈을 꾸는 사람이다. 타고난 이야기꾼에 광대같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듯한 사람이다.
내가 좋아하는 또다른 인물, 사람은 아니지만 어릴 적 꼭 만나고 싶었던... 거북이 카시오페이아. 30분 앞을 미리 아는 능력을 가진 거북이다. 우리는 3년 후, 5년 후, 또는 10년 후나 그 보다 더 먼 미래를 알고 싶어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렇게 먼 미래를 궁금해 할 필요는 없다. 카시오페이아를 늘 내 곁에 친구로 두고 30분 앞의 미래를 알 수 있다면, 30분 후의 미래가 쌓여서 먼 미래를 전혀 다르게 변화시킬 수도 있을테니까.. 어린 나는 카시오페이아라는 거북이에게 푹 빠져있었더랬다. 아니 30분이 아니라 10분 앞을 미리 알 수만 있어도, 아니면 5분 앞이라도 미리 알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는데.. 사람들은 5분 앞 정도는 쉽게 알 수 있다고, 그리고 5분 후의 미래라면 내 의지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5분 후를 바꿀 수 있다면 먼 미래도 바꿀 수 있는 것 아닌가.. 어차피 먼 미래도 지금의 5분이 쌓이고 쌓여서 도달하는 시간의 한 지점일테니까..
미하엘 엔데는 모모를 통해서 늘 쫓기듯이 바쁘게 살아가느라 정작 소중한 것들을 놓치고 마는 현대사회에 대해 일침을 가하고 있다. 사람들에게서 시간을 빼앗아 살아가는 회색인간들. 그들은 사람들에게 더,더,더 빨리 일하고 더 바쁘게 살아가면서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고 협박하면서 말린 시간의 꽃잎을 말아 담배를 피워 자신의 존재를 유지시키는 사람들이다.
나이를 먹을 수록 시간의 흐름은 점점 더 빨라졌다. 매년 이맘때 쯤, 한 해가 저물어갈 무렵이면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 버린 사실에 새삼 놀라곤 한다. 그리고는 모모이야기 속에 등장하던 그 회색인간들을 떠올리곤 한다. 어느새 나도 회색인간들에게 시간을 빼앗긴 건 아닐까.. 하고.
회색인간들이 빼앗아 간 것은 단순히 시간, 그 자체가 아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사고방식 자체를 변화시킨다. 그런 걸 생각하면 나도 회색인간 스타일로 어느새 생각이 바뀐 게 아닐까하고 염려스러워지는 것이다. 다시 또 한해가 간다. 내 마음 속의 모모가 호러박사를 찾아가 회색인간들의 시간창고에서 시간들을 해방시킬 그런 날이 새해 안에 있기를 바래본다. 그래서 새해에는 나도 시간이 없다, 바쁘다, 투덜대지 않고 소중한 시간들을 아이들과 여유있게 나누게 되기를 빈다. 서로에게 시간을 내어주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지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