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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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 배신자처럼 우리를 덮쳤다. 새로운 태양은 우리를 파멸시키려는 적들과 결탁이라도 한 것 같았다. 불면의 밤을 보내고 난 뒤, 우리의 내부에서 요동치든 갖가기 감정들, 자포자기, 쓸모없는 반항심, 종교적 체념, 두려움, 절망감이 이제 한 덩어리가 되어 제어할 수 없는 집단적 광기 속으로 흘러들었다. 명상의 시간, 결정의 시간은 끝났다. 이성적인 활동은 모두 격정적인 혼란 속에서 흩어져버렸고, 그 순간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너무나 가까운, 우리의 집들에 대한 따뜻한 기억들이 섬광처럼 번득이며 칼에 베인 것 같은 날카로운 아픔을 안겨주었다. -16-17 쪽

거기서 우리는 최초의 구타를 당했다. 너무나 생소하고 망연자실한 일이어서, 몸도 마음도 아무런 통증을 느낄 수 없었다. 단지 무척 심오한 경이로움만을 느꼈을 뿐이다. 어떻게 분노하지 않고도 사람을 때릴 수 있을까?-17쪽

우리가 말을 해도 그들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설사 들어준다 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이름마저 빼앗아갈 것이다. 우리가 만일 그 이름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다면 우리는 우리 내부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찾아내야만 할 터였다. 그 이름 뒤에 우리의 무엇인가가, 우리였던 존재의 무엇인가가 남아 있게 할 수 있는 힘을 찾아내야만 했다. -34쪽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울타리인 카베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인간성이 아주 연약한 것이며 이 인간성이야말로 우리 생명보다 더 위태롭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략)
아픈 인류로 미어터질 듯한 막사에 언어가, 추억이, 다른 아픔이 들어찬다. 다른 아픔이란 독일어로 '하임베'(향수병)라는 것이다. '집을 행한 아픔'이라는 뜻의 아름다운 단어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다. 바깥 세상에 대한 기억들은 우리의 꿈을, 깨어 있는 시감을 가득 채운다. 놀랍게도 우리가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떠오르는 모든 기억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선명하게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80쪽

인간의 본성에 따르면 슬픔과 아픔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겪더라도 우리의 의식 속에서 전부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원근법에 따라 앞의 것이 크고 뒤의 것이 작다. 이것은 신의 섭리이며, 그래서 우리가 수용소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삶에서, 인간이 만족할 줄 모르는 존재라는 말을 그토록 자주 듣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인간이 애초에 완전한 행복의 상태를 누릴 수 없어서라기보다 불행의 상태가 지니는 복잡한 성질을 늘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없이, 차례대로 늘어선 그 불행의 이유들이 단 하나의 이름을, 가장 큰 이유의 이름을 갖게 된다. 그 이유가 힘을 잃어버릴 때까지 말이다. 그런데 그 때 우리는 그 뒤로 또 다른 이유가 등장하는 것을 본다. 비탄에 잠길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뒤로 또 다른 이유들이 줄을 서 있다.
그리하여 겨우내 우리의 유일한 적이었던 추위가 가시자 우리는 배가 고프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똑같은 오류를 범하며 오늘 "배만 고프지 않다면!"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배가 고프지 않기를 바랄 수 있단 말인가? 수용소 자체가 배고픔이다. 우리 자신이 배고픔, 살아있는 배고픔이다. -110쪽

몇 시간 동안 우리는 자유로운 인간들 식으로 불행할 수 있다. -116쪽

그러나 우리에게 수용소는 벌을 받는 곳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끝이 정해져 있지 않다. 수용소는 게르만식 사회구조 한가운데에서 시간 제한 없이 우리에게 부과된 존재방식일 뿐이다. -125쪽

우리는 명백하고 손쉬운 추론을 믿지 않는다. 모든 문명적 상부구조가 제거되면 인간의 행동은 기본적으로 잔인하고 이기적이고 우둔하다는 추론 말이다. 이러한 추론에 따르면 '해프틀링'은 거리낌 없는 인간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 생각에 도출될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궁핍과 지속적인 육체적 고통 앞에서 수많은 사회적 습관과 본능이 침묵에 빠진다는 것뿐이다. -132쪽

그들은 끊임없이 교체되면서도 늘 똑같은, 침묵 속에 행진하고 힘들게 노동하는 익명의 군중, 비인간들이다. 신성한 불꽃은 이미 그들의 내부에서 꺼져버렸고 안이 텅 비어서 진실로 고통스러워할 수도 없다. 그들을 살아 있다고 부르기가 망설여진다. 죽음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지쳐 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 앞에서, 그들의 죽음을 죽음이라고 부르기조차 망설여진다.
얼굴 없는 그들의 존재가 내 기억 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 우리 시대의 모든 악을 하나의 이미지로 형상화할 수 있다면, 나는 내게 친근한 이 이미지를 고를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구부정하게 구부린, 뼈만 앙상한 한 남자의 이미지이다. 그을 얼굴과 눈에서는 생각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136쪽

'이해하려 애쓰지 마라, 미래를 상상하지 마라, 모든 게 어떻게 언제 끝나게 될지 생각하며 괴로워하지 마라'는 게 우리의 지혜였다. '다른 사람에게 질문하지도, 스스로 자문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179쪽

살아 있는 인가들에게 시간의 단위들은 항상 어떤 가치를 지닌다. 그것을 통과해 살아가는 사람이 거기서 내적 자원을 많이 얻으면 얻을수록 가치도 더 커진다. 그러나 우리에게 한 시간, 하루, 한 달은, 즉 우리가 가능한 한 빨리 제거하고 싶었던 이 무가치한 잉여의 물질은 생기없이, 그리고 항상 너무 느리게 미래로부터 과거로 내려앉았다. 하루하루 생기 있게, 소중하게, 돌이킬 수 없이 흘러가던 시기가 끝나고 잿빛의 불투명한 미래가 우리 앞에, 마치 넘을 수 없는 장벽처럼 서 있었다. 우리에게 이야기는 정지되어 있었다. -179-180쪽

우리의 배고픔이 한 끼를 굶은 사람의 그것과 같지 않듯이, 우리의 추위에도 특별한 이름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허기'라는 말을 쓴다. '피로', '공포', '고통'이라는 말도 쓴다. '겨울'이라는 말도. 하지만 이것은 전혀 다른 것들이다. 자기 집에서 기쁨을 즐기고 고통을 아파하며 살아가는 자유로운 인간들이 만들어내고 사용하는 자유로운 단어들이다. 만일 수용소들이 좀더 오래 존속했다면 새로운 황량한 언어들이 탄생했을 것이다. 영하의 날씨에 바람 속에서 셔츠와 팬티, 올이 성긴 천으로 만든 윗도리와 바지만 입은 채, 더할 수 없이 허약해지고 굶주린 육체로, 종말이 다가와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하루 종일 노동하는 것의 의미를 설명하려면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189쪽

오늘은 바람이 불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이상하게도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어떤 상황이, 어쩌면 아주 보잘것없을 수도 있는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절망의 문턱을 넘지 않도록 해주고 계속 살아가게 해준다. 비가 오지만 바람이 불지 않는다. 혹은 비가 오고 바람이 분다. 하지만 오늘 저녁 내가 추가로 죽을 배급받을 차례라는 것을 안다. 혹은 상황이 더 안 좋아서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보통 때와 다름없이 배가 고프다. 그러면 정말로 바닥에 누워 있는 것 같을 때마다 종종 그렇듯 정말로 마음 속에 고통과 지루함밖에 느껴지지 않는데,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좋다, 나는 내가 원한다면 언제라도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을 건드리거나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 수 있다. 그러면 비는 끝날 것이다. -201쪽

바로 기억이라는 고통이다. 의식이 어둠을 뚫고 나오는 순간 사나운 개처럼 내게 달려드는, 내가 인간임을 느끼게 하는 잔인하고 오래된 고통이다. 그러면 나는 연필과 노트를 들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을 쓴다. -216쪽

우리는 망가지고 패배했다. 이 수용소에 적응할 수 있었다 해도, 마침내 우리의 식량을 마련하는 법을 배우고 고된 노동가 추위를 견디는 법을 배웠다 해도, 그리고 우리가 다시 돌아갈 수 있다 해도 그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229쪽

지금 나는 아우슈비츠가 존재했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 시대에 그 누구도 신의 섭리에 대해 말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241쪽

수용소에서 지내는 동안 희망을 갖는 버릇, 자신의 이성을 신뢰하는 버릇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수용소에서는 모든 일이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벌어지기 때문에, 생각이라는 것은 쓸모없었다. 그것은 위험하기도 한다. 고통의 원천이자, 그 고통이 일정한계를 넘으면 자연의 섭리에 의해 무뎌져버리는 감수성이라는 것을 되살려내기 때문이다.
기쁨, 두려움, 그리고 고통과 마찬가지로 기다림도 우리를 지치게 한다. -262쪽

우리 존재의 일부분은 우리 곁에 있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의 눈에 하나의 사물일 뿐인 시적을 보낸 사람의 경험이 비인간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세 사람은 대부분 거기에 물들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감사해야 한다. 이것이 샤를과 나의 우정이 지속될 수 있는 이유다. -2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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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뭐래도 우리는 민사고 특목고 간다
김형진.박교선 지음 / 글로세움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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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촌에 있는 '영재사관학원'이라는 민사고 특목고 입시 전문학원의 원장이 쓴 책.. 특목고에 대한 나의 부정적인 선입견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래도 역시 특목고를 가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은 너무 힘들어 보인다. 

엄마인 내가 바라봐야 하는 곳은 특목고가 아니라 우리 아이의 꿈이 있는 곳이다.  아무리 특목고라도 우리 아이가 가진 꿈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저 빛좋은 개살구가 될 뿐이다. 

몇해전부터 불어닥친 특목고 열풍을 난 늘 마뜩찮은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다.  그 곳에 가려는 아이는 공부가 적성에 맞아서 공부에 재미를 느끼는 우수한 영재이거나,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 부모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특별한 환경을 가진 아이거나, 혹은 타고난 성실함과 강한 의지력과 승부욕으로 똘똘 뭉친 노력파 근성의 아이이거나, 극성맞은 엄마의 그릇된 교육열에 희생된 아이일 거라고 생각했다.  뭐, 아주 틀린 이야기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하나 놓친게 있었다.  특목고를 목표로 한 아이들이 거쳐온 과정이었다.  특목고 합격 여부를 떠나서 그 과정에 뿌려졌을 아이들의 노력을 통해서 아이들은 분명히 얻은 것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저자도 그 점에 대해서 강조한다. 

중2가 되는 큰 아이를 바라본다.  우리 아이는 그런 노력의 과정을 견뎌낼 수 있을까?  만화책과 친구들을 좋아하고 얼마전까지만 해도 놀이터에 나가 초등학생들과도 어울려 놀던 우리 큰아이.. 특목고나 대학이 아니라 우리 아이의 꿈을 먼저 바라봐주는 부모가 되어야지 하며 아이를 바라보고 웃는다.  우리 아이의 꿈 안에 특목고가 있다면 그 힘든 과정을 함께 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아이 책꽂이에 꽂아둔다.  읽고 안읽고는 순전히 아이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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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대로 아빠 맘대로 아들 작은거인 10
오은영 지음, 소윤경 그림 / 국민서관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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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대로 아빠 맘대로 아들, 제목만 보고 생각한다면 막나가는 콩가루 집안 이야기일 것 같지만 꿈을 향해 나아가려는 아빠와 그것때문에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어린 아들 종기가 서로의 입장을 어떻게 이해하고 합일점을 찾아가는가 하는 이야기다.  아니, 의사라는 그럴듯한 직업을 내팽개치고 옹기장이가 되려는 아빠만이 아니다.  아빠때문에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솔전리라는 시골로 이사하고 전학을 해야 했던 종기가 만난 사람들, 수경이와 대주의 마음과 입장을 헤아릴 수 있도록 마음 속을 깊게 하고 마음자리를 넓혀가는 과정의 이야기다. 

속담에 '남의 염병보다 내 고뿔이 중하다'라고 했던가.. 역지사지를 행함은 그리 녹녹한 일이 아니다.  가족들 간에도 그렇고 친구간에도 그렇고, 친척과 이웃을 돌아봄에도 그렇다.  더군다나 일방적인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경우라면 누구나 바늘끝처럼 예민하게 굴 수밖에.. 그러나 역지사지는 고뿔걸린 사람이 염병걸린 사람의 딱하고 급박한 처지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만 포함하는 것이 아닐게다.  역지사지는 염병걸린 사람이 고뿔걸린 사람의 가볍긴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사소한 증상들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쌍방향의 길 위에 있는 것일 게다.  책 속의 수경이 말처럼 우리는 모두 "동정을 바라는 게 아니라 이해를 바라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종기 아빠의 "라면 비법"'입에 맞는 물만 찾는 아쉬운 게 없는 애' 종기뿐 아니라  '샘물 한 방울이 얼마나 달콤한지 모르는 목마른 사람'인 수경이와 대주도 전수받아야 할 비법이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니까 말이다.  옹기장이 아빠는 아들 종기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 '이니까' 함정에 우리 모두 빠지는 거야.  '아들이니까', '아빠니까', '부자니까 당연히 이해해 줘야 해' 그렇게.  난 이제 그 함정에 안 빠지고 싶다.  그 비법을 알았거든., 네 덕분에."

"바로 '라면 비법'이지.  '내가 아빠라면', '내가 아들이라면', '내가 가난하다면'하고 눈 감은 채 오랫동안 상대방 입장에서 보는 것야.  너도 한 번 해봐."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가 참 많은 것을 담아내려고 애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종기네 아빠를 통해서는 옹기를 만들 때 나오는 피움불, 돋군불, 갈름피우기, 생질꾼, 건아꾼, 푸레독, 삼층 삼단 단지, 물그릇 등과 같은 생소하지만 정겨운 낱말들과 흥선대원군 시절의 천주교 박해에 대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아름다운 모습을 통해 올바른 직업관이란 게 어떤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만날 수 있고,  수경이에게서는 가정폭력과 호적법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며, 문제의 아들 종기는 자녀 입장에서의 대변인 역할을 충실히 행하고 있어서 "아이들이 맘대로 하는 게 고집부리는 거라면, 어른들이 맘대로 하는 건 독재라는 걸 왜 모를까?"라는 식의 가슴 뜨끔한 질문을 받기도 한다. 

그래도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중효한 건 이거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맘대로 생각할 때'가 있지만 '돋군불의 뜨거운 불길이 옹기들을 익히는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도 갈라져 있을 때보다 모일 때 더 큰 힘을 보여 줄 수 있으며, 그래서 '가마불이 내뿜는 열기는 옹기를 익히지만, 사람이 내뿜는 온기는 정을 익혀준다'는 것.

작가가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려고 애쓴 만큼 아이들에게 던지는 생각거리가 많은 책이다. 이야기를 자칫 잘못 풀어냈다면  따분하거나 지루할 수 있는 이야기인데도 그다지 껄끄럽지 않은 흐름을 만들어낸 걸 보고 작가의 이름을 다시 확인해 보기도 했다. 특히 종기가 독 속에 숨었다가 과거 속으로 들어가 동자승을 만났을 때 갑자기 뜬금없이 이야기가 왜 환타지로 빠지나 했었는데 그 동자승이 오대조 할아버지의 이야기와 이어지고 결국은 종기네 아빠의 옹기장이 꿈과 엮이는 걸 보고는 이야기를 짜기 위해 작가가 무척 고민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책의 그림이 황선미님의 <일기감추는 날>의 그림을 그린 소윤경님의 그림이다.  밝고 경쾌하고 익살맞은 그림들이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한다.  아이의 마음 속 풍경을 참 잘 그리는 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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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스무 살, 아니 만 열아홉 살 사계절 1318 문고 38
박상률 지음 / 사계절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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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열사가 숨진지 올해가 20주기가 되는 해란다.  신문사진 속의 백발이 성성한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모습이 20년의 세월을 말해주는 듯 했다. 아직도 내 기억엔 "종철아, 잘 가그래이, 아버지는 할 말이 없데이"하던 좀더 젊은 모습이 남아 있는데.. 그렇게 세월이 갔다. 

이 책은 광주민주항쟁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1980년 5월에 나는 중학생이었고, 몇년후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야 광주민주항쟁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어째서 크지도 않은 이 나라의 작지 않은 도시에서 일어난 잔혹한 일들이 어쩌면 그렇게 철저히 입막음 될 수 있었던 건지 납득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했던 기억이 난다.  거기다가 그런 만행의 주인공들이 어떻게 이나라의 통수권을 지닌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앉아 국민들 앞에 그 뻔뻔한 얼굴을 꼿꼿이 쳐들 수 있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때 알았던 것 같다.  세상은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희한한 방법으로 움직일 수도 있다는 걸.  수업거부와 시험거부, 최루탄 등으로 얼룩졌던 대학시절은 1987년 6월항쟁을 정점으로 차츰 제모습을 찾아갔지만 아직도 내 기억 안엔 답답함과 혼란, 당황스러움이 혼재된 한 편의 아픈 그림으로 남아있는 것 같다. 

광주민주항쟁의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을 펼치는 내 기분은 묘했다.  대학 때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며 보았던 광주민주항쟁과 갖가지 고문에 대한 사진과 글들이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오래된 기억에서 스멀스멀 일어섰다.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부지런하고 착하게 살아가는 모범청년 영균의 죽음과 그 영균에게 희망을 두고 살아가던 어머니 월산댁의 통곡이 아프고 아프게 마음에 꽂혀온다.  지울 수 없는 우리의 역사가 되어버린 광주민주항쟁을 배경으로 청소년이 읽을 글이 출판된 것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역사를  들려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씁쓸해지기도 하는 복잡한 감정을 느껴야만 했다.

지은이 박상률님도 그런 복잡하고도 착잡한 이 미묘한 감정을 나보다 훨씬 더 진하게 느꼈을 터이다.  그래서였을까... 영균과 월산댁의 이야기와 번갈아 들어간 작가의 글이 자꾸 이야기 진행에 걸림돌이 되는 건.. 작가가 영균을 '너'라고 부르며 써나간 작가의 글은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읽는 이의 뒷덜미를 잡는다.  영균을 향한 추도사같은 느낌이 드는 그 글들이 좀더 소설이 갖는 '이야기'의 힘 속으로 들어왔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글쎄... 그냥 '이야기'가 되어버리기엔 너무나 큰 아픔이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작가가 쓰는 '이야기'는 평범한 일반 사람들이 모여 나누는 수다스런 이야기들과는 다른 강한 힘과 의미를 지니게 되므로 그냥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면 월산댁의 한맺힌 통곡소리도 우리의 귀에 더 크고 생생하게 메아리쳐 울렸을텐데 말이다. 그런 아쉬움 때문에 별 하나를 뺀다. 

그래도 우리의 십대들을 위한 이런 역사적 배경의 글들이 좀더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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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버스데이
아오키 가즈오 지음, 홍성민 옮김 / 문학세계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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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가까운 관계의 사람에게서 상처받기 쉽고 그 상처는 치유되기 어렵다고 말한다.  살아가면서 그 말이 사실이라는 걸 실감할 때가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아스카라는 여자 아이는 가족으로부터 무시당하고 상처받으며 목소리를 잃어버린다.   말 한마디로 사람이 얼마나 상처받을 수 있는지 모르는 짓궂은 오빠 나오토와 체면을 중요시하고 완벽성만을 추구하는 엄마와 아빠는 5학년 짜리 여자아이 아스카에게 잔인한 말을 서슴지 않는다. 아스카에게 자애로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시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할아버지는 아스카가 자기 상처를 어루만지고 보듬을 수 있도록 지혜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자연을 가까이 하도록 도와준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던 아이'였던 아스카가 집으로 돌아가 차츰 자기의 가치를 찾으며 학교의 집단 따돌림문제에 적극 개입을 하는가 하면 중증장애를 가진 메구미와 우정을 나누고 자기에게 상처를 주었던 엄마를 이해하게 된다. 

누군가 나를 따뜻한 눈길로 지켜봐주고 있다는 느낌, 상처받았을 때 언제라도 달려가면 내 편이 되어 위로해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살아가는 데 커다란 힘이 되고 용기가 되는 것 같다. 아스카 역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이해와 격려 속에서 자기를 찾았고 세상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었으니까.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아이’ 아스카가 친구들과 선생님, 아버지와 엄마로부터 “HAPPY BIRTHDAY"라는 축하의 말을 들을 때 나도 마음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책의 삽화가 다분히 순정만화적이다.  어쩌면 십대의 아이들에게 더 친밀하게 다가설 수 있기 위해서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순정만화 투의 삽화가 이야기의 깊이를 깨는 듯한 느낌이 들어 아쉬웠다.  일본 이야기라는 노골적인 피켓시위같은 그림이라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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