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5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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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미국문화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무한 내가 이 책을 읽고 완전히 소화한다는 건 무리였다.  그거야 이미 알고 시작한 게임(?)이었다.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에 주인공 와타나베와 기숙사 선배 나가사와와의 대화에서 언급되었던 책, 그래서 늘 '나도 읽어봐야지'하면서도 쉽게 손이 가지지 않았던 책이었다.  <상실의 시대>에 소개된 <위대한 개츠비>는 이렇다. 

어느날 내(와타나베)가 식당의 양지쪽에서 볕을 쬐면서 <그레이트 개츠비>를 읽고 있자니까, (나가사와가)옆에 와 앉아서 무엇을 읽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레이트 개츠비>라고 나는 말했다.  재미있느냐고 그는 물었다.  훑어 읽는 건 세번 째이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가 있다고 나는 대답했다. 
  "<그레이트 개츠비>를 세 번 읽는 작자라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지" 하고 그는 제 자신을 타이르듯이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시월의 일이었다.   (<상실의 시대> 문예사상사,1989,69쪽)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에서 왜 <위대한 게츠비>를 언급해야 했을까.  개츠비를 위대하게 만드는 건 뭘까. 

개츠비는 "삶의 가능성에 예민한 감수성"(p.11)"희망에 대한 탁월한 재능"(p.11), "낭만적인 민감성"(p.11)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물론 그는 밀주와 도박으로 부를 축적하고 폭력계의 거물인 울심프와 손잡고 불법을 일삼는 범법자이기도 하다.  그런 그에게 데이지라는 여인은 그의 모든 불법과 범죄에 대해 면죄부를 쥐어주는 낭만적인 꿈이자 환상이었다.  개츠비가 살아가는 행위의 모든 목적은 오직 데이지를 위해서였고, 맹목적인 사랑에 대한 환상은 아름다웠지만 현실은 차가웠다는 게 문제였다.

개츠비가 벌이는 성대하고도 화려한 파티는 "개츠비를 희생물로 이용한 것들, 개츠비의 꿈이 지나간 자리에 떠도는 더러운 먼지들"(p.11)을 불러들였고, 아쉽고 비참하게도 개츠비가 사랑한 여인 데이지도 그 먼지들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개츠비가 사랑한 데이지와 실제의 데이지는 같은 인물이라고 볼 수 없었다.  개츠비가 사랑한 데이지는 개츠비가 자기만의 환상과 낭만으로 재탄생시킨 또하나의 데이지였다.  그녀는 "그가 품어온 환상의 거대한 힘"으로 창조되었고 "그 환상의 힘은 그녀를 초월하였으며 모든 것을 뛰어넘었다. 그는 창조적인 열정으로 직접 그 환상에 뛰어들어 그 환상이 끊임없이 부풀어 오르게 했으며, 자신의 길 앞에 떠도는 모든 빛나는 깃털로 그 환상을 장식했던 것이다.(p.138)"

개츠비는 그 환상을 위해 삶을 바쳤고, 동시에 그 환상이 개츠비의 삶을 지탱시켰다.  삶은 낭만적인 환상없이는 지속하기 힘든 것일까.. 삶은 그 자체로 욕심없이 흘러가고 있는데, 애써 그 삶에 꿈의 장식을 달고 환상의 레이스를 덮고 낭만과 자아도취의 조명을 밝혀놓고는 그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이 드러날 때 그 쓰라린 절망의 화살을 삶 탓으로 돌리고 있는 건 아닐까,  욕심없이 소박하게 흐르고 있는 삶에다 이것 저것 끌어다 갖다 붙인 건 바로 나 자신이면서 말이다. 

개츠비가 벌였던 파티의 성대하고 화려한 불빛들을 보고 찾아들었던 먼지같은 인물들에 비하면 그는 단연 반짝이는 존재다.  그는 자기의 꿈이 이루어지리라 확신했고, 그 꿈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걸었고,  그 꿈 앞에 정직했다.  그게 무슨 소용있냐구?  결국 꿈이 그를 배반하지 않았느냐고?  그렇게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본 사람이라면 꿈을 지켜내고 꿈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아간다는 게 얼마나 힘들고 모진 일인지 알 것이다.  냉혹한 현실을 탓하며 자기의 꿈과 낭만을 포기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 것이고, 그래서 개츠비더러 "참 대단한 사람이네."라는 한 마디의 말을 아까워하지 않고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개츠비의 죽음은 한 사람의 삶이 끝났음과 동시에 그의 꿈이 깨져버렸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그 옛날의 따뜻한 세계를 상실했다고, 단 하나의 꿈을 품고 너무 오랫동안 살아온 것에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p.227)"는 느낌과 함께 찾아왔으며 "장미꽃이 얼마나 기괴한 것인지, 또 가꾸지 않은 잡초 위에 쏟아지는 햇볕이 얼마나 냉랭한 것인지 알았을 때(p.228)" 그를 덮쳤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데이지라는 장미꽃이 자신의 환상처럼 아름답고 향기롭지 않으며 기괴한 모습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잡초같은 자신의 인생에는 햇볕조차도 차갑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작중화자인 닉 케러웨이는 소설의 마지막을 이렇게 끝낸다. 
"개츠비는 그 초록색 불빛을, 해마다 우리 눈앞에서 뒤쪽으로 물러가고 있는 극도의 희열을 간직한 미래를 믿었던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피해 갔지만 문제될 것은 없다.  내일 우리는 좀 더 빨리 달릴 것이고 좀 더 멀리 팔을 뻗칠 것이다........ 그리고 어떤 맑게 갠 아침에는.....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계속 전진하는 것이다."
라고.

그러니 어찌 삶의 욕심없고 소박한 흐름에 몸을 맡기고 되는대로 흘러가기를 바라겠는가.  개츠비가 데이지가 사는 집의 초록 불빛에 시선을 두었듯이 나 또한 내 시선을 묶어둘 불빛을 찾아야 한다.  그리곤 온갖 환상과 낭만과 꿈의 장식을 달면서라도 그 불빛을 향해 나아가도록 안간힘을 써야 하리라. 삶의 조류를 거스르는 배가 되어야 하리라. 

그러고보니 <상실의 시대>의 분위기가 떠오른다. 와타나베를 비롯해서 현실의 삶에서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답답증과 상처들 때문에 방황하는 <상실의 시대> 속의 인물들이 어쩐지 개츠비와 묘하게 맞닿아 있다.  물론 나오코는 데이지와 전혀 다르지만.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 첫 부분에 <위대한 개츠비>를 언급하면서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의 분위기와 방향을 암시하려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아쉬운 점 한 가지,  책에 언급되는 음악들을 하나도 알지 못했다.  그 음악을 듣는다면 <위대한 개츠비>의 맛을 좀 더 새롭게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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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6-13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무 해 전에 읽었던 책이네요. 롱아일랜드의 화려한 불빛 그 너머의 허망한 꿈들...
섬사이님, 새 서재에서 뵙는 첫발자국이네요. 새로운 기분, 화사하고 밝은 서재..
좋으네요.^^ 그저 늘 고맙습니다.

섬사이 2007-06-14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무해 전에 벌써 읽으셨군요. <상실의 시대>를 읽은 지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이제서야 겨우 읽었어요. 제 게으름을 탓해야겠지요. ^^
 
이현의 연애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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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기록하는 여자 이진의 프롤로그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연애"라는 낱말이 갖고 있는 가벼움, 때로 우스꽝스러움, 그 대책없는 열띰과 찬란한 유치행각, 시도 때도 없이 불어대는 눈물바람과 남들에게는 심심풀이 이야기감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흥미성 등과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 무겁고 어렵고 진지한 연애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이 무겁고 진지한 주제들을 섬세하고 매끈하게 풀어가며 한점의 흐트러짐없이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저자의 文筆力의 막강한 내공이 감탄스러웠다. 

중간중간 책을 덮고 내용을 머릿 속에서 이리저리 다시 주물러 보거나 엉켜진 가닥을 풀어가며 책에 대한 내 생각을 모아들이는 것만도 시간이 오래 들었다.  나의 독서와 사유의 내공이 빈약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작은 이야기(小說)로서의 본분을 잊은 이 이야기의 진지함도 무시할 수 없을 터이다.  결국 짤막한 내 생각들을 하나로 묶지 못하고 이렇게 토막내어 정리하는 방법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내 내공의 빈약함을 탓할 밖에.

이현現과 이진眞
뒤에 '실'자 하나만 갖다 붙이면 그대로 현실과 진실이 되어버리는 두 주인공의 이름은, "가볍고 깊이가 없는"(p.210) 현실과  아름답고 무심한 듯 하지만 "주변의 모든 것을 끌어당겨 그 공간을 채우려 하는 강력한 어떤 힘"(p.20)을 가졌으나 "현실 속에서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p.13) 진실에 대한 상징일 것이다.
현실과 진실,  육체와 영혼,  표면과 내면 등으로 대조되고 상반되는 두 세계에 각각 몸을 담고 있는 이현과 이진의 연애는 경계는 존재하지만  합쳐지거나 포개어질 수 없는 것들의 결합을 이루어 내려는 무모한 시도였던 것이고,  필연적으로 비극적 결말을 향해 나아갈 수 밖에 없을 터이다. 

기록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 이진에게 기록이란 "기억의 확장'(p.8)이며 "존재를 대신"(p.8)하는 것이다. 이진의 프롤로그에서 언급된 기록에 대한 의미들은 곧 이진이란 인물이 존재하기 위한 목적이며 수단이다.  이진의 기록은 '적는다'는 단순한 의미를 떠나서 "한 인간의 삶 속으로 녹아들어가 그의 감정과 상황과 사건들을 나의 것들로 경험"(P10)하는 것으로 의미가 확장되어 있다.  이진의 기록이라고 볼 수도 있는 이 소설이 현실에서는 소설가 심윤경 작가의 기록임을 상기할 때, 작중 인물 이진을 통해 작가로서 갖고 있는 생각들을 어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으며 섬뜩하게 느껴지던 영혼들을 "제압하고 파악하고 위로"하는(p.12) 이진의 눈빛이 곧 작가의 집요한 눈빛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책 속에는 '이진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네 편의 짧은 이야기가 들어있다.  어릴 때부터 가난과 불운의 운명을 타고 났다고 생각하는 여인의 이야기 '토토로의 집',  방향을 잃은 한량기질의 남자 학원의 예술에 가까운 열정과 그 기저에 흐르는 슬픔을 담은 '라 캄파넬라',  결벽스럽다 할 정도의 맑은 신앙을 지켜내려는 부목사의 고민과 무력한 신의 영원한 침묵에 대한 신앙적 사유를 담은 '창세기', 그리고 부총리의 형의 이야기 '외알 안경을 낀 사나이'가 그것이다. 
이 이야기들을 읽으며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은 삶의 자리가 곧 벗어날 수 없는 고통과 비극의 자리임을 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빈부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내가 있는 자리가 성직의 자리이건 대책이 안서는 한량의 자리이건 높던지 낮던지, 넓던지 좁던지 간에,  가리지 않고 찾아드는 고통과 비극의 감정은 내 삶의 저 밑바닥에서 숨어흐르고 있는 진실에 대한 답답증일 수도 있을 것이고, 어쩌다 튕겨오른 진실의 물방을 하나가 일으키는 몸서리 나는 전율이기도 할 것이다.  마치 '라 캄파넬라'에서 학원의 여동생 혜원이 베토벤의 월광 소타나에 눈물을 쏟으며 빗 속을 달리는 차의 탑커버를 열어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제발 나의 영혼을 건드리지 말아달라고 간절히 부탁하고 싶은 심정을 어찌 억누룰 수 있겠는가. 

특이한 영혼관
이 이야기 속에서의 영혼은 거룩하다거나 깨끗한 하얀 깃털처럼 가벼운 존재로서의 영혼이 아니다.  육체에 깃들어 있는 맑고 순수한 결정체 같은 것이 아니다.  죽음을 통해서만 육신과의 고리를 끊을 수 있고 죽음을 통해서만 세상과의 인연을 벗어던지고 한없이 가볍고 자유로울 수 있는 티없이 순수하고 깨끗한 순백의 존재가 아니다.  이 책에서의 영혼은 우리의 무의식과 의식 세계 양쪽에 온 몸을(영혼에게도 질료로 이루어진 형체가 있다면)  흥건히 적시고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존재, 그래서 내가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의 아주 작은 의식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육신 보다 더 괴로운 존재다. 무의식 속에 가라앉혀 버린 내 진물나게 더러운 치부까지 낱낱이 끌어안고 괴로워 하는 것이 이진이 만나는 우리들의 영혼이며 농후한 밀도를 가진 내밀하고도 독립적인, 결코 가볍지도 자유롭지도 않은 것이 바로 이 책에 나타나는 영혼의 모습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인간 존재의 마지막 승리같은 밝고 투명한 기존 이미지의 영혼과 이 소설 속의 영혼, 육체의 동정을 받아야 마땅한 가엽고 무겁고 끈적한 영혼이 충돌하는 것을 경험했다.  특별하고 새로운 인식이 일어나는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살구꽃 향기
이진이 풍기는 살구꽃 향기는 사람들의 무의식에 아득하게 파묻혀 있던, 생의 원천에 가장 가까웠던 시기를 건드림으로써, 사람들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 "가장 부끄럽지 않고 진실했던 때,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천진하고 순수했던 어느 한 때의 기억"(200쪽) 을 피워올리게 만든다.   지금의 나는 잃어버린 살구꽃 향기,  그것은 먼 과거의 어느 날엔  나도 품고 있었을 진실의 향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진의 살구꽃 향기는 우리 인생의 그 아름다웠던 한 때에 대한 기억을 불러옴으로써 현재의 내 "비천하고 남루한 모습을 더 극명하게 드러내는"(200쪽)  결과를 가져오고 만다.  진실이 아름다우면서도 동시에 아픈 상처를 내는 이유가 바로 그것일 터..

환상과 자아도취의 삶
이현이 이진에 대한 사랑이 "사랑을 닮은 환상에 불과했"(p.297)으며 그녀에 대한 헌신이 "얄팍한 자아도취에 불과했"(p297)다고 고백하듯, 이현을 닮은 나 또한 환상과 자아도취를 진실이라 착각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연히 이진의 영혼을 기록한 노트를 발견하고 그 속에 적힌 내 영혼에 대한 진실을 고통스럽게 마주하게 될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때에는 나도  이현이나  이세처럼, "나의 운명을 수긍"(p.299)하고 "당연한 몫인 듯, 고통에 기대어 살아가야"할 것이다.   이현이 이진의 노트의 남은 빈 칸들을 채우듯, "육신과 정신의 고통을 이기고"(p.301)자 하는 용기를 쥐어짜가면서..
"성공의 여부를 모르는대로, 희망에 들떠 일단 걸어가는 것이 인생이 아니던가요?"(p.301)하던 이현의 물음이 마음 속을  떠돈다.  일단 가서 부딪쳐 멍들고 상처를 입어봐야 알 수 있는 이 길에서 환상과 자아도취가 없이 어떻게 발을 옮길 수 있을까.  환상과 자아도취는 내가 살아가는 원동력이며 에너지인 셈이다.  누가 감히 환상과 자아도취를 비난할 수 있을까.

진실은 한 마리 고양이?
어쩌면 진실은 이현과 이진의 섹스에 등장하는 한 마리 까탈스런 하얀 고양이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다루면 곁에 다가와 고분고분 애교를 떨며 가르릉거리지만, 서두르며 함부로 했다간 날카로운 발톱을 세워 나를 사납게 할퀼 수도 있는  한 마리 고양이.
현과 진이라는 이름의 상징을 놓고 볼 때, 두 주인공의 섹스의 성공은 얍삽한 현실과 미련스럽다 여겨질 만큼 고집스런 진실과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이 아닐까.  현실과 진실 사이에 걸린 팽팽하게 당겨진 줄에서 미끄러지거나 발을 헛딛지 않고 균형을 이뤄가는 것 말이다.  이리저리 달아나 몸을 감추려는 고양이 한 마리를 끌어안고 타는 줄타기의 묘미는 어떤 것일까. 

이 짐을 내려놓고 떠날 수 있을까?
부총리의 형은 이 소설 속의 여느 등장인물과는 다른 이물적인 존재다. 그는 인생의 짐을 내려놓은 용기있는 사람이다.  사회적 이목과 규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부총리가 그 짐을 고스란히 떠맡은 사실에 대해 미안한 감정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 짐은 실은 그저 네가 떠맡은 거야.  아무도 네게 떠맡긴 일이 없는데 말이야.  네가 떠맡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짐들은 아마 아무도 돌보는 사람 없이 길거리에 버려져 있다가 바람에 구르고 짐승에 뜯겼겠지.  그렇게 한 조각씩 한 조각씩 부서지고 사라졌을 거야.  그래서 지금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을 거거든.  그런데 굳이 네가, 어리고 책임도 없는 네가 그 짐을 다 떠맡겠다고 나선 거야.  그러는 바람에 그 짐은 오늘까지 생생하게 살아남아서, 네 뒤로 누군가가 떠맡아주기를 뻔뻔하게 기다리고 있구나."(p.216)
뒤통수를 한 대 후려맞은 느낌이랄까? 내가 떠안고 있는 이 짐 역시 나의 환상이며 자아도취의 산물이었을까?  벗어던져 놓으면 사라져 버릴 이 짐에 대해 약간의 경외감을 갖고 성실히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이며 미덕이라고 여기며 스스로를 옭아매어놓고는 무겁다 버겁다 하며 투정부리고 불평했던 것일까. 완전 마조히스트가 되어버린 꼴이다.
내려놓을 수 있을까?  애석하게도 나는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내려놓고 가볍게 살라는 그의 말과 행동에 황홀한 동경의 눈빛을 보내면서도, 사람이라면 마땅히 "정열에 휩쓸리고 깨지고 박살나서 죽을 것 같은, 그런 일들이 있어야 하는 거"(p.219)라는 그의 말에 어느 정도 동조의 마음을 가지면서도 "형님께는 형님의 삶이 있는 거죠. 제게는 제 삶이 있습니다."(p.218)라는 무뚝뚝한 부총리의 대답을 되풀이 하는 이 이중심리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균형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지옥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남김없이 보여"(p.78)준다 할지라도 겸허하고 당당하게 받아들이며 끝까지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랄 밖에.

깨어진 금기에 대한 생각
비현실적인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이진의 영혼의 기록은 이현에 의해 열리고 파기된다.  영혼의 이야기가 기록된 이진의 노트는  우리를 유혹하는 또 하나의 판도라의 상자이자 에덴의 선악과이다.  금기의 파괴는 늘 고통을 수반한 희생제의가 뒤따르며 동시에 그 자체로서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이진의 아기는 새로운 금기의 시작이자 새로운 고통의 시작이다.
생래적으로 인간은 금기에 약한가보다.  그 반역과 배반의 유전자를 지우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고의적 선택이  아닐까.  무엇이 그 유구한 역사의 시간 안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금기에 대한 순종보다 반역과 배반의 유전자를 더 진화시키도록 부추켰을까.  금기를 깨뜨려 고통을 받고, 그 고통을 감수해내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인식은 더 확장되고 깊어지고 발달했던걸까.  금기를 깨뜨릴 때마다 우리는 신과 가까워지는 걸까, 악마와 가까워지는 걸까.  그도 저도 아니라면 금기를 파기하고 벌을 받는 것은 시지푸스의 형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걸까. 

 

<이현의 연애>는 가식적인 현실과 적나라한 진실이 만나는 경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인간의 삶과의 비극적 연애담과 다름아니다.  그 경계는 내가 살아가며 갈등하고 고민하는 고통과 비극의 자리이기도 하고 결코 만족에 이를 수 없는 목마름의 자리이기도 하다.  잠시 환상과 자아도취가 던져주는 행복감에 젖을 때가 있을지라도 결국 현現과 진眞이 만나는 그 경계에서 "모든 것을 뒤늦게 깨달은 자의 견디기 힘든 회한"(p206)"대책없는 무력감"(p.68)만을 확인해야 하는 것,  그리고 종국엔 그 모든 것을 끌어안고 가야 하는 것이라고 이 소설은 이야기 한다. 

고통은 준비되어 있으니, 이제 나는 삶과 어떤 연애를 벌여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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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09 17: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섬사이 2007-06-10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인님, 참 깊은 맛이 나는 책이었어요. 추천, 고맙습니다.
 

로알드 달 지음, 정영목 옮김 / 강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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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딸 지니와 같이 이 책을 읽고 서로 떠오르는 말 말하기를 한 적이 있다.  그 때 나왔던 말들을 대충 적어보면,
"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간다."
"자기 무덤 제손으로 판다."
"인생, 만만한 거 아니다."
"삶 앞에 겸손하라."
"까불다 맞는다."  등등...

물론 나중엔 없는 말을 지어 갖다 붙여가며  딸과 함께 낄낄거렸었다. 
옆지기도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면 이 책을 붙잡고 있었는데, 딸과 함께 "충격적 반전"이 어떻고 저떻고 하면서 잠깐씩 대화를 나누곤 했다. 

이 책에 엮어진 열 편의 단편소설들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아마 위에 적힌 "뛰는 놈~"부터 "충격적 반전"까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처세에 능숙해서 세상에 대해 알만큼 다 안다고 자부하며 자기의 도도한 잣대를 타인에게 휘두르는 무례하고 거만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세상을 장난감처럼 갖고 놀 수도 있다는 듯, 모든 사람이 자기 손바닥 안에 있다는 듯 무시하며 조롱어린 시선을 던지는 사람들이다.  그게 아니라면 '인생 한 방'이라는 식의 허황된 꿈을 꾸는 사람들이다.  어느 쪽이든 인생을 너무 쉽고 만만하게 본다는 게 문제다.

'목사의 기쁨'에서는 고가구 판매상인이 그렇고, '손님'에서는 바람둥인 오스왈드, '맛'에서는 미식가 리처드 프랏, '항해거리'에선 잔머리 좀 굴려보려던 보티볼씨가 그렇다.  '벅스비 부인과 대령의 외투'에선 벅스비 부인이 잔꾀를 쓰다가 오히려 남편에게 뒷통수를 맞고, '하늘로 가는 길'에서는 착한 포스터 부인의 약점을 갖고 의도적으로 괴롭히는 그 남편이 끝내 외로운 죽음을 맞는다. '남쪽 남자'에서 내기에 손가락을 요구했던 부유해보이던 작은 남자는 빈털털이의 정신병자였다.  '피부'에서의 드리올리는 등에 문신으로 새겨진 유명화가의 그림 덕에 인생역전을 이루려나 했지만 냉혹하고 잔인한 현실에 희생되고 만다. 

말마따나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 듯한 오만하거나 아니면 허황된 인생역전의 꿈에 젖어 있던 인물이  "충격적 반전"에 의해 낭패를 보고 손해를 보고, 심지어 죽음으로 내몰리는 상황이 그려져 있다. 

교만한 자들이 끝내 골탕먹는 이야기지만 읽으면서 그리 통쾌하다거나 유쾌한 감정을 느끼진 못했다.  반전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그런가 하고도 생각해 보았는데, 그건 아니다.  내가 그 교만한 인물로부터 조롱받는 자의 입장과 동일시 되었다면 반전이 충격적일 수록 쾌감을 느꼈어야 옳았다.  문제는 내 자신이 어느 편의 인물들과 동일시 되고 있느냐인데, 내내 생각해 본 결과, 그 둘 다였다.  나의 내면에는 타인에 대한 오만도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잘난 타인에게 무시당하고 싶지 않다는 오기도 있었던 거다. 이야기 속의 충격적 반전이 유쾌하다기 보다 오싹했던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아마도 로알드 달은 우리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교만에 대한 경고를 보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앞에서 주억거린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느니 하는 말들을 이야기꾼의 재미난 입담으로 풀어낸 건지도 모르겠다. 

따지고 보면 겸손의 덕처럼 실천하기 어려운 덕도 없다.  틈만나면 잘난 척하고 싶고, 작은 자랑거리라도 생기면 떠벌리고 싶고, 죽어도 남들한테 무시당하기 싫어서 죽기로 기를 쓰기도 하니, 삶과 사람 앞에 겸손하기가 얼마나 어렵던지.   잘난 척 까불거리다가 제 코앞도 못보고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기 전에 겸손하게 고개 숙이고 고요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덕을 언제쯤이면 배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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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lin 2007-06-02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독서교육을 들었었는데..섬사이님처럼 책에 대해 아이와 함께 이야기하는 게 참 좋대요. 아무 얘기라도 말이죠^^ 저도 결혼해서 애기 낳으면 섬사이님 따라해봐겠어요 ^^

섬사이 2007-06-07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fallin님, 저희 가족은 너무 농담따먹기식 대화가 주종을 이루고 있어서... 따라하지 않으심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ㅋㅋ
 
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에 농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국민학교 6학년 시절 장래희망을 의사라고 적어낸 영빈과 광에게 선생님이 어떤 의사가 되고 싶냐고 물었을 때 광은 돈없어 병원에 못가는 사람들을 거저 치료해주는 의사가 되겠다고 했고 영빈은 돈을 많이 버는 유명한 의사가 되겠다고 마음에도 없는 대답을 하면서 시작되었던 거였다.   두번째 농담을 말해줄까?  두번째 농담은 그런 영빈과 광이에게 현금이, 고 나쁜 년이 분홍빛 혀를 날름거리며 자기는 돈많은 의사랑 결혼할 거라고 하고는 나풀거리고 사라진 거였다.

그게 무슨 농담이냐고?  이 책을 읽다보면 사는 게 다 농담같단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깔깔거리고 웃으며 읽을 수있는 우스개책이라고 넘겨집지는 마라.  읽을 수록 엄숙해지고 진지해지는 책이니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의사가 되겠다던 광은 산부인과 의사가 되어 아들딸 가려 낳게 해주는 재주(?)로 돈 많은 의사가 되었고, 영빈은 A대학병원 과장으로 실력과 학식을 겸비한 의사가 된다.  물론 과장이 될 때까지 고생 무척 많이 하고..  현금은 의사는 커녕 돈 많은 사채업자 아들이랑 결혼했다가 이혼한다.  이게 농담이지, 뭐냐?

처음 농담은 그렇다고 치지만, 세번째 네번째... 페이지가 넘어갈 수록 이제 서로가 서로에게 농담이 되고 만다.  (그러게, 사는 게 농담이라니까..  ) 영빈의 어머니가 고집스레 남편이 부패한 공무원이 아니었음을 강조하고 도덕적 열등감을 갖는 것도 농담이고,  영빈의 동생 영묘가 그 기구한 운명을 예쁘장한 천사의 얼굴과 영특함으로 포장하고 태어난 것도 농담이다.   영빈이 현금과의 불륜을 아내 수경에게 숨기는 것 또한 인생 속에 끼어든 허망한 농담이고 아내 수경이가 영빈 몰래 아들을 잉태하는 것도 농담같은 음모같지 않냐.
영묘의 남편 송경호의 병과 죽음을 두고 벌이는 송씨 집안의 질펀한 농담 짓거리는 그야말로 농담의 절정이이고 영빈의 형 영준의 재력으로 송회장네 기죽이기는 농담의 카타르시스 아니겠냐?

영빈과 현금의 관계는 서로 속이는 것이 없었지 않냐고?  그거야 그렇지..  하지만 그것보다 더 분명한 농담의 관계도 없었다.  박완서님이 영빈과 현금의 만남을 유열愉悅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확실해진다.  유열 -유쾌하고 기쁨 - 그야말로 농담의 첫째가는 특징이다.  농담은 자고로 무조건 유쾌하고 기뻐야 한다.  그래서 이야기 속에서 영빈은 현금을 만날 때의 무책임과 자유스러움이 좋다고 말한다.  무책임, 자유스러움, 그 가벼움,, 그것 또한 농담의 특징이다.  그러니 영빈의 아내 수경이가 비록 간접적으로라도 영빈과 현금의 관계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 농담의 관계는 깨져 버리는 거라구.  더이상 유열할 수도 무책임하거나 자유스러울 수도 없으니까.

그러니 책을 덮고 나면 사는 게  다 허망한 농담같을 수밖에... 송경호처럼 마지막 죽는 순간에나 눈 부릅뜨고 인생의 진담을 들어볼 수 있으려나.. ?

어릴 적에 아버지 따라서 이발소에 가면  벽에 걸려 있는 액자가 있었어.  유화물감인지 페인트인지 모를 조악한 색과 필치로 그려진 초가지붕의 물레방앗간 그림이거나 아니면 새끼들에게 다닥다닥 젖을 물리고 누워있는 암퇘지 그림이거나, 아니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는 푸쉬킨의 시거나....    그래서 난 아직도 키치스러운 느낌의 그림을 볼 때면 "키치스럽다"하지 않고 "이발소 그림같다"고 표현하곤 한다.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사는 것도 다 이발소 그림같이 보인다.  사는 게 이발소 그림같다면서도 마음은 사뭇 엄숙하고 진지해지는 걸 보면 박완서님의 이야기에서 흘러나오는 주술적 마력이 상당히 세다는 생각이 들더라..  이발소에 붙어 있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던 그 시는 살아가면서 돈 때문에 혹은 인간관계 때문에 아니면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라도 삶이 쳐놓은 농담의 덫에 걸렸을 때 너무 억울해하지 말라는 소리로 들린다. 

하지만 누구라도 이 허망한 농담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억울해하며 사는 것보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에서처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며 삶을 마감짓는 쪽으로 살고 싶을 거다.  근데 삶을 즐거운 농담처럼 여길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비로소 아름다운 소풍이 가능한 거 아니겠냐?아무튼 박완서님의 연륜과 깊이가 묻어나는, 참담할 정도로 매력적인 이야기였어. 

그나저나 서로에게 허망한 농담이 되지 않게나 살아봐야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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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lin 2007-05-25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년 전이네요..이 책을 읽으면서 제목의 의미를 알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제 짧은 생각 탓에 겉만 빙빙 돌고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죠. 님의 리뷰를 읽으니..그때 그 답답했던 제 맘이 조금 풀리네요. 다시 한번 이 책을 읽고, 님의 리뷰도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섬사이 2007-05-25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fallin님, 제 리뷰가 도움이 되셨다니 기쁘네요. 하지만 저건 그냥 제 느낌을 적은 리뷰일 뿐이고 fallin님께는 또 다른 의미와 느낌으로 다가오는 부분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fallin님의 리뷰를 기다려도 될까요? ^^

fallin 2007-05-26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예전에 이 책을 읽고 리뷰를 남겼었답니다. 그때..리뷰에 제목에 대한 궁금증을 써놓았었거든요. 섬사이님의 리뷰를 읽으며..그 궁금증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여서 반가운 맘이였어요. 어느것이 정답인지는 몰라도...제겐 반가웠답니다 ^^

섬사이 2007-05-26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셨군요. 정답이야 없겠지요. 저도 책을 읽고 리뷰를 제 느낌 위주로 쓰다보니까 의도적인 오류에 빠질 위험이 크니까요. 분명히 나도 모르게 오류에 빠지는 경우가 있을 거에요. fallin님 리뷰를 찾아서 읽어봐야겠네요. 서로의 생각을 나누다보면 오류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도 있잖아요. ^^

알맹이 2007-05-30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못 읽고 있던 책인데.. 방학 때 꼭! 읽을 테에요. ^^;

섬사이 2007-05-31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야 할 책은 많고 시간은 쪼들리고.. 님도 그러신가 봐요. 저도 읽고 싶은 책은 밀려 있는데 하루에 책읽기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아요. ㅠ.ㅠ
 
아내가 결혼했다 - 2006년 제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이당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어느 틈엔가 "결혼"이라는 게 전공필수에서 교양선택 쯤으로 바뀌는 것 같다.  얼마 전 뉴스에도 결혼 연령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으며 결혼을 꼭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미혼들의 비율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 같다.  "낭만을 짧고 생활은 길다"는 광고문구나 "결혼은 무덤이다"라는 경구를 빌리지 않더라도 결혼이라는 게 사랑의 성공적인 행복한 완결이라는고 볼 수 없다는 걸 모두 인정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데, 그렇다고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은 일처일부의 결혼제도를 무시하고 다른 방법을 과감히 실천할 수 있는 용기와 배짱을 가진 사람도 흔치는 않으리라고 본다. 우리나라에서 결혼이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것이 되는 이유는 일처일부제에 대한 비판때문이라기 보다 내집마련의 어려움과 양육과 직장생활의 병행에 대한 부담, 거기다 막대한 사교육비를 감당해야하는 우리나라의 교육제도에 대한 불만, 여성의 사회적 능력의 신장 등등이 더 큰 이유가 아닐까 싶기도 한데..

이 책은 세 가지 방법으로 결혼을 논한다.  첫번째는 "결혼제도"와 사랑에 대한 사회학적 관점의 고찰.
모노가미, 폴리아모리, 폴리가미, 폴리기니, 폴리안드리, 폴리피델리티 등등의 결혼의 다양한 방식과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의 사랑에 대한 세 가지 종류 - 열정적 사랑, 낭만적 사랑, 합류적 사랑 - 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무슨 사회학 이론서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나름 흥미롭긴 했다.

두번째는 축구 이야기다.
사실 개인적으로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아서 책에서 언급되는 세계축구구단의 이름과 축구용어와 선수들의 이름들이 오히려 이야기 진행을 어지럽히는 요소였다.  축구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남녀간에 결혼을 투고 티격태격 벌이는 논쟁보다 이 축구에 대한 다양한 에피소드와 선수와 감독들의 다분히 아포리즘적인 말들에 더 흥미를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세번째는 가장 소설다운 부분, 덕훈과 인아, 그리고 인아의 두번째 남편 재경의 밀고 당기기식 좌충우돌 결혼 이야기.
인아, 참 독특한 매력과 확실한 주관, 그리고 과감한 실천력까지 두루 겸비한 여자다.  그런 인아와 사랑에 빠져 꼼짝없이 폴리가미의 선구자가 되어버린 덕훈과 그런 덕훈을 불안에 떨게 하며 인아의 결혼관에 공조하는 부드러운 심성의 재경의 이야기인데,,,   이 책이 가진 소재와 이야기 서술방식에 대한 새로운 발상이라는 장점이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점 늘어진다는 느낌이 든다.  덕훈의 계속되는 징징거림과 넋두리가 책의 중반쯤을 넘어서면서 지겨워지기 시작한다. (뭐, 그 징징거림과 넋두리가 관습타파의 어려움과 선구자적 외로움에 대한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   이야기의 구성과 서술을 위해 첫 번째와 두 번째 방법이 사용된 게 아니라, 주객전도식으로 첫번째와 두번째를 말하기 위해 소설의 형식을 빌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폴리가미, 폴리아모리, 폴리기니 등등의 혁신적인 결혼제도와 뿌리깊은 관습으로 자리잡은 모노가미의 충돌이 분명 핵폭탄만큼이나 위력적인 파괴력을 동반할 것 같건만 덕훈의 투덜거림 몇 번, 인아의 눈물 몇 방울, 재경이의 예의바른 접근과 시도 몇 번에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어물쩡어물쩡 넘어가버리는 듯해서 소설 읽은 뒷맛이 영 개운치가 않다.  거기다 결국 뉴질랜드로의 도피가 유일한 해결방안으로 제시된 것도 찜찜함을 더한다. 

내가 뭘 바라는 건가.  소설 한편에 결혼제도의 일대 혁명이라도 일어나기를 기대하겠다는 말인가.  당연히 그건 아니다.  결혼제도를 익숙한 관점에서가 아니라 새롭고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는 것에 만족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 부분에 대한 논의와 선택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고 주인공들을 뉴질랜드로 떠나보낸 작가의 센스도 인정해줘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모노가미와 폴리가미가 소설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현실감있게 충돌하지 않는 이 소설을 환타지장르로 분류해야 하는 건 아닌지, 이 책이 소설인지 축구이야기인지 사회학 설명서인지, 아니면 그 셋을 모두 합친 새로운 퓨전 장르인지  잠시 고민하게 되는 건 좀 문제가 있다고 본다.  뭐, 내 개인적으로는 그렇다.  이 책의 작가의 말대로 "아니면 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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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2007-05-17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만 보고 이 책일 거라 생각했어요^^*

섬사이 2007-05-17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워낙 특이한 면이 있긴 해요, 그쵸?

알맹이 2007-05-17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저도 향기로운 님과 똑같이 생각했답니다 ^^* 책을 읽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섬사이 2007-05-18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애와 결혼의 복잡다난한 과정을 축구와 접목시켰다는, 요란한 광고 덕분인 것 같아요. 여러가지로 파격적이긴 했어요. 소재도 그렇고 서술방식도 그렇구요.

fallin 2007-05-31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아는 분이 빌려줬는데...손이 안가네요^^;;; 책읽고 리뷰 다시 읽어볼래요^^

섬사이 2007-05-31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 축구얘기가 나오는 걸 알았다면 저도 안읽었을 거예요. 제가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거든요. 제 경우엔 꼭 읽어보세요, 하고 권하고 싶은 정도는 아니었어요.

fallin 2007-06-01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좀 미뤄놔야지 ^^ 제가 귀가 얇아요ㅋㅋㅋ

섬사이 2007-06-01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fallin님, 저도 귀 얇아요, 제 개인적으론 팔뚝이랑 배둘레가 좀 얄팍해졌으면 좋겠는데..^^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