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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에 농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국민학교 6학년 시절 장래희망을 의사라고 적어낸 영빈과 광에게 선생님이 어떤 의사가 되고 싶냐고 물었을 때 광은 돈없어 병원에 못가는 사람들을 거저 치료해주는 의사가 되겠다고 했고 영빈은 돈을 많이 버는 유명한 의사가 되겠다고 마음에도 없는 대답을 하면서 시작되었던 거였다. 두번째 농담을 말해줄까? 두번째 농담은 그런 영빈과 광이에게 현금이, 고 나쁜 년이 분홍빛 혀를 날름거리며 자기는 돈많은 의사랑 결혼할 거라고 하고는 나풀거리고 사라진 거였다.
그게 무슨 농담이냐고? 이 책을 읽다보면 사는 게 다 농담같단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깔깔거리고 웃으며 읽을 수있는 우스개책이라고 넘겨집지는 마라. 읽을 수록 엄숙해지고 진지해지는 책이니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의사가 되겠다던 광은 산부인과 의사가 되어 아들딸 가려 낳게 해주는 재주(?)로 돈 많은 의사가 되었고, 영빈은 A대학병원 과장으로 실력과 학식을 겸비한 의사가 된다. 물론 과장이 될 때까지 고생 무척 많이 하고.. 현금은 의사는 커녕 돈 많은 사채업자 아들이랑 결혼했다가 이혼한다. 이게 농담이지, 뭐냐?
처음 농담은 그렇다고 치지만, 세번째 네번째... 페이지가 넘어갈 수록 이제 서로가 서로에게 농담이 되고 만다. (그러게, 사는 게 농담이라니까.. ) 영빈의 어머니가 고집스레 남편이 부패한 공무원이 아니었음을 강조하고 도덕적 열등감을 갖는 것도 농담이고, 영빈의 동생 영묘가 그 기구한 운명을 예쁘장한 천사의 얼굴과 영특함으로 포장하고 태어난 것도 농담이다. 영빈이 현금과의 불륜을 아내 수경에게 숨기는 것 또한 인생 속에 끼어든 허망한 농담이고 아내 수경이가 영빈 몰래 아들을 잉태하는 것도 농담같은 음모같지 않냐.
영묘의 남편 송경호의 병과 죽음을 두고 벌이는 송씨 집안의 질펀한 농담 짓거리는 그야말로 농담의 절정이이고 영빈의 형 영준의 재력으로 송회장네 기죽이기는 농담의 카타르시스 아니겠냐?
영빈과 현금의 관계는 서로 속이는 것이 없었지 않냐고? 그거야 그렇지.. 하지만 그것보다 더 분명한 농담의 관계도 없었다. 박완서님이 영빈과 현금의 만남을 유열愉悅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확실해진다. 유열 -유쾌하고 기쁨 - 그야말로 농담의 첫째가는 특징이다. 농담은 자고로 무조건 유쾌하고 기뻐야 한다. 그래서 이야기 속에서 영빈은 현금을 만날 때의 무책임과 자유스러움이 좋다고 말한다. 무책임, 자유스러움, 그 가벼움,, 그것 또한 농담의 특징이다. 그러니 영빈의 아내 수경이가 비록 간접적으로라도 영빈과 현금의 관계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 농담의 관계는 깨져 버리는 거라구. 더이상 유열할 수도 무책임하거나 자유스러울 수도 없으니까.
그러니 책을 덮고 나면 사는 게 다 허망한 농담같을 수밖에... 송경호처럼 마지막 죽는 순간에나 눈 부릅뜨고 인생의 진담을 들어볼 수 있으려나.. ?
어릴 적에 아버지 따라서 이발소에 가면 벽에 걸려 있는 액자가 있었어. 유화물감인지 페인트인지 모를 조악한 색과 필치로 그려진 초가지붕의 물레방앗간 그림이거나 아니면 새끼들에게 다닥다닥 젖을 물리고 누워있는 암퇘지 그림이거나, 아니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는 푸쉬킨의 시거나.... 그래서 난 아직도 키치스러운 느낌의 그림을 볼 때면 "키치스럽다"하지 않고 "이발소 그림같다"고 표현하곤 한다.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사는 것도 다 이발소 그림같이 보인다. 사는 게 이발소 그림같다면서도 마음은 사뭇 엄숙하고 진지해지는 걸 보면 박완서님의 이야기에서 흘러나오는 주술적 마력이 상당히 세다는 생각이 들더라.. 이발소에 붙어 있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던 그 시는 살아가면서 돈 때문에 혹은 인간관계 때문에 아니면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라도 삶이 쳐놓은 농담의 덫에 걸렸을 때 너무 억울해하지 말라는 소리로 들린다.
하지만 누구라도 이 허망한 농담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억울해하며 사는 것보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에서처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며 삶을 마감짓는 쪽으로 살고 싶을 거다. 근데 삶을 즐거운 농담처럼 여길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비로소 아름다운 소풍이 가능한 거 아니겠냐?아무튼 박완서님의 연륜과 깊이가 묻어나는, 참담할 정도로 매력적인 이야기였어.
그나저나 서로에게 허망한 농담이 되지 않게나 살아봐야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