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알드 달 지음, 정영목 옮김 / 강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큰 딸 지니와 같이 이 책을 읽고 서로 떠오르는 말 말하기를 한 적이 있다.  그 때 나왔던 말들을 대충 적어보면,
"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간다."
"자기 무덤 제손으로 판다."
"인생, 만만한 거 아니다."
"삶 앞에 겸손하라."
"까불다 맞는다."  등등...

물론 나중엔 없는 말을 지어 갖다 붙여가며  딸과 함께 낄낄거렸었다. 
옆지기도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면 이 책을 붙잡고 있었는데, 딸과 함께 "충격적 반전"이 어떻고 저떻고 하면서 잠깐씩 대화를 나누곤 했다. 

이 책에 엮어진 열 편의 단편소설들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아마 위에 적힌 "뛰는 놈~"부터 "충격적 반전"까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처세에 능숙해서 세상에 대해 알만큼 다 안다고 자부하며 자기의 도도한 잣대를 타인에게 휘두르는 무례하고 거만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세상을 장난감처럼 갖고 놀 수도 있다는 듯, 모든 사람이 자기 손바닥 안에 있다는 듯 무시하며 조롱어린 시선을 던지는 사람들이다.  그게 아니라면 '인생 한 방'이라는 식의 허황된 꿈을 꾸는 사람들이다.  어느 쪽이든 인생을 너무 쉽고 만만하게 본다는 게 문제다.

'목사의 기쁨'에서는 고가구 판매상인이 그렇고, '손님'에서는 바람둥인 오스왈드, '맛'에서는 미식가 리처드 프랏, '항해거리'에선 잔머리 좀 굴려보려던 보티볼씨가 그렇다.  '벅스비 부인과 대령의 외투'에선 벅스비 부인이 잔꾀를 쓰다가 오히려 남편에게 뒷통수를 맞고, '하늘로 가는 길'에서는 착한 포스터 부인의 약점을 갖고 의도적으로 괴롭히는 그 남편이 끝내 외로운 죽음을 맞는다. '남쪽 남자'에서 내기에 손가락을 요구했던 부유해보이던 작은 남자는 빈털털이의 정신병자였다.  '피부'에서의 드리올리는 등에 문신으로 새겨진 유명화가의 그림 덕에 인생역전을 이루려나 했지만 냉혹하고 잔인한 현실에 희생되고 만다. 

말마따나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 듯한 오만하거나 아니면 허황된 인생역전의 꿈에 젖어 있던 인물이  "충격적 반전"에 의해 낭패를 보고 손해를 보고, 심지어 죽음으로 내몰리는 상황이 그려져 있다. 

교만한 자들이 끝내 골탕먹는 이야기지만 읽으면서 그리 통쾌하다거나 유쾌한 감정을 느끼진 못했다.  반전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그런가 하고도 생각해 보았는데, 그건 아니다.  내가 그 교만한 인물로부터 조롱받는 자의 입장과 동일시 되었다면 반전이 충격적일 수록 쾌감을 느꼈어야 옳았다.  문제는 내 자신이 어느 편의 인물들과 동일시 되고 있느냐인데, 내내 생각해 본 결과, 그 둘 다였다.  나의 내면에는 타인에 대한 오만도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잘난 타인에게 무시당하고 싶지 않다는 오기도 있었던 거다. 이야기 속의 충격적 반전이 유쾌하다기 보다 오싹했던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아마도 로알드 달은 우리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교만에 대한 경고를 보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앞에서 주억거린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느니 하는 말들을 이야기꾼의 재미난 입담으로 풀어낸 건지도 모르겠다. 

따지고 보면 겸손의 덕처럼 실천하기 어려운 덕도 없다.  틈만나면 잘난 척하고 싶고, 작은 자랑거리라도 생기면 떠벌리고 싶고, 죽어도 남들한테 무시당하기 싫어서 죽기로 기를 쓰기도 하니, 삶과 사람 앞에 겸손하기가 얼마나 어렵던지.   잘난 척 까불거리다가 제 코앞도 못보고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기 전에 겸손하게 고개 숙이고 고요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덕을 언제쯤이면 배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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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lin 2007-06-02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독서교육을 들었었는데..섬사이님처럼 책에 대해 아이와 함께 이야기하는 게 참 좋대요. 아무 얘기라도 말이죠^^ 저도 결혼해서 애기 낳으면 섬사이님 따라해봐겠어요 ^^

섬사이 2007-06-07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fallin님, 저희 가족은 너무 농담따먹기식 대화가 주종을 이루고 있어서... 따라하지 않으심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