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큰딸과 '샤갈전'과 '피카소와 모던아트전'을 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큰딸이 자기 혼자 가도 괜찮다고 했다. 열아홉살, 그렇게 많이 자랐다. 이제 혼자서 미술전을 즐길 수 있을만큼. 엄마와 떨어져 혼자 다녀오고 싶은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나에게도 열아홉살의 시간들이 있었으니까. 큰딸은 내가 아주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도 될만큼 자란 것이다. 하나하나 일일이 다 챙겨주고, 가고 싶다는 장소를 동행해줘야 했던 시절이 지났다. 몇 년 더 지나고 나면 완전히 독립해서 내 슬하를 떠날 나이가 될 것이다. 잘 보고 오라고 기꺼이 손을 흔들어줬다. 그리고 나는 혼자서 영화를 보러 갔다. '아이 엠 러브'
여주인공 엠마는 뭐 하나 부러울 것이 없어 보이는 여자다. 우아하면서도 단정한 미모를 갖추고 이탈리아 상류층 레키 가문의 화려한 안주인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파티 중간에 방으로 돌아와 혼자 있는 모습이라든가 레키가문의 후계자를 지정하는 자리에서의 불편함을 바라볼 때면 잘 구워졌지만 깨지기 쉬운 예술 도자기를 보는 기분이었다.
러시아의 예술품 복원전문가의 딸이었던 엠마가 남편과 결혼해서 이탈리아에 와서 살게 되면서 그녀는 "이탈리아 인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다"고 말한다. 이탈리아의 상류층의 안주인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 위해 그녀는 러시아 인으로서의 본래의 자기 모습들을 지워가야 했을 것이다. 그건 엠마에게 무척 부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고, 어떤 의미로는 억압이었을 것이다.
그런 엠마가 아들의 친구인 요리사 안토니오를 만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안토니오의 요리를 먼저 만난다. 안토니오가 만든 새우요리는 엠마에게는 '틈'의 발견 같은 게 아니었을까. 엠마는 새우요리를 황홀하게 탐식한다. 레키 가가 자본, 경쟁, 문명, 형식 등을 의미한다면 안토니오와 그의 요리는 자연, 감각, 욕망 같은 것들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엠마는 안토니오를 통해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가두고 있는 억압을 자각했고, 안토니오는 억압을 빠져나갈 '틈'을 열어 보여주는 것이다. '틈'을 통해 엠마는 새로운 숨을 쉴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러므로 엠마가 안토니오를 만나면서 점점 더 그 틈으로 빠져들고 자기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안토니오의 트럭을 타고 그의 집을 향해 가는 초록 숲 사이의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긴 장면은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토끼굴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듯한 느낌과 비슷하다.
엠마가 사는 밀라노라는 도시의 건물들을 훑어지나가며 보여주는 장면과 안토니오의 집을 향해 갈 때 보여주는 길 가의 초록빛 숲의 풍경은 대조적이다. 도시의 건물은 인공적이며 계산적이고 잘 길들여져 있으며 공간과 공간이 단절되어 있다. 마치 이탈리아 상류층 안주인으로서의 엠마의 모습과 비슷하다. 안토니오의 집은, 엠마와 안토니오가 정사를 벌이는 장소이고 그 곳은 아무렇게나 놓여진 메트리스 위이거나 날벌레들이 붕붕거리며 날아다니고 풀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숲 속이다. 그만큼 자유롭고 얽매이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니 안토니오의 소박한 외모도 - 여주인공 엠마(틸다 스윈튼)와 별로 어울리지 않고 남주인공치고 별 존재감이 없어 보이는 - 이해할 수 있었다. 여자의 존재인식은 왜 꼭 '사랑'을 통해서 가능하고 여자가 자기 존재를 찾아 떠난 곳이 결국 또 다른 남자의 품이라는 데서 오는 불쾌감도 상쇄되었다. 안토니오는 단순히 남자가 아니라 자연과 감각과 욕망을 찾아가는 틈이었으니까. 안토니오가 엠마를 본래의 이름 '키티쉬' 라고 불러주는 것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엠마는 사랑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키티쉬로서의 '자연인'이기를 선택한 것 뿐이다.
엠마가 레키 가를 떠나기 전 남편에게 "당신이 알던 나는 이제 없다"고 말하고 남편은 엠마에게 "당신은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하는 장면은 레키 가의 우아한 안주인으로서의 엠마의 존재무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안토니오를 따라가다 보게 되는 러시아의 성 바실리 성당을 닮은 사원을 발견하는 것은 그를 통해 자기를 찾게 되리라는 암시였을 것이다. 엠마가 가진 고향 러시아에 대한 향수는 자기 자신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갈망과 같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영화 속 엠마의 딸은 엠마에게 안토니오와 더불어 또다른 깨달음을 주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자기가 바라는 것에 대해, 자기가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유약한 듯 하면서도 확실한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딸은 그림을 선호하는 집안 분위기를 알면서도 사진을 하겠다고 선택했고, 자기가 레즈비언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자기 의견을 내보이는 데 부드럽지만 약했던 엠마에게 딸이 보여주는 의외의 단호함은 자극적이지 않았을까.
처음엔 이 영화의 제목 'I AM LOVE'에서 'I'가 주인공 엠마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쩌면 'I'는 '사랑'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떤 한 존재를 이토록 흔들어 놓을 수 있는 '나'는 바로 '사랑'이라고 선포하고 있는 듯 했다. 또한 그 사랑은 바로 나에 대한 사랑이며 존중일 것이다.
'틈'에 대한 생각이 둥둥 떠다녔다. 영화 속 레키 가에서는 창을 가족과 다름없는 가정부 이다가 엠마가 있는 방의 창문을 열고 닫아 준다. 안토니오와 첫 정사를 벌이던 방의 창문은 활짝 열린 채였고. 그렇게 엠마의 삶에서 안토니오는 틈이 되어주고 그 틈을 통해 엠마는 안과 밖이 바뀌는 것 만큼의 큰 변화를 겪게 된다. 내 삶의 창문과 틈은 내가 열고 닫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OO으로서 살아가는 법' 또는 'OO가 되기 위한 법'을 익히기 위해 애쓰기 보다 그냥 '나'를 제대로 보고 느끼며 사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가끔은 누군가가 내 그저 그런 일상의 틈을 벌려 새로운 뭔가를 보여주는 것도 행복할 것이다. 최근에 내가 받은 뜻밖의 선물은 내게 그런 '틈'이 되어주었다. 그 선물을 받은 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해야할 일들이 빡빡하게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고, 그래서 난 좀 지치고 한숨이 나왔다. 선물은 그 날, 따뜻하고 산뜻한 바람을 불어넣어주는 커다란 틈이었다. 그 행복을 주신 님께 이 페이퍼의 마지막에 고맙다는, 정말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