닷새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작년 일이 되었다. 누가 그랬다는데, '샤베트 같은 바람'이라고, 그런 바람이 불던 날 한 해동안 좋은 인연으로 따뜻했던 사람들과 안치환 콘서트에 다녀왔다.
그 날은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하루종일 피곤했고, 짜증이 났고, 우울했고, 갑갑했다. 따뜻하게 이불을 덮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잠 속으로나 빠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과의 약속에 대한 책임감이 아니었다면 티켓값을 날리는 한이 있어도 시린 바람 속으로 나서지 않았을 것 같은 날이었다.
콘서트 홀에 들어가기 전까지도 그랬다.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지?'하는, 도무지 콘서트에 빠져들지 못할 것만 같은, 가수의 노래와 번쩍이는 조명과 내 심장의 고동소리보다 더 크게 울리는 비트와 관객들의 환호가 나와는 엇박자로 어긋나 버릴 것같은 예감에 자리가 불편했다.
하지만 위로는 예상하지 못한 데서,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받게 되나 보다. 노래들을 듣다가 콧등이 시큰했다. '훨훨'이라는 노래를 듣다가, 마흔을 훌쩍 넘어버린 내가 잃어버린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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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보고파서
오늘도 이렇게 잠 못 드는데
창가에 머무는 부드런 바람 소리
그대가 보내준 노래일까
보고파서 보고파서
저 하늘 넘어 그댈 부르며
내 작은 어깨에 하얀 날개를 달고
그대 곁으로 날아오르네
훨훨 날아가자
내 사랑이 숨쉬는 2층에
훨훨 이 밤을 날아서
그댈 품에 안고
편히 쉬고파
나를 잠 못 들게 하는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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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보고싶은 사람이 없었다. 누군가가 궁금하고 보고 싶어서 못 견뎌한 적이 없다. 굳이 가슴 뛰는 사랑이 더이상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댈 수도 없다. 노래 가사처럼 사랑 때문이 아니라도 외롭거나 적적하거나 오늘처럼 짜증나고 우울하고 갑갑한 날이면 누군가를 찾을만도 했을텐데, 왜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혼자 견디려 했던 걸까. 그게 어른다운 거라서? 삶이란 게 어차피 혼자 견뎌야 한다는 걸 알아버렸으니까? 따지고 보면 지켜야 할 것도 별로 없으면서 뭘 그렇게 단단히 방어하고 살았던 걸까. 알고보면 지켜야 할 것도 없는, 별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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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함께 모여 너무 오랜만에 모여 지난날의 추억을 나눠보자
짧지 않은 시간동안 누구는 저 세상으로 또 누구는 먼 나라로 떠났지만
그립던 너의 얼굴 너무 좋구나 네가 살아있어 정말 고맙다
만만치 않은 세상살이 살다보니 외롭더라 네가 있어 웃을 수 있어 좋다
시집안간 내 친구야 외기러기 내 친구야 오늘은 내가 너의 벗이 될게
우리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하나도 넌 변한게 없구나
남은 인생 통털어서 우리 몇 번이나 볼 수 있을까 내 친구야
남은 너의 인생에 저 하늘의 축복이 함께 하길 바랄게
오늘이 좋다
술 한 잔에 해가 지고 또 한 잔에 달이 뜨니 너와 나의 청춘도 지는구나
잘난 놈은 잘난대로 못난 놈은 못난대로 모두 녹여 하나 되어 마시자
하지만 우리 너무 취하진 말자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구나
남은 인생 통털어서 우리 몇 번이나 볼 수 있을까 내 친구야
남은 너의 인생에 저 하늘의 축복이 함께 하길 바랄게
남은 너의 인생에 저 하늘의 축복이 함께 하길 바랄게
오늘이 좋다, 오늘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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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든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축복과 위로가 필요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에게 주어진 '오늘'을 하루하루 더 좋아할만한 것으로 만들도록 애써야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보고싶고 만나고 싶고 내 손을 꼭 잡고 있어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 그래서 꼭 있어야만 할 것 같았다. "몰랐지? 사실은 나 이렇게 바보야."라고 말하며 베시시 웃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자꾸 잃어가는 것이라고, 내게서 뭔가가 하나하나 빠져나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노쇠의 증상이 더 심해지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그런데 뭐를?하고 물으면 또 그게 무엇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도 없었다. 잊고 있었던 거다.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게 있고, 빠져 나가는 게 있으면 채워지는 것도 있다는 것, 얻고 채우며 살아갈 시간들이 마지막까지 계속 되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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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몸인 줄 알았더니 아니다 머리를 받친 목이 따로 놀고
어디선가 삐끄덕 삐끄덕 나라고 믿던 내가 아니다
딱 맞아 떨어지지가 않는다 언제인지 모르게 삐끗 하더니
머리가 가슴을 따라주지 못하고 저도 몰래 손발도 가슴을 배신한다
확고부동한 깃대보다 흔들리는 깃발이 더 살갑고
미래조의 웅변보다 어눌한 말이 더 날 흔드네
후배 앞에선 말수가 줄고 그가 살아온 날만으로도 고개가 숙여지는 선배들
실천은 더뎌지고 반성은 늘지만 그리 뼈 아프지도 않다
모자란 나를 살 뿐인 이 어슴푸레한 오후
한맘인 줄 알았더니 아니다 늘 가던 길인데 가던 길인데
이 길밖에 없다고 없다고 나에게조차 주장하지 못한다
확고부동한 깃대보다 흔들리는 깃발이 더 살갑고
미래조의 웅변보다 어눌한 말이 더 날 흔드네
후배 앞에선 말수가 줄고 그가 살아온 날만으로도 고개가 숙여지는 선배들
실천은 더뎌지고 반성은 늘지만 그리 뼈 아프지도 않다
모자란 나를 살 뿐인 이 어슴푸레한 오후
모자란 나를 살 뿐인 이 어슴푸레한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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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슴푸레한 오후, 뭔가를 끝마치기도, 뭔가를 시작하기도 애매한 시간. 이 쪽도 아니고 저 쪽도 아닌, 세상을 아직 잘 모르겠다고 하자니 바보같고, 통달한 듯 다 아는 척하자니 등신같은 나이. 어정쩡하게 서서 어디에 시선을 둬야할지도 몰라 속으로는 무지 당황하고 있으면서, 아무에게도 내가 당황하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은. 그래서 어줍은 사춘기 소년만큼이나 강한 척하며 허세를 떨고 싶은 '마흔 즈음'.
그러나 이제 그냥 모자란대로 살 뿐이다. 내가 떠나온 눈부신 시간들을 지금 살고 있는 내 아이들, 빛나는 청춘들을 응원하면서 말이다. 나이들고 늙어가는 게 아쉬울지언정 억울하지는 않을만큼, 어슴푸레한 오후의 빛도 어쩌면 깜깜한 달밤까지도 멋지게 보낼 줄 아는,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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젋은 벗들이여 감사합니다 새롭고 당당한 그대들의 행진
서로 연대하고 즐기고 의지하며 희망하는 법을 알게해줬네
그대의 노래는 나의 노래 그대가 추는 춤은 우리들의 춤
그대들을 우리 곁에 두신 삶이여 오 삶이여 감사합니다.
삶이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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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서트가 끝나고 함께 간 사람들과 근처 식당에 자리를 잡고 뒷풀이를 했다. '마음을 여는 책읽기' 독서모임을 이끌어주셨던 신동호 시인 선생님께서 마련해 주신 자리였다. 안치환의 10집 앨범에는 선생님이 작사하신 곡도 있다. 사실 콘서트도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생각도 못했을 자리였는데, 뒷풀이까지 신경을 써주시니 감사했다. 한 해의 마지막이 덕분에 잘 마무리된 것 같았다.
택시를 타고 돌아왔다. 길가에 쌓인 눈이 빛나고 있었다. 새벽 두 시가 가까워지는 시간이었지만 외롭지도 춥지도 않았다. 머리는 한결 맑아져 있었고 차갑고 맑은 공간 고요한 시간 속에 가만히 서있고 싶었다. 그렇게 아침이 밝아오는 걸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집에 들어가 잠든 아이들을 다독여주고 욕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았다. 섬사이, 그런대로 잘 살아왔구나, 하고 웃어줬다. 새해엔 술을 좀 배워볼까 보다. 무엇보다 따뜻하고 좋은 인연을 빌고 싶다. 다스려지지 않는 미움도 녹일만큼 아주아주 따뜻하고 좋은 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