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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곤소곤 숲 이야기 - 생명이 살아 숨쉬는 녹색 댐 ㅣ 생태동화 3
조임생 지음, 장월궁 그림 / 꿈소담이 / 2009년 10월
평점 :
숲에서 살아가는 나무들과 곤충들, 동물들, 새들과 꽃들에 대한 이야기가 의인화된 동화로 쓰여진 책이다. '생태동화'라는 명함에 어울리게 각 생물들에 대한 세세한 면을 동화로 엮어갔다는 것에는 별 불만이 없다. 그러나 읽으면서 '마음이 참 불편해지는 책'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의인화' 과정에는 작가의 세밀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숲 속의 야생화들의 이야기 '야생화의 여왕' 편에서 야생화의 여왕을 뽑는 대회를 통해 복수초, 제비꽃, 솜다리, 아기똥풀꽃 등을 설명한다. 야생화들을 소개하기 위해 '대회'라는 형식을 빌린 것은 작가로서 참 편리한 방식이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편리에 대한 이의는 없다.
그러나 그 대회에 참가한 노란 서양 민들레에 대한 발언은 좀 거북하다. 서양 민들레의 왕성한 번식성이 하얀색 토종 민들레를 몰아냈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울 뿐더러 (지나친 개발로 인한 환경파괴가 더 큰 원인이다) '외래종이긴 하지만 이제 당신들 나라의 풀이라고 인정'해주고 '시민권'을 달라고 요구하는 서양 민들레에게 '시민권을 받는다고 해서 피를 속일 수는 없다'며 우리는 마음이 곱고 부드러운데 '당신들 외래종은 강하고 포악'해서 '우리나라에 와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식의 설명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관중들과 심사위원이 모두 분노하며 "저 서양 민들레가 참 건방지군." 따위의 말을 하는 장면은 어쩐지 나치 독일이 연상되기도 하고 국내의 외국인노동자들과 다문화가정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하는 것이다. 만약 이 책이 단순한 정보 전달의 기능에 충실한 책이었다면 식물들 간의 세력다툼 이야기라는 본래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을 테지만 '의인화' 과정을 거친 동화였기 때문에 식물간의 세력다툼이 인간 세계의 삶과 겹쳐지면서 그 의미영역을 확장한 것 같다.
서양 민들레를 비판하고 대회에서 내치는 것으로 스스로 제기한 문제를 해결해버리는 것도 좀 그렇다. 서양 민들레를 무대에서 내려보내고 서둘러 대회 분위기를 정리하느라 가수 베짱이를 무대로 불러내는 방법은 아이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방법이 아니다. 어떻게든 서양 민들레에 대한 문제 해결의 여지를 남겨둬야 했던 게 아닐까. 아이들에게 '외래종은 나쁘고 포악하고 건방지다'는 편견만 심어두고 무책임하게 발을 빼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숲 속의 동물들 이야기 '아기 다람쥐 바비' 편에서는 예의 바르고 인사성 밝은 아기 다람쥐 바비에 대해 "바비 부모가 교육을 잘 시켰나 봐."하며 칭찬하는 숲 속 동물들 이야기가 나온다. 뭐, 거기까지는 괜찮다. 그런데 인사성 없는 청설모 몽구리를 바비와 비교하면서 "부모님이 안 계시니 보고 듣고 배운 게 없을밖에요."하며 비난하는 부분이 있다. '어른을 마주쳐도 모른 척 외면'한다는 이유 하나로 부모님이 없어 배운 게 없어 못됐다는 논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아이가 바르게 잘 자라도록 하는 것은 단지 부모 하나만의 책임은 아니다. 국가적 사회적 책임이 따라야 하는 것이고, 부모가 없는 외로운 아이에 대한 책임은 이웃이나 친척이 나누어 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 더 이야기하자면 이 책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도덕적 강박증 같은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아기 다람쥐 바비는 바른 생활 교과서에 나올 것만 같은 바른 아이를 넘어서 어른 멧돼지 들보의 슬픔을 위로하고 자신을 괴롭히던 청설모 몽구리를 참회의 길로 이끌 정도로 성서적 이미지를 갖춘 아이다. 이런 인물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각 이야기마다 되풀이 된다. '꿀벌 나라 여왕님의 결혼식' 편에서 성실하고 정의감에 불타는 꿀벌 마루는 "마루 님은 정말 듣던 대로 훌륭한 분입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고 공포의 밤 숲에 들어온 것을 보고 정말 감동했어요."하는 찬사를 듣는다. '숲나라 임금님이 될 거야' 편에서 떡갈나무 아기는 "저 아이는 아주 영리하고 착한 아이네. 이 숲나라의 꿈나무야. 장차 숲나라의 임금이 될 재목이라네."라는 칭찬을 듣고, '야생화의 여왕' 편에서 솜다리는 "편안한 삶을 버리고 가난하지만 이슬처럼 맑고 깨끗하게 살지요. 정말 겸손하고 향기로운 분입니다."라는 평가를 받고, '오목눈이 둥지 속의 아기 뻐꾸기'에서는 다 자라 둥지를 떠난 뻐꾸기 다솜이가 아빠 오목눈이를 구하기 위해 피를 흘려가며 새호리기와 싸우는 장면에서 독자들의 감동을 요구한다. 하다못해 도토리를 따러 온 여자 아이는 이야기에서 굳이 따지자면 엑스트라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데, 그 여자아이조차도 도토리 나무를 발로 차고 청설모를 향해 돌을 던지는 어른들을 말리는 착하고 바른 아이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강하게 풍기는 도덕적 교훈의 냄새와 그 도덕적 기준에 심하게 어긋나서 납득하기 어려운 편견이 모순되게 공존하는 책이다. 아이들은 모두 티없이 순수하고 착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갖고 있는 판타지다. 그 판타지는 아이들에게 강요된 굴레이고 그 굴레를 쓴 아이는 생명력 없는 로봇같이 느껴져서 매력이 없다. 난 동화에서 말괄량이 삐삐처럼 건강하고 자유분방한 아이를 만나는 게 더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