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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의 우아함
뮈리엘 바르베리 지음, 김관오 옮김 / 아르테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남들에게 자랑을 늘어놓을 만큼 책을 많이 읽지는 못했다. 그래도 순수하고 아름다운 내용을 담은 책, 꿈의 세계가 스펙타클하게 펼쳐지는 판타지 책, 삶의 고단한 여정을 담은 책,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만을 담은 책, 가슴을 조이는 긴박감에 땀을 쥐게 하는 책 등등,,, 다양한 내용의 책들을 읽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소설은 처음이다.
이 책, <고슴도치의 우아함>은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두 마디로 정의 했다. 까칠하고 독특한 책이라고.
처음엔 열두 살 팔로마나 쉰네 살의 르네의 세상과 사람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들이 지적 오만에 사로잡힌 고슴도치의 까칠함으로 보였다. 그 둘이 합쳐지면 슈퍼 울트라 가시가 돋은 괴물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했을 정도다. 그러나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난 여리고 따뜻한 고슴도치의 속살을 느낄 수 있었다. 르네와 팔로마가 뾰족하게 세운 고슴도치의 가시는 세상을 향해 드러낸 뾰족하고 아픈 적의의 가시라기보다 예민한 촉수와 같았다. 그 민감한 촉수가 세상의 거칠고 어두운 부분에 가서 닿을 때마다 르네와 팔로마는 숨고 감추고 도피한다. 그러면서 세상과 주변 인물에 대해, 그리고 문학, 언어, 미술, 영화, 아름다움, 인생 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철학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독특하다는 건 차별화된다는 것이고, 그건 참신함, 개성, 신선함 등등의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선 타자들과의 소통과 이해의 측면에서 그 폭이 좁다는 뜻이기도 하다. 앞에서 말한 철학적 표현들은 바로 이 ‘독특함’의 양면을 드러내고 있다.
내가 그냥 스치고 지나가도록 방기했던 생각과 느낌들, 잠시 떠올랐다가 그 깊이를 잃고 잡념화 되어버렸던 생각들이 뮈리엘 바르베리라는 작가의 깊은 사유를 통해서 생명력을 얻고 문장 속에서 빛을 뿜고 있는 걸 보았다. 그리고 많은 부분에서 새로운 생각들, 참신한 사고의 발상들과의 만남이 있었다. 나도 이 작가처럼 생각의 깊이를 더하며 집요하게 파고드는 예리한 사유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 소설은 세상과 사물, 인물들의 외피를 묘사하지 않는다. 작가는 특유의 철학적 표현을 세상의 부조리, 인간의 내면, 삶에 대한 생각, 예술과 아름다움에 대한 고찰 등을 향해 펼쳐놓는다. 이런 면이 독자들에게 쉽게 읽을 수 없는 소설이라는 인상을 준다. 예를 들어 열두 살 소녀 팔로마의 외모는 소설 후반부(정확히 p.355)에 가서나 알 수 있다. 그 전에는 팔로마의 ‘깊은 사색’과 ‘세상의 움직임에 대한 일기’를 통해 팔로마의 생각과 내면심리의 흐름을 좇을 수 있을 뿐이다.
소설의 후반부로 갈수록 고슴도치의 가시는 부드러워지고 이야기는 따뜻한 난류를 타고 흐른다. 이는 ‘열정과 청춘의 진지함을 현자의 배려와 온정으로 연결시키고 있는’(p.336) 멋진 일본인 카쿠로 덕분인데, ‘그는 세상을 관용과 호기심으로 바라다보’고 ‘식욕, 명석함, 아량의 결탁으로 참신하고 맛있는 칵테일’(p.336)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다. 작가의 일본에 대한 애정이 다분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일본에 대한 작가의 애정은 소설 여기저기에서 수시로 드러난다. 그럴 때마다 반항심과 질투심이 고개를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일이 따지고 들자면 너무 치졸해지는 것 같으니까 그만두자.) 카쿠로의 등장은 독자에게 비로소 이 소설에서 소설다운 흥미를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된다.
분명 손에 쥔 미꾸라지처럼 매끈하게 빠져나가며 쉽게 읽혀지는 책은 아니다. 손에 쥐고 몇 번 힘들여 주무르고 치대는 수고가 필요한 책, 그래서 다 읽고 나면 내 생각이 더해지는 책이다. 까칠하고 독특하다. 그리고 마지막엔 따뜻한 감동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소설과는 다르기 때문에 다소 어렵고 생소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얻을 게 많은 책이다.
사족 하나,
표지 바탕색이 난 화사한 분홍인 줄 알았다. 그런데 받고 보니 형광주황색에 가깝다. 처음 책과 대면하고 나서 나를 가장 당황스럽게 만든 것은 작가의 어려운 철학적 표현들이 아니라 바로 표지의 색깔이었다. 색의 중요함을 인식하는 순간이었다. 형광주황색보단 화사한 분홍이 책을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