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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에게 보내는 편지
대니얼 고틀립 지음, 이문재.김명희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내가 어두운 터널에 있을 때, 난 나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 터널 밖에서 어서 나오라고 외치며 출구를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기꺼이 내 곁에 다가와 나와 함께 어둠 속에 앉아 있어줄 사람. 우리 모두에겐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
샘. 상처를 입으면 널 사랑하는 사람 곁으로 가거라. 널 비난하지도, 섣불리 충고하지도 않는, 네 아픔을 함께해 줄 사람 곁으로. 그런 사람 곁에 있으면 네가 어제 가졌던 것들에 대한 갈망이 줄어들고, 네가 오늘 가진 것들을 더 많이 누리게 될 것이다. (p.213)
어느 글에선가 인간은 이해받으려는 욕구가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보다 앞선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사랑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단계가 상대에 대한 ‘이해’인 점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말인지도 모른다. 이해할 수도, 이해받을 수도 없는 대상을 사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면 가족과 친구, 친척, 이웃, 더 나아가 세상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살아가는 데 있어 매우 불행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 책은 사고로 전신마비가 되어 살아가는 할아버지 대니얼 고틀립 박사가 태어난 지 14개월만에 자페 진단을 받은 손자 샘에게 보내는 편지들로 묶여 있다. 자폐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없지만 세상과 타인을 향한 마음의 문을 닫아거는 병이라고 알고 있다. 소통하고 이해하는 데 장애를 겪는 손자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소통과 이해의 장애를 안은 어린 샘이 넘어야 할 삶의 굴곡과 장벽들을 그려보며 걱정하고 안타까워하는 할아버지 고틀립의 애틋한 마음이 잔잔한 글 속에 녹아있다. 고틀립은 할아버지만이 낼 수 있는 인자하고 자애로운 목소리로 이혼과 전신마비 후에 찾아온 분노와 견딜 수 없는 상실감과 좌절의 감정, 그리고 그런 자신을 추스르는 과정에서 깨달은 인생의 소중함을 들려준다. 뿐만 아니라 샘이 삶의 단계마다 겪을 실제적인 혼란과 위험에 대처하는 방법까지 세세하게 적어 놓고 있다. 샘이 학교에서 겪게 될지도 모르는 만약의 폭력에 대해서, 이성과의 사귐에 대해서, 사회의 편견과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싸움을 벌이는 방법에 대해서, 가족과 부모에 대해서 적어 놓은 글들은 내가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인 동시에 내가 배워야 할 내용이기도 했다.
나는 또 한 명의 샘이 되어서 고틀립의 편지를 읽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세상을 경계하고, 나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면 상처를 입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타인의 지나친 접근을 방어하는 나는 어쩌면 ‘자폐’와 비슷한 증상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왜 ‘비상깜박이’ 켜기를 주저하고 내 안의 ‘호랑이’를 좇아버리려고만 기를 썼을까. 나의 ‘인생지도’ 속의 길은 왜 제자리만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열쇠’를 찾으러 어둠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지않고가로등 아래서 누군가 대신 문을 열어주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살아왔던 것 같다는 생각이 마음 속을 어지럽혔다.
이 책은 그렇게 사람의 가장 근본적인 내면의 줄을 울린다. 그래서 샘만이 아니라 사람들까지도 자기 마음 속의 울림을 듣게 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사랑’을 가지고 세상을 사는 일이 두렵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세요. 그리고 그 사람을 온몸으로 사랑하세요. 작은 땀구멍까지도 아낌없이 사랑하세요. 내일은 그 사람을 더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그 다음날은 사랑하는 사람을 한 명 더 늘리세요. 매일 매일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한 명 더 늘리세요.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세요.”(p.223)하는 그의 외침이 공허하고 씁쓸하게 울리기도 했다.
사랑, 평화, 온정, 신뢰, 이해...... 모두가 꿈꾸지만 실현하기에 너무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들. 책에서는 가능하지만 현실 속에선 불가능하다고 포기했던 것들. 그런 것들에 대한 따스한 향수가 밀려오곤 했다.
어쩌면 필요한 건 용기였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자기를 방어하느라 두껍고 단단한 갑옷을 입고 있는 세상에서 서로의 뺨을 비비고 손을 맞잡고 다정하게 포옹하며 체온을 나누기를 기대하고 있으니까. 누가 먼저 갑옷을 벗을까. 누가 먼저 투구를 벗고 미소 지은 얼굴을 보여줄까. 다 읽은 책을 책장에 꽂지 못하고 공연히 책을 쓰다듬으며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