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벨이 울렸다. 일을 하던 중이었더래서 좀 짜증이 났다.
"여보세요."라는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자동응답시스템에서 들리는 그 여자 로봇같은 목소리가 새어나온다.
--- 고객님의 OO은행 카드로 ** 백화점에서 백 구십 칠 만원이 결제되었습니다. 상담원 연결을 원하시면 0번을 눌...---
이렇게 황당할 수가.. 누가 내 카드로 거금 백 구십 칠 만원이라는 거금을 긁어댔단 말인가. 오늘 조신하게 집 안에서 살림만 하고 있었던 나를 대신해서 그 누가~!!! 드디어 나의 금융정보가 새어나갔구나, 말로만 듣던 금융사기사건에 내가 휘말렸구나, 하는 생각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상담원을 연결했다.
"네,,,"
"지금 막 **백화점에서 제 카드로 결제된 게 있다는데,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요. 전 오늘 계속 집에 있었거든요?"
....... 전화 끊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싶어 얼른 OO은행 영업점에 전화를 해서 사정 설명을 했더니 담당자를 바꿔주었다. 담당자란 사람이 이것저것 물어보더니만,
"고객님, 고객님께서는 저희 은행 신용카드를 갖고 계시지 않고, 직불카드만 갖고 계시다고 나오는데요.."
"네, 맞아요."
"직불카드는 은행계좌에 잔고가 그만큼 있을 경우에만 결제가 가능하기 때문에 말씀하신 것같은 문제가 생기진 않습니다."
... 그래, 은행계좌에 2백만원이나 남아있을리가 없다. OO은행 계좌는 거의 자동이체 목적의 계좌이기 때문에 그만큼의 액수가 남아있을리가 없다. 잘해야, 10만원 정도나 있을까?
"요즘 그런 금융사기전화가 많거든요. 그런 전화를 받으시면 그냥 아무 말씀 마시고 끊으신 후에 지금처럼 고객센터로 전화하셔서 확인하시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에요."
"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별 황당한 전화를 다 받아본다. 하긴 난 신용카드를 딱 한 장만 갖고 있다. 백화점 쇼핑은 최근 2년 넘게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명품이나 최신 가전제품이나 비싼 화장품이나 최고급 식기셋트 같은 거에도 관심이 없다. 귀걸이 하나, 반지 하나도 걸거나 끼지 않을 정도로 악세서리도 안한다. 그러고 보니 내가 여자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원래 성격이 그렇다.
어릴 때부터 레이스나 프릴 달린 옷이라도 입을라치면, 미대를 다니고 있던 오빠들이 놀렸었다. "너 어디서 미친년 속치마 뜯어서 옷 해 입었냐?"하고.. 좀 커서 립스틱이라도 바르면 오빠들은 "쥐 잡아 먹었냐"고 했고, 색깔 없는 립클로즈라도 바르면 "튀김 먹었으면 입 좀 닦아라. 뭐냐? 입술에 기름이 잘잘 흐른다."하며 놀렸다. 그러니 내가 이 지경이 될 수 밖에..ㅠ.ㅠ
그러니 **백화점에서 그런 거금(나한테는 무지 거금이다)을 결제했다는 그 황당한 전화에 내가 긴장할 밖에.
그러고 보니 예전에 받았던 황당한 전화도 생각난다. 요즘은 발신번호가 뜨니까 장난 전화가 많이 사라졌는데, 예전엔 장난전화가 간혹 걸려오곤 했다. "여기는 화장터다.."하는 류의 장난전화는 차라리 애교스러운데, 거친 숨소리와 함께 변태스러운 말 같지 않은 말들을 해댈 때는 어떤 전화라는 걸 알아차리는 순간 끊어버린다고 해도 그 찜찜하고 더러운 기분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어느 날, 열심히 청소기를 돌리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청소기를 끄고 전화를 받았는데, 그런 변태 전화였다. 에이씨~~ 또 오늘 기분 망쳤다, 하는 기분이 들었는데, 순간 번쩍 떠오른 생각..
난 수화기를 거실 바닥에 내려 놓았다. 그리곤 청소기의 세기 조절을 최강으로 해놓고 수화기에다 대고 틀어버렸다. 우윙윙윙윙~~~~ 청소기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ㅋㅋㅋㅋㅋ
변태 전화를 받고는 그렇게 통쾌하고 상쾌하기는 처음이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오늘 받은 전화가 예전에 받았던 변태 전화보다 훨씬 나쁘다. 다음에 또 그런 전화를 받으면 상담원 연결 버튼을 누른 후에
"난 네 통장에서 5백만원 꺼냈지롱~"하거나 요즘 애들 쓰는 말로 "뷁~!!"이라고 크게 외쳐주거나, 아니면, 아니면... 뭐 통쾌한 방법,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