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광중 속에 누우신다.  일꾼들이 돌로 만든 횡대로 할머니를 덮는다. 가족들이 차례로 돌아가며 삽으로 흙을 떠서 할머니 위에 뿌린다. 

할머니, 좋으세요? 
매일 방 안에만 누워계시다가 이렇게 바깥 바람 쏘이시니까 좋으세요?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던 육신에서 놓여나시니까 좋으세요? 
하늘도 참 맑네요. 
햇볕도 좋고 짙어가는 녹음이 싱그러워요.  
저 하늘 높이높이 날아다니시며 이 모든 것을 내려보시니 좋으시죠?
할아버지 곁에 누우시니까 외롭지 않고 좋으시죠?  

갑자기 영화 속 한 장면처럼 할머니가 떠올랐다.  내 눈 앞에 떠오른 할머니는 소녀인 듯, 새색시인 듯 어리고 앳된 모습이다.  수풀 우거진 산 속, 색동저고리를 입은 할머니는 열심히 걸음을 서둘러 산을 오르신 모양이다.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혀있다.  맑고 시원한 계곡을 만나자 할머니는 손으로 물을 떠서 입을 적신다.  그러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웃으신다.  얼굴이 생기로 가득하다. 환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어 보이시곤 저 쪽 산 길로 사라지신다.  난 맥없이 서서 그냥 그렇게 할머니를 보내고 만다. 

손님들도 모두 돌아가고 어머님과 아버님, 그리고 시누네 가족과 우리 식구들만 남았다.  동네 전골집에서 저녁을 먹고 시댁에 들어와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이제 이 2층집에 어머님과 아버님, 단 두 분만이 살게 되었다.  결혼해서 우리가 시댁에 살 때만 해도 옆지기와 나, 그리고 지니까지 해서 4대에 걸친 여덟식구가 살던 집이었다. 

집에 돌아갈 시간.  시댁에 왔다가 집에 가기 전에 할머니가 계신 2층 방에 올라가 시끌벅적하게 인사를 드리고 가는 게 절차였다.  늘 하던 절차를 빠뜨리고 집에 돌아가려니 허전해서 혼자서 불도 켜져 있지 않은 계단을 올라 2층 할머니 방에 들어섰다. 스위치를 눌러 형광등 불을 켜니 훤히 드러나는 빈 방.

할머니가 누워계시던 침대가 주인을 잃은 채 비어있었다.  비어 있을 줄 알고 올라왔는데, 몸으로 다가오는  빈 공간의 느낌이 너무 커서 할머니의 침대를 쓰다듬다가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땅 속에 몸을 누이는 할머니를 보는 것 보다 더 당혹스러웠다.  당혹감을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 쪼그리고 앉아 고개를 파묻고 있는데, 할머니를 간병해주시던 아줌마가 올라오셨다.  나를 보더니 등을 도닥거리신다.  힘들지 않게 편히 가셨으니 그만 슬퍼하라신다.  아줌마에게 내 바보같은 모습을 들킨게 창피하다.  머쓱하게 웃고는 계단을 내려오는데 어머님이 날 보고 계신다. 

"빈 방을 보니까 이상하지?"
"네."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려고 했는데 목구멍이 조여들면서 얼굴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부엌 구석에 서서 휴지로 얼굴을 닦는데 옆지기가 오더니 내 등을 두드린다.  난 왜 이렇게 바보같을까.  내 눈물은 바보같다.  적어도 어머님과 아버님, 그리고 옆지기와 시누 앞에서 이러면 곤란하다.  할머니에 대한 나의 애정이 그 분들 보다 더하랴.  그런데 위로해야 할 사람이 위로받아야 할 분들에게 거꾸로 위로를 받다니.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며칠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옆지기의 운전이 불안했다.  지니가 조수석에 앉아 아빠에게 껌을 먹이고, 말을 시키고, 네비게이션이 붉은 빛으로 깜박거릴 때마다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할머니는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이렇게 남은 생을 이어간다. 

어느 날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그 순간이 할머니의 고요한 죽음과 할아버지의 정갈한 죽음을 본받을 수 있기를 소망할 뿐이다.  벌써 할머니가 그립다.  할머니의 틀니를 닦아드리고, 할머니의 긴 식사를 옆에서 거들고, 할머니의 등에 손을 넣어 긁어드리고, 할머니의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이 할머니의 인자한 눈빛이나 긴 시간동안 계속되던 기도나 희망으로 밝게 빛나던 할머니의 표정과 말씀에 비하면 실상 아무 것도 아니었음을 이제야 알게 되다니.

할머니는 내게 당신의 마음을 주셨고, 나는 할머니께 손주며느리로서의 무미건조한 도리만 돌려드렸다는 사실이 후회로 남았다.   언제쯤이면 후회 없이 떠나보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후회없이 떠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모든 것을 잊지않고 기억하며 살 수 있을까. 

집에 들어서니 피곤이 몰려왔다.  짐도 풀지 않고, 뜨거운 물을 받아 욕조에 몸을 담그고  부어오른 다리와 혹사당한 발을 주물렀다. 씻고 나와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몸을 누이니 할머니는 몰려오는 잠에 저만큼 밀려나신다.  불쌍한 우리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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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6-08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이런 일이 있었군요. 섬사이님, 손주며느리의 정이 살가워요.
할머님도 좋은 곳으로 가셔서 님 생각하시리라 믿어요. 이제 그만 손 놓고
마음 놓으시기 바래요.. 애 많이 쓰셨어요.

치유 2007-06-08 0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그랬군요..그랬어...천국에서 편히 쉬시길..!

fallin 2007-06-08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을 글을 보니..할머니도 편히 가셨겠단 생각이 드네요. 작년에 떠나가신 저희 할머니 생각이 나요. 때로 할머니를 돌봐드린다는 게 귀찮고 짜증스러웠던 시간들이 있었는데, 할머니의 모습, 존재 그 자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이..섬사이님의 글을 보며 공감도 가고, 할머니께 죄송하기도 하고..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섬사이님 피곤하시겠어요. 푹 쉬세요 ^^

2007-06-08 1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홍수맘 2007-06-08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랬구나.
님의 글을 읽으면서 맘이 짠~해 오네요.
할머님은 오히려 하늘나라에서 님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계실거예요.

2007-06-09 0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섬사이 2007-06-09 0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배꽃님,fallin님, 속삭인 ㅎ님, 홍수맘님, 속삭인 ㅇ님, 고맙습니다. 할머님을 잃고도 밥도 잘먹고 히히거리며 잘 지내고 있어요. 삼우제 마치고 한 이틀 푹 쉬었더니 피곤도 많이 풀렸구요. 애도의 슬픔은 너무나 짧고 저의 일상은 아무 변화도 없이 냉정하게 이어지네요. 님들의 위로를 받기가 쑥스럽고 민망할 정도에요. 제가 너무 못됐죠?

2007-06-09 09: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섬사이 2007-06-09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님께도 그런 슬픈 기억이 있군요. 그래요, 시간은 많은 것을 무디게 해주고 정화시켜 주는 것 같아요. 네, 돌아가신 분들은 분명 저희를 따뜻하게 지켜보고 계실 거에요. 그렇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