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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ㅣ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우선 저자 고미숙님께 감사하단 말을 전하고 싶다. 나에게 연암을 그토록 생생하게 소개해준 데 대하여, 나의 무식을 그나마 조금이라도 개선해준 데 대하여 감사해야 마땅할 것이다.
저자의 친절함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연암은 내게 아득히 먼 존재로만 여겨졌을 터이고, 연암에게서 매력을 찾아내고 그 매력에 빠지는 일은 절대 불가능한 것이었을 터이다. 연암의 인간적 면모와 철학적 사유, 그 유쾌하고 호탕한 nomad와 '백탑의 청연'으로 대표되는 벗들과의 우정연대, 그의 거침없고 막힘없는 삶의 필적들을 소개하는 저자의 글을 따라가다보니 어느새 가까이에서 연암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연암의 호모루덴스적인 유쾌한 필담들만큼이나 저자의 입담도 유쾌하다. 하긴 유쾌한 연암에 대한 이야기를 딱딱하고 건조한 문체의 틀을 가진 사람이 펼쳐간다면 그 또한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이 책을 만난 건 행운이라 할만 하다.
얼마전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고미숙님이 펴낸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를 읽었다. 그 책을 읽으며 미진하게 느꼈던 부분들이 이 책을 통해서 많이 해소되었다. <열하일기>라는 텍스트 분석 자체보다는 <열하일기>를 통해서 연암이라는 인물분석에 치중한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 책에서 얻은 것을 토대로 한다면 <열하일기>라는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어보게 만든다.
무엇보다 저자의 세심한 배려가 돋보이는 책이다. 우선 책의 말미에 엮어진 부록 부분.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미리 읽어보면 도움이 된다. 등장인물에 대한 소개 뿐만 아니라 저자가 연암을 설명하면서 사용되는 주요 용어들에 대한 정리가 담겨 있다. 주로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적 개념 용어들(기계, 되기, 리좀) - 난 현대철학에 대해 문외한이다. 다른 시대의 다른 철학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만 - 그리고 nomad(이 용어는 다른 책에서도 많이 애용되는 걸로 봐서 이제 일반상식 수준의 용어가 된 것 같다)라든가, 클리나멘(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사용한 개념이라고 한다), 홈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 같은 용어는 무척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을 뿐아니라 다른 책들에서도 종종 마주치곤 하는 용어들이어서 그렇지 않아도 개념정리가 필요한 것들이었다.
또 하나 인상깊었던 부분은 연암과 다산을 비교한 보론 부분이다. 동시대를 살았고 연암과 다산, 그 둘 모두 한 시대의 획을 긋는 인물이었으며 중세적 담론 외부에 있었다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을 뿐아니라 서로 상반되는 평행선 같은 존재였음을 설명하는 글에서 나는 획일의 시대로만 여겨졌던 조선시대에 서로 다른 향기와 모습을 지닌 다양한 인물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 같아 흥분되기도 했었다.
단지 내가 모를 뿐이었다. 나의 얄팍하고 보잘 것 없는 지식의 범주 안에서 연암과 마찬가지로 다산이든 유성룡이든 그 누구든 빛도 잃고 향기도 없는 지나간 시대의 지나간 인물들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김춘수 시인의 유명한 시 <꽃>에 빗대어 말한다면, 난 이 책을 읽는 행위로써 연암의 이름을 불렀고, 그러자 연암은 나에게로 와서 향기와 빛깔을 가진 꽃이 된 셈이다. 연암 - 독특한 향기와 개성적인 빛깔을 가진 아주 매력적인 꽃임에 분명하다. 그를 알게 되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