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서 창밖을 바라보면 영산홍이 붉은 바다처럼 일어나 있다. 바람이 부는 날이면 파르르 떠는 붉은 물결 같다. 영산홍 양쪽에는 겹벚꽃나무 두그루가 화사하게 구름같은 분홍꽃을 피우고 있다. 그 위로 비스듬히 눈 시린 햇빛이 쏟아지는 풍경을 보고 있으면 마치 뜻밖의 선물을 받은 것처럼 마음이 즐겁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고 가슴 속 묵은 먼지를 털어내듯 큰숨을 내뱉게 된다. 미세먼지도 없고 햇빛도 좋은 맑고 청명한 날이었다. 딸아이 침대에서 이불과 패드를 거둬 빨아 널었다.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고 햇빛이 들어오는 자리로 화분을 옮겨 놓았다. 빨래도 식물들도 행복해 보였다.

 

얼마 전에 다락방 님의 페이퍼를 읽다가 알게 돼서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에서 출간한 세계문학시리즈 중 베스트 e-book 30권을 아주 싼 값에 샀다. 마침 조지 오웰에 관심이 생기고 있는 중이었는데, 30권 안에 <동물농장><1984>가 들어있었고, 그 외에도 읽고 싶은 책들이 몇 권 있었다. <동물농장>은 민음사에서 나온 걸로 오래 전에 읽은 적이 있지만 <1984>는 처음이었다.



 

개인적으로 <1984>보다 <동물농장>이 문학성 면에서는 더 나은 것 같다. <1984>는 이 작품을 쓸 당시의 조지 오웰에게는 1984년이 미래였겠지만 나에겐 오래 전 과거라는 시간적 오차(?)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다. <1984>를 읽으며 내가 조지 오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확실히 나와 많이 다른 사람이다. 위대한 작가를 나와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일이라는 걸 몰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조지 오웰의 작가적 업적과 문학적 성과를 떠나서 인간으로서의 성향이 많이 다르다는 거다. 그는 정직하게 말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고, 행동하기를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아니다. 어쩌면 조지 오웰도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두려워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1984>에서는 분명 두려움이 느껴진다. 빅브라더라는 거대권력 앞에서 두려움에 떠는 인간의 무력함을 두려움 없이 쓰는 일이 가능하진 않을 것 같다. 조지 오웰이 나와 다른 건, 그는 두려워하면서도 쓰고 말하고 행동하는 용기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두려움이 없다면 용기를 증명할 수 없다. 나는 두려우면 숨는다. 그는 두려우면 썼다. 밑바닥까지 내려갔고, 총을 들었다.

 

앞에서 말했던 시간적 오차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동물농장>보다 문학성 면에서 부족한 것 같고, 메세지의 명확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1984>를 그의 대표작으로 꼽는 것은 보다 많은 물음들을 던지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게다가 조지 오웰이 염려했던 전체주의가 세상을 지배할 정도의 위력을 발휘하지는 않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1984>에서 보여주는 여러 정치사회적 술수들에 대해서만은 어쩌면 부분적으로라도 우리 사회에 적용 가능할지 모른다는 섬뜩함을 느끼게 된다.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지만 의미있게 읽을 책인 것은 분명하다.

 

<1984>를 읽고 어제부터 조지 오웰의 에세이를 담은 <나는 왜 쓰는가>를 읽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조지 오웰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김사인의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의 필사를 마쳤다. 324일에 첫시 '풍경의 깊이'를 옮겨적기 시작해서 419일에 끝시 '강으로 가서 꽃이여'를 적었다. 25일간 매일매일 시를 옮겨적는 동안 나는 시와 가까워진 걸까. 넓은 광장 이 끝과 저 끝 마주보는 벤치에 앉아 살짝 눈은 마주친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저 끝 벤치에 앉아있던 시가 ', 매일 이 광장을 찾아와서 맞은 편 끝 벤치에 앉아있는 사람이 있네.'하고 알아봐주지 않았을까. 계속 옮겨적고 읽다보면 언젠가는 시와 한 벤치에 앉는 날도 오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지금은 김선우 시인의 시집 <내 혀가 입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을 옮겨 적고 있다. 오늘 '가을 구름 물속을 간다'까지 옮겨 적었다.



 

조지 오웰은 이 봄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1984>를 읽다가 문득 영산홍 붉게 화려하고 햇빛 찬란한 바깥으로 눈을 돌리면 책의 내용과 풍경이 너무나 어긋나 있어서 현실이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이 들곤 했다. 하지만 음산한 계절에 <1984>를 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하면, 너무 끔찍했을 것 같다.그러니 차라리 봄에 읽는 편이 더 낫다. 한동안 조지 오웰의 책을 몇 권 더 읽게 될 것 같다. 조지 오웰을 이해하려면 스페인 내전에 대한 상식도 좀 알아봐야 할 것 같다. 읽어야 할 박지리 작가의 책도 한 권 더 남아있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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