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
한창훈 지음, 한단하 그림 / 한겨레출판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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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 소개해 줄 책은 한창훈 님의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라는 책이란다. 몇 년 전에 사 두었다가 이제서야 읽었단다. 이 책은 얇고 우화풍 소설이라서 금방 읽을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 자투리로 읽을 시간이 생기면 읽으려고 사 두고도 한참 읽지 않은 것이야. 아무튼, 아빠가 자투리 시간이 생겨서 이 책을 후다닥 읽으면 좋겠다 생각해서 읽은 것이란다.

지은이 한창훈 님의 작품은 처음 읽는 것인데, 지은이 소개를 보니 <홍합>이라는 유명한 작품이 있더구나. 이 책을 이 분이 쓴 거구나. 지은이 한창훈 님께서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를 쓰게 된 이유를 작가의 말에서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작가가 20대일 때 우연히 본 신문칼럼 때문이라고 하는구나. 아빠도 좋아하는 <녹색평론> 김종철 님의 <단 하나의 법조문만 있는 나라>라는 글이라고 하더구나. 그 글이 좋아서 가위로 오려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계속 읽으셨대

남대서양 화산섬 트리스탄 다 쿠냐 섬의 이야기였대. 그 글을 읽은 지 20여 년이 지나고 우화풍 소설을 의뢰 받은 지은이는 그 글이 떠올라서 소설로 쓰신 것이 <그 나라로 간 사람들>이라는 단편이라고 하는구나. 아빠가 읽은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는 연작 소설집로 단편 소설이 5개가 실려있긴 한데, 하나의 장편 소설로 봐도 좋을 것 같았어. 연작 소설이라고 한 것처럼 다섯 편의 단편 소설이 서로 연결되어 있거든


1.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맞아 우연히 섬에 정착한 사람들.. 그곳에서 작은 사회를 이루며 살아간단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섬에 사람들이 더 모이고, 그들은 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회의를 통해 단 하나의 법을 만들었단다. ‘어느 누구도 다른 어느 누구보다 높지 않다가 그 법이란다. 이 법대로 그 섬 사람들은 서로 도우며 살아가다 보니 모두나 평등하게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어. 늘 행복하다 보니 행복이 일상이 되었고, 다른 세상 사람들처럼 행복하겠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지. 그래서 행복이라는 말을 모르고, 책 제목처럼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가 되었어.

그런 섬이 화산 폭발 우려가 있어서 대피를 해야 한다고 했어. 그래서 섬 사람들은 섬을 떠나 본토로 당분간 이주하게 되었지. 섬에서 살던 방식과 본토에서 살던 방식이 다르긴 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원칙을 지키면서 때론 본토 사람들의 방식을 따르면서 살아갔단다. 그러면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해준단다.

우화풍 소설을 의도적으로 쓴 것이라 그런지 등장인물들이 너무 착한 사람들뿐인 것 같구나. 단 하나의 법 조항으로 사는 섬이 실제 있다고 하고 그를 모티브로 쓰긴 했지만, 사람 사는 사회에 갈등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이 또한 아빠가 이 속세에서 살다 보니 생긴 편견일 수도 있지만 말이야. 이 책은 우화풍이라서 교육적인 면도 있고 하지만, 약간은 뻔한 우화 소설이라는 생각도 들었단다. 그래서 적극 추천까지는 안 할 것 같아.

오늘은 책도 얇으니, 편지도 짧게 마칠게.


PS,

책의 첫 문장: 어제 완성한 망루가 오늘 아침 풍랑에 넘어졌습니다.

책의 끝 문장: 웃음소리가 바깥까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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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9)

나혜석은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1021년 최초의 개인전을 가진 화가로 한국 근대 미술사에서 중요하게 자리매김되고 있다. 또 그녀는 한국 근대 문화사에서 최초의 여류소설가 역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안숙원은 그의 소설 <경희>는 한국 현대문학사상 최초의 페미니즘 텍스트라고 평가하면서 이 소설에 나타난 신여성론은 동시대 이광수의 민족개조론과 맞겨룰 만한 담론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나혜석은 여성도 사람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여성 계몽적 시 <노라>를 발표, 1920년대 계몽주의 문학의 중요 작가로 재평가 받고 있다. 이상경은 나혜석은 자유연애주의자가 아니라 자기 성취를 추구하며 온몸으로 계몽주의 사상을 밀고 나갔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46)

대부분의 사람들이 박인덕을 비난했지만, 윤치호는 박인덕을 옹호했다. 그는 1931 10 26일자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첫째로, 나는 수많은 젊은 남자들이 자기 아내와 이혼하는 것과 똑같이 그녀 역시 남편과 이혼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런 남자들 중에는 더 매력적인 여자와 결혼하길 바라는 것 말고 어떤 이유도 없는 자들이 많다. 이들 무정한 젊은 남자들은 비난하지 않고 그저 박인덕만 욕하고 온갖 험담을 늘어놓는 것은 여성은 영원히 남성의 노예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93-94)

마찬가지로 일제는 조선의 라디오를 황국신민화 사업에 적극 활용하고자 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일제는 본격적으로 방송을 국민동원과 전시선전의 도구로 삼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는 황국신민화, 내선일체, 일본어 상용 등의 명분을 내걸어 우리말 뉴스방송에서도 일본어 혼용을 강요하였고, ‘궁성요배(宮城遙拜)의 시간이니 심전개발(心田開發)’이니 하는 프로그램을 방송토록 하였다. 그런가 하면 나중엔 일본군이 되어 천황폐하를 위해 싸우다가 백골이 되어 호국신사에 봉안되는 것이 효도의 길이라는 노래 아들의 혈서를 당대의 인기 가수 백년설이 매일 방송하느라고 2개월간 방송국에 통근했다.”


(114)

1930년대 조선의 중상류층은 행여 뒤처질세라 서양 냄새를 피우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서양화가 곧 계급이요 교양의 척도이자 상징이었다. 1930 11 <매일신보>가 여러 차례에 걸쳐 그런 경향을 지적하고 나선 게 흥미롭다.

11 23일자에 따르면, “서양류의 가수는 성악가라 하여 숭상하고 우리 조선의 고유한 가수는 광대라 하여 천시하고 멸시함은 무슨 까닭인고? 물론 이에는 여러 가지 원인과 동기가 있겠으나 도대체 남의 것이라면 좋으나 그르나 귀하에 여기고 우리의 것이라면 덮어 놓고 천하게 여기는 과도기에 처한 조선의 사회적 결함과 일반 가수의 인격적 저하(低下)가 그 주요한 원인이 된 것은 묻지 않아도 알 일이니 조선의 가수가 결코 본시부터 천한 것은 아니었다.”


(126)

서울 종로경찰서 고등계에서는 이 노래의 가사에 의심을 품고 레코드사 사장 이하 관련자들을 불렀다. 경찰이 문제 삼은 건 삼백연 원안풍은 노적봉 밑에라는 구절이었다. 손목인의 회고에 따르면, “사장 이하 관련자들은 원안풍은원한 품은아니라 원안풍은이라고 극구 해명하고 사정하여 간신히 무마는 되었지만, 솔직히 말해 목포의 눈물삼백연 원안풍삼백 년 원한 품은이라는 뜻으로 우리 민족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겨레의 분노를 노래한 것이다. ‘목포의 눈물’ SP는 이 사건을 겪으면서 더욱 잘 팔려 나갔다.


(160)

일제강점기의 대중가요에 대해 민족의 정서를 황폐화시키고 시적 표현을 왜곡시켰다거나 유행 창가 전반의 의식세계는 결국 식민지배에의 봉사로 귀결되었다는 분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나라 잃은 식민지 민중에게 슬픔을 벗어나라고 주문하는 건 오늘의 관점에서 본 무리한 요구가 아닌가 싶다. 때론 슬픔도 힘이 되는 게 아닐까? 게다가 슬픈 노래가 나라 찾고 경제발전 이룬 뒤에도 계속되는 걸 보면, 이는 좀 더 정교한 분석을 필요로 한다는 걸 말해주는 거라고 볼 수 있다.


(179)

이효석은 조선일보사가 발생한 <조선문학독본>(1938 12월호)에 쓴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에서 가을 낙엽을 태우는 냄새에서 갓 볶음 커피 냄새가 난다라고 썼다. 이에 대해 이영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고등학교 때 이 구절을 읽으면서 정말 커피 냄새가 낙엽 태우는 냄새와 비슷한 줄 알았다. 1970년대만 해도 원두커피를 갈아서 끓어주는 커피 전문점들이 없었고, 다방은 미성년자가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갓 볶은 커피 냄새가 뭔지 알게 된 지금 생각하면 웬걸, 낙엽 태우는 냄새와 비슷도 하지 않다. 그러고 보면 이효석은 커피 냄새를 잘 몰랐던 것이 분명하다. 구태여 익숙하지도 않은 커피 냄새를 들먹인 것은 분명 커피라는 말이 주는 문화적 의미 때문이었을 것이다. “


(224)

1920년대 말부터 유행한 남성의 장발에 가해진 탄압은 한 사나이의 운명을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1937 3월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던 박정희가 교사 일을 그만두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게 된 계기에 장발이 관련돼 있다는 게 흥미롭다. 교사 생활 3년째 되던 1939년 가을 연구수업 시찰차 나왔던 일본이 시학(오늘날 장학사)과 교장이 술자리에서 박정희의 장발을 문제 삼자 박정희는 이에 반발, 술잔을 던지는 등 소동을 벌인 후 사표를 냈다는 것이다. 당시 교사들은 머리를 박박 깎게 되어 있었으나, 박정희만은 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먼 훗날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 뒤에 장발을 혹독하게 탄압하게 된다.


(262-263)

위생에 대한 문화적 차이도 있었다. 일본인들의 기준에선 조선인들이 목욕을 잘 하지 않는 게 야만이었겠지만, 조선인들의 기준으로 볼 때엔 일본의 목욕문화가 야만이었다. 한국 최초의 대중목욕탕은 1905년 서울 서린동 근방에 등장했지만, 여럿이 벌가벗고 목욕을 한다는 것이 익숙지 않은 문화적 저항 때문에 사람이 오질 않아 곧 문을 닫고 말았다. 대중목욕탕에 익숙해질 때까진 10여 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왕실에서도 1919년에서야 목욕실을 두었고, 대중목욕탕은 1920년대에서야 본격적으로 생겨나게 된다.


(266)

쥐잡기운동, 빈대잡기운동, 기생충 박멸운동 등도 병행되었으며, 이는 1930년대에도 지속되었다. 아마도 가장 괴로운 건 빈대의 습격이 아니었을까? 이상은 1936년에 발표한 소설 <날개>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빈대가 무엇보다도 싫었다. 그러나 내 방에서도 겨울에도 몇 마리의 빈대가 끊이지 않고 나왔다. 내게 근심이 있었다면 오직 이 빈대를 미워하는 근심일 것이다. 나는 빈대에게 물려서 가려운 자리를 피가 나도록 긁었다.”


(281)

해마다 화려해지는 유흥가의 축하연 덕분에 크리스마스 이브는 일 년 중 가장 퇴폐적인 밤이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총독부는 유흥업소의 크리스마스 축하연을 전면 금지했다. 그러나 맘먹고 놀겠다는 데야 어디 빠져나갈 길이 없겠는가.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 유흥가는 생뚱맞게 국위선양 기념회’ ‘남경 함락 축하 만찬회’ ‘황국 전승 대연회현수막을 갈아 달고 축하연의 전통을 이어갔다. 크리스마스가 상업적으로 왜곡된 것은 공교롭게도 크리스마스 직전인 12 16일이 200~400페센트씩 지급되는 연말보너스 받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월급쟁이들은 12월 봉급까지 더해 평상시 월급의 3~5배까지 두툼한 월급봉투를 받았다. 오랜만에 두툼해진 월급쟁이의 호주머니를 털기에 크리스마스 이브 축하연만큼 그럴듯한 명분이 없었다.”


(312)

권투의 인기도 그러했을진대 축구의 경우엔 더 말해 무엇하랴.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일제 치하에서의 축구는 카타르시스였다. 프로이트는 인간은 공격을 표현함으로써 분노의 감정을 감소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프로이트는 이런 과정을 정화 또는 카타르시스라고 하였다. 프로이트의 카타르시스 이론은 우리는 내부에 공격적 에너지의 저장소를 항상 지니고 있다고 가정한다. 늘 발산시켜버려야 할 공격성을 어느 정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축구를 통해 그 공격성을 발산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한국인들의 억눌린 상태는 해방이 되었다고 일시에 해소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들에겐 또 다른 종류의 억압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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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라 2023년~

알라딘 친구 여러분들, 2023년 좋은 책들 많이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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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3-12-31 08: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이렇게 한 자리에 책 쌓으시는데만도 한참 걸리셨겠어요? 23년의 독서기록을 사진 한장으로 압축하셨군요!! 와! 내년에도 좋은 책들 함께 나눠요. 북홀릭님

bookholic 2023-12-31 18:48   좋아요 0 | URL
한 해 마무리의 루틴이 되었어요^^
얄라알라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새해에도 좋은 책 소개 부탁드려요~~

호시우행 2023-12-31 0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많이 읽었네요. 건강과 행운을~~

bookholic 2023-12-31 18:49   좋아요 0 | URL
책 읽는 것이 몇 안 되는 낙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파랑 2023-12-31 1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북홀릭님의 독서는 매년 엄청나네요~!! 진정한 책 중독자이십니다~!! 책탑 사진만 봐도 뿌듯 하네요~!!

bookholic 2023-12-31 18:51   좋아요 1 | URL
북플이나 알라딘 서재에서는 중독이라고 하기 어렵죠^^ 닉네임을 부끄럽습니다 ㅎㅎ
새파랑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새해에도 즐독 하시길 바랍니다.

페넬로페 2023-12-31 1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엄청난 책탑이고, 그것을 또 다 읽으셨다는 것에 감동 받습니다.
매년 저에게 내년에 더 분발해야겠다는 의지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bookholic 2023-12-31 18:54   좋아요 0 | URL
ㅎㅎ 고맙습니다... 저도 내년에는 올해보다 좀더 높여보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페크pek0501 2023-12-31 13: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이 푸짐하군요.
새해에도 건필하십시오.^^

bookholic 2023-12-31 18:56   좋아요 1 | URL
올 한 해 잔잔하면서 따뜻한 좋은 글들 감사했습니다.
내년에도 부탁드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대장정 2023-12-31 14: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어봤습니다. 104권 맞나요? 역시 북홀릭이십니다. 👍 내년에도 健讀하십시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bookholic 2023-12-31 18:59   좋아요 1 | URL
아...힘들게 세시다니.. 고맙습니다.. 몇 권 빠진 것 같아요^^
대장정 님도 내년에 올해를 뛰어넘으시길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서니데이 2023-12-31 17: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따뜻한 연말 보내시고
새해복많이받으세요.^^

bookholic 2023-12-31 19:01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서니데이 님~~
늘 좋은 글도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늘 행복하세요...

호시우행 2023-12-31 1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감사합니다.
 

















(142)

카메라는 간단한 기계여서 제아무리 바보라도 사용할 수 있는데, 도전이라면 그것으로 예술, 곧 참된 것과 아름다움의 결합을 창조하는 데 있다. 그러한 탐색은 무엇보다도 정신적인 일이다. 나는 투명한 가을 낙엽과 해변의 완벽한 모양의 소라에서, 여체의 등허리 곡선과 오래된 나무둥치의 결 조직에서 참과 아름다움을 찾는다. 포착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형태들에서도 찾는다. 때때로 암실에서 하나의 상을 가지고 작업하다가 한 사람의 영혼, 한 사건의 감동 또는 한 사물의 생동하는 본질을 만난다. 그러면 감사하는 마음이 치솟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그렇게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 내 일의 목적이다.


(252-253)

그녀는 세기가 바뀐 이래 칠레에 벌써 다섯 차례의 전쟁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우리 칠레인들은 악의가 없어 보이고 심지가 약하다는 평판도 있는 데다 심지어 저기요, 제발 물 한잔 좀 주실 수 있을까요?”하는 식의 비굴한 말투를 사용할 정도지만, 일단 기회만 닿으면 식인종으로 돌변한다고 했다. 우리의 난폭한 기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조상은 스페인에서 온 정복자들 중에서도 가장 노련하고 사나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사막의 태양에 시뻘겋게 달궈진 무기를 들고 최악의 자연 장애물을 이겨 내면서 걸어서 칠레까지 올 생각을 한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그러고는 자신들 못지않게 용맹스러워서 결코 굴복하지 않은 유일한 신대륙 부족이었떤 아라우칸족과 혈통을 섞었다. 아라우칸족은 포로들과 자신들의 추장 토키를 먹는 습성이 있었고 정복자들의 껍질을 말려 제식용 가면을 만들었는데, 특히 턱수염과 콧수염이 있는 사람들의 가죽을 선호했다. 자신들은 수염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백인들에게 복수도 할 수 있었다. 반대로 백인들은 인디오를 산 채로 태워 창에 꽂은 뒤 팔다리를 자르고 눈알을 뽑았다는 니베아의 설명이었다. “그만해라, 됐다! 그런 끔찍한 얘기를 내 손녀딸 앞에서 하지 않도록 해라.” 할머니가 그녀의 말을 중단시켰다.


(348)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진보의 메아리는 우리에게 들려왔고 사회의 변화를 모르고 지낼 수 없었다. 산티아고에서는 이미 실외 스포츠와 실외 게임, 산책 등 카스티야 이레온 귀족의 느긋한 후손들보다는 외향적인 영국인들에게 맞는 놀이들을 광적으로 즐기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유래한 예술과 문화의 바람으로 칠레의 분위기가 새로워졌고, 독일산 기계들이 중후하게 돌아가는 소리에 칠레의 오랜 식민기적 낮잠은 중단되고 말았다. 벼락부자에 교육도 받고 부자들처럼 살고 싶어 하는 새로운 중산층이 탄생했다. 파업, 폭행, 실업, 칼을 뽑아 든 기마경찰의 공격 등으로 국가 기강이 흔들리는 사회 위기가 조성되었지만, 우리에게는 아주 먼 이야기여서 칼레우푸의 생활 리듬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러나 백 년 전에 같은 침대를 썼던 고조부들처럼 여전히 농장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20세기는 찾아들었다.


(430)

기억은 허구다. 우리는 부끄러운 부분은 잊어버리고 가장 밝은 부분과 가장 어두운 부분만 선택하여 인생이라는 널찍한 융단에 수를 놓는다. 나는 사진과 글을 통해 내 존재의 덧없는 상황을 이겨 내고 사라져 가는 순간들을 붙들어 과거의 혼돈을 벗겨 내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매 순간은 순식간에 사라져 금방 과거가 되어 버린다. 현실은 하루살이같이 덧없고 변하는 것이며 순순한 그리움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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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물질의 사랑 - 천선란 소설집
천선란 지음 / 아작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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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 소개해 줄 책은 천선란 님의 <어떤 물질의 사랑>으로, 단편모음집이란다. 모두 여덟 개의 단편집이 실려 있는데, 그 중에 한 작품이 <어떤 물질의 사랑>이고 그것을 책제목으로 뽑은 것이란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천선란 님의 소설은 아빠 취향이 꼭 맞는 것 같구나. 천선란 님의 책들은 모두 좋았어. 이 책은 아빠가 천선란 님을 알기 전에 출간한 책인데, 나중에 검색해 보고 알게 된 책이란다. 주로 SF를 쓰시는 천선란 님의 이 단편 모음집도 모두 SF 소설이란다.

SF 소설에는 <쿼런틴>같은 Hard SF 소설도 있지만, 천선란 님의 SF 소설은 Soft SF 소설이라고 해야겠구나. 천선란 님의 엄마가 적은 나이에 치매에 걸리셔서 고생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엄마를 연상케 하는 등장인물들도 있더구나. 엄마에 대한 사랑이 느껴졌어. 첫 번째 작품인 <사막으로>가 작가의 엄마를 모티브로 한 작품으로 보였어.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은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하는구나. 심각한 대기오염으로 돔 안에서만 살아야 하는 지구. 그 심각한 대기오염 속 어떤 것 때문인지 모르지만, 엄마는 신종 질병에 걸리셨는데, 그 증상이 치매와 비슷했단다. 마치 현실에서 작가의 엄마가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치매에 걸리신 것처럼 말이야. 그런 엄마와 그런 엄마를 정성스럽게 보살피면서 자식에게는 짐을 주지 않으려는 아빠의 이야기

….


1.

<너를 위해서>라는 소설은 정말 짧지만 임팩트가 강한 소설이었단다. 먼 미래, 아기를 낳는 조건을 나라에서 관리하는 세상이었어. 주인공은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조건을 만족하여 아이를 낳게 되는데, 그런데 아이의 유전자 검사를 해보니 성인이 되어 심장마비로 죽을 확률이 엄청 높다고 했어. 그러면서 주인공의 심장을 보관해야 한다면서 주인공을 죽이려고 하는 이야기. 정말 짧은 소설이라고 했는데 얼마나 짧은지 아니? 네 페이지가 끝. 하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던져주는 소설.

<레시>라는 작품은 지구의 바다 생물의 멸종을 막기 위해 바다의 생물들을 데리고 토성의 위성으로 데리고 간 이야기란다. 그런데 그곳에서 새로운 생명체를 만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야.

<어떤 물질의 사랑>은 심라현이라는 사람, 아니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아무튼 지구의 사람과는 다른 존재란다. 겉모습은 사람과 비슷해. 그런데 알에서 태어나서 배꼽이 없고, 성별도 없었어.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에 맞게 성별이 바뀌었어. 남자를 사랑하게 되면 남자의 성징이 나타나고,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여자의 성징이 나타나는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데, 엄마도 신비에 쌓인 분이었어. 심라현은 어느날 라오라는 사람, 아니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아무튼 지구의 사람과 다른 존재를 알게 된단다. 라오는 몸에서 뭔가 떨어지는데, 라현이 자세히 보니 비늘이었어. 둘은 말을 트는 사이가 되었고, 알고 보니 라오는 외계인이었고, 오래 전에 지구에 와서 사랑하는 사람을 찾고 있다고 했어. 알고 보니 라오가 찾고 있는 사람은 라현의 엄마였단다. 그러면서 일어나는 에피소드에 관한 이야기란다.

<그림자 놀이>공감이라는 감정이 사회악으로 치부되어 시술을 통해 그 감정을 없애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세상의 이야기란다. 주인공 이라도 수술을 통해 공감이 없었는데, 20년 전에 우주비행사로 떠났던 소중한 친구인 도아가 다시 돌아왔단다. 우주에서 얻은 방사능으로 병이 생겨서 2주밖에 못 산다고 했어. 하지만 공감이 없어진 이라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모르핀뿐... 아무리 공감을 없앴다고 하지만, 몸 어딘가에는 아직 남아 있지 않았을까.

<두하나>라는 소설은 동아시아 대륙 상공에 정착한 미확인 물체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물체가 생긴 다음부터 남자들만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고, 전염되었어. 좀비는 아니지만 그 움직임은 좀비와 비슷했어. 그 전염된 남자들로부터 대피하게 되었는데 영종도에 그 대피소가 있었어. 전염되지 않은 소수의 남자들도 있어서 대피소로 왔지만, 얼마 못가 전염이 되었고, 대피소에 있는 여자들 중에는 자신의 남자 가족 구성원들도 데리고 오려는 이들도 있었어. 그러면서 갈등을 빚는 이야기가 진행된다. 소설 제목 두하나는 등장 인물 중에 한 명인데, 전염된 남자들의 소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단다. 그러면서 일어나는 일들의 이야기가 <두하나>라는 소설이란다.

<검은색의 가면을 쓴 새>는 멸종된 줄 알았던 저어새 수천마리가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란다. 그 저어새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확인해 보니 철원 근처 비무장 지대였는데, 그 곳은 수십 km 깊이의 싱크홀이 있었고, 그곳에서 저어새들이 온 곳이었어. 사람들은 수색대를 조직해서 조사해보았지만, 씽크홀로 들어간 사람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어. 드론도 보내봤지만, 4000m 이하까지 내려갔다가 사라졌단다. 이 구멍에 대해 많은 노력들을 했지만 허사였단다. 구멍에 들어갈 수색대원을 더 뽑게 되었는데, 주인공 은지도 지원했고 최종 4명에 뽑혀서 씽크홀을 탐험하게 되었어. 대기업 취업 보장에 큰 돈을 준다고 했거든그런 것에 희망을 걸어야 하는 은지의 처지가 안타깝기도 했지만, 은지는 그 전의 수색대원들과 다른 결과를 얻기 바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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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소설은 <마지막 드라이브>라는 소설이야. 안드로이드 더미와 델리의 이야기란다. 더미와 델리의 역할은 교통사고 시뮬레이션에서 운전석과 보조석에 앉아서 시험을 하는 거야. 그런데 기술이 발달하면서 교통사고 사망자가 없어지게 되어 그 일도 하지 않아도 되었어. 하지만 운전사가 보조석에 있던 애인을 보호하려는 행동으로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더미와 델리는 이 경우를 시뮬레이션을 하기 위해 다시 실험을 하게 되었어. 그리고 150번이나 이 시험을 하게 되었고, 마지막 시뮬레이션을 앞두고 더미는 델리와 데이트를 하게 해달라고 하여 허락해주었단다. 인공지능 로봇의 학습 능력으로 사랑도 배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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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8편의 소설을 간단히 이야기했는데, 이 책도 읽은 지 오래되어 기억이 좀 가물가물하구나. 짧게 적어둔 메모와 겨우 남은 기억으로 이야기를 해서, 책의 내용이 잘못된 부분이 있을 수 있으니 양해 바라고오늘은 이만 줄일게.


PS,

책의 첫 문장: 사막에 대해 글을 써보는 건 어떠니?

책의 끝 문장: 사랑하는 델리, 나와 드라이브를 함께해줘서 고마워요.


우주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구는 그 많은 행성들 중 어쩌다 생긴 하나에 불과했고, 그중에서도 아주 작은 행성이었으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고 해도 별 상관 없는 행성이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안에서 존재의 이유조차 알 수 없도록 우연히 생긴 생명체였다. 사랑과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만든 것은 인간이다. 이 땅을 외롭게 만든 것은 오롯이 인간의 짓이라는 걸 상기할 때마다 나는 그저 이 행성을 떠나야만 그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 P18

엄마는 원장과 눈을 마주 보고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엄마가 자주 하는 우기기의 비법인데, 말이 안 되는 주장을 펼칠 때일수록 당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구는 네모난데 왜 동그랗다고 하는 거예요? 라는 말을 내뱉은 학자처럼 말이다. 원장은 그럴 수도 있나? 하다가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고 엄마의 계략에 넘어갔다. 세상이 이렇게 얼렁뚱땅 생겼다는 걸 엄마를 통해 배웠다. 세상은 치밀해 보이지만 사실 대체로 엉성하고 얼렁뚱땅 넘어간다는 것을. - P93

이 사랑은 어떤 물질로 이루어진 사랑일까. 나를 꽉 끌어안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이 미적지근한 온도의 사랑은. 엄마가 내게 마지막으로 알려준 것은 온도였다. 이 온도를 기억하고 있다가, 이런 온도의 존재를 만나야 한다고. - P153

내가 가족들을 가능 늦게 만났잖아. 늦게 태어났으니까. 그 단단한 결속력, 나는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에 쌓았을 추억. 그런 걸 감내하고 버텨야 하는 자리라고, 막내가. 그런 의미로 애교란 살아남기 위한 생존수단인 셈이지. 나는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라는 어필. 마치 강아지나 고양이가 주인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 애교를 부리듯이. 언니는 그럴 필요가 없었겠지. 언니가 태어났을 때는 언니 혼자였으니까.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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