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0 : 서울편 2 - 유주학선 무주학불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0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유홍준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울편 두 번째 이야기를 읽었단다. 서울편은 모두 4권을 계획하고 계신데 현재는 2권까지 나왔단다. 얼마 전에 1권을 읽고 나서 2권도 읽고 싶어서 서둘러 찾아 읽었단다. 그냥 스쳐 지나간 서울의 곳곳에 서려 있는 이야기들을 구수하게 해주시는데, 참 재미있었단다. 유홍준님께서 예전부터 강조한 것처럼 알면 보인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공감하게 하는 내용들이었어. 이 읽은 내용들을 머릿속에 잘 간직하지 못함이 아쉬울 뿐이구나. 이제 코로나19도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 조금만 더 참고, 완전 사라지고 나면 한번 서울나들이를 해보자꾸나. 2권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유명한 지리학 박사가 서울을 평가한 것을 읽어보고 시작해보자꾸나.

=======================

(21-22)

겐테 박사는 서울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서울의 로케이션은 아주 독특하다. 사방에 뾰족하고 높고 힘찬 산들이 민가가 들어선 곳까지 뻗어 내려오면서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이 서울의 모습이다. 이런 전망(view)을 가진 서울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장 아름답고도 꼽는 군주국 도시 명단에 들어가야 할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서울을 페르시아 수도 테헤란과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와 비교해보면 비슷한 점이 많다.

그러나 서울에는 (…) 잘츠부르크처럼 웅장하고 엄숙한 기사의 성채가 없고, 테헤란의 (…) 위엄 넘치는 다만반드(Damavand) 산처럼 거대한 산도 없다. 그러나 서울보다 고도가 약 300미터 높을 뿐인 남산에서 내려다보면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


1.

2권의 이야기는 한양도성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한단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아빠도 한양도성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단다. 한양 도성이라는 것이 전쟁을 대비한 성곽인줄 알았어. 그런데 울타리의 개념이라고 하는구나.

=======================

(48)

단적으로 말해 한양도성은 전란을 대비해 쌓은 성곽이 아니라 수도 한양의 권위와 품위를 위해 두른 울타리다. 집에 담장이 있고, 읍에 읍성이 있듯이 수도 서울에 두른 도성이다. 영어로 말해서 포트리스(fortress)가 아니라 시티 월(city wall)이다. 만약에 전쟁을 대비해 성곽을 축조했다면 석벽을 사다리꼴로 높이 쌓고 성곽 둘레에 해자를 깊게 파서 두르는 등 겹겹의 방어시설을 구축했어야 했다. 도성이 울타리이기 때문에 숭례문을 비롯한 관문도 사람들이 드나드는 통행문 이상의 기능을 하지 않았다. 동대문을 옹성처럼 두른 것은 전투를 의식해서가 아니라 풍수상 허하다는 서울의 동쪽 지세를 보완한다는 의미였을 뿐이다.

=======================

한양 도성은 태조 때부터 세종 때까지 지었다고 했어. 주로 농한기 때 백성들을 동원해서 지었고, 이후에는 간간히 복원공사를 했다는구나. 예전에 한양도성을 따라 걷는 순성 놀이라는 것이 있었대. 도성 순례라고도 했어. 그런데 1968년 북한의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했던 김신조 사건 이후 북악산의 출입이 한동안 금지되었단다. 40년이 지난 2007년이 되어서야 북악산이 다시 개방되었고, 한양도성도 다시 복원을 하기 시작했다고 하는구나. 백 퍼센트 복원은 아니지만, 다시 순성 놀이를 할 만큼의 복원이 되었다고 하는구나.

조선을 만들면서 어떻게 이런 명당을 수도로 정할 생각을 했을까. 원래 계룡산 자락에 수도를 지으려고 했었대. 9개월 동안 공사도 진행되었는데, 풍수가 안 좋다는 신하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져서 중단이 되었다는구나. 두 번째로 검토된 곳은 무악산 아래 신촌 일대였다고 하는구나. 그곳도 안 좋다고 해서, 태조가 처음부터 눈 여겨 보았던 북악산 아래로 정해졌다고 하는구나. 다 태조의 빅 픽쳐였던 것 같기도 하고서울에는 등산하기 좋은 산들이 많단다. 아빠도 서울에 있는 산에 올라가보곤 했었는데, 산에 올라가서 서울 시내를 바라다 보면 풍수지리에 전혀 지식이 없는 아빠의 눈에도 경복궁의 자리가 아늑하니 자리가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단다. 북악산은 아직 가보지 못했는데, 기회 되면 한번 가보고 싶구나.


2.

두 번째 이야기는 자문밖 이야기란다. 자문밖이 어디지? 이런 생각이 들었어. 자문은 자하문을 줄여 부르는 말인데, 자하문은 사소문 중에 하나인 창의문의 다른 이름이란다. 자문밖에는 아름다운 골짜기들이 많아서, 조선시대의 왕족을 비롯하여 상류층들이 풍류를 즐기는 곳이 많이 있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그때 만들어진 지명들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어. 자문밖의 중심은 세검정이고, 장의사라는 절, 한지를 만들던 조지소, 영조가 만들었다고 하는 세검정 정자, 연산군이 만든 누각 탕춘대 등이 있다고 하는구나. 이곳의 아름다움을 잘 요약해서 적은 글이 있어 발췌해 보았단다.

======================

(125)

인조반정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연산군 때 탕춘대 절벽 밑 좌우로 흐르는 물을 가로질러 돌기둥을 세워 옆으로 긴 누각을 지었다.”고 했고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성종 때 문신인 성현(成俔) <용재총화>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도성 밖에 놀 만한 곳으로는 장의사 앞 시내가 가장 아름답다. 시냇물이 삼각산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나오고 골짜기 안에는 여제단(厲祭壇)이 있으며 그 남쪽에는 무이정사(武夷精舍, 무계정사를 말한 듯함)의 옛터가 있는데 길 앞에는 돌을 수십 길이나 쌓아올린 수각이 있다. 또 절 앞 수십 보 앞에는 차일암(遮日巖)이 있는데, 바위가 절벽을 이루어 시내를 베고 있는 것과 같으며 그 바위 위에는 장막을 칠 만한 우묵한 곳이 있는데 바위는 층층으로 포개져 계단과 같다. 흐르는 물소리가 맑은 하늘 아래 천둥 번개가 치는 듯해 귀가 따갑다. 물이 맑고 돌이 희어서 선경(仙境)이 완연하다.”

======================

부암동에는 여러 위인들의 별장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중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석파정이 유명하대. 흥선대원군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른 곳에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 같은데, 그는 노련한 정치가이기 전에 난초도 잘 그리고, 시도 잘 짓고, 글씨도 잘 쓰고 책도 많이 읽었다고 하는구나. 지은이 유홍준님은 흥선대원군이 술에 관해 남긴 한마디를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0 – 서울편2>의 부제로 정했단다. 그 문장이 참 멋있어서, 외워두고 싶은 문장이구나.

======================

(152)

유주학선 무주학불(有酒學仙 無酒學佛)

술이 있으면 신선을 배우고 술이 없으면 부처를 배운다.”

인생의 여유와 허허로움을 느끼게 하는 명구가 아닐 수 없다. 석파정에서 동쪽으로 건너다보이는 북악산 아래에는 추사가 지내던 백석동천 별서가 있다. 이제 백석동천으로 발을 옮기자니 사제지간에 이렇게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왠지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어쩌면 별서의 팔자였는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든다.

======================

부암동 별서에 머물던 사람 중에 현진건이라는 유명한 소설가도 있는데, 이 분이 손기정 선수의 금메달 소식을 신문에 실을 때 일장기를 없앤 장본인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단다. 현진건은 당시 동아일보 사회부장이었는데, 이 일로 구속 당하게 된 이후에는 역사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구나. 안타깝게도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3년 돌아가셨다고 하는구나.


3.

덕수궁으로 잘 알려져 있는 궁의 옛이름은 경운궁이었단다. 태조의 부인 신덕왕후 강씨가 죽고 난 다음 묘를 현재 덕수궁 근처에 모셨고, 정릉이라고 불렀어. 이 동네의 이름이 정동인데, 정릉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정릉이 이곳이 아니거든나중에 지금의 성북구 위치로 이전을 한 것이라고 하는구나. 태조는 아내 신덕왕후를 생각하는 마음에 정릉 근처에 흥천사라는 절을 지었대. 나중에 릉은 성 밖으로 이장을 했지만, 절은 그대로 남아 있었대. 이 절은 연산군과 중종 때 화재로 전소되었고, 선조 때 정릉원찰이라는 절로 다시 지었고, 정조 때 돈암동으로 옮겨 이름도 신흥사로 바꾸었다가 나중에 다시 흥천사가 되었다고 하는구나.

원래 흥천사 자리 근처에 세조가 의경세자를 잃은 세자비(인수대비)에게 지어 준 집이 있었어. 그런데 세자비의 둘째 아들 성종이 다시 왕이 되어 궁으로 들어오게 되고, 세자비의 첫째 아들 월산대군이 그 집에서 머물게 되었단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피난에서 돌아와서 이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로 지내게 되면서 경운궁이라는 이름이 붙었어. 선조가 머물던 곳은 옛 왕이 머물던 곳이라는 뜻으로 석어당이라고 불렀어. 광해군이 정식 궁으로 지으려고 했으나 반정으로 중단되었고, 을미사변 이후 고종이 아관파천 후 다시 돌아올 때 경운궁으로 환궁을 했단다. 그래서 조선의 마지막 법궁이 되었는데, 고종이 경운궁으로 돌아온 이유는 서양 열강의 대사관들이 주변이 많아서, 일본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이라고 하더구나. 약소국의 황제가 겪어야 하는 아픔이구나.

고종이 경운궁에 자리를 잡으면서, 서양식 건물들을 지었단다. 그래서 덕수궁에 가보면 서양식 건물들이 있는 것이란다.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되고 순종이 황제가 되어 창덕궁으로 가면서 아버지께 덕에 의지하고 장수하시라고 덕수궁이라는 이름을 지었는데, 그 이후 경운궁이라는 이름보다 덕수궁으로 부르게 되었단다. 2000년대 들어서 한때 이름을 다시 경운궁으로 하자는 민원이 있던 적도 있었대.

======================

(196)

그런 경운궁이 다시 역사의 주무대에 등장한 것은 1897 2월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1895)을 겪은 고종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지 1년 뒤에 경복궁이 아니라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 조선왕조의 마지막 법궁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그해 10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경운궁은 황궁이 되었다.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되고 뒤를 이은 순종황제가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경운궁에 상황(上皇)으로 남은 아버지께서 덕에 의지해 장수하시라는 뜻으로 덕 덕() , 목숨 수() , 덕수(德壽)라는 이름을 지어 바쳤고 이후 덕수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

..

1904년 화재로 나서 다시 복원을 할 때는 본전인 중화전을 원래 2층이었는데 단층으로 복원했다는구나. 돈이 없어서 말이야. , 슬프구나. 그래서 지금 덕수궁 중화전은 1층으로 남있다고 했어. 덕수궁의 문은 대한문이라고 하는데 원래 이름은 대안문이었는데, 이름을 대한문으로 바꿨다고 하는구나. 아빠는 그동안 그 대한문이 대한민국의 대한(大韓)’인줄 알고 있었는데, ‘대한(大漢)’이더구나. 왜 중국의 한나라 漢을 썼을까? 의문이 들었는데, 大漢이라는 것은 큰 하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구나. 그래도 이왕 이름 바꾸는 것, 논란의 여지가 없도록 大韓으로 해도 좋지 않았을까 싶구나. 그 대한문이 원래는 현재보다 더 앞쪽에 있었는데, 도로를 넓히면서 담장과 함께 현재의 위치로 이동했다는구나.

======================

(283-284)

그런가 하면 대한문의 한() 자를 중국의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 중국을 숭상하는 뜻이 있다는 주장, 혹은 조선도 중국처럼 큰 나라라는 뜻이라는 설도 나왔다. 반대로 이 글자를 놈이라는 뜻으로 해석해 이토 히로부미가 큰 놈이 드나드는 문이라는 뜻으로 바꾸도록 강요했다는 주장도 생겼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낭설이다. 1907년에 편찬된 <경운궁 중건도감 의궤>에 실려 있는 이근명(李根命) <대한문 상량문>에 그 내력이 소상히 밝혀져 있는바, 대한은 큰 하늘이라는 뜻으로 새로 태어난 대한제국이 하늘과 함께 영원히 창대하라는 염원을 담은 것이다.

======================


4.

2권의 마지막으로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 성균관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단다. 성균관의 성균이라는 말의 어원은 음을 고르게 조율하는 것을 뜻한다고 하는구나.

======================

(381)

성균이란 음악에서 음을 고르게 조율하는 것을 뜻하며 <주례(周禮)> <대사악(大司樂)>에서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성균의 법을 관장하여 국가의 학정(學政)을 다스리고 나라의 자제들을 모아 교육한다.”

그리고 주소(注疏, 각주)에서는 그 뜻을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이란 그 행동의 이지러진 것을 바르게 하는 것이고, ()이란 습속의 치우침을 균형 있게 하는 것이다.”

======================

성균관 유생들이 강학하는 명륜당을 비롯하여 대성전을 이야기해주고, 조선시대의 교육체제와 문묘 제례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었단다.

======================

(448)

성균관이 강학공간인 명륜당(明倫堂)과 향사공간인 대성전(大成殿)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교()와 학()이 분리되지 않아 유학(儒學)이면서 동시에 유교(儒敎)임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그 때문에 불교와 마찬가지로 유교의 성현을 모시고 예를 올리는 종교공간을 갖고 있는데 이를 문묘(文廟)라 한다. 불교에 사찰이 있듯이 유교엔 문묘가 있고, 사찰에 대웅전이 있듯이 문묘엔 대성전이 있고, 사찰에 관음전, 지장전이 있어 보살을 모시듯이 문묘엔 동무(東廡), 서무(西廡)가 있어 역대 성현들을 모시는 것이다.

======================

성균관에 대한 이야기도 좋았지만, 아빠에게 가장 감명을 준 것은 정조 대왕이 성균관 유생들에게 당부하는 말씀이었단다. 그것은 비단 유생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고, 모든 이들이 깊이 새기면 좋은 말씀이었단다. 오늘을 살고 있는 너희들과 아빠에게도 말이야.

======================

(389)

! 제생들아! 그대들은 나의 이 말로 하여 혹 느슨하게 생각하지들 말고 한 치 한 푼이라도 오르고 또 올라 마치 100리 길을 가는 사람이 항상 90리를 절반쯤으로 생각하듯이 하라. 그리하면 자만하고 싶어도 자만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계속해야 할 것이 학업이고 무궁무진한 것이 덕이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바라는 것은 제생들이 그렇게 계속 노력하여 무궁한 발전을 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제생들이여! 감히 노력하지 않아서 되겠는가.”

정조의 ‘100리 길을 갈 때 90리를 절반쯤으로 생각하라는 말에 나는 그간 80리만 가도 다 간 기분으로 살았던 것 같아 조금 뜨끔했다.

======================

아빠의 기억력이 좋지 않아 조금씩 메모해 둔 것을 토대로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보다 너희들이 나중에 커서 이 책을 읽어보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작년에 너희들과 덕수궁을 간 적이 있었잖아. 그때는 인근에 전시회에 갔다가 들른 것이라서 한 바퀴 휙 돌고 나온 것이 전부였는데, 이 책을 읽고 났더니 너무 아쉬운 생각이 드는구나. 이 책을 읽고 덕수궁에 갔다면 너희들에게 좀더 많은 이야기를 해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 다음에 또 가면 되지그때는 이 책을 들고 가야겠구나. 그러면 참 좋은 우리들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될 것 같구나.


PS:

책의 첫 문장 : 서울은 누가 뭐래도 우리나라의 상징이자 자존심이다.

책의 끝 문장 : 그런 영광과 사명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성종 19년(1488)에 명나라에서 온 동월이라는 사신은 <조선부>에서 서북쪽에서 들어오며 한양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찬미했다.

"임진강 나루를 건너 파주에 이르러 한성을 바라보니 저 높이 서기(瑞氣)가 어리었다. 벽제관을 지나 홍제원에 당도하니 여기가 조선의 서울인데 동편으로 우뚝하다. 높은 삼각산에 받쳐 있고 울창한 푸른 소나무 그늘에 덮여 있다. 북쪽은 천 길로 이어져 내려서 그 기세는 진정 천군(千軍)을 누를 만하고 서쪽을 바라보니 한 관문(關門)이 있는데 오직 말 한 필 드나들 만하다. 산은 성 밖을 둘렀는데 날쌘 봉황이 날아가며 번뜩이는 것 같고 소나무 아래에 흰모래는 마치 쌓인 눈에 햇볕이 내리쬐는 듯하다." - P44

석파(이하응)는 난초 그림뿐만 아니라 시도 잘 지었고, 글씨도 잘 썼고 독서도 많이 했다. 그가 즐겨 사용한 문자도장에는 이런 멋진 문구가 있다.
讀未見書 如逢良士
讀己見書 如遇故士
"아직 보지 못한 책을 읽을 때는 어진 선비를 만나듯 하고
이미 본 때를 읽을 때는 옛 벗을 만나듯 한다." - P151

현진권은 자신이 역사소설로 돌아선 이유에 대해 <문장> 1939년 12월호에 <역사소설문제>를 기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사실을 위한 소설이 아니오. 소설을 위한 사실인 이상 그 과거가 현재에 가지지 못한, 구하지 못한 진실성을 띄었기 때문에 더 현실적이라고 믿습니다. 현재의 사실에서 취재한 것보담 더 맥이 뛰고 피가 흐르는 현실감을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비현실적이라는 둥 도피적이라는 둥 하는 비난의 화살은 저절로 그 과녁을 잃을 것입니다." - P168

먼 옛날로 돌아가서 600여 년 전, 수도 한양의 도시계획 마스터플랜을 설계한 삼봉(三峯) 정도전은 동네마다 이름을 지으면서 성균관 일대는 ‘가르침을 숭상한다’는 의미로 숭교방(崇敎坊)이라고 했다. 오늘날 대학로가 있는 성균관 옆 동네가 동숭동(東崇洞)인 것은 숭교방의 동쪽이라는 뜻이다. - P40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방구석 미술관 - 가볍고 편하게 시작하는 유쾌한 교양 미술
조원재 지음 / 블랙피쉬 / 2018년 8월
평점 :
품절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인터넷 서점과 책 관련 SNS을 돌아다니다 보면 눈에 가는 책이 눈에 띠곤 해. 그렇게 알게 된 책 <방구석 미술관>이라는 책을 이번에 읽었단다. 제목이 독특하다고 생각했는데, 책소개를 읽어보니 지은이 조원재라는 분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제목이라고 하는구나. 아빠도 가끔 팟캐스트를 듣는데, 미술 관련된 팟캐스트까지 들을 생각은 해보지 않았어. 그래도 가끔씩 아주 가끔씩 미술에 관련된 책을 읽곤 했었잖아. 미술에 대한 것을 알고는 싶지만, 워낙 커다란 분야이다 보니 쉽지 않은 분야이기도 하고... 얼마 전에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을 읽고 한번 더 좌절했었잖아. 이 책은 제목에서 오는 분위기가 그리 어렵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인기 있는 팻캐스트를 진행하고 있는 이의 책이라고 하니... 더욱 더 읽어볼 만하다고 생각했단다.

이 책은 유명한 화가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주고 있단다. 14명의 화가를 소개해주고 있는데, 각 화가들의 숨겨진 에피소드가 재미있었어. 몰랐던 화가들을 알게 되는 것도 좋았단다. 이 책에서 읽은 내용을 잘 기억하고 있다면, 너희들에게 화가들의 숨겨진 에피소드들을 재미있게 이야기해줄 수도 있겠다 싶었단다. 기억력이 문제이지만 말이야.


1.

그럼,이 책에 실린 몇몇 화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게. 14 명의 화가들을 다 이야기하기에는 아빠의 인내력이 부족하고

절규라는 유명한 작품을 그린 유명한 화가 뭉크라는 작가가 있단다. 그 그림을 보면 아름다움보다는 보는 사람마저 공포감을 느끼게 해주는 그림이야. 그런 그림을 그리는 이라면 죽음 같은 것도 왠지 초연할 것이라는 편견을 갖게 되는데, 그건 정말 편견이란다. 어린 시절 관절염이 생겨 평생 관절염으로 고생하고, 어린 시절에 엄마와 누나를 연이어 잃은 뭉크는 평생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졌다고 하는구나. 그뿐만 아니라 세 번의 사랑의 아픔을 겪고 나서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하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대. 그리고 81살까지 장수를 했다고 하는구나. 이 책에 죽기 4년 전 그린 자화상이 실려 있는데, 그의 삶이 얼굴에 담긴 듯 초라하고 늙은 모습에 애잔함이 느껴졌단다.

프리다 칼로. 아빠는 처음 들어본 화가인데 멕시코 출신의 세계적인 화가라고 하는구나. 멕시코 지폐에도 실려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구나. 화가로서는 명성을 얻었지만, 칼로의 삶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을 것 같구나. 열여덟 살 때 교통사고로 인해 온 몸의 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받았고, 그로 인해 평생 아이도 낳지 못하고 불편한 몸으로 살아야 했어. 그런 힘든 시기에 그림을 만나면서 그 어려움을 이겨나갔지. 그리고 칼로는 22살 연상의 디에고 리베라라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된단다. 아무리 사랑이라는 것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22살의 연상의, 그리 잘 생기지 않은 소문난 바람둥이와 결혼이라니그것도 리베라의 세번째 결혼아마 칼로는 리베라라는 사람보다 리베라의 그림을 사랑했던 것은 아닌지디에고 리베라는 멕시코의 국민화가로 부르던 사람이거든

하지만 디에고 리베라의 엽기적인 바람기는 멈추지 않았어. 프리다 칼로의 여동생과 바람을 비웠다고 하는구나. 칼로가 화가 나서 맞바람을 피웠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상처가 아물겠니. 칼로는 우연히 여러 화가들이 공동으로 여는 전시회에 자신의 작품을 전시했는데, 그 작품들이 크게 히트를 쳐서 뉴욕과 파리에서 개인 전시회를 여는 등 크게 성공하였다고 하는구나. 프리다 칼로의 작품들을 보면 엽기적인 모습을 띠기도 하는데, 아마추어의 눈을 가진 아빠는 그것이 그리 대단한 작품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런데 그런 화풍을 갖게 된 이유가 바로 디에고 리베라가 바람을 피워서 그랬다고 하는데, 리베라의 바람이 아니었다면 프리다 칼로의 작품도 없었을 것이라고 지은이는 이야기하는구나. 그리고 비록 리베라가 바람을 피웠지만, 프리다 칼로의 재능은 인정하고 칼로가 무명일 때부터 칼로의 작품을 여기저기 소개하기도 했다는구나. 그렇다고 용서를 할 수는 없지.

….

그리고 그 유명한, 아빠도 좋아하는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단다. 그가 왜 노란색에 빠질 수밖에 없고, 그가 왜 정신적으로 그런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는지 이야기기를 해주었어. 그것은 바로 파리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술 압생트 때문이라고 하는구나 고흐가 파리로 와서 당시 파리에서 유행하던 술 압생트에 빠졌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압생트라는 술에 산토닌이라는 성분이 있었는데, 이 산토닌이라는 성분에 중독이 되면 황시증, 그러니까 세상이 노랗게 보이는 병에 걸릴 수 있다고 했대. 그리고 산토닌 중독이 되면, 정신착란, 간질 발작과 환청 증세까지 보일 수 있었대. 고흐가 환청에 시달리다가 자신의 귀까지 자른 것이 바로 모두 이것 때문이었던 것인가. 결국 1915년 프랑스는 압생트를 금지하는 법령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중독이 되었고, 그중에는 고흐도 있었던 거야. 고흐는 자신의 상태를 인지하고,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갱생의 노력을 했지만 결국 그 병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한 것이로구나. 황시증으로 색을 제대로 보지 못한 고흐는, 아이러니하게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어내며 명작을 그리게 되었단다.

=========================

(87)

색을 표현해야 하는 화가가 색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는 건 어쩌면 저주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반 고흐는 그것을 영삼의 원천으로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부를 수 있는 가장 순도 높은 고음의 노랑을 찾아냅니다.

노란 높은 음에 도달하기 위해서 나 스스로를 좀 속일 필요가 있었다.”

그는 이 말을 알코올 중독 수준이 너무 심각하다며 자신을 나무란 의사에게 했다고 합니다. 활활 타오르는 노랑을 보기 위해 자신을 속이며 압생트를 계속 마셔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예술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던질 수 있었던 반 고흐가 생명을 활활 태우며 꽃피운 대표작이 바로 <해바라기>입니다.

=========================

구스타프 클림트. 이 화가도 키스라는 그림으로 무척 유명한 화가인데, 그를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19세기 말 오스트리아 미술계의 반항아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하는구나. 그의 나이 20대까지만 해도 착한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그림 천재였대. 하지만, 30살에 동생을 잃고 얼마 후 아버지마저 잃은 그는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었어. 그리고 이후 그는 반항의 아이콘이 되었대. 빈 미술협회와 의견 충돌을 보이면서, 따로 떨어져 나와 분리주의 그룹을 만들었대. 그와 뜻을 함께 한 이들과 함께 문제작들을 잇달아 발표했는데, 당시에는 많은 악평이 쏟아졌지만, 나중에는 새로운 예술의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하는구나.

=========================

(116-117)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미술 천재 클림트. 고전주의 양식을 따라 그리기만 해도 마음 편히 먹고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타협하지 않고, 시대의 반항아로 살았습니다. 예술가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새로운 예술의 시대를 빈에도 꽃피우기 위해, 스스로 황금빛 창을 들고 아테나 여신이 되기를 자처했습니다. 그리고 온갖 반발과 저항을 이겨내고, 결국 새로운 예술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그의 분리주의 정신은 곧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라는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또 다른 거장들을 탄생시키는 인큐베이터가 되었습니다.

=========================

에곤 실레. 에곤 실레는 화가는 이름은 들어본 것 같기도 한 이름이었단다. 그의 작품은 어떤 것이 있는지는 전혀 몰랐어. 그런데 이 책에 실린 에곤 실레의 작품을 보니 어디선가 많이 본 화풍이더구나.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이라는 소설이 있는데, 민음사에서 이 책을 출간하면서, 책표지에 실은 그림이 하나 있었는데, 그 그림과 비슷한 그림들을 실레가 그렸어. 그래서 아빠가 함 찾아보니 민음사의 <인간실격> 표지에 실린 그림도 에곤 실레의 그림이더구나. 이런 내용도 책에 실렸다면 좋았을 텐데, 이런 생각을 했단다. 에곤 실레를 설명하는 부분은 공공장소나 너희들과 함께 책을 볼 때 적당하지 않겠다 싶었단다. 외설적이라고 생각할 정도의 작품들도 있었거든. 실레가 아버지를 무척 사랑했는데, 그런 아버지가 성병이 죽고 말았대. 그것에 대해 큰 충격을 받고 그런 외설적인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단다. 그의 삶도 무척 불우했다고 하는구나. 아내와 뱃속의 아이가 죽고 난 뒤 에곤 실레도 젊은 나이에 스페인 독감으로 죽고 말았대. 정말 불쌍하구나.

폴 고갱이라는 유명한 화가가 있지. 한때 고흐와도 같이 지냈던 사람. 그런 그가 잘 나가던 증권맨이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단다. 그것도 10년이나 증권회사를 다니고 있었고 돈도 잘 벌었대. 이후 화가로 전향했대. 이제 막 화가로 들어선 사람이 돈을 잘 벌 리 없고, 이내 가난해졌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아내는 아이들 다섯은 데리고 친정으로 가버렸다고 하는구나. 그렇게 가족보다 그림을 선택할 정도로 그림에 미쳐 있던 고갱. 이후 고갱은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려고 평생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구나.

그가 그리려는 것은 원시대 야생을 그리려고 했어. 그래서 원시대 야생을 찾으러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멀리 타히티에 가서 정착해서 그곳에서 그림을 그렸다고 하는구나. 누군가 보면 미쳤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런 똘끼가 그를 유명한 화가로 만든 것은 아닌가 싶구나. 예술가의 삶은 기나긴 고난의 길이라고 이야기하는 그의 말은 공감하면서, 절대 발을 들여놓고 싶지 않은 길이구나.

=========================

(163)

예술가의 삶은 기나긴 고난의 길이다! 우리를 살게 만드는 것도 바로 그런 길이리라. 정열은 생명의 원천이고, 더 이상 정열이 솟아나지 않을 때 우리는 죽게 될 것이다. 가시덤불이 가득한 길로 떠나자. 그 길은 야생의 시를 간직하고 있다.” – 폴 고갱

=========================

에두아르 마네. <악의 꽃>으로 유명한 시인 보들레르의 영향을 받고 도발적인 그림들을 그리면서 많은 비판을 받았대. 당시 <악의 꽃>이라는 시와 보들레르가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그에게 영향을 받아 그린 마네 역시 많은 비판을 받았던 것이지. 마네는 모네, 르누아르, 세잔 등 다음 세대 유명한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대.

….

클로드 모네. 마네에게 영향을 받은 모네. 마네, 모네.. 이 비슷한 이름을 가진 화가들은 시험공부를 하는 학생들을 많이 헛갈리게 할 것 같구나. 모네는 어렸을 때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고, 십대 중반 때부터 캐리커처를 그려 돈을 벌었다고 하는구나. 부댕과 용킨트라는 화가를 만나면서 그림 실력도 더 늘었고, 빛을 중시하는 풍경화를 많이 그렸대. 하지만 당시에는 많은 인정을 받지 못해 시대를 앞서 간 화가로 평가를 받았단다.

폴 세잔. 세잔의 사과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아빠는 잘 모르겠더구나. 그리고 그 사과 그림이 정말 잘 그린 것인지도 잘 모르겠고 말이야. 점점 현대로 오면서 그림 속에 다른 것을 봐야 하는 것 같았어. 세잔식 인상주의라고도 하는 후기 인상주의의 대표주자라고 하는데, 그런가 보다 했단다. 세잔식 인상주의의 특징은 기존 인상주의에 조화와 균형을 담았다고 하는데, 이런 화풍을 설명하는 부분은 크게 감동을 받지 못하겠더구나.


2.

화가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 하고 오늘 편지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뒤샹이라는 사람이 황혼의 나이에 인터뷰를 한 내용이 있는데, 예술가의 정의를 멋지게 정의한 것이 발췌해보았단다. 비단 예술가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며 사는 삶. 정말 멋진 삶이 아닌가 싶구나.

=========================

(333)

어느덧 거장의 칭호를 받는 79세 뒤샹은 한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예술가로 살며 가장 만족스러웠던 것은 무엇이었나?” 그는 이렇게 답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 그림이나 조각 형태의 예술 작품들을 만드는 데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차라리 내 인생 자체를 예술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

=========================


PS:

책의 첫 문장 : 혹시 오늘, 죽음에 대해 생각해봤나요?

책의 끝 문장 : ‘Life’란 무엇인가?’


평생 죽음을 의식했던 뭉크는 예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자신의 심장을 열고자 하는 열망에서 태어나지 않은 예술은 믿지 않는다. 모든 미술과 문학, 음악은 심장의 피로 만들어져야 한다. 예술은 한 인간의 심혈이다." - P13

"자기신뢰야말로 용기의 초석이고, 자기신뢰는 위험이란 요소와 친하게 되어 있습니다. (중략) 용기란 고뇌하며 위험에 맞서는 정신을 의미합니다. (중략) 삶은 거센 물결과 고통을 헤치고 나아가는 투쟁이자, 끝없이 밀려드는 적들과의 투쟁이라고 했지요. 인간은 누구나 자연이 각자에게 선사한 것을 즐기기 위해 홀로 투쟁해야 합니다."

이것이 열아홉 살 에곤 실레의 정신입니다. 자신이 자연에게 준 것을 삶에서 즐기기 위해 스스로를 믿고, 용기를 내, 위험을 기꺼이 껴안으며 투쟁하는 것. 그 의지는 끝내 그만의 솔직하고 뜨거운 예술 세계로 실체를 드러냅니다. - P130

"삶에서처럼 예술에서도 사랑에 뿌리를 두면 모든 일이 가능합니다." – 마르크 샤갈 - P28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벌새 - 1994년, 닫히지 않은 기억의 기록
김보라 쓰고 엮음, 김원영, 남다은, 정희진, 최은영, 앨리슨 벡델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작년은 우리나라 영화의 해인 것 같았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라는 영화가 칸 영화제 최고의 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아카데미 감독상, 최우수 작품상 등을 휩쓸었단다. 기생충이 그렇게 메인 영화제 최고의 상을 휩쓰는 동안 독립 영화 <벌새>는 각종 독립영화제 등 많은 상을 받았단다. 검색을 해보니 46개의 상을 받았대. 와우, 대단하구나. 하지만 독립 영화의 한계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보지는 않았지. 개봉관도 그리 많지 않았고 말이야. 아빠도 그런 영화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는데, <벌새>라는 책도 있더구나. 아빠는 책 소개를 자세히 보지 않고, 영화 <벌새> <벌새>라는 소설을 영화로 만든 줄 알았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이 많이 있잖아.

워낙 평이 좋다 보니 아빠도 이 책을 구입했단다. 원작 소설을 먼저 읽고 나서 영화를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말이야. 그런데 이 책은 영화 시나리오였단다. 아빠가 책 소개를 안 보고 당연히 원작 소설이라고 생각했던 거야. , 아빠가 영화 시나리오를 읽어본 적이 있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읽어본 적이 없는 것 같더구나. 한번 읽어봐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어. 재미있더구나. 아무래도 영화 시나리오다 보니까 아빠가 영화감독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읽게 되더라구. 이 부분은 카메라 움직임을 이렇게 하고, 배우들은 모습은 이렇게 하고저절로 이런 생각이 들더구나. 색다른 재미였어.


1.

이 책의 부제는 <1994, 닫히지 않은 기억의 기록>이란다. 1994. 벌써 26년전의 일이구나. 어떤 해는 아무런 의미도 없던 한해일 수 있지만, 어떤 해는 머릿속에 박혀 잊을 수 없는 한해일 수도 있어. 1994년이 바로 그런 해란다. 특히 아빠는 군대를 간 해이기도 하기 때문에 잊을 수가 없는 한 해란다. 1994년의 많은 날들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생생하구나. 우리나라에서도 이런저런 많은 일이 일어났어.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성수대교 붕괴였단다. 멀쩡하던 커다란 다리가 어느날 갑자기 무너질 수 있다는 이 사건은, 그 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커다란 트라우마를 주었단다. 아빠도 군대에서 작은 텔레비전에서 그 뉴스를 보면서 황당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떠오르는구나. <벌새>의 배경에 성수대교 근처 동네가 나와 설마 했는데…. 그리고 1994년에 큰 사건으로 아빠는 김일성의 사망이 떠오르는구나. 몇 십 년 동안 북한의 절대권력을 누리고 있던 김일성의 죽음. 군대에 있던 아빠는 비상이 걸려서 고생을 했던 기억이 나는구나.

이런 1994주인공 은희는 중학생이었단다. 떡집을 운영하는 부모님의 둘째 딸. 언니 김수희는 고등학생이고, 오빠 대훈은 중3이었어. 은희의 아버지는 권위주의자에 똘똘 뭉친 사람이라고 보면 되고, 아들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란다. 그리고 딸들에게도 서슴지 않고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었어. 그렇다고 남편으로서는 훌륭하냐? 그렇지 않단다. 떡집은 대부분 엄마가 도맡아 하고, 은희 아버지는 춤바람도 났어. 오빠 대훈도 은희를 가끔 때리고 그랬어. 참 나쁜 오빠구나. 언니 수희는 그렇지는 않지만, 언니는 언니 나름대로 연애를 하느라, 은희와 많이 친하지는 않았어. 식구는 많았지만 은희는 집에서 늘 외로움을 느꼈어.

그런 은희에게 기댈 곳에 생겼어. 새로운 한문학원 강사 김영지. 서울대에 입학했지만, 학생운동으로 지금은 휴학생차분하고 꼭 필요한 말만 하고, 무엇보다 다른 학원 선생과 달리 학생들을 사람으로 대했어. 이애 은희는 김영지에게 깊은 이라는 것을 느꼈을 거야. 은희는 힘든 일이 있을 때 영지를 찾아갔어. 그리고 영지의 품에 안기기도 했어. 얼마나 원했던 것일까. 가족에서 얻지 못한 포근함.

은희가 귀에 혹이 생겨서 큰 수술을 한다고 잠시 학원을 그만둘 때 은희는 자신의 집에 있는 책을 영지에게 선물했고, 영지는 예상밖에 병문안을 해서 은희에게 큰 힘을 주었어. 그렇게 은희와 영희의 정은 깊어져 갔어. 그들의 그런 정은 어느날 갑자기 학원을 그만 둔 영지로 인해 끊겼어. 하지만 영지로부터 온 편지와 소포로 그 인연의 끈은 다시 이어지는 듯 했지. 소포에 써 있는 주소를 찾아 영지를 만나러 가는 은희의 모습은 이 영화에서 가장 행복한 모습이었지. 하지만, 은희를 기다리는 것은 영지의 죽음이었어. 성수대교의 희생자 중에 한 명이 바로 영지였던 거야. 꼭 이렇게 영화를 슬프게 만들었어야 했나. 부제에 1994년이 들어가 있다는 것은 성수대교 이야기가 나온다는 뜻이었지만은희의 언니 수희가 극적으로 그 사건을 피했다는 이야기로 성수대교 이야기는 끝이 났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영지를 죽게 만들다니은희를 너무 불쌍하게 만들었어…. 감독 나빠.

은희는 무너진 성수대교를 보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영지를 그리워했어. 어쩌면 영지를 가슴에 묻고 새 출발을 기약했을 수도


2.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영화 <벌새>도 보았단다. 배우들이 모두 낯설었지만, 다들 연기들을 잘 하더구나. 그리고 영화 시나리오대로 그대로 그려졌어. 비록 아빠가 생각했던 영상과는 달랐지만 말이야. 이 책은 영화에서 그려지지 않은 대본도 약 40분 분량이 있다고 했어. 영화를 보니 그 내용들을 굳이 화면이 옮기지 않아도 앞뒤 내막을 잘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이 영화의 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김보라님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했고, 후기에서 자신은 가족들과 화해를 했다고 하는구나. 그래, 가족은 그런 거지.. 김보라 감독의 이름을 잘 기억했다가 그의 새로운 영화가 나오면 한번 봐야겠구나. 기대되는구나.


PS:

책의 첫 문장 : 딩동.

책의 끝 문장 : 너무너무 고맙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kpio99 2020-06-23 23: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보시는 것도 추천드립니다.

bookholic 2020-06-24 07:49   좋아요 1 | URL
네, 저도 책을 읽고 영화를 봤는데, 말씀하신 것처럼 영화도 좋았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시고요^^
 
녹색평론 통권 172호 - 2020년 5월~6월
녹색평론 편집부 지음 / 녹색평론사 / 2020년 5월
평점 :
품절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우리는 지금 코로나 시대를 살고 있단다. 코로나가 처음 발생했을 때, 최근에 생겼던 다른 바이러스들처럼 몇 달이 지나고 나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단다. 하지만 다섯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기세 등등하구나. 조금만 틈만 보이면 비집고 들어와 놀라온 속도로 전염시키고 있는데, 아직도 이 바이러스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단다. 이젠 누구나 쉽게 코로나 이후 시대는 이전의 시대와는 다르다고 이야기를 한단다. 이번 녹색평론에서도 많은 꼭지를 두어 코로나 바이러스를 이야기했단다. 녹색평론뿐만 아니라 많은 매체들이 코로나 이후 시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시대가 결코 절망스러운 모습만은 아니라고 이야기를 하는구나. 자본주의 병폐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

(39)

그런 점에서 코로나19 사태는 수많은 목숨을 빼앗아가고 막대한 불편과 불안을 안겨주었지만, 한편으로 이제와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생태계 위기에 대한 수많은 경고들에도 불구하고 절대 멈추지 않았던 개발과 소비가 현저하게 줄었고, 최소화된 삶의 규모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에 따라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바퀴가 잠시 멈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 이 바퀴가 멈추거나 느려져도 세상은 돌아가는구나. 그렇다면 유일한 대안이라고 믿었던 이 거대한 바퀴를 멈추고 다른 작은 바퀴들이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렇게 코로나19 사태를 개인적 일상뿐 아니라 문명사적 대전환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들려오는 시작한다.

============================

코로나로 인해 소비와 산업 활동이 둔화되면서, 자연이 되살아나는 모습이 지구촌 여기저기서 보이고 있단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코로나 이후 시대 사람들이 생각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구나. 지구온난화는 비록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들어섰지만, 아직 자연을 되살릴 수 있는 기회는 있다고, 어쩌면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 볼 수 있었단다. 암울한 코로나 시대를 살면서 바라는 작은 희망이 아닐까.

============================

(5)

최근의 언론보도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뉴스의 하나는, 지금 세계 곳곳에서 소비와 산업 활동이 일시적이나마 정지 내지는 둔화되자, 화석연료 사용량이 대폭 줄어든 것은 물론, 대기가 청명해지고, 소음이 잦아들고, 자연 만물이 모처럼 생기를 되찾았다는 소식이다. 이는 종래의 생활이 결코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알려주는 확연한 증표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은 하나밖에 없음이 분명하다. , 더 이상 생태계에 훼손을 끼쳐서 결과적으로 인간생존의 기초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함이 없이 인간다운 생존, 생활이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직도 우리들 대다수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붙들려 있는 신화, 즉 새로운 과학기술의 개발을 통한 끝 없는 성장(혹은 진보)의 추구하는 관념과 깨끗이 결별하는 게 진짜 급선무라고 할 수 있다.

============================

….

<천재토끼 천상문>이라는 책의 지은이 김남일님이 얼마 전부터 녹색평론에 연재를 하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고 있었는데, 이번 호에서는 코로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면서, 필립 로스의 <네메시스>라는 책을 소개해주었단다. <네메시스>라는 책도 전염병에 관한 책이라서 말이야. 필립 로스의 <네메시스>란 책은 아빠가 사두고 읽지 않은 책 중에 있어서 녹색평론을 덮고 바로 읽어보았단다. <네메시스>에 관한 이야기는 그 책의 독서편지에서 이야기해줄게..

….

그런데 이 코로나는 과연 언제 어떻게 끝날까. 퇴근길에 아직은 걸을만한 날씨라서, 집에 걸어오곤 하는데, 마스크는 정말 답답하더구나. 다들 조금만 참고 노력하면 이 마스크를 벗어 던질 시간이 올 지 알았는데, 이젠 못 올 것 같구나. 여행을 가고 싶어도 어쩌면 코로나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큰 용기를 가지고 길을 나서야 하는 것 같아. 다음 녹색평론을 읽을 때쯤이면 코로나 바이러스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을지라도 조금이라도 진전을 보였으면 좋겠구나. 세계가 보이지 않는 적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이 시대는 어쩌면 세계3차대전을 겪고 있는 것일 수도….


1.

우리나라 현대사의 비극 6.25 한국전쟁이 70주년이 되었단다. 하지만 남북 관계는 여전히 좋질 않단다. 2년 전만 해도 평화의 무드가 한반도을 뒤덮었으나, 최근에는 다시 상황이 악화되어 언제 다시 남북이 한 책상에 앉게 될지 모르겠구나. 2020년은 이것저것 다 안 되는 한 해인가 보구나. 

아빠가 어렸을 때는 6.25사변이라고 불렀는데, 요즘에는 한국전쟁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더구나. 이번 녹색평론에서는 6.25 70주년 특집으로 몇 꼭지에서 다양한 시각으로 6.25를 바라보았단다. 전쟁으로 만들어진 미국이라는 나라에게 한국전쟁은 또 하나의 일상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나라가 만들어진 이후 크고 작은 전쟁과 함께 했고, 그런 전쟁을 통해 나라는 부강해졌고, 세계 패권국가가 되었으니, 한국전쟁이 발생했을 때는 한쪽에서는 쾌재를 불렀을지도 모를 일이란다.

==============================

(52)

미국은 전쟁으로 만들어진 나라다. 독립전쟁(1776~1783)을 통해 근대 최초의 민주공화국을 설립했고, 멕시코전쟁(1846~1848)으로 국민통합을 이룩했다. 또한 식민지시대 이래 19세기 말까지 지속적으로 인디언전쟁을 벌였다. 스페인전쟁(1898)을 통해 북미대륙을 넘어 동아시아로 진출했고, 1차대전 참전(1917)으로 세계 최대의 채권국가이자 최강의 경제대국으로 우뚝 섰다(미국 역사학자 폴 케네디가미국은 태어날 때부터 제국이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런 역사를 지칭한 것이다.)

==============================

6.25를 거치고 나서 우리나라는 크게 변했단다. 변했을 수밖에 없겠지. 온 나라가 폐허가 되었으니 말이야. 그 중에 6.25를 거치면서 대표 종교로 거듭난 개신교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어. 개신교를 믿는 이들에게는 좋지 못한 글일 수도 있지만, 아빠는 그저 책에서 읽은 사실을 이야기뿐이란다. 한국전쟁 당시 개신교를 믿는 사람들은 3%도 안 된다고 했어. 하지만 한국전쟁 중에 개신교는 반공주의를 이용하고, 정치권력에 깊이 개입하면서 많은 이익을 챙기게 되었단다.

==============================

(85)

물론 한국 개신교는 가톨릭과는 달리 매우 복잡한 종단이다. 그만큼 어떤 관점을 취하는지에 따라,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 읽기를 시도하는지에 따라 다른 해석들이 도출될 수 있다. 하지만 오늘 한국의 시민사회가 개신교에 대해 확인하고자 하는 몇 가지 문제적 요소들, 가령 극우 반공주의 성향이 강하고, 교세에 비해 너무 막대한 사회적 자원을 과점하고 있으며, 정치권력에 깊이 개입되어 있는 점 등을 알고자 할 때, 한국전쟁이라는 시공간적 사건에서 한국 개신교의 형성을 살피는 것은 매우 유용하다.

==============================

그 중심의 인물이 바로 한경직이라는 인물이란다. 한경직이라는 인물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오늘날 극우 세력의 선봉을 걸으면서 온갖 민폐를 끼치고 있는 전광훈 목사가 자신을 한경직에 비유했다는 내용을 보고, 한경직이라는 사람은 안 봐도 뻔하는 생각을 했단다.

==============================

(88)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의 둘째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혁혁한 공로를 세운 일등 공신인 전광훈 목사가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을 한경직과 비유했던 것은 일견 타당성이 있다. 해방 정국의 한경직도 압도적으로 좌편향의 사회였던 남한을 극우파 사회로 바꾸었고 기어이는 극우적인 남한 단독 정부 설립에 누구보다도 큰 기여를 했지만, 그에겐 너무 과격한 목사의 이미지가 강했다.

==============================

한국전쟁 이후 개신교는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단다. 밤에 도심에 셀 수 없는 십자가가 그걸 대신 대변하고 있단다. 그런데 최근에 개신교는 위기를 맞은 듯 보인단다. 개신교를 믿는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개신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개신교의 이미지는 많이 안 좋아졌단다. 전광훈 목사 같은 이가 수구우익단체를 이끄는 일이나, 코로나 시대 다들 조심하는데, 정부지침에 따르지 않는 교회들을 중심으로 끊이지 않는 집단 감염. 그것을 집단 이기주의로 욕하는 사람들도 있단다. 여론의 시선이 무척 차갑고 매섭단다. 다들 힘들게 거리 두기를 하면서 더운 날씨에 마스크를 쓰고 있는데, 밀집지역에서 교회활동으로 인한 끊이지 않는 감염들. 다른 종교단체는 집단감염이 없으니, 더욱 그들의 행동은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키고 있단다. 개신교는 기독교도가 아닌 이들의 시선을 살펴보고, 반성을 하는 기회를 스스로 가졌으면 좋겠구나.

….

그밖에 한국전쟁을 페미니즘의 시작에서 살펴보았고, 한국전쟁을 다루는 문학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고, 북한문학에서는 어떻게 전쟁을 다루는지에 대한 특별 기사를 실었단다. 한국전쟁 70주년에 맞게 잘 준비한 글들이었어.


2.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표적인 적폐는 언론이란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수구언론들이 적폐의 온상이고 말이다. 그런데 요즘 그들의 행태를 보면 마지막 발악을 보는 것 같단다. 예전에 그들은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사람들의 마음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지금은 미디어가 변하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곧이곧대로 듣는 이는 별로 없는 것 같구나. 아빠도 그들의 기사는 스포츠 기사도 보지 않는단다.

이번 녹색평론에는 아빠가 좋아하는 분의 글이 실렸단다. 역사학자 한홍구. <조선*동아 100년 저물어가는 언론권력>이라는 속 시원한 제목으로 속 시원한 글을 써주셨단다. 최근에 신간 소식이 뜸했는데, 이렇게 녹색평론에서 글을 읽게 되어 반가웠단다. 조선, 동아 일보의 언론 같지 않은 행보는 오래되었지만, 완전히 망가진 것은 1987 6월 항쟁 이후라고 하는구나. 그때부터 권력에 빌붙어 아무를 떨더니, 권력까지 쥐어 잡고 아무도 그들을 건들 수 없게 되었단다. 그들 스스로 밤의 대통령이라고 불렀다고 하는구나.

==============================

(150)

많이 망가지는 했어도 1987 6월항쟁까지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언론은 언론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화 이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그 자체가 권력으로 부상하면서 괴물이 되어갔다. 민주화는 그동안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군부와 안기부 등 정보기관이 뒤로 물러나고, 그 빈자리를 민간이 메우는 과정이기도 했다. 민주화로 인해 가장 득을 본 것은 최루탄을 마시며 민주화를 외쳤던 민주시민들도, 체포와 고문과 투옥을 무릅쓰고 투쟁한 민주화운동가들도 아니었다. 군부와 정보기관 대신 이 나라의 알짜 권력을 장악한 것은 재벌과 검찰 등 관료집단과 보수 언론이었다. 특히 1991 5월의 분신 정국당시 수구세력의 유서 대필 사건을 조작하여 위기를 돌파할 때 검찰과 조선일보는 새로 얻은 힘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청와대는 여전히 힘을 갖고 있지만, 대통령은 5년짜리 계약직 공무원에 불과했다. ‘민주화 5년 단임과 문민화에 머물러 있는 한, 진짜 권력은 그것을 죽을 때까지 손에 쥐고 있다가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재벌 총수와 언론사 사주들의 것이었다. 5년 임기의 새 대통령을 뽑기 직전인 1992 11, 방일영의 고희연에서 사원 대표인 스포츠조선 신동호가 낮의 대통령은 그동안 여러분이 계셨지만, 밤의 대통령은 오로지 회장님 한 분이라고 선포했다.

==============================

그랬던 조선, 동아는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단다. 그들을 오랫동안 미워했던 이들에게 얼마나 반가운 소식인지 모르겠구나. 힘을 잃은 언론의 권력.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자신들의 영향력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그들의 미래는 어둡다는 것에 행복하구나.

==============================

(152)

대한민국이 또다른 100년을 맞이하는 이 순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미래는 결코 밝지 않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사라져야 할 존재로 지탄을 받기 시작한 것도 족히 20년은 넘었다. 어설픈 세무조사나 우리 안에서만 진행된 안티조선운동은 어쩌면 조선일보를 온갖 항생제에 내성을 가진 슈퍼박테리아로 만들어버렸다. 그런데 지금은 언론 지형이 그 어느 때보다도 급격히 변하고 있다. 조선일보의 영향력은 예전 같지 않다. 한때 노년층을 붙잡아두던 <TV조선>도 트로트 열풍을 선도하며 돈이나 벌 뿐, 정치적 영향력 면에서 유튜브에 자리를 내준 지 오래다. 가짜뉴스 생산의 원조였던 조선일보는 훨씬 독하고 막강한 수구 유튜브를 따라갈 수 없게 되었다.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가 지배하는 탈진실(post-truth) 시대의 도래는 비단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등 수구 언론뿐 아니라, 그와 대척점에 선 진보적인 레거시 미디어’(전통 매체)들에도 엄청난 과제를 던지고 있다.

==============================

6월인데 벌써 무척 덥구나. 코로나 바이러스가 지구온난화도 없애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한 같구나. 그렇다고 지구온난화로 빨리 더워진 날씨가 코로나 바이러스를 없애지도 못하고..

너희들도 얼마 전부터 학교를 가기 시작했는데, 마스크를 쓰고 따가운 햇볕 아래 걸어가는 모습을 보니 안쓰럽구나. 학교에서도 마스크를 제대로 벗지 못하고어느날 갑자기, 우리 주변에 아주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인데 몰랐던 무언가가 코로나 바이러스의 천적임이 밝혀져서, 코로나 바이러스를 쉽게 없애는 기적이 생기길…. 그럼, 오늘은 이만 마칠게.


PS:

책의 첫 문장 : 인류가 소위 문명생활을 시작한 이래, 역병은 인간사회를 끊임없이 괴롭혀왔다.

책의 끝 문장 : 이후로 면에 산다는 것’, ‘오지 마을에 산다는 것등이 계속해서 나왔으면 좋겠다.


인류가 소위 문명생활을 시작한 이래, 역병은 인간사회를 끊임없이 괴롭혀왔다. 세계의 역사는 어떤 점에서 전염병의 역사라고 해도 좋을지 모른다. 세계의 역사는 어떤 점에서 전염병의 역사라고 해도 좋을지 모른다. 때로는 국지적으로, 때로는 대륙 전체에 걸친 역병의 창궐과 그 후유증으로 세계사의 큰 흐름이 바뀌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삶을 뿌리째 흔들어 놓고 세계사의 물줄기를 변화시킨 결정적인 요인은 생산력의 발전이나 계급투쟁, 혹은 전쟁이 아니라, 감염력이 강하고 치사율이 높은 전염병이었는지도 모른다. - P2

자연은 무심해 보인다. 도도해 보이기도 한다. 세상 꼭대기에 서서 무소불위의 존재처럼 날뛰던 인간들이 바이러스의 습격으로 세계 곳곳에서 비명을 지르는 공안, 여느 때처럼 봄은 오고 꽃이 피고 새순이 올라온다. 길가의 고양이는 봄볕을 즐기며 한가하게 졸고 있다. 인간만 자기가 만들어 놓은 아수라장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누구를 탓하랴. 지금이라도 자연을 존중하고 따르면, 자연은 우리를 다시 품을 것이다. 무시하고 거부하면, 더 심하게 내칠 것이다. 그렇게 인간의 자리가 비게 되면, 인간에게 쫓겨났던 동물과 식물이 다시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얼마 전, 코로나19로 인적이 뜸해진 도심을 찾았던 퓨마와 여우와 야생 염소는 바로 그 전조가 아닐까. - P30

민중의 입장에서 정당한 전쟁은 없다. 오로지 피할 수 없는 전쟁에 대응하는 민중의 숭고한 희생이 있을 뿐이다. 오직 지배체제만이 정당한 전쟁을 이데올로기적으로 구성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북한의 내밀한 관점을 이해하더라도 20세기 냉전체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는 한국전쟁에 대한 다각적 이해는 여전히 유효하다. 미국, 중국, 구소련의 관계 속에서 전쟁 발발의 원인을 역사적으로 규명하고, 동아시아적 차원과 세계적 차원에서 한반도 평화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문제는 현재적 과제이다. - P134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naturall1004 2020-06-20 2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혹시 블로그는 안하시나요? 글이 너무 좋아 계속 읽고 싶네요!

bookholic 2020-06-21 20:5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칭찬 고맙습니다~~~ 저는 알라딘 서재에서 노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즐거운 한 주 되시기 바랍니다.
 
풀잎관 3 - 2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2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풀잎관 3권을 이야기해줄게. 반전이라면 반전이라고 할까. 그동안 로마의 영웅이라고 일컬어지던 이의 무서운 변신. 그 옛날 우연히 들은 예언에 대한 집착. 바로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이야기란다. 그가 이런 비참한 말로로 인해 역사 속 위인이 되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럼, 그 이야기를 해줄게.


1.

2권에서 가장 비극적인 이야기는 로마와 이탈리아가 결국 전쟁을 벌인 것이었잖아. 이 전쟁은 시간이 흐를수록 로마 쪽으로 기울었고, 결국 이탈리아의 패배로 끝이 났단다. 이탈리아를 이끌었던 실로와 무틸루스도 죽었단다.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났지만, 상처뿐인 승리였단다. 로마는 이 전쟁의 승리로 얻은 것은 없었고, 무척 많은 것을 잃었단다. 술피키우스 같은 이는 이 전쟁은 크게 잘못되었다면서 뉘우치기도 했단다.

=======================

(95-96)

이제 원로원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나 자신도 예외가 아니다. 로마 원로원은 사라져야 할 때다. 하고 술피키우스는 결심했다. 오래된 세도가문이 더 이상 존속해선 안 된다. 부와 권력이 집중된 소수가 이탈리아인에게 가했던 실로 무시무시한 부당행위가 또다시 자행되어선 안 된다. 우리는 잘못된 사람들이다, 하고 술피키우스는 생각했다. 우리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원로원은 사라져야 한다. 로마를 인민의 손에 넘겨야 한다. 우리는 인민의 손에 주권이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 인민은 우리의 저당물에 불과하지 않은가. 최하층민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인민. 로마에서 최대 다수를 차지하면서도 제일 적은 권력을 누리는 2, 3, 4계급. 진정 부유하고 힘있는 1계급 기사들은 모든 면에서 원로원과 차이가 없다. 그러니 1계급 기사들 역시 사라져야 한다.

=======================

하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지. 로마와 이탈리아의 내전을 내심 기쁜 눈으로 바라보는 이가 있었으니, 아시아 속주의 폰토스 왕 미트리다테스 왕이었단다. 그런 미트리다테스 왕의 불 같은 성격에 불을 붙인 이가 있었어. 아시아 속주에 집정관 대행으로 아퀼리우스라는 사람이 왔는데, 황금만 탈취하고 온갖 못된 짓을 했거든. 결국 폭발한 미트리타테스 왕은 아시아 속주에 상주하고 있는 로마군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단다. 그리고 아시아에 거주하고 있던 로마인과 이탈리아인들을 참혹하게 죽였는데, 그 수가 십 수만 명이라고 했어.

국내에서는 로마와 이탈리아가 서로 싸우고 있었는데, 아시아에서는 그들을 하나로 보고 모두 죽여버렸으니로마가 얼마나 옳지 못한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있겠지? 미트리다테스 왕은 이 승리로 여세를 몰아 로마로 진출하려고 에게 해로 진출했지만, 해전에서는 약했는지 패배하여 일단 후퇴를 하였단다. 그리고 아시아 속주의 여러 나라들을 침략하여 대부분을 차지했어.


2.

이런 아시아 속주의 소식은 로마에도 전달되었어. 예전에도 아시아 속주의 골치거리를 술라가 해결한 적 있잖아. 이번에도 술라가 대표로 뽑혔어. 하지만 술라는 돈이 없다며 출정을 망설였단다. 이탈리아와 전쟁을 해서 재정이 바닥이 난 거야. 이런 재정 상태에서 섣불리 원정을 가면 질 수 있다고 생각을 한 것이지.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의견이었어. 하지만, 마리우스는 이를 강하게 비판했단다. 그러면서 술라가 가지 못한다면 자신이 아시아 속주를 가겠다고 했어. 그러나 원로원은 젊은 술라를 선택했어. 술라는 원로원의 선택이므로 전쟁을 준비하고 동방으로 길을 나섰단다.

그런데 마리우스와 한편이었던 호민관 술피키우스는 평민회의 합법적인 방법으로 술라의 총사령관 직위를 박탈시켰단다. 그리고 마리우스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어. , 어려운 시국에 내부적으로 분열되는 모습을 보이는 로마. 술라는 동방으로 향하던 중 총사령관직에서 잘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술라는 이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어. 그리고 그의 부대원들은 모두 그를 지지하고 있었지.

술라는 어려운 결정을 했단다. 로마의 군대를 데리고 로마로 향하는 것이었어. 로마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고, 잘못되면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을 따르던 부하들의 목숨도 남아나지 않을 결정이었어. 술라는 부대원들에게 명령했어. 로마로 진군하되, 로마인들을 약탈하지 말라. 무력시위이자 쿠데타였어. 로마에는 제대로 된 수비대는 없었어. 마리우스가 급하게 노예들을 중심으로 군대를 만들고 술라의 부대에 맞섰지만, 오합지졸 군대로 술라의 정예부대를 막을 수는 없었어. 마리우스는 도망을 갈 수 밖에 없었단다.

로마에 입성한 술라는 원로원을 장안하고, 법을 바꿔서 평민회와 호민관의 권한을 대폭 축소해 버렸어. 그리고 원로원의 권한을 높였고, 부족한 원로원 의원을 충원했고, 백인조회라는 것을 창설해서 자신의 부하들 중심으로 조직했단다. 그리고 다음 집정관으로 자신의 측근인 나이우스 옥타비우스를 선출하게 만들었단다. 술라가 그렇게 원로원을 장악했지만, 그를 모두가 지지한 것은 아니었나 봐. 차석 집정관으로는 술라의 반대진영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가 되었거든. 술라는 자신을 총사령관의 자리에서 쫓아낸 술피키우스와 마리우스를 대반역죄로 판결했어. 술피키우스는 잡혀와 처형당했고, 마리우스는 어디론가 도망을 가서 잡지 못했단다. 이렇게 로마를 정리하고 나서, 그는 다시 동방 원정을 떠났단다. 킨나라는 작은 불씨를 남겨 두고 말이야.


3.

마리우스는 아들과 측근 몇몇만 데리고 로마를 떠나 도망신세가 되었어. 그를 쫓는 군인들에게 잡혀 처형에 위험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 지역의 백성들의 도움으로 위를 탈출하기도 했단다. 로마 백성들에게 아직 그는 영웅이었어. 그러나 속주들은 그를 받아들이는 것을 무척 부담스러워했어. 마리우스는 이해했지. 아프리카 지역의 누미디아의 왕이 받아주었지만, 마리우스의 아들이 왕의 첩과 눈이 맞는 바람에 다시 쫓겨났단다. 그러다가 아프리카의 조그만 섬에서 그들을 받아주었단다. 받아준 정도가 아니라 대환영이었어. 그 섬에는 마리우스에 옛날에 해방시켜준 옛 노예 군사들이 정착해서 살고 있었거든. 그들에게 마리우스는 영웅이고, 마리우스를 위해서라면 죽음을 내놓고 싸울 수 있는 이들이었어.

한편, 로마에서는 차석 집정관 킨나와 수석 집정관 옥타비우스 사이에 알력 다툼이 있었어. 옥타비우스는 킨나의 지지세력을 참살시키는 일이 벌어졌어. 그리고 신성모독이라는 누명을 씌워 킨니와 여섯명의 호민관을 추방시켰단다. 킨나는 로마에서 추방당해 이탈리아 지역에 머물면서 반격을 준비했단다. 군대를 준비해서 로마로 진군할 예정이었어. 술라의 부대가 로마를 진군한 사례가 있으니, 두 번째는 어렵지 않았지.

그리고 세 번째는 더 쉬웠을 거야. 무슨 말이냐고? 마리우스도 노예부대를 이끌고 로마로 향하고 있었거든. 킨나와 마리우스는 연락이 되어 같이 로마를 진군하기로 했어. 하지만, 킨나의 부하 중에는 마리우스와 동행을 경고한 이가 있었어. 마리우스는 더 이상 예전의 그 마리우스가 아니라고 했어. 자신의 탐욕과 권력 욕심에 사로잡힌 늙은이라고 말이야. 그리고 그 옛날 들은 예언, 즉 집정관을 일곱 번 한다는 것에 집착을 하고 있다고 말이야.


….

4.

마리우스는 노예부대를 이끌고 로마로 입성했어. 그들의 부대를 대항할 이들이 없었어. 그렇게 로마를 차지한 마리우스는 차석 집정관이 되었단다. 그에게 수석이든 차석이든 상관 없었어. 그저 일곱 번째 집정관이 되면 되는 거니까 말이야. 당시 수석 집정관은 킨나가 되었어. 하지만 차석 집정관이 된 마리우스는 거의 황제처럼 행동했단다. 그것도 폭군처럼 말이야.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변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어. 그의 로마 부대는 로마인들을 야만족 다루듯이 약탈을 했어. 그리고 반대파는 가차없이 죽여버렸단다. 그 이전 수석집정관이었던 옥타비우스도 마리우스에게 죽음을 당했어. 그의 내면 깊숙이 이런 폭군이 숨어 있었는데, 그걸 참고 있었던 것일까. 돌변한 그의 모습에 그 어떤 조언도 할 수 없었어. 그런데 그는 화를 내다가 다시 한번 쓰러졌단다. 다시 찾아온 뇌졸증. 하지만 이번에는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어. 일곱 번째 집정관은 그렇게 6일만에 끝났단다. 비록 6일이었지만, 6일은 평생 오랫동안 쌓아왔던 명예와 명성을 쓰러뜨리는데 충분한 6일이었단다.

이렇게 풀잎관 3권이 끝이 났단다. <마스터즈 오브 로마> 2부도 끝이 났고 말이야. 풀잎관 3권을 읽은 약 열흘간 아빠는 고대 로마를 여행한 기분이었단다. 마리우스와 술라의 숨소리를 듣는 느낌이었어. 7 부 중에 2부가 끝이 났구나. 또 그들의 이야기가 그리워지면 또 읽고 이야기해줄게.


PS:

책의 첫 문장 : 술라는 로마를 통치하면서 한 가지 중요한 부분을 아예 간과하고 있었다.

책의 끝 문장 : “저도 알아요, 루키우스 데쿠미우스, 저도 알아요!”


"트리부스 수는 지금의 서른다섯 개가 적당하고, 더 늘어나서는 안 됩니다!" 술피키우스가 외쳤다. "또 트리부스회와 평민회에서 시민 수가 고작 3,4천 명인 몇몇 크리부스가, 시민 수가 10만 명이 넘는 에스퀼리누스 트리부스나 수부라 트리부스와 투표권이 동등한 것도 옳지 않습니다! 이처럼 로마의 통치 제도는 모든 면에서 저 전지전능한 원로원과 1계급을 보호하려는 목적에 따라 설계되었습니다! 원로원 의원이나 기사가 에스퀼리누스 트리부스나 수부라 트리부스에 속합니까? 당연히 아닙니다! 그들은 라비우스, 코르넬리우스, 로밀리우스 트리부스를 프리페르눔, 부키, 비비니움 출신 사람들이 공유하게 합시다. 그들의 파비우스, 코르넬리우스, 로밀리우스 트리우스를 에스퀼리누스 언덕과 수부라 지구 출신 해방노예들이 공유하게 합시다!" - P10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