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여행가방 - 박완서 기행산문집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밀린 숙제를 해놓는 기분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어나간다는 것이 내겐 좀처럼 맞지 않는구나 하는 일을 이런 형태로 다시금 깨닫게 될 줄야.

 

왠지 왕성한 여행가는 아닐 것 같은 박완서님의 기행 산문집이라기에 사봤다.

 왕성한 여행가가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어디서 왔는지 따져 물을 필요도 없이 그냥 느낌이니 뭐라 할 말은 없다.

 그런 분은 여행에서 무엇을 보고, 보려하고, 느끼고 어떤 이야기를 적어 내려갔을까하는 궁금증에 샀던 것 같다.

 

뭐 일일이 책을 살 때 이유를 달지 않는 것이 내 습성이니 굳이 이유를 적게 되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세상에 있을 때 그분의 작품들을 많이 읽지 못하다 세상을 떠나신 후에야 이렇게 읽게되는 것에 대한 대상도 없는 송구스러움 탓은 아닐까 싶어진다.

 왜 떠나서 없어진 뒤에 찾게 되는가?하는 허허로운 질문과 함께 첫 장을 넘겼던 것 같다.

 

과정을 무시한 목적지 위주의 여행.

 책 앞머리에 그녀는 자신이 그동안 해왔던 여행을 이렇게 평하고 있다.

 되도록 목적지에의 가장 빠른 교통편을 강구하고, 주변 풍경을 가능한 빨리 스쳐 도달하는 것.

 그러고는 여행이 갖는 휴식과 전환의 의미를 잃고 단지 일정에 끌려다니다 지쳐서 돌아오게 되는.

 소소하지만 살아있는 여행을 하지 못했음을 두고 바보 여행이었다고 그녀는 이야기하고 있다.

 

뭔가 이런저런 의미의 아쉬움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던 이야기로 기억 될 것 같다.

 다른 이야기는 미뤄두고 그녀가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한 티베트 이야기나 적어보련다.

 

알고 있겠지만, 티베트는 독립국가가 아니다.

 과격한 의미로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듯, 티베트는 중국의 지배하에 있다.

 이 사실은 그녀가 티베트를 여행하는 동안 그 나라에 보내는 시선과 그 나라에 발견하게 되는 사실들을 받아들이는 중요한 잣대가 되고 있다.

  빈번히 등장하는 티베트 안의 한족에 대한 삐딱하기까지 한 시선이 일제 시대 지배층인 일본인을 대하듯 하던 것처럼 말이다.

 

뭔가 흐름을 쉽게 타버리는 나는 그만, 그 감정의 흐름에마저 훌렁 올라서는 괜시리 중국이 미워지기도 했다.

 안타까운 것은 구걸하는 티베트인들의 이야기다.

 조금 번화한 시내라는 곳엔 어디든 구걸하는 티벳인들이 있다.

 그 구걸을 견디다 못해 한 사람에게 돈을 건넸다가는 몰려드는 구걸부대에 둘러싸여 오가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티벳에서 연민은 약점이 된다. 그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약점이 된다는 것은 참 서글펐다.

 

구걸티벳인들에 대한 이미지는 마지막 즈음에 전환을 맞이하지만 그렇다고 서글픔마저 전환되지는 않았다.

 

야크똥 이야기나 조금하다 이야기를 마쳐야겠다.

 티베트는 고산지대다 보니 나무가 적다못해 없단다.

 수목한계선을 넘어선 시점에서 나무는 커녕 풀도 구경하기 어려워 적나라한 바위와 흙이 티베트의 전경이라고 하면 될 것 같다.

 그러다보니 난방에 사용할 연료가 터무니 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야크똥이다.

 

야크는 황소가 조금 더 크고 북실한 것 같은 생김이라는데 화려하게 치장한 것도 황소와는 다른 점일 것 같았다.

 그 야크의 배설물 야크똥은 집집마다 담장이란 담장엔 찰싹붙어서 잘 말려져서 저장했다 연료로 쓰인단다.

 온 담장마다 틈도 없이 붙어있을 야크똥을 상상하는 재미가 제법 찰졌다.

 

아아, 왠지 읽었다고 이야기하기가 부끄러울만큼 머릿속에서 정리되질 않는다.

 무슨 르포를 읽은 것 마냥 티베트의 현재 현실도 아닌 몇 년 전의 이야기만 전해 들어 애잔함과 씁쓸함 서글픔만 남은 것처럼.

 먹먹하고 막막하고 쓸쓸하다.

 

달라이라마의 행복론에서 인도로 망명한 14대 달라이 라마는 그런 서글픔을 전혀 품고 있지 않았음을 떠올려본다.

 중국은 티베트의 독립운동에 군대까지 동원해 유혈진압도 서슴지 않고, 티베트 인들은 가진자에 대한 당당한 요구든 단지 구걸이든 관광객들을 쫓아다니고, 한족들의 이주로 이젠 티베트인보다 한족이 더 많아지고, 그럼에도 그들의 깊은 신앙은 변함없고.

 달라이라마는 무엇에서 희망을 보고 무엇에 희망을 걸고 있던 것일까?

 나이든 여류작가의 눈을 통해 본 티베트는 희망적 풍경에도 너무나 황폐하고 절망적이었다.

 그들은 십수년 후에도 한족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들을 지켜나갈 수 있을까, 그들의 문화를 기억하고 독립된 나라로 존재했던 시대를 그리워할까?

 

옴마니반메훔을 풀면 '연꽃 속의 보석이여'라는 말이 된다고 한다.

 암울한 시대에 읇는 옴마니반메훔은 어떤 바램을 담고 있는 것일까?

 무엇이 연꽃이고 무엇이 보석인가.

 진흙속에서도 고결한 꽃을 피우는 연꽃이 지금 그들이 처해있는 진흙탕같은 세상에서 기다리는 희망이라도 된다는 것일까?

 그 연꽃 속의 보석이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조예도 없는 염불에 괜히 골몰한 시간이기도 했다.

 

한국인이 한국말로 쓴 여행기가 나를 이토록 당황스럽게 만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 이유조차 떠올릴 수 없음을 부끄러워하며 그만 마쳐야겠다.

 

그냥 "옴마니반메훔"

 

 

가서 또 한 번 놀란 것은 그들이 그동안에 더 잘살게 돼서가 아니었다. 그들의 종이와 일회용품의 낭비가 이젠 조금도 놀랍지 않은 나자신에게 놀라고 만 것이다. 25쪽

 

아무의 눈치도 볼 거 없다 해도 자연의 눈치만은 봐야 하는 것은 인간의 최소한의 법도다. 흐르는 큰 강물에는 양심의 가책 없이 오줌을 깔길 순 있지만, 하루 한 통이나 고일까 말까 한 옹달샘물에 오줌을 누는 것은 짐승만도 못한 짓이다. 25쪽

 

이방인이 티베트에서 장려한 사원과 수많은 불상을 보는 일은 눈에는 최고의 사치요 충격이었지만 그 이상은 되지 못했다. 마음의 평화나 기쁨은 못 느꼈다. 호화와 사치를 극한 불상과 이 땅의 극빈층하고 저절로 대조가 되니까 불상에서 느끼고 싶은 자비를 느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205~20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