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 알랭 드 보통의 유쾌한 철학 에세이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명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한마디로 정리해보면 사물, 현상, 그리고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긴 책이라고 해야겠다.

 

철학, 혹은 철학자라고 하면 어딘가 무척이나 난해하고 복잡하며 아주 높은 경지에 있어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막연한 아득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사실 철학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 고뇌들에 대한 사색과 사유의 과정과 결과이며, 철학자들은 그 누구보다 인간적인 존재였다고 하면 이상한 표현이 될까?

 

언젠가 읽었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느꼈던 아득한 절망, 그 절망에 무척이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이라는 제목은 나를 끌어당기기에 충분하고 남을 힘을 지니고 있었다.

 

현대의 철학자로 내가 가장 즐겨읽고, 좋아하며, 어떤 의미로 존경하게 된 이가 바로 알랭 드 보통이다.
 그의 철학에 대한 이해의 수준은 내가 즐겨 읽을 수 있을만큼 쉽고 평이하게 철학과 문학을 논하는 글을 써내는 능력이 증명하듯 대단히 높다.
 
학문과 출판의 올바른 현 위치를 안다고하기엔 나의 수준이 아직 너무나 편협하고, 부족함을 감수하고서도 이야기하자면 인문이 하나의 화두로 떠오르며 요즘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분야가 철학이 아닌가한다.
 
여기저기서 과거 철학의 역사에서 다루었던 화두들과, 현재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한계, 분쟁, 몰이해를 아우르는 갈등들, 그리고 미래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닥쳐올 난관을 예측하고 그것에 대비하기 위한 분투가 시작된 것을 본다.
 우리는 예측 가능한 문제에 대해서는 무척 유연하고 무던히 반응하고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터무니없게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급작스런 상황에 대한 반응은 너무나 한심스럽다. 그 문제가 지극히 단순하고 간단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농담 중에 이런 농담이 있지 않던가?

'집에 불이 났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어서 119에 연락하라고 말한다. 그러자 아들이 묻는다. 119가 몇번이지요?'
 지금 훗하고 콧방귀 뀐 당신, 당신이 정말 자다깨서 화재를 인식했을 때도 그렇게 코웃음 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가?

 

내가 지금의 깜냥으로 이해할 수 있는 철학의 모습은 '재해대처요령'의 숙지와 닮아있다.
 우리가 보고 듣는 모든 발생가능한 사건들이 언제라도 나를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극복하든, 그러한 사실에 절망하든 그것은 우리 각자에게 달린 선택의 문제다.

 

아무래도 중반부 몽테뉴와 쇼펜하우어에서 "이게 뭔 소리지?"하는 의문의 종이 지나치게 쟁쟁거리며 머릿속을 울렸던가 보다.
 내가 언제부터 철학을 했다고 철학을 논하고 있으니. 에헴.

 

지금까지의 말을 결론 짓자면 철학은 단순하고 막연한 사고와 사유의 재료도, 산물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삶과 아주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으며, 무척이나 실용적인 학문이라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책 이야기를 해보자.
 추측컨데 이 책의 원제가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일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베르테르가 느꼈을 절망과 슬픔을 위로 해 줄 수 있는 내용들을 묶어내고 있기에 이러한 제목을 붙이지 않았나 싶다.

 

본문은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장에 어울리는 철학자들이 남긴 사유물과 철학자들의 삶을 뼈대로해서 알랭 드 보통의 해석이라는 살을 붙여놓은 형식이다.
 각 장의 주제는 1장 인기 없는 사람을 위하여 철학자 소크라테스, 2장 돈이 없는 사람을 위하여 철학자 에피쿠로스, 3장 좌절한 사람을 위하여 철학자 세네카,
 4장 부적절한 존재를 위하여 철학자 몽테뉴, 5장 상심한 사람을 위하여 철학자 쇼펜하우어, 6장 곤경에 처한 사람을 위하여 철학자 니체다.
 
이쯤 되면 눈치 빠른 사람들은 왜 베르테르가 기쁨의 위로를 받았을지 추측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소크라테스와 세네카는 사형 당했다. 에피쿠로스는 오해 받았고,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외면당했으며 몽테뉴는 별종이었다.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예측가능한 절망 중에 가장 커다란 것은 죽음 일 것이다.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신념과 사상이 꺽이지 않으며 의연하게 죽음과 마주하는 모습으로 되려 주위 사람의 슬픔을 무색하게하는 당당함은 어디서 왔을까.
 모두가 감추고 싶어하는 인간 존재의 부적절함을 되려 밝은 곳으로 끄집어내 자신의 모든 것을 인정하려 했던 별종은 어떤 시선을 감당해야 했을까
 온갖 난잡함으로 오해 받았던 쾌락에 솔직했을 뿐인 사람과 어쩌면 단지 외로웠던 것일 뿐인 사람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정상에 올랐던 것일까?

 

사실 이 책을 읽으며 느꼈던 것은 지적 갈증이었다.
 위대한 철학자들이 고심하고 고뇌했으며 극복하고자했던 갈등들은 내게 크고 작은 파문을 일으켰지만 무지라는 벽에 막혀 잠재워졌을 뿐이다.
 문장을 이해할 수 있는 배경의 부재.
 인정 할 수 밖에 없는 뼈아픈 현실의 이름이었다.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이해하자고 소박한 목적을 두고 읽기 시작했지만 그 이상을 이해하고자하는 욕망은 전혀 사그러들지 않았다.
 이 후 내가 소크라테스나 세네카, 에피쿠로스, 몽테뉴, 쇼펜하우어, 니체를 읽게 된다면 그것은 지적 욕망의 발현, 욕심을 이루고자하는 목적의 다름이 아닐 것이다.
 
모르는 것은 낯설다.
 하지만 아는 것이 늘어 갈수록 모르는 것이 많아진다고 느껴진다.
 그럼에도 그 느낌이 결코 싫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기쁨'이라고 이름 지으련다.

 

이 책은 메모할 것이 많았던 책이다.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의 단서를 적거나, 구절을 적어두거나.
 하지만 그 어떤 메모도 이 책을 설명하는 말로 쓰기엔 부족해 보인다.

 

고대의 철학자가 흔히 과학자를 겸할 수 있었던 것이 사물에 대한 깊은 사유를 통한 나름의 원리에 대한 가설을 세우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 아닐까? 라거나 골치 아플 것 없는 삶을 사는 짐승을 위대한 철학자 몽테뉴가 한편으로는 부러워했다거나, 부유했지만 지독하게 염세적이었던 쇼펜하우어의 생애나,  어떤 철학자의 사상에 매료되었다가 어느 순간 경멸하게 되는 과정이 결코 부자연스러운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나,  행복과 불행이 둘이 함께 성장하거나 둘이 함께 성장을 멈추고 시시한 존재로 남게되는 자매, 혹은 쌍둥이와 같다거나 하는 메모들이 무슨 소용일까.

 

이해가 가면서도 난해하고, 난해해하면서도 팽개쳐버리지는 못하는 묘한 매력을 지닌 책이다.
 그런 점에서 무척이나 철학적인 책이 아닐까?

 

고매한 철학자들의 삶을 통해 그들의 사상과 철학의 흐름과 목적이 결국은 우리와 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복'해지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느끼는 철학에대한 막연한 두려움이나 거부감을 희석해보고자 했던 의도는 아니었을까라며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우리의 삶은 매우 바쁘고 힘겹고 고된 일상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눈을 들어 정상을 바라보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지금보다 나빠지지 않을 수는 있다.
 하지만 지금보다 더 좋아질 수도 없다.
 
우리는 마음으로 준비하고 대비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그 문제가 무척 갑작스럽고 돌발적인 상황에 발생하더라도 대체로 차분하고 의연히 대처하고 해결해 나가곤 한다.
 하지만 우리가 무방비라고 이름 짓곤하는 상태에서는 너무나 무력한 것이 사실이다.
 
철학은 연습이지 싶다. 다른 이름으로는 훈련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불행을 원망하며 괴로워하기보다 그 불행을 넘어 행복을 찾아갈 수 있는 잠재력을 기르는데 '철학'을 이용해보는 것은 어떨른지.

 


 철학의 임무는 우리의 바람이 현실세계의 단단한 벽에 부딪힐 때 가능한 한 부드럽게 안착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130쪽

 

비가 내리면 당혹스러워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소나기와 친숙해지면 비가 내려도 분노의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132쪽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현실을 자유로이 만들어갈 수 있는 상황과 변화 불가능한 현실을 평온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상황을 올바르게 구분하는 것이 바로 지혜. 170쪽

 

이성이 인간에게 자리 잡은 것은 우리를 고문하가 위해서라고 감히 결론 내려도 괜찮을까? 만약 우리가 지식을 얻게 된 결과, 그것을 얻지 않았다면 누릴 수 있었을지 모르는 평정과 안일을 잃게 된다면, 그리고 그 지식이란 것이 우리의 처지를 피론의 돼지보다 더 열악하게 만든다면 지식이란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192쪽

 

자신의 마을을 떠나오자마자 그들은 마치 물을 떠난 고기같이 군다. 어디를 가나 자신들의 방식을 고집하고 낯선 것들을 저주한다. 그러다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나면 그들은 그 만남을 축하한다. 까다롭고 과도한 신중함으로, 그들은 자신을 망토 속에 푹 파묻고는 미지의 나라와 접촉하지 못하게끔 단속하며 여행을 하는 셈이었다. 212쪽

 

몽테뉴는 흥미로운 지혜란 어느 인생에서나 발견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의 이야기들이 제아무리 소박하다 하더라도 옛날의 그 많은 책에서보다 우리 자신에게서 더 위대한 통찰력을 도출할 수 있다. 264쪽

 

모든 삶은 다 힘겹다. 그리고 그들 중 몇 명을 완성된 삶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고통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달려있다. 모든 고통은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희미한 신호다. 353쪽

 

우리 대부분은 곤경이라 부를 수 있는 이들 어린 싹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흔히들 고민이나 시기하는 마음에는 우리가 배워야 할 합당한 것들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감정에 봉착하면 그것들을 감정의 잡초로 여기고 제거해 버린다. 359쪽

 

그는 행복하기 위해서 열심히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그 목표에는 닿지 못했다 해도 그는 자신이 한때 갈구했던 그 대상을 결코 저주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눈에 고귀한 인간 존재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비치는 것들을 끝까지 소중하게 여겼다. 말하자면 '더 이상 거부하지 않는' 어떤 존재가 되고자 애썼던 것이다. 3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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