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각오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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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얼마 전 그의 소설 『달에 울다』를 읽었다. 『달에 울다』는 독특한 소설의 형식, 선명하게 살아 움직이는 이미지들, 절제된 문장, 넘치지 않는 감정의 수위 등으로 나를 매료했다. 반면 『소설가의 각오』는 동어 반복, 여성비하, 감정의 과잉, 소설가의 각오라기보다는 벌어들이는 원고료 만큼만으로 살아가겠다는 생활인으로서의 각오가 스물 네 시간 발기된 페니스를 보는 것처럼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최근 누군가를 흘겨볼 만큼의 에너지도 없는 내게는 혹독한 시간이었다. 리뷰는 이런 혹독한 시간의 증거로 남겨두기 위해 적는다.


이 책은 마루야마 겐지가 1966년 등단의 형식을 거친 후 1968년부터 1991년까지 쓴 에세이들을 주제 없이 시간 순으로 묶은 것이다. 적게는 11편에서 많게는 19편까지 평균 5년을 한 단위로 했고 중간에 <소설가의 각오>를 배치했다. 나는 이 부분을 가장 먼저 읽었다. 그는 중학교 시절 진지하게 가출을 고민하고 있었고, 그 무렵 『백경』을 읽었고, 에이헙 선장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했고, 바다로 나가기 위해 해양대학으로 진학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으므로 통신사를 양성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진학은 했지만 학업을 따라갈 수 없어 학교에서 공부해야할 시간을 영화를 보는 데 할애했다. 당연히 성적이 받쳐주지 않아 선원의 꿈은 접고 기업체의 텔렉스오퍼레이터로 근무하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는 도산의 위기에 놓이게 되고 그는 새로운 직업을 찾아야했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 소설을 썼고 그 소설의 이름은 『여름의 흐름』이었으며 그때 그의 나이는 21세였다. 그는 이 소설로 <문학계>의 신인상과 그해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했는데 그때까지의 아쿠타가와 상 수상자 중 최연소였다고 한다.


 

“문학은 읽는 것이며 쓰는 것이지, 논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소설쓰기를 목표로 하는 자는, 문학론 따위와는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해야 한다. 그리고 홀로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마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독을 이길 힘이 없다면 문학을 목표로 할 자격이 없다. 세상에 대해, 혹은 모든 집단과 조직에 대해 홀로 버틸 대로 버티며 거기에서 튕겨 나오는 스파크를 글로 환원해야 한다. 가장 위태로운 입장에서서 불안정한 발밑을 끊임없이 자각하면서 아슬아슬한 선상에서 몸으로 부딪치는 그 반복이 순수문학을 하는 사람의 자세인 것이다.”  

 

너무나 지당한 말씀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현대 사회는 이렇게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영웅대접을 받는 시대가 되었다. 이후 그는 일본 북알프스 기슭의 오지마을로 들어가서 현재까지 수도승과 같은 금욕주의를 택했다고 한다.  오늘날 일본 현대문학의 ‘작가정신’이라 불리는 그가 소설가 지망생이나, 소설가, 평론가 등을 향한 신랄한 비판의 목소리는 오늘의 우리나라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오죽했으면 “한국문학이 두개의 M(Money, Massmedia)신에 의해 지배되는 경향이 있다”는 말까지 나오겠는가.

그런데 뭔가 미진하다. 나는 그의 책 『달에 울다』를 읽고 상당한 기대를 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소설가의 각오』를 이 잡듯이 뒤져서 내가 찾아낸 작품에 대한 그의 의견은 몇줄 되지 않는다. 

 

 “그래도 세상은 점점 더 영상으로 기울어가고, 언어를 멀리하고 있습니다. 나는 문장을 사용하여 영상보다 더 영상적인 표현을 할 수 없을까 하고 이리저리 따져보고 있습니다. 문장을 사용한 영상적 이미지로 다시 말해 논리나 이치가 아니라 감동을 통하여 철학 혹은 사상을 읽는 이의 마음에 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가 나의 화두인 셈이지요.”   

 

“농밀한 문장에 깊이와 매끈함과 광택이 있으며, 읽어나감과 동시에 문장이 영상으로 펼쳐지고, 그것이 혼을 향하여 곧장 돌진하는 작품. 그런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짧지도 길지도 않은 기간 동안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는 정도였다.  어휘만 다를 뿐 언어로 그림을 그리겠다는 내용이다. 그가 학창시절 공부대신 보았던 영화의 영향이 그대로 드러나는 말이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그의 '철학 혹은 사상'이지 그것을 영상적 이미지로 드러내겠다는 방법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달에 울다』라는 소설을 작가의 의도대로 읽었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다소 실망스러웠다. 나의 이런 실망은 그가 『소설가의 각오』곳곳에 반복해놓은 문장들 때문에 바닥을 쳤다. 잘못 표기된 이름에 대한 이야기, 필기구에 대한 이야기를 비롯해 심지어 등단과 아쿠타가와 상 수상에 대한 똑같은 이야기는 무려 네 번이나 반복되고(더 있을지도 모른다)있었다. 그의 반복 덕분에 나는 그가 볼펜에 휴지를 감아 글을 쓰고, <문학계> 신인상을 받았고, 최연소 아쿠타가와 상 수상자라는 사실을  내 머리 속에 문신하듯 박아 넣었다.  

 

 

그는 내게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잘못 표기된 이름, 필기구, 수상에 대한 사실들을 반복을 통해 뇌 속에 강제 주입하더니 이제는 혈압을 올리는 방법까지 동원하고 있다.  

 

“여자가 이러니저러니 잔소리가 많을 때에는 한 방 주먹이라도 날려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이 상책이다.” “나는 여성잡지에는 원고를 쓰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어 지금까지 두세 번 쓴 일이 있다. 에세이와 인터뷰. 하지만 그것으로 그만두었다. 쓰잘데없는 짓이기 때문이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여자를 상대로 고심하면서 무어라고 얘기한다는 것은 정말 내키지 않는 일이다.” “나는 원고 의뢰를 수락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여자나 게이한테는 아무리 진지한 이야기를 해도 흘려듣기만 할 뿐 정신은 전혀 다른 곳에 가 있기 때문이라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들은 상대편의 얼굴이나 옷을 쳐다보고 있어서 도무지 기분이 나쁘다고.”  

 

 

곳곳에 ‘사나이’ 운운하면서 혼자서 최고입네 독야청청하는 그는 마초증후군 환자일지도 모른다. 그가 만약 소설을 쓰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는 야쿠자 보스가 되어있지 않았을까? 책날개에 있는 “이 산문집은 타락한 작가들을 향해 던지는 신랄한 비판이자 작가 지망생들이 반드시 읽어야할 삼엄한 문학개론이다”라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타락한 작가들’은 이런 책 안 읽기 때문이다. 백번 양보해서 설사 읽는다고 해도 타락을 부추길 확률이 더 높다. 또 문학개론서는 더더욱 아닐 뿐만 아니라 소설가의 각오라기보다는 생활인으로서의 각오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이 책은 나처럼 건망증이 심하고 혈압 낮은 사람이 꼭 읽어야할 책이다.














 

 




























 

짧은 자서전과도 같은 <소설가의 각오>에서 그는 문학에 대한 자세를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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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2-01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초증후군 환자의 생활인으로서의 각오라는 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반딧불이 2009-02-01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를 저렇게 씹어놓고 알라딘에서 주는 '이주의 마이리뷰'에 뽑혀 적립금을 받았습니다. 마음이 참으로 불편했었는데 공감해주시니 조금 위안이 되는군요. 고맙습니다.
 
군주론 - 제3판 개역본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강정인.김경희 옮김 / 까치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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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마키아벨리가 로렌초 데 메디치 전하께 올리는 글’이라는 헌정사로 시작하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방법론적 안내서이다. 총 26장으로 구성된 『군주론』을 내용면으로 살펴보면 군주국의 종류와 그 획득 방법, 획득된 군주국을 유지하는 방법, 이탈리아를 통일할 강력한 지도자를 염원하는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모든 국가나 모든 통치체는 공화국 아니면 군주국이라는 전제하에 군주국의 종류와 군주국을 획득하는 방법론을 설명한다.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군주제는 ‘1인 통치자에 의한 지배체제’를 의미하며 군주국의 성립 성격에 따라 세습군주국과 신생군주국으로 나눈다. 세습군주군은 선조의 기존질서를 바꾸지 않으면서 불의의 사태에 대응하는 것만으로 신생군주국보다 훨씬 용이하게 보존될 수 있다. 그러나 신생군주국은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에 봉착하게 된다. 그것은 군주국을 얻게 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군주가 자신이 통치해야할 영토를 확립하는 방법에는 타인의 무력을 이용하는 경우, 자신의 무력을 이용하는 경우, 운명에 의한 경우, 역량에 의한 경우 등이 있다. 군주국의 획득 방법이 다양한 만큼 다스리고 유지하는 방법 또한 각각의 경우에 따라 달라진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각각의 경우들을 역사 속의 인물이나 사건 등의 예시를 통해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흔히 『군주론』은 교황 알렉산드르 6세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를 모델로 삼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체사레 보르자의 행적에서 신생군주의 모델이 될만한 많은 점을 발견하였지만(p58), 부친 사망 이후 그의 정적이었던 율리우스 2세가 교황으로 선출되는 것을 막지 못했던 것은 커다란 실수라고 비판하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 보르자뿐만 아니라 주변국들의 다양한 인물들을 예로 들어 그들의 행위에서 장단점을 모두 교훈으로 받아들인다. 특히 마키아벨리는 모세, 키로스, 로물로스, 테세우스 등 많은 위대한 인물들의 사례를 인용하고 있는데 그들의 출현은 필연에 의한 것이었으며 설사 그들에게 기회가 운 좋게 다가온 것이라 하더라도 그 기회를 포착, 활용하게 한 것은 그들이 가진 비범한 능력(역량)이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군주가 되고자하는 이는 운(fortuna)과 역량(virtu)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 마카아벨리의 주장인데 이렇게 해서 군주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획득한 영토와 시민을 다스리는 등 권력을 유지하는 일은 또 다른 과제로 남는다.


권력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은 군대(무력)인데 당시의 여러 세력들은 용병에 의지하고 있었다. 용병은 계약 조건이 좋으면 아군이나 적군을 가리지 않고 곧바로 새로운 계약을 맺곤 했기 때문에 마키아벨리는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이 자국민의 군대를 키워서 군사적으로 자립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군사력을 확보한 군주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상황의 필요에 따라 다양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러나 이런 군주를 위해 마키아벨리는 모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가해행위는 모두 일거에 저질러야 하며, 그래야 그 맛을 덜 느끼기 때문에 반감과 분노를 작게 일으킵니다. 반면에 은혜는 조금씩 베풀어야 하며 그래야 그 맛을 더 많이 느끼게 됩니다.” “인간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바를 따르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행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군주는 권력을 유지하기보다는 잃기가 쉽습니다.” “군주는 상황의 필요에 따라 선하지 않을 수 있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악덕 없이 권력을 보존하기가 어려운 때는 그 악덕으로 인해서 악명을 떨치는 것도 개의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 “군주는 미움을 받는 일은 타인에게 떠넘기고 인기를 얻는 일은 자신이 친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군주는 또한 자신이 재능이 있는 자를 아끼고 어떤 기예 분야에서 뛰어난 자를 우대한다는 점을 보여 재능의 예우자임을 과시해야 합니다.” “일년 중 적절한 시기에 축제나 구경거리를 주선하여 인민들이 즐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인간이란 은혜를 모르고 변덕스러우며 위선적인 데다 기만에 능하며 위험을 피하려고 하고 이익에 눈이 어둡습니다.” “인간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자보다 사랑을 베푸는 자를 해칠 때에 덜 주저합니다.” 등등.  심리학자만큼이나 인간의 심리와 본성을 꿰뚫고 있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를 위한 조언들은 단호하고 전방위적이다.  ‘통치자를 위한 실용 안내서’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진 『군주론』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기는 게 전부’라고 왜곡되면서 선정적이고 악마적인 공격의 대상으로도 이름 높다. 그러나 “마키아벨리가 정치적 사악함을 서술하였다 해서 그것을 발명하지 않았음은 킨제이가 섹스를 발명하지 않은 것만큼이나 사실이다.”


그렇다면 마키아벨리는 왜 이런 『군주론』을 썼을까? 이탈리아는 지중해 전역을 지배하던 로마 제국의 영광이 서린 곳이다. 그러나 이런 영광은 사라지고 11세기 이탈리아는 베네치아, 제노바, 밀라노, 피렌체 등의 거대한 상업도시로 성장하였고 이탈리아 반도 전체는 여러 세력들의 각축장이었다. 마키아벨리가 한창 그의 열정과 지적 능력을 발휘하며 외교관으로 일하고 있을 당시 이탈리아 지역은 밀라노 공국, 베네치아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 교황령 등으로 분열되어 교황권과 황제권의 권력 싸움이 횡횡하였고 프랑스, 스페인, 신성로마제국 등 외세의 침략으로 어지러웠다. 피렌체 공화정에서 외교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마키아벨리는 이런 전쟁의 상황에 늘 노출되어 있었고 스페인의 공격으로 피렌체 공화정이 무너지자 메디치 가문이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메디치 가문에 의해 마키아벨리는 투옥되어 고문을 받기도 했고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그의 헌정사에 나타나 있듯이 그는 일차적으로 당시의 피렌체를 지배하고 있던 메디치 가문의 공직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랐고 다음으로 과거 로마제국의 영광을 그리워하며 이탈리아의 통일을 열망하는 마음으로 『군주론』을 썼다. 이런 그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메디치 가문은 그를 공직으로 부르지 않았고 이 책은 그가 사망하고 5년이 지난 후(1532)에야 출간되었으며 이탈리아가 통일이 되기까지는 30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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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2-12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예전에 일본어를 중역한 판본으로 '군주론'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이 버전으로 다시 읽고 싶습니다.

반딧불이 2009-02-14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자가 아주 아주 공들인 것이란걸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어요. 기꺼이 추천드려요.

비로그인 2009-02-14 23:19   좋아요 0 | URL
구입했습니다~
 
장미의 이름 읽기 - 텍스트 해석의 한계를 에코에게 묻다
강유원 지음 / 미토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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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을 썼다. 소설가 이윤기는 이 소설을 번역하여 1986년 출간했다. 철학자 강유원은 2004년『장미의 이름 읽기』라는 책을 썼다. 나는 이윤기의 번역본을 읽지 않았다. 이 소설은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나도 본 적이 있다. 너무 오래되어 잿빛 기억 속에서 잿빛을 더해가고 있을 뿐이지만 중세 수도원의 몇 장면이 스틸 컷처럼 아직 남아있다. 역시 희미한 기억이지만 번역자 이윤기와 철학자 강유원과 관련한 번역과 오역의 문제에 대해 귀동냥한 기억도 있다. 세상이 좋아져서 앉은자리에서 손가락만 몇 번 놀리면 이런 기억의 근거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움베르토 에코가 쓴 <장미의 이름>은 내가 영어판을 중역한 책이지 이탈리아어를 직접 번역한 책이 아니다. 초판 출간 14년 뒤인 2000년, 무려 60쪽에 달하는 원고 봉투를 받았다. 철학을 전공한 한 학자의, ‘<장미의 이름> 읽기’라는 제목이 달린 원고였다. 그 학자는 철학개론 시간에 학생들에게 <장미의 이름>을 바르게 읽어주면서 이 소설이 지닌 철학적 의미를 가르쳤던 모양인데, 바로 그때의 메모를 내게 보내준 것이다. 오독하고 오역한 것이 매우 부끄러웠다. 이 원고는 무려 300여 군데의 부적절한 번역, 빠져 있는 부분과 삭제해야 할 부분을 지적해주고 있었다. 그의 지적은 정확하고도 친절했다. 나는 철학 전공자가 아니어서 에코가 소개한 해박한 중세학 및 철학을 다 이해할 수 없었다. 어렴풋이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그 책에 나오는 무수한 개념을 철학사에서 찾아내는 일이 나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나는 그 학자의 지적을 검토하고, 260군데를 바르게 손보았다. 그러고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부끄러웠다고 고백하고, 그의 지적을 새 책에 반영해도 좋다는 양해를 얻었다. 정확한 지식과 예리한 눈을 겸비한 분이 감시해주고 있는 것은 역자로서는 아픈 일이지만 우리 번역 문화에는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싶었다. 아, 이렇게 가야 하는구나 싶었다. 철학자 강유원 박사께 나는 아직까지도 고마워한다.(한겨레21. 2005.7.8)




지적과 수용 사이의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의 갈피들을 짐작해보면서 2009년 읽는 첫 책으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장미의 이름 읽기』라는 제목은 얼핏 소설 『장미의 이름』에 대한 해설서처럼 느껴진다. 사실 서양이론서들에 대한 해설서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무수히 읽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소설에 대한 해설서? 그것도 철학자가? 라는 의구심이 일었다. “텍스트 해석의 한계를 에코에게 묻다”라는 부제와 저자가 서문에 밝힌 에코의 이 소설을 “포스트모던으로 규정해 버리면, 그의 소설에 대한 해석은 불가능해진다.”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논리적인 사유 태도를 가지고 읽어야 할 텍스트이다”라는 말이 이런 나의 의문을 조금 누그려 주었다. 또 프롤로그 앞에 표기해둔 서술 방식  “1. 이 텍스트는 그것 자체로 완결된 하나의 텍스트이므로 『장미의 이름』과 무관할 수도 있다.  2. 이 텍스트는 『장미의 이름』이라는 텍스트에 대한 텍스트, 즉 이차적 텍스트이므로, 『장미의 이름』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저자의 말이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저자는 프롤로그에 컨텍스트와 텍스트, 기호, 해석, 저자의 의도, 수용자의 참여 등에 대한 저자의 입장을 명료하게 밝혀두었다. 또 소설 『장미의 이름』을 읽는데 필요한 배경지식들이 잘 정리되어있다. 이 소설은 1327년을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1315년부터 시작된 홍수는 유럽의 농지를 수렁으로 만들고 농민들을 굶주림과 온갖 질병에 노출시켰다. 기근은 종교적 열정을 불러일으켰고 수도사들은 청빈을 설교했으며 평신도들은 청빈을 실천했다. 그러나 수도사들이 몸담고 있는 수도원은 각기 다른 주장으로 대립하면서 도미니크 수도회, 베네딕트 수도회, 프란체스코 수도회 등으로 나누어졌다. 중세사회에서 강력한 세력을 확립한 도미니크 수도회와 베네딕트 수도회는 수도원 주변에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도미니크 수도회와 베네딕트 수도회가 성직매매 등으로 땅을 소유하는 것이 부패와 타락의 지름길이라고 주장하면서 ‘청빈’과 ‘빈자 사랑’을 교리로 들고 등장하였다. 그들의 표면적인 대립 이유는 예수가 물건을 소유했느냐 사용했느냐의 문제였지만 그 속에는 물건(재산)의 소유뿐만 아니라 세속의 정치적 권한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즉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정치와 교회의 분리원칙을 주장했던 것이다. 각각의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중점적으로 하는 일도 달랐다. 도미니크 수도회는 이단 설득, 종교재판, 노동 등에 집중하였고 베네딕트 수도회는 ‘수도원은 서책 미치광이들의 집합소’라고 할 만큼 수도사들은 양피지와 잉크단지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살인사건은 바로 이 베네틱트 교단의 수도원 내에 있는 장서관에서 일어난다. 이 사건의 해결을 위해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윌리엄이 파견되는데  재미있게도  베네딕트 수도회의 아드소를 윌리엄의 시자로 등장시킨다. 윌리엄이 과학과 합리적 이성을 중시하는 근대의 상징이라면 아드소는 중세의 상징아닌가. 결국 장강의 앞물결이 뒷물결에 밀려나듯 구시대의 상황들을 근대에 복속되도록 설정한 것이다. “장서관이란, 수세기에 걸쳐 서책끼리의 음울한 속삭임이 계속되는 곳, 인간의 정신에 의해서는 정복되지 않는, 살아있는 막강한 권력자, 만든 자, 옮겨 쓴 자가 죽어도 고스란히 살아남을 무한한 비밀의 보고”이다. 장서관은 수도원의 축소판이고 수도원은 세상의 축소판이다. 또 장서관의 축소판은 책이고 책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결국 책(Text)과 세상(Context)이 뫼비우스의 티처럼 얽혀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을 읽는 것은 책을 읽는 행위임과 동시에 세상을 읽는 행위인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 윌리엄과 호르헤를 통해 우리는 신앙과 이성, 중세와 근대, 종교와 세속, 진리와 우상 등 세상의 문제들을 읽어낼 수 있다.  

 

 

『장미의 이름 읽기』는 내게 한 가지를 더 보태주었다. 그것은 책을 읽는 행위와 세상을 읽는 행위 사이에 700년에 가까운 시간을 거슬러 ‘중세’로 뛰어드는 도약의 힘이다. 타임머신과도 같은 이 책으로 인해 나는 두 번의 밤을 새웠지만 고단함보다는 새벽의 이마를 보는 즐거움이 더 컸다. 앞서 밝혀두었지만 나는 소설 『장미의 이름』을 읽지 않았다. 그러나 『장미의 이름 읽기』를 읽으면서 추리소설을 읽는 긴장감과 중세에 대한 무수한 정보들로 밤이 짧았다. 책을 덮을 때  “이 텍스트는 그것 자체로 완결된 하나의 텍스트이므로 『장미의 이름』과 무관할 수도 있다.”는 저자의 말에 나는 하이 파이브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또  “이 텍스트는 『장미의 이름』이라는 텍스트에 대한 텍스트, 즉 이차적 텍스트이므로, 『장미의 이름』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말은 우리의 번역 현실과 번역이라는 작업에 대한 저자의 태도를 대변하고 있는 듯해서 덩달이로 마음이 어두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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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2-12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어엇..! 저도 '장미의 이름' 보다 '장미의 이름 읽기'가 더 읽고 싶습니다.

반딧불이 2009-02-13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홀드님..이것좀 꼭 읽어봐주시고 글의 형식적인 특징이랄까..수사학적 특징좀 가르쳐주세요~

비로그인 2009-02-14 23:17   좋아요 0 | URL
저도 부족한 게 많은지라;; 저도 꼭 읽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네요~

프레이야 2009-02-17 0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미의 이름,은 오래 전 읽었는데요.. 이 책도 담아갑니다.
좋은 리뷰가 참 많네요. 감사합니다.

반딧불이 2009-02-17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세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제게는 딱 맞는 책이었습니다. 도움이 되셔야할텐데...
 
GO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신사참배, 교과서 왜곡, 독도 문제 등 일본과 한국간에는 끊임없이 문제들이 야기되고 있다. 이런 정치적인 문제와는 다르게 내가 일본에서 일주일가량 머물렀던 집 안주인은 한국 드라마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녀는 가끔 내게 드라마 내용에 대해 묻기도 하고 주인공이 입고나온 한복이나 결혼의상에 대해 자주 묻곤했다. 나는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기 때문에 내용은 알수가 없고 주인공의 얼굴은 낯익어도 이름조차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제대로 해줄 수는 없었다.  

정치적인 입장들이야 서로 괄호치기 해두었던 탓인지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나는 마치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는 것처럼 편안했고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의사를 신기할만큼 이해하기까지 했다. 짧은 시간탓이었는지 민족간의 갈등이나 이데올로기 같은 것들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재일 한국인들에 대한 이야기 역시 나는 생각해볼 기회가 별로 없었던 듯하다. 기껏해야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개념 정도였을까. 

 가네시로 가즈키의 <GO>는 이런 내게 민족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해주었다. 주인공 스기하라는 재일 한국인으로 처음 조선 국적을 가졌다가 아버지의 하와이 여행을 계기로 국적을 한국으로 바꾼다. 물론 아버지의 하와이 여행이 여행을 위한 여행이 아니라 국적을 바꾸기 위한 여행이기도 했다는 것은 뒤에 밝혀진다. 국적을 바꾸었지만 그것은 단지 서류상의 이름 바꾸기 일뿐 그들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본땅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그들에게는 일본인도 적이고 같은 민족인 조선도, 한국에 여행와서 만나는 동일 국적의 한국인도 적이다. 그러므로 처음 사랑에 눈뜨게 하는 '사쿠라이'도 스기하라에게는 넘어야할 문제다.  늘 문제의 문턱들로 우리앞에 다가서는 사랑은 스기하라도 예외로 두지 않았다.  하와이나 노르웨이로 가고싶다는 희망은 이런 넘어야할 문턱 많은 삶에 대한 반증인지도 모른다. 거기는 다를까?

스기하라라는 한 소년의 성장과정을 민족의 정체성 문제와 관련시켜 풀어낸 이 소설은 술술 읽힌다. 작가가 한국계 일본인이라는 정체성이 이 소설을 쓰게한 동력인 듯 싶다.  무겁고 심각해질 수 있는 요소들을 가볍게 작가는 가볍게 풀어냈지만 그런이유로 아쉬운 점 또한 없지 않다. 사쿠라이의 아버지가 한국인과 사귀면 절대 안된다는 이유는 너무 어처구니 없었다. 피가 더럽다니!!   피속에 시궁창의 똥물이라도 흐른단 말인가. 포즈만 있는 민족주의, 혈통우월주의자의 빈티나는 트집잡기라고 밖에는 달리 할말이 없다.

 사쿠라이는 한동안 연락이 없다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뜬금없이 나타나서 자신이 처음 스기하라를 보았을 때의 이야기를 한다. 농구경기 중 스기하라가 벌인 헤프닝을 보고 '거기가 젖었다'는 고백. 솔직하면서도 발칙한 이 말이 재회의 이유가 될 수 있다니. 필연성의 면에서 싱겁고 설득의 면에서 아쉽다. 청소년답다는 말로 포장하면 얼마든지 사랑스럽기까지 하지만 이런 황당한 이별과 재회는 나처럼 오래 굶주린 사랑 결핍증 환자에겐 필연성이 떨어져 아쉽고 싱거웠다.  하지만 '초등학교 졸업의 술수정뱅이 권투선수'아버지와 아들의 오고가는 주먹질에 싹트는 사랑이나 친구와의 우정은 또 다른 형식의 사랑을 생각해보게 해주었다.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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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2-01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으로 유쾌한 소설이지요^^

스트레인지러브 2010-10-27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학생 시절에 좋아했던 작가고,
레볼루션 NO.3 이후론 참신함이 좀 덜하더라지만,
지금도 꾸준히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편견이라고 하시니, 88올림픽 개최하고 한류열풍 불기 전까지만 해도(80년대)
일본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나라 여론조사 순위 해보면,
언제나 1위가 소련, 2위가 한국(남북 포함)이었다는 말을 들었어요.
일본인이 소련한테는 태평양전쟁때 뒤통수맞은 경험이 있다고 해도,
한국한테는 왜? 했던 기억이 나네요...

반딧불이 2010-10-27 21:23   좋아요 0 | URL
가네시로 카즈키를 저는 처음 접했어요. 마음님의 리뷰를 보고 기회가 되면 영화도 좀 챙겨보고 작품도 살펴볼 요량을 했습니다.

그런데 위에 "편견이라고 하시니"..하고 덧붙이셨는데 어떤 의미로 쓰신 말씀인지 잘 모르겠어요. 조금 부연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스트레인지러브 2010-10-28 06:18   좋아요 0 | URL
사쿠라이의 아버지 대사였던 "피가 더럽다" 이 부분을 "편견"이라 말하고 싶었습니다. 반딧불이님 글에서 "그런 편견"이란 단어를 본 건 같은데 없었네요^^;;
난독인가

반딧불이 2010-10-28 08:34   좋아요 0 | URL
저는 제가 실수를 했나 염려되었었네요.

이 책은 아무생각없던 제게 민족의 정체성과 재일한국인의 삶을 생각해보게 해주었드랬어요. 스기하라 아버지의 반대 이유나 스기하라의 '거기가 젖었다'라는 고백이 좀 언짢기는 했지만요.

스기하라가 보다 더 그럴듯한 이유를 가지고 찾아오게 만들었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작가에 대한 아쉬움도 남았구요.

스트레인지러브 2010-10-28 19:10   좋아요 0 | URL
"젖었다"는 건 전 그냥 지나치고 봤는데,
반딧불이님 글 보고 책을 펼쳐 보니 정말 그 구절이 있네요.
전 그냥 그러려니 하고, 그럭저럭 넘겼는데 말이네요. ;
어쩌면 가네시로 가즈키가 연애소설보다는 성장소설에 능한 작가라서
그런 쪽에 서투른지도 모르겠어요. ^^

반딧불이 2010-10-29 00:57   좋아요 0 | URL
두 주인공이 어떻게 화해를 하도록 만드나 나름 궁금했었어요. 작가의 정체성을 생각하며 눈여겨 보았던 기억이에요. 아무생각없이 사는 아줌마지만 이런 순간에는 갑자기 민족주의자라도 된것처럼 이런식이면 곤란하잖아?? 하는 생각이 들었었지요. 작가의 다음 작품을 읽을 땐 만족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답니다.
 
엉덩이의 재발견 - 문화와 예술로 읽는 엉덩이의 역사
장 뤽 엔니그 지음, 이세진 옮김 / 예담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최근 하버드 대학의 교수이면서 정치학자인 하비 맨스필드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 The manly man's man(남자다운 남자의 남자라고 해야하나?)"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었다. 나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른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고 어찌어찌 연이 닿았을 뿐이다. 다만 스쳐지나칠 뿐이었던 그가 나를 향해 정확하게 쏘아준 언어의 화살이 있었다. 그것은 "품격"이라는 단어였다. 그것은 만주벌판에 섰을 때  온몸으로 느껴지던 "광활"이라는 단어가 주던 충격과 비슷한 것이었다. 

나는 단지 그의 얼굴만을 보았을 뿐인데, 그것도 일이분 정도였을 짧은 시간을 스치듯 보았을 뿐인데  내게 전달되던 그에 대한 첫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저런 '품격'은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일까? 타고난 성품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고 풍성한 사랑과 균형잡힌 교육, 무엇보다도 거기에는 자신을 꾸준히 가꾸어 온 자의 세월이 보였다.  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는가? 또 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단어로 명명되는가? 돌이켜보면 어떤 이는 내게서 고슴도치의 가시를 보고가고, 어떤 이는 배추 속잎을 보고 가고, 또 어떤 이는 잠자리 날개를 보고 가고, 또 어떤 이는 목련 꽃을 또 어떤 이는 포카리 스웨트를 보고갔다. 그것들은 다 내게 있었던 듯하지만 여전히 내것인 것은 아니다. 

사람의 인상을 구성하는 면면들은 대부분 얼굴을 포함한 신체의 앞면에 포진해 있는 탓에, 엉덩이는 이런 구성의 면면들에 그리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지는 않다. 엉덩이도 예쁘다면 금상첨화일 뿐 인상을 결정짓는 데는 병아리 눈물만큼도 관여하지 못한 채 부차적인 보조물로 머물 뿐이다. 더구나 엉덩이는 우리몸의 일부이지만 그것을 볼 때에도 거울을 통해 얼굴을 보듯 볼 수 없다. 거울을 통해 보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엉덩이는 뒤틀리고 마는 탓에 우리는 우리의 엉덩이를 보기위해서는 거울속의 엉덩이를 볼 수 있는 또하나의 거울이 필요하다. 이러한 탓에 누군가 나의 엉덩이에 주목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엉덩이는 오직 그만의 것이고 그는 그만이 볼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자격이 있다. 이렇게 보이는 곳에 있지만 보이지 않는 또 보이지 않는 곳에 있어서 더욱 있는듯 마는듯한 엉덩이에 주목한 사람은 장 뤽 엔니그라는 남자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엉덩이를 본 남자가 아닐까 싶다. 

 그는 프랑스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로 많은 일간지와 저널에 기고하고 있고 여러권의 책도 썼다고 한다. 작가의 서문이 없어 그가 어떤 의도로 혹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 책을 썼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을 읽다보면 그가 이 책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회화와 문학작품과 조각과 영화와 동성애와 형벌까지 연구했는가 낱낱이 살펴 볼 수 있다. 목욕, 성교, 블라종, 매음굴 등 불어의 알파벳 순서에 따라 엉덩이와의 관련성을 세밀하고도 농밀하게 짚은 이 책은 넉넉하게 실려있는 화보들과 저자의 문체가 읽는 즐거움을 준다.  이외에도 우리가 익이 알고 있는 모나리자의 불가해한 미소 속에 소년의 엉덩이가 감추어져 있다거나, 엉덩이에 가해지던 형벌 같은 이야기들은 흥미는 있지만 도무지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중국에는 쥐를 이용한 엉덩이 형벌이 있었던 모양이다. 죄수의 엉덩이에 항아리를 묶어놓고 밑바닥에 뚫린 구멍속으로 이틀 굶긴 쥐를 집어넣어 시뻘겋게 달군 쇠막대기로 쥐를 지지는 모양인데 이때 쥐는 찢고 할퀴고 물어뜯고 하면서 도망을 다니다가 끝내는 엉덩이에 나 있는 항문을 파고든다는 것이다. 다음 장면은 차마 적을 수 없어 상상에 맡겨야겠다. 인간의 잔혹행위의 한계는 대체 어디인가. 

미처 몰랐던 많은 정보와 문체가 주는 즐거움이 만만찮음에도 그러나 숨막히게 언급되는 모든 그림을 다 실을 수 없는 것, 또 그것이 책의 앞부분을 제외하면 도판이 작고 흑백이어서 그 효과를 제대로 내지 못한다는 것, 또 번역의 고충이기는 하겠지만 우리말로 표기되지 않고 그대로 실려있는 소제목들  (예를 들면, 아파란시스, 블라종, 핀업 등)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엉덩이 심미가들에게 언급되었던 세상의 모든 엉덩이를 따라가며 이제 내 엉덩이를 새로 볼 수 있는 마음의 호사를 누릴 것이다. 이 책은 숭고한 포르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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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2-12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쥐를 이용한 엉덩이 형벌"...;; 정말 섬뜩합니다. 상상만해도 무섭네요.

반딧불이 2009-02-13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키아벨리가 감옥에 갇혀있을때 '스트라파도'라는 형벌을 받았다고해요. 팔을 뒤로 묶고 높은곳에서 떨어뜨리는 형벌인모양인데 각 나라 형벌이 그나라 국민의 성정을 잘 보여주는 듯하더라구요.

비로그인 2009-02-14 23:16   좋아요 0 | URL
한국은 (더 멀리 갈것도 없이)1970~80년대 '안기부'가 기세등등하게 국민을 옥죄었을때 저질렀던 각종 고문과 형벌들을 생각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