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읽기 - 텍스트 해석의 한계를 에코에게 묻다
강유원 지음 / 미토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을 썼다. 소설가 이윤기는 이 소설을 번역하여 1986년 출간했다. 철학자 강유원은 2004년『장미의 이름 읽기』라는 책을 썼다. 나는 이윤기의 번역본을 읽지 않았다. 이 소설은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나도 본 적이 있다. 너무 오래되어 잿빛 기억 속에서 잿빛을 더해가고 있을 뿐이지만 중세 수도원의 몇 장면이 스틸 컷처럼 아직 남아있다. 역시 희미한 기억이지만 번역자 이윤기와 철학자 강유원과 관련한 번역과 오역의 문제에 대해 귀동냥한 기억도 있다. 세상이 좋아져서 앉은자리에서 손가락만 몇 번 놀리면 이런 기억의 근거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움베르토 에코가 쓴 <장미의 이름>은 내가 영어판을 중역한 책이지 이탈리아어를 직접 번역한 책이 아니다. 초판 출간 14년 뒤인 2000년, 무려 60쪽에 달하는 원고 봉투를 받았다. 철학을 전공한 한 학자의, ‘<장미의 이름> 읽기’라는 제목이 달린 원고였다. 그 학자는 철학개론 시간에 학생들에게 <장미의 이름>을 바르게 읽어주면서 이 소설이 지닌 철학적 의미를 가르쳤던 모양인데, 바로 그때의 메모를 내게 보내준 것이다. 오독하고 오역한 것이 매우 부끄러웠다. 이 원고는 무려 300여 군데의 부적절한 번역, 빠져 있는 부분과 삭제해야 할 부분을 지적해주고 있었다. 그의 지적은 정확하고도 친절했다. 나는 철학 전공자가 아니어서 에코가 소개한 해박한 중세학 및 철학을 다 이해할 수 없었다. 어렴풋이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그 책에 나오는 무수한 개념을 철학사에서 찾아내는 일이 나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나는 그 학자의 지적을 검토하고, 260군데를 바르게 손보았다. 그러고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부끄러웠다고 고백하고, 그의 지적을 새 책에 반영해도 좋다는 양해를 얻었다. 정확한 지식과 예리한 눈을 겸비한 분이 감시해주고 있는 것은 역자로서는 아픈 일이지만 우리 번역 문화에는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싶었다. 아, 이렇게 가야 하는구나 싶었다. 철학자 강유원 박사께 나는 아직까지도 고마워한다.(한겨레21. 2005.7.8)




지적과 수용 사이의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의 갈피들을 짐작해보면서 2009년 읽는 첫 책으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장미의 이름 읽기』라는 제목은 얼핏 소설 『장미의 이름』에 대한 해설서처럼 느껴진다. 사실 서양이론서들에 대한 해설서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무수히 읽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소설에 대한 해설서? 그것도 철학자가? 라는 의구심이 일었다. “텍스트 해석의 한계를 에코에게 묻다”라는 부제와 저자가 서문에 밝힌 에코의 이 소설을 “포스트모던으로 규정해 버리면, 그의 소설에 대한 해석은 불가능해진다.”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논리적인 사유 태도를 가지고 읽어야 할 텍스트이다”라는 말이 이런 나의 의문을 조금 누그려 주었다. 또 프롤로그 앞에 표기해둔 서술 방식  “1. 이 텍스트는 그것 자체로 완결된 하나의 텍스트이므로 『장미의 이름』과 무관할 수도 있다.  2. 이 텍스트는 『장미의 이름』이라는 텍스트에 대한 텍스트, 즉 이차적 텍스트이므로, 『장미의 이름』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저자의 말이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저자는 프롤로그에 컨텍스트와 텍스트, 기호, 해석, 저자의 의도, 수용자의 참여 등에 대한 저자의 입장을 명료하게 밝혀두었다. 또 소설 『장미의 이름』을 읽는데 필요한 배경지식들이 잘 정리되어있다. 이 소설은 1327년을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1315년부터 시작된 홍수는 유럽의 농지를 수렁으로 만들고 농민들을 굶주림과 온갖 질병에 노출시켰다. 기근은 종교적 열정을 불러일으켰고 수도사들은 청빈을 설교했으며 평신도들은 청빈을 실천했다. 그러나 수도사들이 몸담고 있는 수도원은 각기 다른 주장으로 대립하면서 도미니크 수도회, 베네딕트 수도회, 프란체스코 수도회 등으로 나누어졌다. 중세사회에서 강력한 세력을 확립한 도미니크 수도회와 베네딕트 수도회는 수도원 주변에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도미니크 수도회와 베네딕트 수도회가 성직매매 등으로 땅을 소유하는 것이 부패와 타락의 지름길이라고 주장하면서 ‘청빈’과 ‘빈자 사랑’을 교리로 들고 등장하였다. 그들의 표면적인 대립 이유는 예수가 물건을 소유했느냐 사용했느냐의 문제였지만 그 속에는 물건(재산)의 소유뿐만 아니라 세속의 정치적 권한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즉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정치와 교회의 분리원칙을 주장했던 것이다. 각각의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중점적으로 하는 일도 달랐다. 도미니크 수도회는 이단 설득, 종교재판, 노동 등에 집중하였고 베네딕트 수도회는 ‘수도원은 서책 미치광이들의 집합소’라고 할 만큼 수도사들은 양피지와 잉크단지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살인사건은 바로 이 베네틱트 교단의 수도원 내에 있는 장서관에서 일어난다. 이 사건의 해결을 위해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윌리엄이 파견되는데  재미있게도  베네딕트 수도회의 아드소를 윌리엄의 시자로 등장시킨다. 윌리엄이 과학과 합리적 이성을 중시하는 근대의 상징이라면 아드소는 중세의 상징아닌가. 결국 장강의 앞물결이 뒷물결에 밀려나듯 구시대의 상황들을 근대에 복속되도록 설정한 것이다. “장서관이란, 수세기에 걸쳐 서책끼리의 음울한 속삭임이 계속되는 곳, 인간의 정신에 의해서는 정복되지 않는, 살아있는 막강한 권력자, 만든 자, 옮겨 쓴 자가 죽어도 고스란히 살아남을 무한한 비밀의 보고”이다. 장서관은 수도원의 축소판이고 수도원은 세상의 축소판이다. 또 장서관의 축소판은 책이고 책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결국 책(Text)과 세상(Context)이 뫼비우스의 티처럼 얽혀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을 읽는 것은 책을 읽는 행위임과 동시에 세상을 읽는 행위인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 윌리엄과 호르헤를 통해 우리는 신앙과 이성, 중세와 근대, 종교와 세속, 진리와 우상 등 세상의 문제들을 읽어낼 수 있다.  

 

 

『장미의 이름 읽기』는 내게 한 가지를 더 보태주었다. 그것은 책을 읽는 행위와 세상을 읽는 행위 사이에 700년에 가까운 시간을 거슬러 ‘중세’로 뛰어드는 도약의 힘이다. 타임머신과도 같은 이 책으로 인해 나는 두 번의 밤을 새웠지만 고단함보다는 새벽의 이마를 보는 즐거움이 더 컸다. 앞서 밝혀두었지만 나는 소설 『장미의 이름』을 읽지 않았다. 그러나 『장미의 이름 읽기』를 읽으면서 추리소설을 읽는 긴장감과 중세에 대한 무수한 정보들로 밤이 짧았다. 책을 덮을 때  “이 텍스트는 그것 자체로 완결된 하나의 텍스트이므로 『장미의 이름』과 무관할 수도 있다.”는 저자의 말에 나는 하이 파이브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또  “이 텍스트는 『장미의 이름』이라는 텍스트에 대한 텍스트, 즉 이차적 텍스트이므로, 『장미의 이름』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말은 우리의 번역 현실과 번역이라는 작업에 대한 저자의 태도를 대변하고 있는 듯해서 덩달이로 마음이 어두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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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2-12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어엇..! 저도 '장미의 이름' 보다 '장미의 이름 읽기'가 더 읽고 싶습니다.

반딧불이 2009-02-13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홀드님..이것좀 꼭 읽어봐주시고 글의 형식적인 특징이랄까..수사학적 특징좀 가르쳐주세요~

비로그인 2009-02-14 23:17   좋아요 0 | URL
저도 부족한 게 많은지라;; 저도 꼭 읽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네요~

프레이야 2009-02-17 0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미의 이름,은 오래 전 읽었는데요.. 이 책도 담아갑니다.
좋은 리뷰가 참 많네요. 감사합니다.

반딧불이 2009-02-17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세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제게는 딱 맞는 책이었습니다. 도움이 되셔야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