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각오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5월
평점 :
품절


 

 

 얼마 전 그의 소설 『달에 울다』를 읽었다. 『달에 울다』는 독특한 소설의 형식, 선명하게 살아 움직이는 이미지들, 절제된 문장, 넘치지 않는 감정의 수위 등으로 나를 매료했다. 반면 『소설가의 각오』는 동어 반복, 여성비하, 감정의 과잉, 소설가의 각오라기보다는 벌어들이는 원고료 만큼만으로 살아가겠다는 생활인으로서의 각오가 스물 네 시간 발기된 페니스를 보는 것처럼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최근 누군가를 흘겨볼 만큼의 에너지도 없는 내게는 혹독한 시간이었다. 리뷰는 이런 혹독한 시간의 증거로 남겨두기 위해 적는다.


이 책은 마루야마 겐지가 1966년 등단의 형식을 거친 후 1968년부터 1991년까지 쓴 에세이들을 주제 없이 시간 순으로 묶은 것이다. 적게는 11편에서 많게는 19편까지 평균 5년을 한 단위로 했고 중간에 <소설가의 각오>를 배치했다. 나는 이 부분을 가장 먼저 읽었다. 그는 중학교 시절 진지하게 가출을 고민하고 있었고, 그 무렵 『백경』을 읽었고, 에이헙 선장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했고, 바다로 나가기 위해 해양대학으로 진학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으므로 통신사를 양성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진학은 했지만 학업을 따라갈 수 없어 학교에서 공부해야할 시간을 영화를 보는 데 할애했다. 당연히 성적이 받쳐주지 않아 선원의 꿈은 접고 기업체의 텔렉스오퍼레이터로 근무하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는 도산의 위기에 놓이게 되고 그는 새로운 직업을 찾아야했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 소설을 썼고 그 소설의 이름은 『여름의 흐름』이었으며 그때 그의 나이는 21세였다. 그는 이 소설로 <문학계>의 신인상과 그해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했는데 그때까지의 아쿠타가와 상 수상자 중 최연소였다고 한다.


 

“문학은 읽는 것이며 쓰는 것이지, 논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소설쓰기를 목표로 하는 자는, 문학론 따위와는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해야 한다. 그리고 홀로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마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독을 이길 힘이 없다면 문학을 목표로 할 자격이 없다. 세상에 대해, 혹은 모든 집단과 조직에 대해 홀로 버틸 대로 버티며 거기에서 튕겨 나오는 스파크를 글로 환원해야 한다. 가장 위태로운 입장에서서 불안정한 발밑을 끊임없이 자각하면서 아슬아슬한 선상에서 몸으로 부딪치는 그 반복이 순수문학을 하는 사람의 자세인 것이다.”  

 

너무나 지당한 말씀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현대 사회는 이렇게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영웅대접을 받는 시대가 되었다. 이후 그는 일본 북알프스 기슭의 오지마을로 들어가서 현재까지 수도승과 같은 금욕주의를 택했다고 한다.  오늘날 일본 현대문학의 ‘작가정신’이라 불리는 그가 소설가 지망생이나, 소설가, 평론가 등을 향한 신랄한 비판의 목소리는 오늘의 우리나라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오죽했으면 “한국문학이 두개의 M(Money, Massmedia)신에 의해 지배되는 경향이 있다”는 말까지 나오겠는가.

그런데 뭔가 미진하다. 나는 그의 책 『달에 울다』를 읽고 상당한 기대를 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소설가의 각오』를 이 잡듯이 뒤져서 내가 찾아낸 작품에 대한 그의 의견은 몇줄 되지 않는다. 

 

 “그래도 세상은 점점 더 영상으로 기울어가고, 언어를 멀리하고 있습니다. 나는 문장을 사용하여 영상보다 더 영상적인 표현을 할 수 없을까 하고 이리저리 따져보고 있습니다. 문장을 사용한 영상적 이미지로 다시 말해 논리나 이치가 아니라 감동을 통하여 철학 혹은 사상을 읽는 이의 마음에 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가 나의 화두인 셈이지요.”   

 

“농밀한 문장에 깊이와 매끈함과 광택이 있으며, 읽어나감과 동시에 문장이 영상으로 펼쳐지고, 그것이 혼을 향하여 곧장 돌진하는 작품. 그런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짧지도 길지도 않은 기간 동안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는 정도였다.  어휘만 다를 뿐 언어로 그림을 그리겠다는 내용이다. 그가 학창시절 공부대신 보았던 영화의 영향이 그대로 드러나는 말이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그의 '철학 혹은 사상'이지 그것을 영상적 이미지로 드러내겠다는 방법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달에 울다』라는 소설을 작가의 의도대로 읽었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다소 실망스러웠다. 나의 이런 실망은 그가 『소설가의 각오』곳곳에 반복해놓은 문장들 때문에 바닥을 쳤다. 잘못 표기된 이름에 대한 이야기, 필기구에 대한 이야기를 비롯해 심지어 등단과 아쿠타가와 상 수상에 대한 똑같은 이야기는 무려 네 번이나 반복되고(더 있을지도 모른다)있었다. 그의 반복 덕분에 나는 그가 볼펜에 휴지를 감아 글을 쓰고, <문학계> 신인상을 받았고, 최연소 아쿠타가와 상 수상자라는 사실을  내 머리 속에 문신하듯 박아 넣었다.  

 

 

그는 내게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잘못 표기된 이름, 필기구, 수상에 대한 사실들을 반복을 통해 뇌 속에 강제 주입하더니 이제는 혈압을 올리는 방법까지 동원하고 있다.  

 

“여자가 이러니저러니 잔소리가 많을 때에는 한 방 주먹이라도 날려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이 상책이다.” “나는 여성잡지에는 원고를 쓰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어 지금까지 두세 번 쓴 일이 있다. 에세이와 인터뷰. 하지만 그것으로 그만두었다. 쓰잘데없는 짓이기 때문이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여자를 상대로 고심하면서 무어라고 얘기한다는 것은 정말 내키지 않는 일이다.” “나는 원고 의뢰를 수락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여자나 게이한테는 아무리 진지한 이야기를 해도 흘려듣기만 할 뿐 정신은 전혀 다른 곳에 가 있기 때문이라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들은 상대편의 얼굴이나 옷을 쳐다보고 있어서 도무지 기분이 나쁘다고.”  

 

 

곳곳에 ‘사나이’ 운운하면서 혼자서 최고입네 독야청청하는 그는 마초증후군 환자일지도 모른다. 그가 만약 소설을 쓰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는 야쿠자 보스가 되어있지 않았을까? 책날개에 있는 “이 산문집은 타락한 작가들을 향해 던지는 신랄한 비판이자 작가 지망생들이 반드시 읽어야할 삼엄한 문학개론이다”라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타락한 작가들’은 이런 책 안 읽기 때문이다. 백번 양보해서 설사 읽는다고 해도 타락을 부추길 확률이 더 높다. 또 문학개론서는 더더욱 아닐 뿐만 아니라 소설가의 각오라기보다는 생활인으로서의 각오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이 책은 나처럼 건망증이 심하고 혈압 낮은 사람이 꼭 읽어야할 책이다.














 

 




























 

짧은 자서전과도 같은 <소설가의 각오>에서 그는 문학에 대한 자세를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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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2-01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초증후군 환자의 생활인으로서의 각오라는 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반딧불이 2009-02-01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를 저렇게 씹어놓고 알라딘에서 주는 '이주의 마이리뷰'에 뽑혀 적립금을 받았습니다. 마음이 참으로 불편했었는데 공감해주시니 조금 위안이 되는군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