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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5년 4월
평점 :
“마음의 눈으로 자신을 보는 우리들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을 보게 되지만, 우리 마음 밖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그 변화를 쉽게 눈치 챈다. “ -17쪽
나이를 의식하며 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가끔 내가 나이가 들었다는 걸 간접적으로 의식하게 될 때가 있다. 꼬맹이였던 조카들이 나보다 훌쩍 키가 자라 나타났을 때,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언니 오빠들을 장례식장이나 결혼식장에서 몇 년 만에 만났을 때, 상대적으로 내 나이를 가늠해보게 된다. 가장 최근의 일은 탱고를 배우겠다고 찾아 간 탱고 아카데미에서였다. 주변에 나보다 나이를 더 먹어 보이는 사람이 전무했다. 뻘쭘했지만 마음 먹은 일을 포기 해야 할 만큼 나이가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 학습 지진아에 다름 아닌 내가 무엇을 한들 때가 아니겠는가. 뻔뻔함도 자산으로 여겼다. 탱고를 위해 내게 허락된 시간이 많지 않은 것과 반비례로 나는 탱고에 몰입했던 것 같다. 마음의 눈으로 스스로를 보았다고 단언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다. 어떤 일을 하든 이 일을 하고 있는 지금이야 말로 내가 이 일을 해야 하는 바로 그 때라고 여겼다.
“왜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야 나를 알게 되었어요? 하고 그녀가 물었다. 나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나이란 숫자가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고.” -81쪽
“그러고 보니 난 영계네” 누군가 장난삼아 한 말 한마디로 크게 휘청했다. 가끔 먹는 삼계탕 속의 약병아리가 수시로 떠올랐다. 다리를 꼬고 허연 배를 드러낸 채 뜨거운 국물에 잠겨있는 적나라한 모습의 어린 닭이 내 나이를 환산하게 했다. 정말 나이를 잊고 지낸 건지, 잊고 싶었던 건지 알 수 없지만 헤아려 보니 새삼스러웠다. 졸지에 노계가 되어버린 나는 ‘영계’라는 단어를 곱씹으며 며칠 동안 비실비실 방바닥 신세를 졌다.英鷄? young+鷄? 영어와 한자의 합성어란 말이냐? 계통도 족보도 알 수 없어 네이버에 물었다.
< '영계(-鷄)'는 '연계(軟鷄)'에서 온 말입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연계'에서 '연'이 '영'으로 그 소리가 달라져 원어인 '軟'과의 연관성이 멀어졌기에 '원어 정보'가 아닌 '어원 정보'에 해당 내용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살이 무르고 어린 닭을 의미하는 ‘연계’가 ‘영계’의 어원이었다. 연계가 영계가 된 건 자음동화 였던 것. 그러나 영계는 원래의 의미보다는 나이가 어린 이성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 더 많이 쓰이는 것 같다. 시대는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며 가장 추잡한 성의 대명사로 ‘영계’를 전락 시켜버렸다. ‘영계’에게 무슨 죄가 있으랴.
나는 윤리, 도덕 등에 잘 학습되어 살아왔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체제 유지를 위한 지배자들의 한 방편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그것은 더 이상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미성년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그것을 회춘이니, 몸을 보하느니 하는 것으로 믿는 것까지 용인할 수는 없다. 나이 차이를 떠나 인간을 닭으로, 이성(異性)을 단지 성적(性的)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것에 대해서도 유감이지 않을 수 없다.
수 십 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또 불륜임을 알고도 사랑에 빠지는 이들이 더러 있는 것 같다. 해외 토픽이나 가십거리가 되는 경우도 있고, 예술가를 만나 감동 어린 예술 작품으로 탄생 되기도 한다. 몇십 년의 나이 차이나 불륜이 아름다울 수 있는 건 그들의 사랑이 진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마르케스의 말처럼 그들에게’ 나이는 숫자가 아니라 느끼는 것’이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사랑할 나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나이라 하더라도 사랑을 느끼는 그 순간이 바로 사랑할 나이가 되는 것.
“ 진심으로 말하는데, 진정한 사랑을 하는 경이를 맛보지 않고 죽을 생각은 하지 마세요.” -132쪽
<내 슬픈 창녀의 추억> 속 주인공은 90살의 칼럼니스트다. 아흔 살 생일을 자축하기 위해 창녀촌을 다시 찾았다가 14살 소녀를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 알몸으로 잠자는 소녀를 지켜보는 것만이 그가 하는 일. 그리고 파동 치는 사랑의 마음을 칼럼으로 쓰는 일. 그들에게 ‘영계’는 끼어들 자리가 없다. 육체의 사랑을 나눈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허락된 모든 감각의 담지체인 몸을 빌어 사랑을 나누고 서로를 교감 할 수 있다면 그건 얼마나 아름답고 또한 축복받은 일이랴. 그러나 그는 애써 그것을 지향하지도 지양하지도 않는다. 그에게 ‘섹스란 사랑을 얻지 못할 때 가지는 위안에 불과하다.’ 이삼 백명의 여자와 사랑을 나눈 자가 하는 말이니 이것이 가진 자의 여유라고 하더라도 한번쯤 새겨볼 여지는 있을 않을까?
마르케스가 말하는 진정한 사랑이란 어떤 걸까? 육체적 사랑이 배제된 플라토닉 러브? 글쎄……. 그런데 이상하다. 왜 우리는 사랑을 말할 때 소크라테스니 플라톤이니 하는 철학자들의 권위에 기대야 하는 걸까? 그 어떤 말에도 만족하지 못하면서. 사랑은 사랑을 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에게 사랑을 물을 수도 없다. 어쩌면 사랑은 사랑을 하는 사람의 수만큼 , 사랑의 횟수만큼 무한한 얼굴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내가 일생 동안 열 번의 사랑을 한다면 열 번의 사랑이 모두 첫사랑이고, 그러므로 사랑에 대한 어떤 정의도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은 있다. 사랑을 ‘광기’라고 정의 했던 이가 소크라테스였던가? 울리히 벡의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이라던 말도 사랑의 정의에서 외면할 수 없는 말이다.
나는 사랑이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 하지 못한다면 그건 낭비3종 세트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에너지 낭비, 시간 낭비, 돈 낭비. 언제나 내 뒤통수를 치는 것이 취미인 生은 또 언제 이런 내 생각의 뒤통수를 칠지 모르겠다. 가만히 있어도 노계가 되는 나이가 되고 보니 그것이 낭비3종 세트든, 진정한 사랑이든 딱히 비켜갈 의지도 생기지 않는다. 비켜가기는 커녕 만약 운명이 내게 선심쓰듯 사랑을 선물한다면 이제는 진정 맞짱을 떠야 할 나이가 된 듯 싶다.
나이를 돌이켜보면서 시간을 헤아리는 단위도 달라졌음을 문득 깨닫게 되었다. 시간이 왜 이렇게 안가느냐고 투정을 부리던 때도 있었고, 일주일 단위로 뭉턱뭉턱 시간이 흘러가던 때도 있었다. 이제는 한해가 어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도둑맞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마르케스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다.
" 내 생애를 일년이 아니라 10년 단위로 재기 시작했다. 오십대의 삶이 결정적이었는데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보다 나이가 적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육십대는 이제 더 이상 실수할 시간이 남아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장 열심히 산 시기였다. ....... 인생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어지러운 강물처럼 흘러가버리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석쇠에서 몸을 뒤집어 앞으로 또 90년 동안 나머지 한쪽을 익힐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흡족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 147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