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평역에서 창비시선 40
곽재구 지음 / 창비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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沙平驛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뻐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시를 쓰는 꿈을 꾼 적이 있는가? 그것도 최소 3회를 연작으로 시쓰는 꿈을 꾼 적 있는가? 솔직히 말하자. 나는 없다. 몇 번 꿈 속에서 시를 받아 적은 적은 있다. 그러나 세 번을 연이어 같은 내용의 꿈을 꾼 적은 맹세코 없다. 꿈속의 시는 얼마나 아름답고 힘이 있고 절절하던가? 그러나 깨고나면 시는 '나 잡아봐라~' 는 슬로우 비디오처럼 생각 속을 날아다닐 뿐 단 한 줄도 잡히지 않는다.
꿈 속에서 시인을 만난 적도 있다. 이미 돌아가신 분도 있고, 아직 건강하게 생존해 계신 분도 있다. 전날 그분들의 시를 읽었던 것도 아니어서 깨고나면 꿈을 더듬으며 의미를 생각해보곤 한다. 시에 끄달리면서도 엉뚱한 데 한눈 팔고 있는 무의식의 발로려니 여긴다.
곽재구 시인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이며 시적 자질에 대해 물을 때 저 질문을 한다고 한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큰 시인이 될거라고 열심히 쓰라고 한단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 판단하라는 얘기겠지. 저 기준이라면 난 시인이 되기는 글렀다.
​그런데 연작 꿈이 가능한가? 결정적인 순간에 꿈에서 깨면 아쉬움에 이불을 뒤집어 쓰고 계속 꿈을 꾸어보려고 애쓴 적도 있다. 한두번 잘렸던 꿈이 연결되기도 했던 것 같다. 매순간, 그러니까 하루 86400초를 온통 시 생각에 젖어있기를 10년쯤 하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하루 열편씩 천일 동안 천편의 시를 쓴다면 그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건 86400초니 1000편이니 하는 양적이 문제는 아니니라.
곽재구 시인은 1981년, 전남대 4학년 재학중일때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데뷔했다. 1980년대를 흔히들 '전두환과 노태우의 시대', '시의 시대'라고 부른다. 백골단이 군화발로 우루루 달려 들어와 강의실에 사과탄을 던지던 시대, 눈물 콧물 기침으로 범벅이 되어 뛰쳐나오는 학생들을 운동장에 꿇어 앉히고 막무가내로 후려치며 지명수배자를 찾아내던 시대. 당시 '오월'은 금기어였다고 한다. 그런 시대에 시인은 이창동, 김진경, 고광헌, 이영진 등과 함께 '오월시 동인'이었다. 금기어를 동인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내 건 것도, 당시의 동인들이 모두 문화 각 영역에서 자기몫을 하고 있는 것이 신기하기조차 하다. 김춘수, 강은교 등이 모더니즘의 시를 쓰던 시대에 이들은 리얼리즘의 시를 썼다. 특히 곽재구 시인의 시 <박득세>, <김득구>, <조경님> 등은 청소부, 권투선수, 버스 안내양의 실명이고, 유곽촌이었던 '대인동'이라는 지명을 제목으로한 연작 <대인동> 시리즈에는 시인에 의해 비로소 빛나는 하층민들이 수없이 등장한다.
1983년 초판본이 인쇄된 80년대의 시 『사평역에서』가 가슴에 와 닿는 이유는 당시의 상황과 지금의 시대적 상황이 많이 달라졌으나 또 같은 상황이라는 맥락 때문일 것이다. 3,40년 전의 시에서 한 시인이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물과 사람과 시대를 얼마나 넓고 깊게 사랑했는가, 셀로판지 처럼 얇고 투명한 서정으로 폭압의 시대를 어떻게 건너왔는가를 살피는 기회였다. 동시대를 살고 있지만 나는 또 얼마나 멀리있는가.
지옥여행으로 바뀌어버린 수학여행, 바늘구멍도 아닌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하는 총리 후보들, 말년 병장의 총기난사, 일본 자위대의 활동폭 확대 등 하루도 잠잠한 날이 없다. 어느 시인은 사람이 희망이라고 했지만 사건이 터질 때마다 사람이 사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절감한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시대는 여전하다.
바닥에서도 아름답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날은 올 수 있을까
미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은 채
그리워진 서로의 마음 위에
물먹은 풀꽃 한 송이
방싯 꽂아줄 수 있을까
칡꽃이 지는 섬진강 어디거나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한강변 어디거나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모래알이 아름다워
뜨거워진 마음으로 이 땅 위에
사랑의 입술을 찍을 날들은
햇살을 햇살이라고 말하며
희망을 희망이라고 속삭이며
마음의 정겨움도 무시로 나누어
다시 사랑의 언어로 서로의 가슴에 뜬
무지개 꽃무지를 볼 수 있을까
미장이 토수 배관광 약장수
간호원 선생님 회사원 박사 안내양
술꾼 의사 토끼 나팔꽃 지명수배자의 아내
창녀 포졸 대통령이 함께 뽀뽀를 하며
서로 삿대질을 하며
야 임마 너 너무 아름다워
너 너무 사랑스러워 박치기를 하며
한송이 꽃으로 무지개로 종소리로
우리 눈뜨고 보는 하늘에 피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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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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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눈으로 자신을 보는 우리들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을 보게 되지만, 우리 마음 밖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그 변화를 쉽게 눈치 챈다. “ -17

 

 

 

나이를 의식하며 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가끔 내가 나이가 들었다는 걸 간접적으로 의식하게 될 때가 있다. 꼬맹이였던 조카들이 나보다 훌쩍 키가 자라 나타났을 때,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언니 오빠들을 장례식장이나 결혼식장에서 몇 년 만에 만났을 때, 상대적으로 내 나이를 가늠해보게 된다. 가장 최근의 일은 탱고를 배우겠다고 찾아 간 탱고 아카데미에서였다. 주변에 나보다 나이를 더 먹어 보이는 사람이 전무했다. 뻘쭘했지만 마음 먹은 일을 포기 해야 할 만큼 나이가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 학습 지진아에 다름 아닌 내가 무엇을 한들 때가 아니겠는가. 뻔뻔함도 자산으로 여겼다. 탱고를 위해 내게 허락된 시간이 많지 않은 것과 반비례로 나는 탱고에 몰입했던 것 같다. 마음의 눈으로 스스로를 보았다고 단언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다. 어떤 일을 하든 이 일을 하고 있는 지금이야 말로 내가 이 일을 해야 하는 바로 그 때라고 여겼다.

 

 

 

왜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야 나를 알게 되었어요? 하고 그녀가 물었다. 나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나이란 숫자가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고.” -81

 

 

 

그러고 보니 난 영계네누군가 장난삼아 한 말 한마디로 크게 휘청했다. 가끔 먹는 삼계탕 속의 약병아리가 수시로 떠올랐다. 다리를 꼬고 허연 배를 드러낸 채 뜨거운 국물에 잠겨있는 적나라한 모습의 어린 닭이 내 나이를 환산하게 했다. 정말 나이를 잊고 지낸 건지, 잊고 싶었던 건지 알 수 없지만 헤아려 보니 새삼스러웠다. 졸지에 노계가 되어버린 나는 영계라는 단어를 곱씹으며 며칠 동안 비실비실 방바닥 신세를 졌다.英鷄? young+? 영어와 한자의 합성어란 말이냐? 계통도 족보도 알 수 없어 네이버에 물었다.

 

 

 

< '영계(-)''연계(軟鷄)'에서 온 말입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연계'에서 ''''으로 그 소리가 달라져 원어인 ''과의 연관성이 멀어졌기에 '원어 정보'가 아닌 '어원 정보'에 해당 내용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살이 무르고 어린 닭을 의미하는 연계영계의 어원이었다. 연계가 영계가 된 건 자음동화 였던 것. 그러나 영계는 원래의 의미보다는 나이가 어린 이성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 더 많이 쓰이는 것 같다. 시대는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며 가장 추잡한 성의 대명사로 영계를 전락 시켜버렸다. ‘영계에게 무슨 죄가 있으랴.

 

 

 

나는 윤리, 도덕 등에 잘 학습되어 살아왔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체제 유지를 위한 지배자들의 한 방편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그것은 더 이상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미성년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그것을 회춘이니, 몸을 보하느니 하는 것으로 믿는 것까지 용인할 수는 없다. 나이 차이를 떠나 인간을 닭으로, 이성(異性)을 단지 성적(性的)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것에 대해서도 유감이지 않을 수 없다.

 

수 십 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또 불륜임을 알고도 사랑에 빠지는 이들이 더러 있는 것 같다. 해외 토픽이나 가십거리가 되는 경우도 있고, 예술가를 만나 감동 어린 예술 작품으로 탄생 되기도 한다. 몇십 년의 나이 차이나 불륜이 아름다울 수 있는 건 그들의 사랑이 진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마르케스의 말처럼 그들에게나이는 숫자가 아니라 느끼는 것이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사랑할 나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나이라 하더라도 사랑을 느끼는 그 순간이 바로 사랑할 나이가 되는 것.

 

 

 

 

진심으로 말하는데, 진정한 사랑을 하는 경이를 맛보지 않고 죽을 생각은 하지 마세요.” -132

 

 

 

<내 슬픈 창녀의 추억> 속 주인공은 90살의 칼럼니스트다. 아흔 살 생일을 자축하기 위해 창녀촌을 다시 찾았다가 14살 소녀를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 알몸으로 잠자는 소녀를 지켜보는 것만이 그가 하는 일. 그리고 파동 치는 사랑의 마음을 칼럼으로 쓰는 일. 그들에게 영계는 끼어들 자리가 없다. 육체의 사랑을 나눈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허락된 모든 감각의 담지체인 몸을 빌어 사랑을 나누고 서로를 교감 할 수 있다면 그건  얼마나 아름답고 또한 축복받은  일이랴. 그러나 그는 애써 그것을 지향하지도 지양하지도 않는다. 그에게 섹스란 사랑을 얻지 못할 때 가지는 위안에 불과하다.’ 이삼 백명의 여자와 사랑을 나눈 자가 하는 말이니 이것이 가진 자의 여유라고 하더라도 한번쯤 새겨볼 여지는 있을 않을까?

 

 

 

마르케스가 말하는 진정한 사랑이란 어떤 걸까? 육체적 사랑이 배제된 플라토닉 러브? 글쎄……. 그런데 이상하다. 왜 우리는 사랑을 말할 때 소크라테스니 플라톤이니 하는 철학자들의 권위에 기대야 하는 걸까? 그 어떤 말에도 만족하지 못하면서. 사랑은 사랑을 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에게 사랑을 물을 수도 없다. 어쩌면 사랑은 사랑을 하는 사람의 수만큼 , 사랑의 횟수만큼 무한한 얼굴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내가 일생 동안 열 번의 사랑을 한다면 열 번의 사랑이 모두 첫사랑이고, 그러므로 사랑에 대한 어떤 정의도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은 있다. 사랑을 광기라고 정의 했던 이가 소크라테스였던가? 울리히 벡의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이라던 말도 사랑의 정의에서 외면할 수 없는 말이다.

 

 

 

나는 사랑이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 하지 못한다면 그건 낭비3종 세트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에너지 낭비, 시간 낭비, 돈 낭비. 언제나 내 뒤통수를 치는 것이 취미인 은 또 언제 이런 내 생각의 뒤통수를 칠지 모르겠다. 가만히 있어도 노계가 되는 나이가 되고 보니 그것이 낭비3종 세트든, 진정한 사랑이든 딱히 비켜갈 의지도 생기지 않는다. 비켜가기는 커녕 만약 운명이 내게 선심쓰듯 사랑을 선물한다면 이제는 진정 맞짱을 떠야 할 나이가 된 듯 싶다.  

 

 

나이를 돌이켜보면서 시간을 헤아리는 단위도 달라졌음을 문득 깨닫게 되었다. 시간이 왜 이렇게 안가느냐고 투정을 부리던 때도 있었고, 일주일 단위로 뭉턱뭉턱 시간이 흘러가던 때도 있었다. 이제는 한해가 어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도둑맞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마르케스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다.

 

 

" 내 생애를 일년이 아니라 10년 단위로 재기 시작했다. 오십대의 삶이 결정적이었는데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보다 나이가 적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육십대는 이제 더 이상 실수할 시간이 남아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장 열심히 산 시기였다. ....... 인생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어지러운 강물처럼 흘러가버리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석쇠에서 몸을 뒤집어 앞으로 또 90년 동안 나머지 한쪽을 익힐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흡족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 1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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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혜윰 2013-12-26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도 참 좋아요^^

반딧불이 2013-12-27 09:58   좋아요 0 | URL
영화도 있군요..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2013-12-27 0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27 1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탱고 - 강렬하고 아름다운 매혹의 춤 살림지식총서 313
배수경 지음 / 살림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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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고와 관련하여 찾아본 책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탱고의 역사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부둣가에 대거 유입된 유럽 이민자들이 고단한 삶을 달래기 위해 처음 시작했다는 것, 유럽으로 수출되었다가 아르헨티나로 역수입되었다는 것, 처음엔 음악만 있었지만 가사가 생겨나고 클래식 음악과 접목하면서 지금의 탱고로 변화해왔다는 것, 다른 음악에서는 볼 수 없는 반도네온이라는 독특한 악기가 있다는 것 등이다.

 

탱고는 흔히들 춤의 성격에 따라 클래식 탱고, 누에보 탱고로 나누기도 한다. 이것은 서로 다른 장르의 춤이 아니라 무엇을 중시하는가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클래식 탱고는 클로징 아브라소를 통해 음악과 파트너와의 컨넥션을 중시한다. 반면 누에보 탱고는 클로징 아브라소로는 불가능한 화려하고 역동적인 동작을 구사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두 사람이 일정정도 거리를 둔 오픈 아브라소여야만 가능하다.

 

아브라소를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밀롱게로 스타일, 살롱탱고, 콘티넨탈 혹은 유로피안 탱고 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밀롱게로 스타일은 두 사람이 가슴을 아주 밀착시킨 상태로 춤을 춘다. 이 스타일은 음악과 파트너에게 집중하므로 파트너와의 교감이나 춤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살롱탱고는 한쪽 가슴은 밀착하고 다른 쪽은 오픈한 상태를 말하고 콘티넨탈 혹은 유로피안 탱고는 가슴을 밀착하지 않은 상태로 춤을 추는 것 같다.

탱고의 역사나 분류, 구성요소 외에도 배수경의 책에는 다른 책들과는 좀 다른 특징을 보이는데 그것은 탱고에 대한 다양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열정의 춤, 조용한 내면의 춤, 예술적 감성의 춤, 즉흥적이고 창조적인 춤, 책임이 따르는 춤, 무한히 발전하는 춤, 말 없는 교감의 춤, 낭만의 춤, 3분간의 연애, 합일의 춤, 자신을 수양하는 춤

 

열거한 11가지는 탱고에 대한 저자의 정의다. 저자의 모든 정의에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음료의 광고처럼 내게는 아직 2프로가 부족하다. 부족한 2프로는 뭘까. 나는 틈나는 대로 탱고에 대한 동영상을 찾아보고, 탱고에 관한 책을 읽고, 탱고음악으로 샤워를 하다시피 지내면서 탱고에 대한 나만의 정의를 내릴 수는 없을까 궁리하고 있다. 궁리할수록 매혹적이면서도 당혹스러운 것이 탱고다.

 

나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탱고를 시작하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친구 따라 밀롱가에 갔다가 배우게 되었다는 사람,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시작했다는 사람, 살사와 같은 다른 춤들을 배우다가 춤의 종착처럼 탱고에 다다르게 되었다는 사람 등 사람들의 동기는 평범하고 다양했다.

 

또 나는 그들에게 왜 탱고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모두 탱고와의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왜 탱고와의 사랑에 빠져있는지 궁금해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왜 좋아하는지 그 이유를 꼭 알아야하느냐고 되묻거나 그것을 궁금해 하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냥 좋으니까 한다는 그들의 말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진실한 답이었다. 그들은 즐거운 일에 열정을 다해 몰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내가 탱고에 빠지는 이유도 같은 맥락일 것 같다. 덧붙인다면 아마도 무언가로부터 도피하려는 몸짓이기도 할 것이고 결핍된 것을 충족시키려는 몸부림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뚜렷한 결과물을 내놓지도 못하면서 오랜 동안 허우적거리고 있는 언어의 진창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감각적이고 역동적인 춤은 이성으로부터, 언어로부터 얼마나 멀고 자유로운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에는 자신이 원하는 향수를 만들기 위해 살인을 불사하는 주인공 그루누이가 등장한다. 파리의 지저분한 생선가게 좌판에서 생선을 손질하던 칼로 탯줄이 잘려 쓰레기통에 버려지고도 용케 살아난 그에게는 체취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저주 받았다고 밖에 달리 말할 수 없는 능력을 갖고 있었는데 그건 세상의 모든 냄새를 맡고 변별할 수 있는 후각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가 그토록 향수에 집착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바람이나 구름, 냇물조차 가지고 있는 냄새를 자신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열망 때문은 아니었을까. 자신에게 없는 체취를 가장 매혹적인 향기로 채우고 싶은 욕망. 어쩌면 나도 내게 결핍된 것을 탱고에서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따스함, 웃음, 향기로움, 자유로움, 아름다움, 몰입, 신명....... 끝없이 나열되는 결핍들이 허기진 이빨을 세우고 달려드는 것 같다.

 

탱고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춤이다. 혼자 하는 일에 익숙하고 혼자 있지 못해 안달하는 내게 어쩌면 탱고는 함께 하는 일의 아름다움과 따스함을 알려주려고 하는 걸까? 고요한 시간, 혼자 떠올려 보는 내 모습은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팔랑거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내가 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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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1일부터 6일까지 서울에서는 “2013 서울 탱고 페스티벌이 열렸다. 나는 처음 경험하는 국제적인 행사였다. 아르헨티나에서 세 쌍의 마에스트로가 왔고 많은 외국인들이 오직 춤을 추기 위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날아들었다. 뉴질랜드, 하와이, 대만, 베이징, 일본, 홍콩 등에서 온 다양한 외국인들을 접하면서 그들에게 서울 탱고 페스티벌이 상당히 인기 있는 행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어느 나라에서 왔든 얼마나 나이를 먹었든 어떤 직업을 가졌든 아무런 편견 없이 오직 탱고라는 세계 공용어로 서로 소통하고 있었다. 그들은 밤을 새워 쉬지 않고 춤을 추었다.

 

마에스트로들의 모든 동작은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웠고, 역동적이면서도 부드러웠다. 공연을 하거나 강습을 할 때 그들은 진정으로 즐기고 있었고 때문에 얼굴에서는 행복한 표정이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춤이 끝나면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쪽쪽 소리가 나게 입맞춤을 하고, 엉덩이나 따귀를 때리는 시늉을 하며 장난을 해서 보는 이들도 즐거웠다. 세 쌍의 마에스트로들은 성격이 모두 달라보였다. 시골 할아버지와 할머니처럼 중후하면서도 친근한 호르헤와 마리아 (Jorge Dispari &Maria del Carmen Romero), 춤은 물론이려니와 몸매며 얼굴까지 아름답고 우아한 하비에르와 노엘리아(Javier Rodriguez &Noelia Barsi), 귀여운 악동 커플 같은 옥타비오와 꼬리나(Octavio Fernandez &Corina Herrera). 그들의 춤은 그들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문득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어떻게 보이는지 궁금해졌다. 나는 호르헤의 강습 두 개(Milonga con Traspie, Giro Combination), 하비에르의 강습 두 개(Milonga con Traspie, Adornos)를 들었다. 예민하면서도 상냥하고 섬세하면서도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하비에르는 밀롱가를 출 때는 탱고를 잊어버리라는 말로 두 춤의 변별성을 확실히 해주었다.

 

마에스트로들 중 가장 연장자인 호르헤 디스파리 (Jorge Dispari)는 살사나 재즈의 동작이 탱고에 묻어나는 것을 경계했다. 특히 그가 한 말이 내게는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어릴 때 누구나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며 놀았다는 것, 그때는 틀린다는 것을 몰랐으며 설사 틀렸다고 해도 즐거웠다는 것, 하지만 지금의 우리들은 틀릴까봐 걱정되어 즐기지도 못한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네 차례의 강습과 두 번의 밀롱가에 참여하면서 나는 체력적 한계와 더불어 노는 일의 어려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무슨 수영을 독립운동 하듯이 하느냐고 말하던 수영코치도 떠올랐고, 자기는 도저히 가르칠 수 없으니 다른 사람한테 배우라던 스키 코치, 도대체 몇 남자를 상대해야 직성이 풀리겠냐며 내가 포핸드로 공을 받아내는 동안 팔굽혀 펴기를 몇 개씩 하던 스쿼시 강사도 떠올랐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는 노는 일을 절체절명의 일을 하듯이 해왔던 것 같다. 모든 개인은 자신이 사는 세계를 반영한다는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나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세대였던 것이다. 개인의 욕망이나 쾌락보다 역사적 사명이 우선이라고 배웠고, 몸을 쓰는 일을 경멸하는 정신적 우월주의 시대를 살아왔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요즈음 잘 노는 사람이 가장 부럽다. 파트너가 설명을 듣는 동안 쿠션을 껴안고 춤을 추는 사람, 음악이 흘러나오면 온몸으로 반응하며 흥겨워 하는 사람, 동작 하나하나가 분명하고 단정한 사람, 춤추고 있는 동안 얼굴이 행복으로 물드는 사람. 이렇게 존재 자체만으로도 타인을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을 보고 있으면 내 가슴은 목련이 벙글 듯이 사랑스러움으로 뻐근해진다. 아마도 나는 오래 이런 사람의 주위를 공전할 것이다. 태양계에서 퇴출당한 명왕성처럼 춥고 어두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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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 - 떠돌이 철학자의 삶에 관한 에피소드 27
에릭 호퍼 지음, 방대수 옮김 / 이다미디어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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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주경야독(晝耕夜讀)이니 형설지공(螢雪之功)이니 하는 사자성어들을 처음 접했을 때 경외심이 일었다. 얇은 명주 주머니에 반딧불이를 잡아넣어 그 빛으로 글을 읽었다니! 겨울밤 눈 위에 반사되는 달빛을 이용해 글을 읽었다니! 얼마나 간절하고 아름다운 일이냐.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 말은 나에게 가난을 정당화하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고상한 압력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호롱불로 두터운 어둠에 구멍을 뚫고 살던 때엔 당연한 일 아니냐고, 개똥벌레나 눈빛에 비추어 보는 건 아버지가 눈 어두울 때 돋보기 찾아 끼는 것과 다른 게 아니라고 구시렁거리기도 했다.

 

주경야독이나 형설지공의 주인공들은 호롱불을 밝힐 기름도 없던 가난을 이기고 훗날 벼슬길에 나서서 안정적인 삶을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낮보다 더 밝은 밤을 살면서 밤을 낮 삼아 일로 내몰리거나 또 잠을 착취당한 현대인에게도 설득력을 갖는 것이리라. 그런데 여기 일생동안 길 위로 스스로를 내몰았던 사람이 있다. 그는 부두의 노동자로 오렌지 행상으로 자두 농장의 막일꾼으로 레스토랑의 웨이터로 전전하면서 밑바닥 인생을 피해가지 않았다.

 

그야말로 주경야독의 현대판 주인공으로 낮에는 일을, 밤에는 글을 읽고 사색을 했다. 그 사색의 결정판이 맹신자들이다.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을 적은 이 책은 1951년에 발표 되었다. 나치즘과 2차 세계대전 직후에 나온 이 책은 광신적 기독교 신자나 광신적 민족주의자 광신적 나치 등에 내재된 공통적 속성을 찾아간다. 극심한 자기부정이 정체성을 잃게 하고 대중운동의 광신자가 되게 한다는 그의 논리는 나치즘이나 테러리스트 폭탄 테러자의 심리를 이해하는 데에도 일정정도 도움이 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언더그라운드에 나오는 사린가스 유포자의 심리도 같은 맥락일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엘리트로 인정받던 사람들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 살인에 동참하게 되는 행위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자서전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단순히 그의 일생을 펼쳐놓는데 그치고 있지는 않다. 그보다는 저자의 사색과 통찰이 밑바닥 노동자의 삶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 살펴보는 데 더 유용하다. 그는 머리를 아래로, 엉덩이를 위로 하는 것이 사유의 가장 좋은 자세일거라고 말하며 동시에 두 방향으로 끌어당기는 것은 영혼의 스트레칭이라고한다.

 

함께 일한 노동자들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그가 관찰하고 깨달은 것들을 덧붙이는 식의 글쓰기 방식도 눈여겨보는 것이 좋겠다. 그가 소개하는 일화들은 가볍고 재미있지만 그의 사색의 흔적들은 결코 재미있지도 가볍지도 않다. 밑줄 그어 놓은 것들을 아래 옮겨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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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행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그의 얼굴에 각인된다. 인간의 얼굴은 자신의 모든 비밀을 드러내는 한 권의 열린 책이다. 그러나 상형문자로 쓰여지기 때문에 그것을 해독할 수 있는 열쇠를 지닌 사람은 극소수다.

 

-절대 권력은 선의의 목적으로 행사될 때에도 부패한다. 백성들의 목자를 자처하는 자비로운 군주는 그럼에도 백성들에게 양과 같은 복종을 요구한다.

 

-성숙한 이는 자신의 귀보다는 눈을 더 신뢰한다. 눈의 명료함보다 말을 더 믿는 데에서 비합리성이 나타난다. 어린아이와 미개인 그리고 맹신자들은 그들이 보아온 것보다는 들어왔던 것들을 더 잘 기억한다.

 

-자기기만이 없다면 희망은 존재할 수 없지만, 용기는 이성적이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를 본다. 희망은 소멸할 수 있지만 용기는 호흡이 길다. 희망이 분출할 때에는 어려운 일을 시작하는 것이 쉽지만 그것을 마무리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전쟁을 이기고, 대륙을 제압하고 나라를 세우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희망 없는 상황에서 용기가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줄 때 인간은 최고조에 달할 수 있다.

 

-약자 속에 내재하는 자기혐오는 일상적인 생존경쟁에서 유발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에너지를 드러낸다. 약자들에게서 분출되는 강렬함은 말하자면 그들에게 특수한 적응력을 부여해 주는 것이다.

 

-절망과 고통은 정태적인 요소이다. 상승의 동력은 희망과 긍지에서 나온다. 인간들로 하여금 반항하게 하는 것은 현실의 고통이 아니라 보다 나은 것들에 대한 희구이다.

 

-40대가 청소년보다 배우는 것이 쉽지 않다거나 쉽게 잊는다는 증거는 없다. 중년은 보다 감각이 예민하고, 인생의 소중함을 알고 있으며, 관찰과 행동에 있어 끈기가 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우리의 경제 시스템은 안정적 수입원을 확보하는 데 인생의 절반을 필수적으로 소비하도록 하고 있다. 현실이 그러하더라도 이제 남은 나머지 절반은 상부 구조의 건설에 바쳐져야 한다. 그러나 거기에 손대는 사람은 100만명 가운데 한명도 없다. 우리에게 은퇴란 희화이고 잔인한 농담이다. 우리의 쇠락하는 여생이 권태와 실망으로 찌들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적 생활양식은 단죄되어야 한다. 노년은 감미롭고 향기로운 인생의 열매여야 한다.

 

-나는 계속 지폐 뭉치를 응시했다. 갑자기 내 손에 쥐고 있는 것이 평범한 달러가 아니라 놀라운 힘을 지닌 부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할 일은 부적을 흔드는 것이었고, 세상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할 터였다.

 

-약한 소수 민족인 유대인과 아직 봉건 영주의 발굽 아래 있었던 상인계급이 은행의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해 왔던 일을 생각해 보면 돈은 약자들이 고안해 냈다는 것이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이들은 언제나 돈을 증오했다. 그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고상한 이상에 따라 움직이기를 기대하고, 공포를 이용해서 권력을 지탱하려다 죽는다. 돈이 지배적인 역하라을 멈추는 순간에 자동적인 진보는 그 종말을 맞을 것이다. 그리고 문명의 몰락은 통화의 붕괴로 나타날 것이다.

 

-친숙성은 생의 날카로운 날을 무디게 한다. 아마 예술가의 본모습은 이 세상에서의 영원한 이방인이거나 다른 별에서 온 방문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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