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 - 떠돌이 철학자의 삶에 관한 에피소드 27
에릭 호퍼 지음, 방대수 옮김 / 이다미디어 / 200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주경야독(晝耕夜讀)이니 형설지공(螢雪之功)이니 하는 사자성어들을 처음 접했을 때 경외심이 일었다. 얇은 명주 주머니에 반딧불이를 잡아넣어 그 빛으로 글을 읽었다니! 겨울밤 눈 위에 반사되는 달빛을 이용해 글을 읽었다니! 얼마나 간절하고 아름다운 일이냐.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 말은 나에게 가난을 정당화하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고상한 압력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호롱불로 두터운 어둠에 구멍을 뚫고 살던 때엔 당연한 일 아니냐고, 개똥벌레나 눈빛에 비추어 보는 건 아버지가 눈 어두울 때 돋보기 찾아 끼는 것과 다른 게 아니라고 구시렁거리기도 했다.

 

주경야독이나 형설지공의 주인공들은 호롱불을 밝힐 기름도 없던 가난을 이기고 훗날 벼슬길에 나서서 안정적인 삶을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낮보다 더 밝은 밤을 살면서 밤을 낮 삼아 일로 내몰리거나 또 잠을 착취당한 현대인에게도 설득력을 갖는 것이리라. 그런데 여기 일생동안 길 위로 스스로를 내몰았던 사람이 있다. 그는 부두의 노동자로 오렌지 행상으로 자두 농장의 막일꾼으로 레스토랑의 웨이터로 전전하면서 밑바닥 인생을 피해가지 않았다.

 

그야말로 주경야독의 현대판 주인공으로 낮에는 일을, 밤에는 글을 읽고 사색을 했다. 그 사색의 결정판이 맹신자들이다.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을 적은 이 책은 1951년에 발표 되었다. 나치즘과 2차 세계대전 직후에 나온 이 책은 광신적 기독교 신자나 광신적 민족주의자 광신적 나치 등에 내재된 공통적 속성을 찾아간다. 극심한 자기부정이 정체성을 잃게 하고 대중운동의 광신자가 되게 한다는 그의 논리는 나치즘이나 테러리스트 폭탄 테러자의 심리를 이해하는 데에도 일정정도 도움이 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언더그라운드에 나오는 사린가스 유포자의 심리도 같은 맥락일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엘리트로 인정받던 사람들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 살인에 동참하게 되는 행위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자서전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단순히 그의 일생을 펼쳐놓는데 그치고 있지는 않다. 그보다는 저자의 사색과 통찰이 밑바닥 노동자의 삶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 살펴보는 데 더 유용하다. 그는 머리를 아래로, 엉덩이를 위로 하는 것이 사유의 가장 좋은 자세일거라고 말하며 동시에 두 방향으로 끌어당기는 것은 영혼의 스트레칭이라고한다.

 

함께 일한 노동자들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그가 관찰하고 깨달은 것들을 덧붙이는 식의 글쓰기 방식도 눈여겨보는 것이 좋겠다. 그가 소개하는 일화들은 가볍고 재미있지만 그의 사색의 흔적들은 결코 재미있지도 가볍지도 않다. 밑줄 그어 놓은 것들을 아래 옮겨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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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행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그의 얼굴에 각인된다. 인간의 얼굴은 자신의 모든 비밀을 드러내는 한 권의 열린 책이다. 그러나 상형문자로 쓰여지기 때문에 그것을 해독할 수 있는 열쇠를 지닌 사람은 극소수다.

 

-절대 권력은 선의의 목적으로 행사될 때에도 부패한다. 백성들의 목자를 자처하는 자비로운 군주는 그럼에도 백성들에게 양과 같은 복종을 요구한다.

 

-성숙한 이는 자신의 귀보다는 눈을 더 신뢰한다. 눈의 명료함보다 말을 더 믿는 데에서 비합리성이 나타난다. 어린아이와 미개인 그리고 맹신자들은 그들이 보아온 것보다는 들어왔던 것들을 더 잘 기억한다.

 

-자기기만이 없다면 희망은 존재할 수 없지만, 용기는 이성적이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를 본다. 희망은 소멸할 수 있지만 용기는 호흡이 길다. 희망이 분출할 때에는 어려운 일을 시작하는 것이 쉽지만 그것을 마무리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전쟁을 이기고, 대륙을 제압하고 나라를 세우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희망 없는 상황에서 용기가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줄 때 인간은 최고조에 달할 수 있다.

 

-약자 속에 내재하는 자기혐오는 일상적인 생존경쟁에서 유발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에너지를 드러낸다. 약자들에게서 분출되는 강렬함은 말하자면 그들에게 특수한 적응력을 부여해 주는 것이다.

 

-절망과 고통은 정태적인 요소이다. 상승의 동력은 희망과 긍지에서 나온다. 인간들로 하여금 반항하게 하는 것은 현실의 고통이 아니라 보다 나은 것들에 대한 희구이다.

 

-40대가 청소년보다 배우는 것이 쉽지 않다거나 쉽게 잊는다는 증거는 없다. 중년은 보다 감각이 예민하고, 인생의 소중함을 알고 있으며, 관찰과 행동에 있어 끈기가 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우리의 경제 시스템은 안정적 수입원을 확보하는 데 인생의 절반을 필수적으로 소비하도록 하고 있다. 현실이 그러하더라도 이제 남은 나머지 절반은 상부 구조의 건설에 바쳐져야 한다. 그러나 거기에 손대는 사람은 100만명 가운데 한명도 없다. 우리에게 은퇴란 희화이고 잔인한 농담이다. 우리의 쇠락하는 여생이 권태와 실망으로 찌들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적 생활양식은 단죄되어야 한다. 노년은 감미롭고 향기로운 인생의 열매여야 한다.

 

-나는 계속 지폐 뭉치를 응시했다. 갑자기 내 손에 쥐고 있는 것이 평범한 달러가 아니라 놀라운 힘을 지닌 부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할 일은 부적을 흔드는 것이었고, 세상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할 터였다.

 

-약한 소수 민족인 유대인과 아직 봉건 영주의 발굽 아래 있었던 상인계급이 은행의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해 왔던 일을 생각해 보면 돈은 약자들이 고안해 냈다는 것이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이들은 언제나 돈을 증오했다. 그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고상한 이상에 따라 움직이기를 기대하고, 공포를 이용해서 권력을 지탱하려다 죽는다. 돈이 지배적인 역하라을 멈추는 순간에 자동적인 진보는 그 종말을 맞을 것이다. 그리고 문명의 몰락은 통화의 붕괴로 나타날 것이다.

 

-친숙성은 생의 날카로운 날을 무디게 한다. 아마 예술가의 본모습은 이 세상에서의 영원한 이방인이거나 다른 별에서 온 방문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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