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양이 뭐지? : 음양편 젊은 한의사가 쉽게 풀어 쓴 음양오행
어윤형, 전창선 지음 / 와이겔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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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와 인간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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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그린 그림 - 미술사 최초의 30가지 순간
플로리안 하이네 지음, 최기득 옮김 / 예경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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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거꾸로 된 그림이 전시장에 걸려 있다. 관람객은 그것을 어떻게 보게 될까? 똑바로 서서 거꾸로 된 그대로 보게 될까, 아니면 바로 보기 위해 머리를 아래로 향하게 될까?

거꾸로 그린 그림이 전시장에 걸렸을 때, 비평가들은 그림을 바로 보기 위해 머리를 아래로 내리고 보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웃음을 터트렸고 전시회는 산만하게 끝나 버렸다. 그러나 거꾸로 된 그림을 최초로 그린 화가 게오르그 바젤리츠는 이런 상황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잃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모든 거꾸로 된 그림은 그의 상표가 되었고, 사람들은 거꾸로 그린 듯한 그림만 나오면 바젤리츠를 연상하게 되었다.

나는 거꾸로 된 그림이 바로 그린 그림을 단지 아래 위를 뒤집어 놓은 것인지, 아니면 정말 거꾸로 그린 것인지만 궁금할 뿐 이런 별난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시도가 화가에게는 상당히 중요했던 모양이다. 물체를 거꾸로 그림으로써 주제의 의미는 사라지고 감상자들은 오히려 회화적인 결과에만 관심을 집중하게 되는 효과를 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젤리츠는 왜 그림을 거꾸로 그렸을까?

모든 창작자들은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기법이나 양식 혹은 내용에 갈증을 낸다. 화가도 예외는 아니다. 이제까지의 회화사에 없었던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을 만들어야 한다는 욕망과 부담감이 이런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로크니 로코코니 낭만주의니 인상주의니 하는 모든 새로운 양식에는 최초로 그러한 양식을 시작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최초로 미술이 탄생한 것은 동굴 벽화였다. 벽화에 나타나는 코뿔소나 메머드 같은 동물그림을 누가 그렸는지, 왜 그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름 상당한 힘이 느껴진다.

콘트라포스토자세로 서서 탄력 있는 가슴과 S라인을 만들어내는 <밀로의 비너스>같은 고대의 조각상은 완벽한 균형미로 나를 기죽인다. 남자의 나체상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생각나게 한다. 가만히 앉아있는데도 불구하고 온몸의 근육이 꿈틀거리는 듯한 느낌을 전해주는 이 조각상은 차라리 짐승남이라고 하는 편이 옳다. 피가 초고속으로 전신의 혈관을 질주하는 것만 같은 근육질의 이 남자가 생각에 붙잡혀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성의 힘이 청동보다도 더 무겁게 느껴진다. <밀로의 비너스>나 <생각하는 사람>은 그러나 인간 육체의 결점을 보완해 만든 이상형의 몸이라고 하니 너무 주눅 들지 말기로 하자.

그럼 이런 환상의 몸매를 가진 조각상 말고 인간의 누드를 보고 그린 최초의 누드화는? 1425년 피사넬로라는 화가가 그린 드로잉이라고 한다. 여성 모델을 이용해 나체를 그리는 일이 흔치 않았던 당시에 모델을 한 여성들도 놀랍지만 작고 정교한 이 드로잉에 나오는 한 여성의 다리는 줄줄이 비엔나소시지를 닮았다.

최초의 초상화, 최초의 자화상 같은 것은 한 번쯤 접해 보았었지만, 최초로 밤을 그린 그림이나 최초로 그린 겨울 풍경화 같은 것을 보고 있으면 내가 그동안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에 대한 예술가들의 고뇌가 느껴져 부끄럽기도 하고 감탄스럽기도 하다. 특히 재미있었던 것은 발가벗긴 아기 예수가 성모 마리아의 무릎에 엎어져서 엉덩이를 맞고 있는 그림이었다. 아기예수의 엉덩이에 손자국이 벌겋게 나있고 성모의 눈에는 흰자위가 그득하다.

이 책은 고대 동굴벽화부터 물감을 뿌려서 그리는 잭슨 폴락, 한때 삼성의 비자금을 조성하는데 한몫했던 팝아트, 작년인가, 덕수궁 현대 미술관에서 보았던 이스트로 반죽한 듯 부풀어 있는 페르난도 보테로의 그림까지 모든 미술사의 최초를 모아 엮었다. 당시에는 천재 아니면 광인으로 불렸을  모든 최초에 설명과 그림을 곁들였다. 그림이 선명하고 크기도 적당해서 인터넷으로 따로 찾아보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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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6-17 0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스트리아에 가시면 미술관이며 박물관도 돌아보시는 건가요?
그림 감상을 즐기는 지인 한 분이 책이나 카달로그에 나오는 그림과 실제 가서 대면하는 그림은 과장을 좀 보태자면 완전히 다른 그림이라던데...
좋은 기회가 되겠네요. 그림 많이 보고 오세요^^

반딧불이 2010-06-17 09:35   좋아요 0 | URL
그러고 싶은데 워낙 소문난 저질 체력이라 가능할지 모르겠어요. 원래 준비를 하면 한만큼 실망하기도 하고 안하면 안한만큼 충격이 오기도 하고 그런게 여행인것 같아요.

비로그인 2010-06-17 0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만히 앉아있는데도 불구하고 온몸의 근육이 꿈틀거리는 듯한 느낌을 전해주는 이 조각상은 차라리 짐승남이라고 하는 편이 옳다."라는 느낌을 받으실 정도의 반딧불이님이시라면 빈의 여행이 얼마나 값지실지 상상이 되어요.

저도 가끔 그림들을 보면서나 사진들을 보면서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에 대한"이라는 생각을 해보곤 했습니다. 이렇게, 그 어느 순간을 포착할 수 있는 감성과 지성도 대단하구나 라는 ... 느낌이실 것 같아요.


p.s 빈에 있는 중요 두 미술관에 전시된 클림트의 작품은 꼭 보셨으면 좋겠어요. 그가 그린 풍경화를 보고서야 ..저는 아! 클림트 ! 했던 것 같아요. 좋은 여행 되세요. ^^반딧불이님.

반딧불이 2010-06-17 09:42   좋아요 0 | URL
클림트 저도 좋아해요. 특히 그림속의 황금빛이요. 1000피스 퍼즐 맞추기, 냉장고에 붙어있는 악세서리, 키홀더..이런게 다 클림트 그림이에요. 클림트도 에곤 실레도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2010-06-17 1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17 1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06-17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림에 관심이 많은데요......
유럽에 가진 못하지만 가을에 광주 비엔날레라도 가야겠네요^^
유익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반딧불이 2010-06-17 10:17   좋아요 0 | URL
닥나무님 관심영역이 어디까지인지도 궁금해져요. 사람없는 날이 언제일까 고민하다가 늘 놓쳐버리는 비엔날레. 올해는 비오는 날로 잡아볼까 싶어요. 음감도 좋네요. 비엔날레, 비온날로

cyrus 2010-10-04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내용에서 제일 흥미 있는 것이 최초로 꿈을 그림으로 표현한 뒤러가
인상 깊었습니다. 이 책 읽기 전에는 달리인 줄 알았는데.. 이 책 덕분에
새로운 미술사적 지식을 얻어서 좋았답니다ㅎㅎ 아무도 관심 없었던 미술사의 최초에
대해서 다룬 것도 흥미로웠구요^^

반딧불이 2010-10-04 20:38   좋아요 0 | URL
최초에 대해서 다룬 건 신선한 발상이었는데 그 발상만큼 글이 재미있었던 건 아니어서 좀 아쉬웠던 책이었어요.
 
오스트리아 CURIOUS 42
수잔 로라프.줄리 크레이시 지음, 노지양 옮김 / 휘슬러 / 2005년 10월
평점 :
절판


 

예정된 여행이 있어 급한대로 통독하며 메모를 했다. 갈 곳이야 빈과 잘츠부르크 달랑 두 곳이지만  전체적인 분위기 파악을 해야했다. 일행들이 워낙 입으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이니 별 걱정도 안된다만 무식이 탄로나지 않게 눈요기라도 해야하는 상황이다. 

한데 책이 역사 문화부터 시작해 오스트리아로 이주할 사람들을 위한 안내까지 뭐 하나 빠진게 없다. 덕분에 국제 원자력기구인 IAEA의 본부가 있다는 것, 석유수출국 기구인 OPEC의 사무국도 오스트리아에 있다는걸 알았다. 수도  빈(WIEN)은 독일식 발음이며 영어로는 비엔나(VIENNA), 체코어로는 비덴(VIDEN), 헝가리어로는 벡스(BECS)라고 부른단다. 주변국이 많아 이렇게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니 갑자기 갑갑한 생각이 들었다.  

오스트리아에 예술가들은 또 왜 이리 많나. 모짜르트, 베에토벤, 슈베르트, 슈트라우스, 말러, 부르크너, 쇤베르크, 하이든, 브람스, 클림트, 에곤 실레, 슈테판 츠바이크까지 헥헥.....  갖고 있는 씨디들을 뒤져서 음악은 일단 아이팟에 담아야 하겠다. 클림트도 츠바이크도 눈도장은 한번 찍고 가야할텐데 이거 뭐 눈도장 찍을 것들을 꺼내놓고 보니 강행군을 해야할 판이다. 모가지도 안돌아가는데.....  

먹을 것도 넘쳐난다. 다양한 빵종류부터 커피, 와인, 맥주 등등 이거 다 맛보고 올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치즈와 구더기>라는 책의 표지로 쓰인 그림 <농부의 결혼식>이 빈 미술사 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프로이트 박물관, 모짜르트 생가, 위에 열거한 저 많은 사람들이 묻혀 있다는 중앙묘지에 가서 예술적 영감을 훔쳐라도 올 수 있으면 좋으련만.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를 가 볼 수 있을까 모르겠다만 일단 기억해 두기로 한다. 그런데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만큼이나 내게는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이 이 책의 표지다. 이 남자가 책의 제목을 압도하는 바람에 내용은 뒷전이 되어버릴 것같다.  

책 속의 정보들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다. 오스트리아에 대한 개괄은 이것으로 충분할 듯 하다. 다만 얼마나 써먹을 수 있을까, 현지에 갔을 때 어느정도 도움이 될까가 남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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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3 07: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13 16: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10-06-16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빈보다 잘츠브르크가 더 좋았어요!!!!
이 글을 읽고 있으니 몸은 이미 그곳에 가있는것 같아요~.
목도 아프신데 강행군을 하시는건 아닌가요????????
책 표지의 저 청년은 누구래요?????ㅎㅎㅎ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인물인가???ㅎㅎㅎ
암튼 조심해서 잘 다녀오세요,,,여행을 하실 정도면 이제 많이 좋아지신거라 생각할께요(맘대로,,ㅎㅎㅎ)

반딧불이 2010-06-16 10:15   좋아요 0 | URL
잘츠인지 빈인지 저도 다녀와서 말씀드릴께요.
그리고 제병은 놀러 못가서 난 병이에요~ 좀 쏘다니면 멀쩡해져서 돌아온다는...

라로 2010-06-16 18:01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그럼 그대신 사진 많이 찍어 오세요~~~.^^
언제 가세요????

반딧불이 2010-06-17 01:31   좋아요 0 | URL
나비님. 7월 초에 가요. 사진은...음..그냥 풍경을 마구마구 오려오죠 머.

라로 2010-06-17 10:21   좋아요 0 | URL
오려오시든 찍어 오시든 패오시든 많이만 가져오셈~~~ㅎㅎㅎㅎ
나도 꼬랑지에 붙어서 따라가고 시프다,,,힝힝힝
 
밥그릇 경전 - 2010 제4회 시작문학상 수상작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80
이덕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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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가을밤이었다. 어느 낯선 간이역 대합실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새벽녘, 어떤 서늘한 손 하나가 내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왔다.
순간 섬뜩했으나,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때 내가 가진 거라곤 날선 칼 한 자루와 맑은 눈물과 제목 없는 책 따위의 무량한 허기 뿐이었으므로.
그리고, 이른 아침 호주머니 속에선 뜻밖에 오천원권 지폐 한 장이 나왔는데,
그게 여비가 되어 그만 놓칠 뻔한 청춘의 막차표를 끊었고, 그게 밑천이 되어 지금껏 잘 먹고 잘 산다.

그때 다녀가셨던 그 어른의 주소를 알 길이 없어......, 그간의 행적을 묶어 소지하듯 태워 올린다.

이덕규 시인의 첫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에 실린 자서(自書)다. 항간에는 시집에 실린 시보다 이 자서가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아내에게 혹은 부모님께 바친다는 일부 시인들의 자서를 평가절하 할 의도는 없지만 이덕규 시인의 자서가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사실이다. 그가 두 번째 시집 『밥그릇 경전』을 낸 것은 지난 2009년 이른 봄이다. 실천문학사의 시집 판형이 바뀌고 나온 첫 번째 시집이다. 판형이 더 커지고 책값도 8000원으로 올랐다.

이덕규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 2010년 <시작 문학상>을 받았다. <시작> 여름호에는 첫 번째 시집과 두 번째 시집의 시가 각각 다섯 편씩 실렸다. 어째서 수상작인 두 번째 시집의 시만을 싣지 않고 이렇게 반반씩 나누어 실었는지 그 의도는 알 수 없다. 다만 김수이 문학 평론가가 첫 번째 시집과의 연장선에서 두 번째 시집의 해설을 쓴 때문이 아닌가 혼자 짐작해 볼 뿐이다.

시집 끝에는 <담백한 이념의 뭉게구름소스>라는 제목의 해설이 실려 있다. 평론가는 이덕규 시인의 시적 영토를 세 가지로 분류한다. 자신과의 내적 분쟁,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각성과 비판, 전통 삶의 원리에 대한 애정과 그 현재적, 내면적 활용이 그것이다. 시인의 시를 내용상으로 분석, 분류하고 새로운 이름아래 모으고 있다. 평론가의 이런 분류와 이름 짓기는 시인이 어떤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런 이름아래서는 시를 논리적으로 이해하려는 성향이 강해지기 때문에 시의 아름다움과는 당연히 멀어질 수밖에 없다. 일찍이 『서정은 진화한다』에서 그녀가 보여준 현대시 진단에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그곳에서 빛나던 그녀의 논리가 이곳에서도 여전하다는 말은 하지 못하겠다.

해설과는 무관하게 시집은 섬뜩하고 따뜻한 이야기, 선명한 이미지, 질탕한 가락으로 가득 차 있다. 시인이 마음 두고 있는 것은 밥, 구름, 독, 돌멩이 등이다. 그리고 이것들을 지배하는 색깔은 흰색이다. 공사판에서 들판에서 까맣게 그을린 시인에게 흰색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시보다 시인을 먼저 알았지만 도무지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 언젠가 내 나름대로의 해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우선은 시인의 질탕한 언어유희를 같이 즐겨보자.
 

논두렁

 

 

찰방찰방 물을 넣고

간들간들 어린모를 넣고 바글바글 올챙이 우렁이 소금쟁이 물거미 미꾸라지 풀뱀을 넣고

온갖 잡초를 넣고 푸드덕, 물닭이며 논병아리며 뜸부기 알을 넣고

햇빛과 바람도 열댓 마씩 너울너울 끊어 넣고

무뚝뚝이 아버지를 넣고 올망졸망 온 동네 어른 아니 모다 복닥복닥 밀어넣고

 

첨벙첨벙 휘휘 저어서 마시면,

 

맨땅에 절하듯

누대에 걸쳐 넙죽넙죽 무릎 꿇고 낮게 엎드린 생각들 길게 이어 붙인

저 순하게 굽은 등짝에 걸터앉아

미끈유월, 그 물텀벙이 한 대접씩 후르륵 뚝딱 들이켜면

허옇게 부르튼 맨발들 갈퀴손가락들 건더기 째 꿀떡꿀떡 넘어가겠다

 

 

 
어떤 후일담

 

눈 올 때마다 마당 끝으로 밀어붙여 쌓아놓은

눈 더미, 한겨울 지나 모두들 떠났는데 아직도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신음하는

눈 더미, 잘못 든 길 끝에서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죽어가는 떠돌이 여행자의 몽롱한 중얼거림 같은

눈 더미, 무심코 걷어찬 발길질에 지상에 내려와 가장 오래 머문 흰빛이 옆구리에서 환하게 뿜어져 나오는

눈 더미, 혼절했던 어둔 짐승이 문득 깨어나 제 상처를 들여다보며 지르는 외마디 비명 같은

눈 더미, 깊은 어둠 속에 숨어 금서에 발라 먹던 형설(螢雪)! 그 담백한 이념의 뭉게구름소스 같은

눈 더미, 한때 공중에 세웠다가 무너져 내린 망명정부 기밀문서 같은

눈 더미, 명명백백한 세계의 밑그림을 그리다가 감쪽같이 증발한 어느 혁명가의 구겨버린 비밀수첩 같은

눈 더미, 시뻘건 담배꽁초를 눈에 틀어박자 그 멀고 먼 설구구의 비밀을 고통스럽게 발성하는

눈 더미, 허공에 빛나는 그 만년제국의 내력을 읽어내려는 순간 백지의 반란 같은 눈사태가 내 머릿속을 덮쳐 온통 캄캄해지는

눈 더미, 누구나 한번쯤 읽었지만 지금껏 단 한 사람도 읽어내지 못한 불후의 베스트셀러 같은

눈 더미, 먼 길을 돌아 나온 늙은 자작나무 토막처럼 모락모락 옛이야기를 피워 올리며

서서히 타들아 가는 유언장 같은 이, 눈 더미

 

 

 
연애질

 
북조선에선 남녀가 사귀는 걸 두고 연애질이라고 한다는데, 연애질!

그 질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뭔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게 보여

삽질 가래질 쟁기질 써래질 호미질 낫질로 일구어낸 만 평 푸른 보리밭 물결이 보이고

휘영청 달빛 젖은 이랑 사이로 밤새 축축하게 걸어놓은 물방아 소리 들려오는데

누가 거기 대고 손가락질을 하겠어

뭔가 질퍽대고 싶은 게 사랑인데

흘끔흘끔 곁눈질만 하다가 깔짝깔짝 입질만 하다가 돌아서는 당신

어디 이걸 낚시질이라 할 수 있겠어

핏대 세우고 삿대질만 해대는 당신들 쌈질은 발길질 주먹질로 걸어야지

연장 있으면 뭐 해 연장질을 해야지

애정 전선에 균열이 생기면 즉지 구멍 난 냄비나 솥단지 때우듯

물 샐 틈 없이 온몸으로 땜질을 해야지

열흘 굶고도 도적질할까 말까 망설이는 당신 말이야

그 우라질 마음만 있으면 뭐 하냐구, 몸이 떠나는데 그걸 뭣에다 쓰냐구 젠장!

 

논두렁 밭두렁을 누비던 농부의 재간은 논밭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언어의 이랑과 고랑을 누비며 시 짓는 노고가 즐겁다. 그리고 그가 추수한 밥에 대한 시는 양보다 질이다. 농약 잔뜩 뿌려 거두어들인 풍년이라기보다는 한 섬 유기농 쌀이다.



뚝딱, 한 그릇의 밥을 죽이다

 

 

먼 들판에서 일에 몰두하다 보면 문득 허기가 밀려와 팔다리를 마구 흔들어댈 때가 있다 사람을

삼시 세끼 밥상 앞에 무릎 꿇려야 직성이 풀리는 밥의 오래된 폭력이다

때를 거르면 나를 잡아먹겠다는 듯이

사지를 흔들어대는 허기진 밥의 주식(主食)은 그러니까 오래전부터 사람이다

결국 사람은 모두 밥에게 먹힌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빈 밥통의 떨림

 

그러나, 우물처럼 깊고 어두운 밥통의 고요한 중심에 내려가 맑은 공명을 즐기듯

먹먹하게 담배를 피워 물고 논두렁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어느 순간

감쪽같이 배고픔이 사라지고 어떤 기운이 나를 다시 천천히 일으켜 세우는 것인데, 그 힘은

내마음 어딘가에 마지막으로 밥을 제압하기 위해 비축해둔 또 다른 밥의 농밀한 엑기스인 치사량의 독과 같은 것이다

 

그 옛날 사나흘 굶고도 알 수 없는 기운으로 벌떡 일어나 품을 팔았던 어머니들처럼

수시로 닥치는 밥의 위기 때마다 마지막인 듯 두 눈 부릅뜬 채 막다른 곳으로 밥을 밀어붙이면 비로소

밥은 모락모락 두 손 들고 밥상 위로 올라온다

그래 먼 들판에서 하던 일마저 끝내고

허적허적 돌아와 그 원수 같은 한 그릇의 밥을 죽이듯 뚝딱, 해치우고 나면

내 마음의 근골 깊은 절미 항아리 속으로

낮에 축낸 한 숟가락의 독이 다시 꼬르륵, 들어차는 소리 듣는 것이다

 

나는 밥의 중함을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삼시 세끼 밥상 앞에 무릎 꿇려야 직성이 풀리는 밥의 오래된 폭력’은 충분히 이해된다. 그리고 ‘때를 거르면 나를 잡아먹겠다는 듯이/사지를 흔들어대는 허기진 밥의 주식은 그러니까 오래전부터 사람’이라는 시인의 말에 공감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젠장, 인간은 누구나 밥의 밥이다. 시집의 표제작보다 더 경건해지던 시였다. 표제작도 옮겨둔다.

 

 

밥그릇 경전

 

 

어쩌면 이렇게도

불경스런 잡념들을 싹싹 핥아서

깨끗이 비워놨을까요

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금강(金剛)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 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로 굴리고 밟고

으르렁그르렁 물어뜯다가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어느 경지에 이르면

저렇게 마음대로 제 밥그릇을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테두리에 잘근잘근 씹어 외운

이빨 경전이 시리게 촘촘히

박혀 있는, 그 경전

꼼꼼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 대목에선가

할 일 없으면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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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6-12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좋은 시들로 마음의 기름기를 씻어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반딧불이 2010-06-12 19:26   좋아요 0 | URL
후와님. 이 시들은 안 쌀쌀맞지요?

비로그인 2010-06-13 04:15   좋아요 0 | URL
ㅎㅎㅎ 예, 저녁 짓는 냄새 가득한 골목처럼 아주 따뜻합니다^^

비로그인 2010-06-13 0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5천원으로 세상을 살고, 그 5천원 같은 세상이 있어줄 것 같아 덤벙대다가 저 시궁창 어딘가에 빠져 닮아빠진 이를 북~북~ 갈다가, 다시 또 그 5천원을 누군가에 베풀고는 & 또 누군가에게 받고는 언 가슴이 슬그머니 녹혀진 것으로 위안삼아 이 세상을 버티고 살아가기도 하지요.
시가 아니라 작은 에세이 같은 글들이네요..반딧불이님.

반딧불이 2010-06-12 22:26   좋아요 0 | URL
시인의 첫시집에 실린 자서에요. 현대인들님.
여행 후유증 없이 잘 지내시죠?

2010-06-13 1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10-06-16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요즘 먹는 한약 때문에 팔에 두드러기가 한창인데
자면서 팔을 벅벅 긁다가 일어났어요.ㅠㅠㅠ

반딧불이님 뭐하시는 분이세요?????점점 궁금~ㅎㅎㅎㅎㅎㅎ

앞으로 할 일 없으면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말을 기억하겠습니다.
사실 오늘 남편이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제가 해든이 샤워시켜 재우느라
저녁먹은 설거지 내일 아침 준비하면서 하려고 미뤄뒀는데
이러고 할일없이 알라딘이나 돌아댕기지 말고 밥그릇이나 씻어야겠어요,,,


반딧불이 2010-06-16 10:19   좋아요 0 | URL
한약때문에 그러시다면...약 지은 곳에 문의해보세요. 두드러기가 콧구멍, 목구멍까지 나서 응급실까지 갔던 1인이에요.

나비님. 정말 제가 뭐하는 사람일까요?(또 고상한척 한다)
저도 늘 밥그릇 씻는 사람이어요.

그나저나 해든이 노동좀 고만시켜욧! 허리아파 뒷짐지고 물주더만~ ㅋㅋ

라로 2010-06-16 18:00   좋아요 0 | URL
문의했죠!! 두드러기 없어질때까지 약을 안먹으면 안돼냐니까 이 막무가내 선생님이 침을 놔주시면서(침 놔주면 잠시 가라앉은듯 보임) 좀 참으면 좋아질거니까 참으라고,,ㅠㅠ,,벌써 3주째라는,,ㅠㅠㅠㅠ

그런데 두드러기가 콧구멍, 목구멍까지 나요???헉
지금은 다 가라앉은거죠?????

해든이,,,아하하하하

반딧불이 2010-06-17 01:46   좋아요 0 | URL
나비님. 저는 갖은 검사를 다해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채로 만 13개월째에요. 최근 일주일 정도 잠잠한데 언제 또 돋아날지 모르는 상태거든요. 그냥 평생 동거하려나보다 여기고 있어요.

라로 2010-06-17 10:23   좋아요 0 | URL
13개월째라고라???@@3주째도 죽을 맛인데,,,ㅠㅠ 목도 아프시다면서,,,ㅠㅠ아이고 사부님이라고 부를께요~~~사부님~~ㅎㅎ

꼼미 2010-06-16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가운 시 소개, 잘 읽고 갑니다.. 전 "연애질"이 좋군요...^^

반딧불이 2010-06-17 01:27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꼼미님
연애질에서 삽질 가래질 쟁기질....삿대질 연장질 땜질 우라질까지 운이 참 재미있었어요. '질'돌림 글자를 곰곰 생각하는 시인을 그려보면서 한참 웃었답니다.
 
빈자일기
강은교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11월
평점 :
절판


  

 

요즈음을 위하여



어두워라 내 마음속
기쁜 님
오지 않고 홀로 땅 속
날쌔게 피거둠.

꽃뿌리여 꽃뿌리여

바다로 가도 웬일
산 바다는 없고
아는 배는 모두 떠나
더 떠날 배 없다.

없다 없다 아무것
이 침묵 추위에
눈뜨고 눈감은 아무것
어둠에도 어둠 재(炭)만 떠들고

눈물에도 눈물 재만
일어서니
한낮에 피 얼고
살 한참 얼고 얼 뿐.

이 너른 암묵 천지에
홀로 피 속 피
홀로 땅 속 땅








-어떤 사랑의 비밀 노래



한 섬의 보채는 아픔이
다른 섬의 보채는 아픔에게로 가네.

한 섬의 아픔이 어둠이라면
다른 섬의 아픔은 빛
어둠과 빛은 보이지 않아서
서로 어제는
가장 어여쁜
꿈이라는 집을 지었네.

지었네,
공기는 왜 사이에 흐르는가.
지었네,
바다는 왜 사이에 넘치는가.
우리여 왜,
이를 수 없는가 없는가.

한 섬이 흘리는 눈물이
다른 섬이 흘리는 눈물에게로 가네.
한섬의 눈물이 불이라면
다른 섬의 눈물은 재(炭).

불과 재가 만나서
보이지 않게
빛나며 어제는 가장 따스한
한 바다의 하늘을 꿰매고 있었네.





안개 속에는



안개 속에는
기다리는 남녀와
기다림을 그친 남녀들이 있습니다.

안개 속에는
눈떠가는 남녀와
방금
잠들어가는 남녀들이 있습니다.

이윽고
천천히 섬이 되는 남녀와
이윽고
천천히 물이 되어 춤추는 남녀.

아아
 

안개 속에는
아직 만나지 않은 남녀와
벌써 이별해버린 남녀들이
실비아꽃처럼 흐득흐득
대지에 저희
꿈의 씨를 뿌립니다.



동백



만약
내가 네게로 가서
문 두드리면.

내 몸에 숨은
봉오리 전부로
흐느끼면.
  

또는 어느 날
꿈 끝에
네가 내게로 와서
 

마른 이 살을
비추고
활활 우리 피어나면.

끝나기 전에
아, 모두
잠이기 전에.

 

 

 

매미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같은 리듬이 반복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처음 울기 시작할 때 음을 끌어올리고 일정한 음높이가 되고나면 다시 내려간다. 모두 잦아들기 전에 다시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일정한 마디를 몇번씩 반복하곤한다. 그러다가 마지막 울음은 여운을 남기면서 잦아든다. 물론 사람이 다가가거나 먹이를 노리는 새가 날아들면 뚝 끊기기도한다. 동생의 알사탕을 몰래 훔쳐 먹다가 들켜서 목구멍 굵기보다 큰 사탕을 통채로 꿀꺽 삼킨 것처럼 울음은 빈 뱃속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적당한 반복에서 우리는 가락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자지러지는 매미의 울음소리를 오래 듣다보면 그 동어반복이 절절함을 넘어 무섭기조차하다.  강은교의 시집은 반복으로 넘실거린다. 매미의 무서운 동어반복은 아니다.  어느 주술사의 주문같은 효과를 내면서 멀미가 느껴질 만큼 넘실거린다. 참 많은 마침표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시적 긴장을 주기보다 출렁거린다는 느낌을 강하게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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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0-06-11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를 읽지 않게 된게 언제부터인지 기억도 못하겠어요,,,,에구

방금 남편과 <유령 작가>를 보고 왔어요.
로만 폴란스키의 스타일이 잘 느껴지는 작품이었어요.
적당한 서스펜스에 적당한 트위스트,,,,이완 맥그리거의 자연스런 연기,,,다 좋았답니다.
번역만 빼고,,ㅎㅎㅎ
끝나고 생각해보면 좀 엉성한듯한 스토리가 느껴지지만요,,,

반딧불이님의 <시>리뷰를 읽고 언제 같이 영화 관람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ㅎㅎㅎ

목은 좋아지시는 건가요?????????

반딧불이 2010-06-11 11:15   좋아요 0 | URL
아..나비님 저도 이거 보고싶어하고 있는 중이에요. 맥그리거도 한번 보고싶구요. 또 감독의 네일밸류도 있으니 내리기 전에 보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답니다.

저는 맨날 혼자 보는 사람이니 나비님이 같이 가시면 옆구리가 든든하겠죠. 목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고맙습니다.

반딧불이 2010-06-14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없는 이미지를 엉뚱한 곳에서 찾았다. 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2810161

반딧불이 2010-06-16 01:19   좋아요 0 | URL
고쳐졌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