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그릇 경전 - 2010 제4회 시작문학상 수상작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80
이덕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스무 살 가을밤이었다. 어느 낯선 간이역 대합실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새벽녘, 어떤 서늘한 손 하나가 내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왔다.
순간 섬뜩했으나,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때 내가 가진 거라곤 날선 칼 한 자루와 맑은 눈물과 제목 없는 책 따위의 무량한 허기 뿐이었으므로.
그리고, 이른 아침 호주머니 속에선 뜻밖에 오천원권 지폐 한 장이 나왔는데,
그게 여비가 되어 그만 놓칠 뻔한 청춘의 막차표를 끊었고, 그게 밑천이 되어 지금껏 잘 먹고 잘 산다.

그때 다녀가셨던 그 어른의 주소를 알 길이 없어......, 그간의 행적을 묶어 소지하듯 태워 올린다.

이덕규 시인의 첫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에 실린 자서(自書)다. 항간에는 시집에 실린 시보다 이 자서가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아내에게 혹은 부모님께 바친다는 일부 시인들의 자서를 평가절하 할 의도는 없지만 이덕규 시인의 자서가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사실이다. 그가 두 번째 시집 『밥그릇 경전』을 낸 것은 지난 2009년 이른 봄이다. 실천문학사의 시집 판형이 바뀌고 나온 첫 번째 시집이다. 판형이 더 커지고 책값도 8000원으로 올랐다.

이덕규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 2010년 <시작 문학상>을 받았다. <시작> 여름호에는 첫 번째 시집과 두 번째 시집의 시가 각각 다섯 편씩 실렸다. 어째서 수상작인 두 번째 시집의 시만을 싣지 않고 이렇게 반반씩 나누어 실었는지 그 의도는 알 수 없다. 다만 김수이 문학 평론가가 첫 번째 시집과의 연장선에서 두 번째 시집의 해설을 쓴 때문이 아닌가 혼자 짐작해 볼 뿐이다.

시집 끝에는 <담백한 이념의 뭉게구름소스>라는 제목의 해설이 실려 있다. 평론가는 이덕규 시인의 시적 영토를 세 가지로 분류한다. 자신과의 내적 분쟁,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각성과 비판, 전통 삶의 원리에 대한 애정과 그 현재적, 내면적 활용이 그것이다. 시인의 시를 내용상으로 분석, 분류하고 새로운 이름아래 모으고 있다. 평론가의 이런 분류와 이름 짓기는 시인이 어떤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런 이름아래서는 시를 논리적으로 이해하려는 성향이 강해지기 때문에 시의 아름다움과는 당연히 멀어질 수밖에 없다. 일찍이 『서정은 진화한다』에서 그녀가 보여준 현대시 진단에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그곳에서 빛나던 그녀의 논리가 이곳에서도 여전하다는 말은 하지 못하겠다.

해설과는 무관하게 시집은 섬뜩하고 따뜻한 이야기, 선명한 이미지, 질탕한 가락으로 가득 차 있다. 시인이 마음 두고 있는 것은 밥, 구름, 독, 돌멩이 등이다. 그리고 이것들을 지배하는 색깔은 흰색이다. 공사판에서 들판에서 까맣게 그을린 시인에게 흰색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시보다 시인을 먼저 알았지만 도무지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 언젠가 내 나름대로의 해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우선은 시인의 질탕한 언어유희를 같이 즐겨보자.
 

논두렁

 

 

찰방찰방 물을 넣고

간들간들 어린모를 넣고 바글바글 올챙이 우렁이 소금쟁이 물거미 미꾸라지 풀뱀을 넣고

온갖 잡초를 넣고 푸드덕, 물닭이며 논병아리며 뜸부기 알을 넣고

햇빛과 바람도 열댓 마씩 너울너울 끊어 넣고

무뚝뚝이 아버지를 넣고 올망졸망 온 동네 어른 아니 모다 복닥복닥 밀어넣고

 

첨벙첨벙 휘휘 저어서 마시면,

 

맨땅에 절하듯

누대에 걸쳐 넙죽넙죽 무릎 꿇고 낮게 엎드린 생각들 길게 이어 붙인

저 순하게 굽은 등짝에 걸터앉아

미끈유월, 그 물텀벙이 한 대접씩 후르륵 뚝딱 들이켜면

허옇게 부르튼 맨발들 갈퀴손가락들 건더기 째 꿀떡꿀떡 넘어가겠다

 

 

 
어떤 후일담

 

눈 올 때마다 마당 끝으로 밀어붙여 쌓아놓은

눈 더미, 한겨울 지나 모두들 떠났는데 아직도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신음하는

눈 더미, 잘못 든 길 끝에서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죽어가는 떠돌이 여행자의 몽롱한 중얼거림 같은

눈 더미, 무심코 걷어찬 발길질에 지상에 내려와 가장 오래 머문 흰빛이 옆구리에서 환하게 뿜어져 나오는

눈 더미, 혼절했던 어둔 짐승이 문득 깨어나 제 상처를 들여다보며 지르는 외마디 비명 같은

눈 더미, 깊은 어둠 속에 숨어 금서에 발라 먹던 형설(螢雪)! 그 담백한 이념의 뭉게구름소스 같은

눈 더미, 한때 공중에 세웠다가 무너져 내린 망명정부 기밀문서 같은

눈 더미, 명명백백한 세계의 밑그림을 그리다가 감쪽같이 증발한 어느 혁명가의 구겨버린 비밀수첩 같은

눈 더미, 시뻘건 담배꽁초를 눈에 틀어박자 그 멀고 먼 설구구의 비밀을 고통스럽게 발성하는

눈 더미, 허공에 빛나는 그 만년제국의 내력을 읽어내려는 순간 백지의 반란 같은 눈사태가 내 머릿속을 덮쳐 온통 캄캄해지는

눈 더미, 누구나 한번쯤 읽었지만 지금껏 단 한 사람도 읽어내지 못한 불후의 베스트셀러 같은

눈 더미, 먼 길을 돌아 나온 늙은 자작나무 토막처럼 모락모락 옛이야기를 피워 올리며

서서히 타들아 가는 유언장 같은 이, 눈 더미

 

 

 
연애질

 
북조선에선 남녀가 사귀는 걸 두고 연애질이라고 한다는데, 연애질!

그 질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뭔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게 보여

삽질 가래질 쟁기질 써래질 호미질 낫질로 일구어낸 만 평 푸른 보리밭 물결이 보이고

휘영청 달빛 젖은 이랑 사이로 밤새 축축하게 걸어놓은 물방아 소리 들려오는데

누가 거기 대고 손가락질을 하겠어

뭔가 질퍽대고 싶은 게 사랑인데

흘끔흘끔 곁눈질만 하다가 깔짝깔짝 입질만 하다가 돌아서는 당신

어디 이걸 낚시질이라 할 수 있겠어

핏대 세우고 삿대질만 해대는 당신들 쌈질은 발길질 주먹질로 걸어야지

연장 있으면 뭐 해 연장질을 해야지

애정 전선에 균열이 생기면 즉지 구멍 난 냄비나 솥단지 때우듯

물 샐 틈 없이 온몸으로 땜질을 해야지

열흘 굶고도 도적질할까 말까 망설이는 당신 말이야

그 우라질 마음만 있으면 뭐 하냐구, 몸이 떠나는데 그걸 뭣에다 쓰냐구 젠장!

 

논두렁 밭두렁을 누비던 농부의 재간은 논밭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언어의 이랑과 고랑을 누비며 시 짓는 노고가 즐겁다. 그리고 그가 추수한 밥에 대한 시는 양보다 질이다. 농약 잔뜩 뿌려 거두어들인 풍년이라기보다는 한 섬 유기농 쌀이다.



뚝딱, 한 그릇의 밥을 죽이다

 

 

먼 들판에서 일에 몰두하다 보면 문득 허기가 밀려와 팔다리를 마구 흔들어댈 때가 있다 사람을

삼시 세끼 밥상 앞에 무릎 꿇려야 직성이 풀리는 밥의 오래된 폭력이다

때를 거르면 나를 잡아먹겠다는 듯이

사지를 흔들어대는 허기진 밥의 주식(主食)은 그러니까 오래전부터 사람이다

결국 사람은 모두 밥에게 먹힌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빈 밥통의 떨림

 

그러나, 우물처럼 깊고 어두운 밥통의 고요한 중심에 내려가 맑은 공명을 즐기듯

먹먹하게 담배를 피워 물고 논두렁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어느 순간

감쪽같이 배고픔이 사라지고 어떤 기운이 나를 다시 천천히 일으켜 세우는 것인데, 그 힘은

내마음 어딘가에 마지막으로 밥을 제압하기 위해 비축해둔 또 다른 밥의 농밀한 엑기스인 치사량의 독과 같은 것이다

 

그 옛날 사나흘 굶고도 알 수 없는 기운으로 벌떡 일어나 품을 팔았던 어머니들처럼

수시로 닥치는 밥의 위기 때마다 마지막인 듯 두 눈 부릅뜬 채 막다른 곳으로 밥을 밀어붙이면 비로소

밥은 모락모락 두 손 들고 밥상 위로 올라온다

그래 먼 들판에서 하던 일마저 끝내고

허적허적 돌아와 그 원수 같은 한 그릇의 밥을 죽이듯 뚝딱, 해치우고 나면

내 마음의 근골 깊은 절미 항아리 속으로

낮에 축낸 한 숟가락의 독이 다시 꼬르륵, 들어차는 소리 듣는 것이다

 

나는 밥의 중함을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삼시 세끼 밥상 앞에 무릎 꿇려야 직성이 풀리는 밥의 오래된 폭력’은 충분히 이해된다. 그리고 ‘때를 거르면 나를 잡아먹겠다는 듯이/사지를 흔들어대는 허기진 밥의 주식은 그러니까 오래전부터 사람’이라는 시인의 말에 공감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젠장, 인간은 누구나 밥의 밥이다. 시집의 표제작보다 더 경건해지던 시였다. 표제작도 옮겨둔다.

 

 

밥그릇 경전

 

 

어쩌면 이렇게도

불경스런 잡념들을 싹싹 핥아서

깨끗이 비워놨을까요

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금강(金剛)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 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로 굴리고 밟고

으르렁그르렁 물어뜯다가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어느 경지에 이르면

저렇게 마음대로 제 밥그릇을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테두리에 잘근잘근 씹어 외운

이빨 경전이 시리게 촘촘히

박혀 있는, 그 경전

꼼꼼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 대목에선가

할 일 없으면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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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6-12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좋은 시들로 마음의 기름기를 씻어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반딧불이 2010-06-12 19:26   좋아요 0 | URL
후와님. 이 시들은 안 쌀쌀맞지요?

비로그인 2010-06-13 04:15   좋아요 0 | URL
ㅎㅎㅎ 예, 저녁 짓는 냄새 가득한 골목처럼 아주 따뜻합니다^^

비로그인 2010-06-13 0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5천원으로 세상을 살고, 그 5천원 같은 세상이 있어줄 것 같아 덤벙대다가 저 시궁창 어딘가에 빠져 닮아빠진 이를 북~북~ 갈다가, 다시 또 그 5천원을 누군가에 베풀고는 & 또 누군가에게 받고는 언 가슴이 슬그머니 녹혀진 것으로 위안삼아 이 세상을 버티고 살아가기도 하지요.
시가 아니라 작은 에세이 같은 글들이네요..반딧불이님.

반딧불이 2010-06-12 22:26   좋아요 0 | URL
시인의 첫시집에 실린 자서에요. 현대인들님.
여행 후유증 없이 잘 지내시죠?

2010-06-13 1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10-06-16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요즘 먹는 한약 때문에 팔에 두드러기가 한창인데
자면서 팔을 벅벅 긁다가 일어났어요.ㅠㅠㅠ

반딧불이님 뭐하시는 분이세요?????점점 궁금~ㅎㅎㅎㅎㅎㅎ

앞으로 할 일 없으면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말을 기억하겠습니다.
사실 오늘 남편이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제가 해든이 샤워시켜 재우느라
저녁먹은 설거지 내일 아침 준비하면서 하려고 미뤄뒀는데
이러고 할일없이 알라딘이나 돌아댕기지 말고 밥그릇이나 씻어야겠어요,,,


반딧불이 2010-06-16 10:19   좋아요 0 | URL
한약때문에 그러시다면...약 지은 곳에 문의해보세요. 두드러기가 콧구멍, 목구멍까지 나서 응급실까지 갔던 1인이에요.

나비님. 정말 제가 뭐하는 사람일까요?(또 고상한척 한다)
저도 늘 밥그릇 씻는 사람이어요.

그나저나 해든이 노동좀 고만시켜욧! 허리아파 뒷짐지고 물주더만~ ㅋㅋ

라로 2010-06-16 18:00   좋아요 0 | URL
문의했죠!! 두드러기 없어질때까지 약을 안먹으면 안돼냐니까 이 막무가내 선생님이 침을 놔주시면서(침 놔주면 잠시 가라앉은듯 보임) 좀 참으면 좋아질거니까 참으라고,,ㅠㅠ,,벌써 3주째라는,,ㅠㅠㅠㅠ

그런데 두드러기가 콧구멍, 목구멍까지 나요???헉
지금은 다 가라앉은거죠?????

해든이,,,아하하하하

반딧불이 2010-06-17 01:46   좋아요 0 | URL
나비님. 저는 갖은 검사를 다해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채로 만 13개월째에요. 최근 일주일 정도 잠잠한데 언제 또 돋아날지 모르는 상태거든요. 그냥 평생 동거하려나보다 여기고 있어요.

라로 2010-06-17 10:23   좋아요 0 | URL
13개월째라고라???@@3주째도 죽을 맛인데,,,ㅠㅠ 목도 아프시다면서,,,ㅠㅠ아이고 사부님이라고 부를께요~~~사부님~~ㅎㅎ

꼼미 2010-06-16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가운 시 소개, 잘 읽고 갑니다.. 전 "연애질"이 좋군요...^^

반딧불이 2010-06-17 01:27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꼼미님
연애질에서 삽질 가래질 쟁기질....삿대질 연장질 땜질 우라질까지 운이 참 재미있었어요. '질'돌림 글자를 곰곰 생각하는 시인을 그려보면서 한참 웃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