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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자일기
강은교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11월
평점 :
절판
요즈음을 위하여
어두워라 내 마음속
기쁜 님
오지 않고 홀로 땅 속
날쌔게 피거둠.
꽃뿌리여 꽃뿌리여
바다로 가도 웬일
산 바다는 없고
아는 배는 모두 떠나
더 떠날 배 없다.
없다 없다 아무것
이 침묵 추위에
눈뜨고 눈감은 아무것
어둠에도 어둠 재(炭)만 떠들고
눈물에도 눈물 재만
일어서니
한낮에 피 얼고
살 한참 얼고 얼 뿐.
이 너른 암묵 천지에
홀로 피 속 피
홀로 땅 속 땅
섬
-어떤 사랑의 비밀 노래
한 섬의 보채는 아픔이
다른 섬의 보채는 아픔에게로 가네.
한 섬의 아픔이 어둠이라면
다른 섬의 아픔은 빛
어둠과 빛은 보이지 않아서
서로 어제는
가장 어여쁜
꿈이라는 집을 지었네.
지었네,
공기는 왜 사이에 흐르는가.
지었네,
바다는 왜 사이에 넘치는가.
우리여 왜,
이를 수 없는가 없는가.
한 섬이 흘리는 눈물이
다른 섬이 흘리는 눈물에게로 가네.
한섬의 눈물이 불이라면
다른 섬의 눈물은 재(炭).
불과 재가 만나서
보이지 않게
빛나며 어제는 가장 따스한
한 바다의 하늘을 꿰매고 있었네.
안개 속에는
안개 속에는
기다리는 남녀와
기다림을 그친 남녀들이 있습니다.
안개 속에는
눈떠가는 남녀와
방금
잠들어가는 남녀들이 있습니다.
이윽고
천천히 섬이 되는 남녀와
이윽고
천천히 물이 되어 춤추는 남녀.
아아
안개 속에는
아직 만나지 않은 남녀와
벌써 이별해버린 남녀들이
실비아꽃처럼 흐득흐득
대지에 저희
꿈의 씨를 뿌립니다.
동백
만약
내가 네게로 가서
문 두드리면.
내 몸에 숨은
봉오리 전부로
흐느끼면.
또는 어느 날
꿈 끝에
네가 내게로 와서
마른 이 살을
비추고
활활 우리 피어나면.
끝나기 전에
아, 모두
잠이기 전에.
매미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같은 리듬이 반복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처음 울기 시작할 때 음을 끌어올리고 일정한 음높이가 되고나면 다시 내려간다. 모두 잦아들기 전에 다시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일정한 마디를 몇번씩 반복하곤한다. 그러다가 마지막 울음은 여운을 남기면서 잦아든다. 물론 사람이 다가가거나 먹이를 노리는 새가 날아들면 뚝 끊기기도한다. 동생의 알사탕을 몰래 훔쳐 먹다가 들켜서 목구멍 굵기보다 큰 사탕을 통채로 꿀꺽 삼킨 것처럼 울음은 빈 뱃속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적당한 반복에서 우리는 가락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자지러지는 매미의 울음소리를 오래 듣다보면 그 동어반복이 절절함을 넘어 무섭기조차하다. 강은교의 시집은 반복으로 넘실거린다. 매미의 무서운 동어반복은 아니다. 어느 주술사의 주문같은 효과를 내면서 멀미가 느껴질 만큼 넘실거린다. 참 많은 마침표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시적 긴장을 주기보다 출렁거린다는 느낌을 강하게 전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