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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그린 그림 - 미술사 최초의 30가지 순간
플로리안 하이네 지음, 최기득 옮김 / 예경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거꾸로 된 그림이 전시장에 걸려 있다. 관람객은 그것을 어떻게 보게 될까? 똑바로 서서 거꾸로 된 그대로 보게 될까, 아니면 바로 보기 위해 머리를 아래로 향하게 될까?
거꾸로 그린 그림이 전시장에 걸렸을 때, 비평가들은 그림을 바로 보기 위해 머리를 아래로 내리고 보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웃음을 터트렸고 전시회는 산만하게 끝나 버렸다. 그러나 거꾸로 된 그림을 최초로 그린 화가 게오르그 바젤리츠는 이런 상황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잃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모든 거꾸로 된 그림은 그의 상표가 되었고, 사람들은 거꾸로 그린 듯한 그림만 나오면 바젤리츠를 연상하게 되었다.
나는 거꾸로 된 그림이 바로 그린 그림을 단지 아래 위를 뒤집어 놓은 것인지, 아니면 정말 거꾸로 그린 것인지만 궁금할 뿐 이런 별난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시도가 화가에게는 상당히 중요했던 모양이다. 물체를 거꾸로 그림으로써 주제의 의미는 사라지고 감상자들은 오히려 회화적인 결과에만 관심을 집중하게 되는 효과를 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젤리츠는 왜 그림을 거꾸로 그렸을까?
모든 창작자들은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기법이나 양식 혹은 내용에 갈증을 낸다. 화가도 예외는 아니다. 이제까지의 회화사에 없었던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을 만들어야 한다는 욕망과 부담감이 이런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로크니 로코코니 낭만주의니 인상주의니 하는 모든 새로운 양식에는 최초로 그러한 양식을 시작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최초로 미술이 탄생한 것은 동굴 벽화였다. 벽화에 나타나는 코뿔소나 메머드 같은 동물그림을 누가 그렸는지, 왜 그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름 상당한 힘이 느껴진다.
콘트라포스토자세로 서서 탄력 있는 가슴과 S라인을 만들어내는 <밀로의 비너스>같은 고대의 조각상은 완벽한 균형미로 나를 기죽인다. 남자의 나체상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생각나게 한다. 가만히 앉아있는데도 불구하고 온몸의 근육이 꿈틀거리는 듯한 느낌을 전해주는 이 조각상은 차라리 짐승남이라고 하는 편이 옳다. 피가 초고속으로 전신의 혈관을 질주하는 것만 같은 근육질의 이 남자가 생각에 붙잡혀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성의 힘이 청동보다도 더 무겁게 느껴진다. <밀로의 비너스>나 <생각하는 사람>은 그러나 인간 육체의 결점을 보완해 만든 이상형의 몸이라고 하니 너무 주눅 들지 말기로 하자.
그럼 이런 환상의 몸매를 가진 조각상 말고 인간의 누드를 보고 그린 최초의 누드화는? 1425년 피사넬로라는 화가가 그린 드로잉이라고 한다. 여성 모델을 이용해 나체를 그리는 일이 흔치 않았던 당시에 모델을 한 여성들도 놀랍지만 작고 정교한 이 드로잉에 나오는 한 여성의 다리는 줄줄이 비엔나소시지를 닮았다.
최초의 초상화, 최초의 자화상 같은 것은 한 번쯤 접해 보았었지만, 최초로 밤을 그린 그림이나 최초로 그린 겨울 풍경화 같은 것을 보고 있으면 내가 그동안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에 대한 예술가들의 고뇌가 느껴져 부끄럽기도 하고 감탄스럽기도 하다. 특히 재미있었던 것은 발가벗긴 아기 예수가 성모 마리아의 무릎에 엎어져서 엉덩이를 맞고 있는 그림이었다. 아기예수의 엉덩이에 손자국이 벌겋게 나있고 성모의 눈에는 흰자위가 그득하다.
이 책은 고대 동굴벽화부터 물감을 뿌려서 그리는 잭슨 폴락, 한때 삼성의 비자금을 조성하는데 한몫했던 팝아트, 작년인가, 덕수궁 현대 미술관에서 보았던 이스트로 반죽한 듯 부풀어 있는 페르난도 보테로의 그림까지 모든 미술사의 최초를 모아 엮었다. 당시에는 천재 아니면 광인으로 불렸을 모든 최초에 설명과 그림을 곁들였다. 그림이 선명하고 크기도 적당해서 인터넷으로 따로 찾아보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