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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편
서정춘 지음 / 동학사 / 2002년 12월
평점 :
품절
추석 나흘 전이 시아버님 제사다. 음식을 한꺼번에 할 수가 없어서 늘 두 번씩 장을 보고 상을 차리곤 한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제사 때는 5800원하던 파 한 단 값이 추석이 가까워오자 6900원으로 올랐다. 하늘은 땅을 파버리려는 듯 비를 퍼부었고 추석은 다가왔다. 마트의 야채담당 아저씨는 비가 너무 많이 내려 농작물이 다 녹아내린 탓이라고, 파는 사람도 괴롭다고 투덜거린다. 농사는 참혹하고 소비자는 울상이다.
내 한해 글 농사도 형편없다. 누군가 가끔씩이나마 따뜻한 햇볕 같은 눈길을 건네주지 않았더라면 그나마 글 농사의 흉내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보다 더 흉악한 작황을 거둔 시인을 만났다. 시집은 오랜 가뭄에 들었든 듯 얄팍하고 시는 햇빛을 못 본 실과처럼 살이 없다. 평소에 6,70편의 시가 실려 있는 시집들을 읽다가 그것의 절반 분량의 시가 실려 있는 딱딱한 하드커버의 이 시집을 보니 뭔가 밑지는 기분이 들었는데 시인의 말을 대하니 가슴이 탁 막힌다.
아 나의 농사는 참혹 하구나
흑!
흑!
1968년에 데뷔하여 28년만인 1996년 첫 시집을 냈다. 시집의 이름은 『죽편』이다. 울음소리인 듯한 ‘흑’이 내 눈에는 ‘흙’으로 읽히고 옆에 붙어있는 느낌표가 빗줄기처럼 느껴진다. 올해 농사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망쳤지만 시인의 시 농사에는 촉촉한 비와 따가운 햇살이 함께해서 향기로운 시의 열매를 맺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나의 이런 바람과는 별개로 시집에 실린 시들은 호두알처럼 단단하다. 여행이라는 부제가 붙은 표제작인 「죽편」역시 5행에 불과한 짧은 시다.
竹篇 1
여기서부터, ―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
대나무의 마디마디를 ‘칸칸마다 밤이 깊은/푸른 기차’로 형상화한 이 짧은 시를 소리 내어 읽다보면 대나무 숲이 보이고 오죽을 만지는 듯 단단함과 매끄러움이 느껴진다. 그리곤 남은 여백을 읽어야할 것만 같아 다음페이지로 시선이 옮겨지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시인의 참혹한 농사가 가슴 아프지 않다. 그동안 읽었던 시집들의 시가 너무 많았다는 생각도 설핏 든다.
세 번째 시집에 실린 시인의 말이다.
시, 열 여자를 만나면
시, 아홉 여자가 나를 버렸다
시, 한 여자도 곧 나를 버릴 것이다
충족감보다는 결핍에서 느끼는 감정들이 시를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경우가 많다. 시인은 스스로 버림받았다고 하지만 버린 사람은 오히려 시인이 아닐까. 한 가마니 모래알을 쏟아놓고 사금 알갱이 하나를 골라내는 듯 언어를 고르는 시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 시집 『귀』에도 역시 35편의 시가 실렸다. 책은 첫 번째 시집보다 가로의 길이가 3cm쯤 넓어졌다. 이 말은 그만큼 독자가 채워야할 여백이 많다는 얘기와 다르지 않다. 표제작인 「귀」는 하이쿠보다 조금 더 길 뿐이다.
귀
하늘은 가끔씩 신의 음성에겐 듯 하얗게 귀를 기울이는 낮달을 두시었다
네 번째 시집 역시 단 한 편의 덤도 없이(덤이라는 말이 너무 경박하지만) 딱 서른다섯 편의 시가 실렸다. 아니 서른다섯 편을 실었다. 내게는 없는 두 번째 시집 역시 같은 분량의 시가 실렸을 것이다. 네 번째 시집에 실린 시인의 말이다.
이
짓거리 마다가 짜고 짧다
아서라
마서라에
쩔쩔 맺으므로
가장 적은 언어로 가장 많은 말을 하고자 한 시인의 의지 혹은 언어의 경제학이 읽히는 말이다. 시인이 시집을 낼 때마다 일반 시집 분량의 딱 절반 분량만을 실었다면 어떤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시인은 그의 시집을 통해 요즈음 나오는 한 권의 시집에 실린 시가 너무 많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시가 필요 이상으로 길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네 번째 시집의 제목인 '물방울은 즐겁다'는 '빨랫줄'이라는 시의 한 행이다. 그나마 좀 긴 시다.
빨랫줄
그것은, 하늘아래
처음 본 문장의 첫 줄 같다
그것은, 하늘 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길게 당겨주는
힘줄 같은 것
이 한 줄에 걸린 것은
빨래만이 아니다
봄바람이 걸리면
연분홍 치마가 휘날려도 좋고
비가 와서 걸리면
떨어질까 말까
물방울은 즐겁다
그러나, 하늘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당겨주는 힘
그 첫 줄에 걸린 것은
바람이 옷 벗는 소리
한 줄 뿐이다
바람 맑고 햇빛 찬란한 날은 기다란 빨랫줄에 풀먹인 이불 호청이나 널어 마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할줄 모르는 나같은 범부는 바람이 옷벗는 소리를 들어보지도 못했다. 김광균이었던가, 겨울밤 눈내리는 소리에서 여인의 옷 벗는 소리를 들었던 시인이? 바람이 옷 벗는 소리를 빨랫줄에 걸어놓은 시인 때문에 이불 호청 타령은 접어두고 바람의 옷이나 걷어야할 듯 싶다.
몰두
몰두를 보았어요
음머 하고 소가 울어서
소가죽을 뚫느라
피눈물을 흘리는
진드기 보았어요
보다가 보았을 땐
진드기 모가지가 떨어졌어요
참으로 끔찍한 시다. 집중이니 몰두니 하는 단어들을 종종 쓰는 나는 갑자기 몰두라는 단어가 무서워졌다. 몰두를 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는구나 싶어서. 나는 진드기만도 못했구나 싶어서. 시인의 시들을 읽노라면 생각에 사특함이 없는 것이 시라고 했던 공자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시인이 금싸라기같은 낱말만을 골라 쓰고 넉넉하게 남겨둔 여백은 사특함을 씻어내기 위한 곳인지도 모르겠다.
'시인의 말'이 시집의 내용과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 시집을 만나고 나서 야문 호두알 두어 개를 가슴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