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과 사귀다 랜덤 시선 25
이영광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의 마지막을 우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장으로 마감해야한다. 나는 감상적인 인간은 아니지만 그의 죽음 앞에서는 마음이 착잡해지고 눈시울이 젖어드는 걸 감추지 못하겠다. 실패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믿으며 스스로를 채찍질해 대통령에까지 이르렀지만 이제 그의 소신은 그를 부엉이 바위 아래로 내몰았다. 내 눈물 한 방울, 국화 한 송이가 그의 죽음에 무슨 위로가 되겠는가 싶어 망연해지는 마음을 달랠 길이 없다. 죽음 앞에서도 인간은 얼마나 이기적인지 나는 그를 위로하기보다 내 마음을 위로하고자 시집을 펼친다.


이영광의 두 번째 시집 『그늘과 사귀다』는 아버지와 형을 차례로 잃고 죽음과 사귀어가는 과정이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면서 울적한 마음의 눈까지 적신다.



떵떵거리는




아버지 세상 뜨시고
몇 달 뒤에 형이 죽었다
천둥 벼락도 불안 우울도 없이
전화벨이 몇 번씩 울었다


아버지가, 캄캄한 형을 데려갔다고들 했다
깊고 맑고 늙은 마을의 까막눈들이
똑똑히 보았다는 듯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손을 빌려서
아버지는 묻고
형은 태웠다

사람이 떠나자 죽음이 생명처럼 찾아왔다
뭍에 끌려 나와서도 살아 파닥이는 銀빛 생선들,
바람 지나간 벚나무 아래 고요히 숨 쉬는 흰 꽃잎들,

나의 죽음은 백주 대낮의 백주 대낮 같은
번뜩이는 그늘이었다

나는 그들이 검은 기억 속으로 파고 들어와
끝내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짓고
떵떵거리며 살기 위해
아주 멀리 떠나버린 것이라 생각한다



가끔 노무현 전 대통령의 홈페이지에 들려보곤 했었다. 거기에는 밀짚모자를 쓴 잠바차림의 그가 구멍가게에 앉아 담배를 피우려는 모습도 있었고, 유모차에 손자손녀를 태우고 자전거에 매달아 동네 한 바퀴 도는 사진도 있었다. 너무도 행복해 보이는 그의 모습은 그도 대통령이기 이전에 한 가족의 일원이라는 것을 새삼 생각하게 해주었었다. 그런 그가 자살로 자신의 생을 마감하자  ‘사람이 떠나자 죽음이 생명처럼 찾아왔다’는 시인의 말이 주먹이 되어 가슴을 친다. 나는 아직 죽음의 그늘과 깊이 사귀지 못했다. 그런데 나는 그가 나의 ‘검은 기억 속으로 파고 들어와/끝내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짓고/떵떵거리며 살기 위해/아주 멀리 떠나버린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종교가 없다. 그러므로 그가 천국에 가기를 기도할 수도 극락왕생하기를 바랄 수도 없다. 다만 그가 채찍질 하며 밀고 간 그의 생을 이제 좀 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쉼,


식은 몸을 말끔히 닦아놓으니,
생의 어느 축일 보다도 더
깨끗하고 
희다
미동도 없는데 어지러운
집은, 우물 같은 고요의 소용돌이 속으로
아득히
가라앉는다
찰싹, 물소리가 들려온 듯한  

창밖 새소리가 홀연 먼 산으로 옮겨 앉는
이 순간을,
한 번만 입을 달싹여
쉼,
이라 불러야 할까
우물 속에는 밤새워 가야 할 먼 길이
저렇듯 반짝이며 흐르고 있으니




5월 29일 11시 경복궁에서 국장이 시작되고 식이 끝나면 시청 앞 광장에서 노제가 열릴지는 아직 미지수다. 아마도 조문객들이 길게 뒤를 따르리라. 시인의 말처럼 어쩌면 죽음은 길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길’을....... 기나긴 장례의 길을.......




길의 장례



나는 죽음의 뼛소리를 듣고 서쪽으로 갔다
날은 춥고 해는 기울고 어둠이 서서히 드리우는
먼 곳으로,
전차를 타고

이 죽음은 길을 좋아했다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길이었다.
길은 이 죽음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으나
단 한 번 사랑해주지도 않았다
한 죽음이 더 큰 죽음에 의해 길 위에 쓰러질 때
그는 죽음을 알아보지 못했으며,
다만 흘린 피와 토사물과 제 내장이 짜내는 신음으로
길이 난생처음의 빛깔로 눈 감는 것을 갸우뚱, 보았으리라
버려진 길이었으므로 그는, 아팠으리라
제 속의 죽음이 밖으로 나와 저를 부를 때에도
그는 착하여 알아듣지 못했으며
새벽까지 길 위에 길처럼 길게 누워
집으로 가는 길 사력을 다해 찾고 있었으리라
그가 평생을 헤매 다녔으나
한 번도 도달하지 못한 머나먼 세상이 또는 세월이
그에게 다가오기를 쿵쿵쿵쿵, 기다리는 동안
버르적거리며 어둠 속으로 기어들어갔으리라
뒤늦게 달려온 구급차보다 먼저 그가 어딘가로 실려가고
죽음은 젖은 잎 뒹구는 골목을 스쳐 더 추운 곳,
야간 병원의 냉동고 속으로 들어갔던 것이었다
그를 목격했던 세상은 그제야 어둠에서 걸어나왔지만
부어터진 몸속에 있던 그는 간 곳 없다


냉동고에서 나온 죽음은 한 번 더 죽기 위해
화장장으로 간다 길가 나무들에 양철빛 불꽃이
타고 있다 한 번 더 죽기 위해 죽음은
이제 초열지옥으로 들어간다
이 개 같은 땅 어디에 눈물 많은 神이 있으랴
그 옛날 그가 나에게 물려주었던
왕자 화판만한 쪽창 하나를 이쪽으로 열어두고
죽음은 고요히 몸부림치며 들어간다
지상에서 가장 춥고 어두운
불 속으로



‘그가 평생을 헤매 다녔으나/한 번도 도달하지 못한 머나먼 세상’을 두고 그는 화장 절차를 밟기 위해 화장장으로 갈 것이다. 화장지는 경기 수원시 영통구 하동 수원시연화장이라고 한다. 그리고는 ‘한 번 더 죽기 위해 죽음은/이제 초열지옥으로 들어’갈 것이다. ‘이 개 같은 땅 어디에 눈물 많은 神이 있으랴’ 이제 ‘죽음은 고요히 몸부림치며 들어’갈 것이다. ‘지상에서 가장 춥고 어두운/불 속으로’


장례가 끝나면 그는 그의 사저 뒷산 어딘가에 묻힐 것이고 아마도 많은 이들이 그를 찾을 것이다. ‘목숨도 성질도 다해서’(성묘) 그가 이사한 둥근 묘 앞에서 사람들은 술을 따르고 음복을 하고 담배에 불을 붙여 놓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술 잘못 드려도 상 엎지 않고/재차가 어긋나도 호통이 없는 대신에’(음복) 얼굴에 주름을 지으며 빙그레 웃을 것이다. 권력도 모함도 법도 죄도 없는 오롯한 독채에서 평안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죽음은 누구나의 공통분모다. 이러한 탓인지 시인이 죽음의 그늘과 사귀어가는 과정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전직 대통령의 죽음에도 내 어머니의 죽음에도  어디에다 놓아도 시가 어긋나지 않는다.  시인의 마음을 알뜰하게도 할퀴고 간 죽음의 상처에서 돋아난 시이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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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7 08: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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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8 0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
박현찬, 설흔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글쓰기 관련 책을 읽고 있는 중이다. 『유혹하는 글쓰기』『글쓰기 생각쓰기』『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를 읽었다. 『글쓰기의 공중부양』을 읽는 중이고『디지털 시대의 글쓰기』는 아직 남아있다. 책들은 각각의 특징이 있고 한결같은 공통점도 있다.7권의 책 중에서『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는 형식이 매우 신선하고 독특하다.

이 책은 소설의 형식을 빌려 연암 박지원의 글쓰기 방법론을 서술했다. 스승으로는 실제 인물인 연암을, 그에게 글쓰기를 배우러 들어간 김지문은 가공인물로 설정했다. 때문에 연암을 중심으로 보면 가르치는 방법을, 김지문의 입장에서 보면 배우는 사람의 태도와 자세를 살필 수 있다. 물론 나는 배우는 자의 입장에서 보았다.『비슷한 것은 가짜다』『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등에서 읽었던 연암의 문장론을 소설 속 주인공 김지문이 깨달아 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되새김질했다. 되새김은 즐겁고 유익했지만 두 주인공의 갈등 때문에  안타까웠고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는 종내 부러웠다.

자신의 문하생으로 지문을 받아들인 연암의 첫 주문은 ‘하나를 알더라도 제대로 음미하고 자세히 생각하는 것’이었다. 한 달여 동안 논어를 찬찬히 다시 읽고 느리게 읽는 것이 왜 좋은지를 깨달은 지문에게 연암은 글 솜씨를 보기위해 ‘붉은 까마귀’에 대해 글을 써오라고 한다. 세상에 없는 붉은 까마귀에 대해 궁리에 궁리를 거듭해 해결한 지문에게 연암은 약(約)과 오(悟)의 이치를 깨달았음을 설명해준다. 이런 식으로 지문이 연암에게서 배운 글자는 변(變)과 간(間)을 합하여 단 네 글자였다. 지문이 연암에게서 받은 마지막 과제는 사마천이 『사기』를 지었을 때의 심정이 어땠을까를 알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갈등은 절정으로 치닫고 지문은 끝내 연암에게 숙제를 제출할 기회를 잃게 된다.

연암이 지문에게 가르친 것은 단지 約, 悟, 變, 間의 네 글자와 사마천의 심정을 짐작하는 일 뿐이었지만 이 속에 독서와 글쓰기의 모든 방법이 들어있었다. 제자의 눈높이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알맞은 과제를 내주는 연암은 이론을 앞세우지 않는다. 그의 방법은 꼼꼼한 독서가 우선하였지만 문자로 된 것만이 책이 아님을 몸으로 부딪쳐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문장이 벼슬을 하거나 이름을 날리는데 쓰는 도구로 쓰여서는 안 된다는 것 또한 연암의 커다란 가르침이었다. 연암에게서 쫓겨나고 난 후에야 자신의 잘못을 크게 깨달은 지문은 스승을 그리워하며 스승이 읊었던 시를 읊고 또 읊었다.

저자들은 ‘연암의 문장론을 다루는 본격 소설이면서 동시에 실용적인 글쓰기 방법을 배울 수 있다는 차원에서 인문실용소설’이라고 이름 붙였다. 나는 소설적 감동으로 글쓰기의 방법을 배우고 연암의 글을 되새김하는 호사를 누렸다. 그러나 연암 같은 스승에 대한 갈증으로 창자가 다 녹아내린 것처럼 뱃속이 헛헛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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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하는 글쓰기 - 스티븐 킹의 창작론
스티븐 킹 지음, 김진준 옮김 / 김영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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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스티븐 킹의 소설들은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 많다. ‘호러의 왕’이라는 그의 별명이 말해주듯이 대부분 공포영화 쪽인 모양이다. 나는 공포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예측하지 못했던 곳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무언가에 대책 없이 놀라기 싫다. 영화내용과는 상관없이 관객들이 지르는 비명소리에 놀라는 것도 짜증난다. 영화관을 혼자 즐겨찾기 하는 나로서는 공포 앞에 스스로 투신하는 일이 멜로영화를 보고 혼자 눈물짓는 것보다 더 초라하게 느껴진다. 보고나서도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싫어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아니 그냥 이쯤에서 솔직히 고백하자. 공포영화를 보고 싸늘해진 손을 잡아줄 사람이나 무섭다고 파고들 가슴이 옆에 없노라고. 이런 나도 <미져리>와 <쇼생크 탈출>은 재미있게 보았다. 물론 집에서 보았지만.

그것이 공포든 유머든 책을 읽게 만들고 영화를 보게 만드는 것은 작가의 몫이다. 스티븐 킹의 글에는 사람을 유혹하는 무언가가 있다. 원제가 On Writing인 이 책의 제목이 『유혹하는 글쓰기』가 된 것도 아마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작가가 소설가인 까닭으로 ‘스티븐 킹의 창작론’이라는 부제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자전적 소설 같은 느낌을 준다. 소설처럼 잘 읽히고 재미있다. 하지만 있을법한 이야기를 써놓은 것이 아니다. 스티븐 킹 자신의 소설 쓰는 실제과정이 고스란히 적혀있다.

<이력서>라는 소제목을 가진 부분에는 병약한 어린 시절, 가난한 무명작가시절, 부와 명성을 함께 누리는 유명작가가 되기까지를 너무도 유머러스하게 그려놓았다. 그를 공포작가라고 부르는 것이 무색할 정도다. 드라이버 하나만으로도 작업이 가능한 곳에 무거운 연장통을 통째로 들고 다니는 목수에 작가를 비유한 <연장통>. 소설의 아이디어와 작업과정, 초고와 퇴고의 과정 그리고 출판 대리인을 선정하는 일까지 작가가 경험하는 창작의 모든 과정을 서술해둔 <창작론>에서 그는 많이 읽고 많이 쓰라는 주문을 잃지 않는다.

다독하라는 말은 나도 여러 선생님과 선배들에게서 또 모든 창작관련 책에서 귓구멍과 눈에 굳은살이 박일 지경으로 듣고 보았다. 그런데 대체 많다는 것이 얼마 만큼이란 말이냐. 분량에 대한 스티븐 킹의 대답은 너무 간단해서 허무하다.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나 책을 많이 읽음으로써 얻어지는 결과에 대한 그의 답은 많이 읽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적나라하게 현실적인 말이다. ‘책을 읽는 사람은 작가의 나라에 입국하는 각종 서류와 증명서를 갖추는 셈’이고 ‘읽으면 읽을수록 펜이나 워드프로세서를 가지고 쓸데없이 바보짓을 할 가능성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다작에 대해 스티븐 킹은 ‘여러분이 쓰고 싶은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정말 뭐든지 좋다. 단, 진실만을 말해야한다’고 말한다. 또 그는 ‘소설의 소임은 거짓의 거미줄로 이루어진 이야기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는 것이지, 돈벌이를 위해 지적인 사기를 치는 것이 아니’고 ‘그런 방법은 통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문학적 우수성에 끌려 소설책을 구입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그는 플롯보다는 직관을 중시하고 모든 것을 한꺼번에 말해주는 탁월한 묘사에 집중한다. 그는 ‘글쓰기를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이’고 ‘그리고 가장 귀중한 교훈들은 스스로 찾아 익혀야 한다.’고 거듭 말한다.

작가는 글쓰기란 무엇인가를 묻고 ‘정신 감응’이라고 답한다. 책읽기란 무엇인가고 물으니 그 또한 정신감응이다. 그렇다면 글쓰기와 책읽기란 이음동의어다. 그러나 감응이 그렇게 쉬운 일이더냐. 더구나 육체적 감응도 아니고 정신적 감응이라니. 나는 등허리에 들어간 머리카락 한 올에도 온 신경다발이 한쪽으로 쏠리는 몸뚱어리를 가졌지만 석고를 들이부은 듯 뻣뻣하기 이를 데 없는 정신도 지녔다. 『유혹하는 글쓰기』는 굳어가는 내 정신에 피뢰침을 꽂고 스티븐 킹의 유머와 진실의 전류를 흐르게 한다. 이 정도면 육체적 정신적 감응을 한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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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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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속에서 수면제 대용으로 펴들었던 책이었다. 아베 코보라는 작가나 작품에 대한 사전 지식도 전혀 없었다. 보르헤스의 『모래의 책』과 비슷한 이름 때문인지 작가의 이름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중남미의 작가로 연상했던 듯싶다. 두어 장 읽다보니 보르헤스나 마르케스의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으로 책날개의 작가소개를 보니 ‘아베 기미후사’라는 본명을 가진 일본인 작가였다. 일본의 카프카라고 불린다는데 나는 처음 대하는 작가다. 작가가 어느 나라 사람이건 수면제인줄 알고  각성제를 털어 넣은 꼴이 되어버렸다.

니키 준페이라는 31세의 남자가 2박 3일의 여행을 떠났다가 행방불명되었다. 7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사망선고가 내려졌다. 주인공이 사라지면 이야기가 끝나야겠지만 이 소설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기차역에서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현실세계에서 사라진 그남자는 어찌되었나? 이것이 이 소설의 시작이고 끝이다.  

 

그의 여행목적은 곤충채집이었다. 새로운 종을 발견하여 긴 라틴어학명과 함께 곤충도감에 자기이름을 남기고 싶어 한다. 그가 주목한 곳은 불모의 모래땅이었다. 그러나 사막에도 꽃은 피고 벌레와 짐승도 산다. 강한 적응력으로 살아남은 변종이 있기  때문이다. 남자가 찾아간 곳은 기차로 반나절 정도면 닿을 수 있는 어느 해안이었다. 사구의 능선을 따라 걷던 남자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하룻밤 묵어갈 곳을 안내받는다. 그곳은 커다란 모래구덩이로 30대 초반의 여자가 혼자 살고 있다.

쏟아지는 모래 때문에 밥을 먹을 때도 우산을 쓰고 먹어야하는 곳. 온몸에 들러붙는 모래 때문에 옷을 입고 자는 것보다 알몸으로 자는 것이 훨씬 수월한 곳. 밤마다 모래를 퍼내고 물이나 때 지난 신문을 배급받는 곳, 구덩이 밖에서 줄사다리를 내려줘야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곳에 자신이 갇혀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주인공은 깨닫는다. 그는 끊임없이 모래구덩이를 탈출할 계획을 세우지만 실패를 거듭한다. 만만찮은 이일을 통해 그는 모래구덩이의 삶에 차츰 적응해간다. 마치 그가 찾아 나섰던 곤충의 변종처럼. 그는 스스로 불모의 모래땅에 가서 그 끊임없는 흐름으로 인해 어떤 생물도 받아들이지 않는 모래에 적응하는 새로운 인간 종이 되어간다.   

여자와 함께 구슬을 꿰는 부업을 해서 라디오를 구입하고, 유수장치를 연구하면서도 그는 도망갈 기회만을 노린다. 어느 날 여자가 하반신을 피로 물들이며 격통을 호소했을 때 구덩이 밖으로 나갈 기회가 찾아왔다. 반년 만에 새끼줄 사다리가 내려졌고 삼륜차는 여자를 싣고 떠났다. 아무도 그를 감시하지 않는다. 그는 돌아갈 곳도 목적지도 마음대로 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남자는 자신의 도망을 미룬다. '벌이 없으면, 도망칠 재미도 없'는 법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발명한 유수장치를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어한다. 

실종신고 최고장과 판결문으로 소설은 끝난다. 현실 세계에서 이미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러나 바람과 모래뿐인 사구에서 그는 물을 얻는 장치를 발명했다. 과연 니키 준페이는 모래의 여자와 사구에 남을까? 현실로 돌아올까? 작가는 니키 준페이를 뫼비우스의 띠처럼 현실세계도 아니고 모래세계도 아닌 경계에 채집해 두었다. 어느 환경에나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인간 변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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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 한문화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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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안도현 시인이 한겨레신문에 시와 연애하는 법이라는 시 창작론을 연재한 적 있다. 주1회, 총 26회에 걸쳐 연재 되었다. 나는 이 사실을 연재가 끝나고 나서도 몰랐다. 내가 시에 마음 걸어두고 있다는 걸 아시는 분이 이걸 편집해 파일로 보내주셨다. 그것을 받고서야 그것이 연재되었었다는 것도, 또 연재가 끝났다는 것도 알았다. 얼굴 한번 마주한 적 없는 분에게서 이런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큰마음의 선물을 받고, 부끄럽고 감사한 마음을 전할 방법을 몰라 시간 날 때마다 읽으면서 보내주신 분의 곡진한 마음을 되새기고 있다.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는 그 창작론에 언급된 책이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는 저자 자신이 뼛속까지 내려가서 쓴 글이다. 진정성과 열정의 늪으로 읽는 이를 끌어들이는 힘이 느껴진다. 저자는 자신의 글쓰기 경험을 그대로 옮겨 놓아 글 쓰는 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들, 궁금해지는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만날 수 있게 했다. 혹시나 지쳐 다른 곳에 눈 돌리고 마음 휘둘릴 때 양치기처럼 내가 가야할 길을 다잡아 주기도 한다. 특별한 구성이나 형식이 없으므로 아무 때나 아무 곳이나 펼쳐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나 글쓰기에 임하는 마음, 정신, 자세 등을 더 중요시 했으므로 글쓰기의 테크닉을 원하는 사람은 다소 실망할 수도 있겠다.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글쓰기에 대한 열정으로 마음이 더워지고 손이 바빠졌다. 특히 마음을 통제하지 말고 마음가는대로 내버려두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논리적인 사고나 자신의 생각대로 글을 조절하겠다는 마음을 버리라는 말인데 사실 나는 이런 식으로 글을 써 본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창조적인 글쓰기에서는 반드시 시도해 볼만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마음가는대로 썼던 글이라도 그녀의 ‘사무라이가 되어 쓰라’는 말처럼 그것이 감정의 배설에 지나지 않도록, 내가 쓰는 특정한 글의 양식에 맞게 불필요한 부분을 과감하게 잘라내야겠지만 말이다.

내게 늘 손이 게으르다고 안타까워하시던 선생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한 ‘습작을 위한 글감 노트 만들기’는 구체적 방법론이다. 10분이든 20분이든 정해진 시간만큼 무조건 쓰기, 강력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골라서 엄청나게 좋아하는 것처럼 써보기 또 싫어하는 시각으로 써보기, 완전히 중립적인 입장에서도 써보기 등 그녀의 방법론이 어깨를 짓누른다. 이 짓누름은 그것이 요약과 정리로 끝내야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행으로 옮겨야할 것이기 때문이리라.  언제나 문제는 행동이다. 형용사보다 동사가 중요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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