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책
박민영 지음 / 지식의숲(넥서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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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일은 즐겁기도 하고 참담하기도 하다. 전자의 경우는 처음 읽었을 때는 몰랐던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거나 또 다른 의미로 충만해질 때이다. 후자의 경우, 책은 온몸에 붉은 줄 푸른 줄을 긋고 내 책꽂이에 꽂혀있으면서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명하고 있는데 정작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다. 처음엔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전자의 경험보다 후자의 경험이 잦아지면서 나는 영화속 여주인공처럼 혹시 내 머릿속에 지우개가 들어있지 않나 의심하게 되었다. 정기검진을 받으러 오라는 치과의사의 호의를 무시하다 어금니를 뽑아야했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올랐고 어떤 식으로든 내 독서 방법에 대한 점검이 필요한 때였다. 

 알라딘에서 한참 뜨고 있는 독서에 관한 책을 발견했다.(http://blog.aladin.co.kr/734872133/1994606) 이 책은 표지부터 나를 사로잡았다. 책장이 바람을 일으키며 후르륵 넘어가는 이미지였다. 이 책을 읽고나면 나도 모든 책들을 저렇게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도 굼뜨고 껄끄러운 내 독서방식에서 비롯된 프로이트적 욕망의 발로였으리라. 더구나 저자가 일본에서 ‘미시마 유키오의 재래’라는 평을 들을 만큼 유명한 소설가라고 한다. 나는 날름 주문을 했고 책이 배달되어 오기까지의 시간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그 자리에 모두 읽어버렸다.  저자가 소설가인 덕분에 이 책의 대부분은 소설읽기에 할애되고 있었다. 더구나 그가 선택한 일본 소설들이 유감스럽게도 내가 읽어보지 못한 소설이 더 많았다. 나는 읽지 못한 소설들을 독서목록에 추가하고, 이 소설들을 읽은 후에 다시 한번 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그리곤『책을 읽는 방법』이라는 제목의 이 책을 ‘소설을 읽는 방법’이라고 내 맘대로 바꿔버렸다.      

  이미지에 현혹 당했던 눈을 씻고 다시 고른 것이 박민영의 책이다. 우선 그가 이 책의 대상으로 삼은 사람들이 마음에 든다. ‘책을 읽어도 좀처럼 자신의 지적 능력이 발전하는 느낌을 받지 못하는 사람’, ‘책을 읽어야겠다는 마음은 있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읽어야할지 모르는 사람’, ‘독서를 통해 단편적인 지식이 아니라 폭넓은 교양과 깊이 있는 지적 역량을 갖추고 싶은 사람’, ‘지성인으로서 사회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고 싶은 사람.’ 머리 속 지우개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았지만, 지적 능력, 교양, 지성인 같은 어휘들이 적당히 내 허영을 부추겼다. 책을 읽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잠언 같은 말들에 나는 또 많은 밑줄을 그었다.

책은 인간의 생각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촉진시킨다는 점에서 어떠한 매체보다 우월하다-23
기억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색에 의해서 얻어진 것만이 참된 지식이다 -41
책을 읽는다는 것은 외우는 게 목적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한다. -42
열역학 제2법칙을 모르는 인문계와 셰익스피어를 모르는 이공계 사이에는 거대한 장벽이 가로막고 있다. -79
공부하는데 시간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시간이 있어도 공부하지 않는다. -88
인간에게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함으로써 이해되는 과정이 분명히 존재한다. -96
책과 문화가 서로 대화하게 하라. 그러면 독서의 즐거움뿐만 아니라 더불어 다른 예술작품을 향유하는 능력도 성장할 것이다. -102
무딘 연필이 좋은 머리보다 낫다. -113
반대하거나 논쟁하기 위해 독서하지 말라. 그렇다고 해서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 위해서도 독서하지 말라. 그저 자신이 생각하고 연구하기 위해서 독서하라. -125
생각하지 않고 책장을 넘기기 위해서만 책을 읽는 무리들이 많다. -153
언어가 정밀하다는 것은 곧 사유가 그만큼 정밀하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154
지식은 타오르는 불과 같다. 처음에는 불을 붙여 주는 사람의 힘에 의지하지만, 불이 붙고 나면 그 스스로 타오른다. -196 
진정한 독서가에게 모든 책은 참고문헌일 뿐이며, 책에 있는 텍스트를 발견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참고로 하여 자기 내부의 텍스트를 발견하는 것이 목적이 된다. -227
자신의 생각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독서의 진정한 목적이다. -228
가장 불행한 독자는 인쇄된 문자 이외에는 다른 것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다. -228
독서가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키는 과정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각을 수용하는 것에만 머무른다면 독서의 즐거움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229
독서가 다른 사람의 텍스트를 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텍스트를 읽어나가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232
메모는 자신이 책에 심어 놓은 수많은 지적 이정표이다. -248
사물의 실체에 접근하는 것은 불연기연, 즉 아니다 그렇다, 그렇다 아니다를 반복함으로써만 가능하다. -268 

  밑줄 그어 놓은 말들을  같은 내용끼리만 묶어보았다.  추려낸 내용들을 살펴보니 그간의 나의 독서행위는 무엇이든 그저 알고싶다는 욕심이 앞서서 눈도장 찍기에만 급급했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그저 줄거리 파악하기에 바빴고 애꿎은 형광펜과 칼라펜으로 책을 학대하는데 그쳤던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가슴에 와닿는 말은 진정한 독서가는 텍스트를 읽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신의 내부를 발견한다는 것이었다. 늘 바깥을 향해 흔들리던 눈길을 내 안을 향하도록 거두어들여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밑줄 그어놓은 많은 말들은 곧 내 기억 속 지우개의 밥이 될 것이다. 그러나 왠지 이제는 지우개가 두렵지 않다. 지우개가 지울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우개는 단지 나의 기억만을 지울 뿐 생각을 지우지는 못한다.  지우개가 지운 내 기억의 찌꺼기만큼 내 생각이 자랄 것을 믿기로 한다. 이제부터 다시 읽는 모든 책들은 내게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의미로 충만해지는 즐거움만을 가져다 줄 것이다. 


★ 이 책을 읽으면서 독서목록에 추가한 책
이삼성, 『20세기의 문명과 야만』
롤랑 바르트, 『현대의 신화』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히라노 게이치로, 『책을 읽는 방법』
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
모디머J. 애들러, 『독서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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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하는 공부 - 강유원 잡문집
강유원 지음 / 여름언덕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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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도 싫고 하기도 싫은 말 중의 하나가 공부라는 말이다. 내가 어릴때 우리집은 가난하고 아이들은 많았다. 그 당시로서는 오남매가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경제력에 비해 공부해야할 아이들이 많았다는 거다. 때문에 아들들이 당연히 우선시 되었고 딸인 나는 은근히 책 좀 안봤으면,  공부좀 덜했으면 하는 암묵적인 분위기에 젖어 있어야했다.  그러니 공부하라는 말 한번 들어보지 못하고 학창시절이 끝난 셈이다.  그런데도 공부하라는 말은 듣기 싫다. 지금 생각해보면 공부하라고 할때의 그 공부가 듣는 사람이 하고싶은 공부가 아니었기 때문인 것도 같다. 또 오빠나 남동생을 겨냥하고 있는 그 말에는 공부를 잘해서 권력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한 기대를 담고 있는듯해서 옆에서 듣는 나까지 부담스러웠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가능하면 공부하라는 말은 삼키고 살았다. 참다 참다 하는 말이 고작 '책 좀 봐라' 였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초등학생이었던 아들은 만화로 된 '조선왕조실록'을 펴들었었다. 수십번을 봐서 책은 너덜너덜 한데도 그것만 본다. 한참 보다가 깔깔거리고 웃는 대목도 언제나  똑같다.  거의 외우다시피 봐도 여전히 웃긴다는 것이다. 참 질긴놈이다 싶으면서도 다른 재미있는 책들이 많은데도 왜 한가지만 파고드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이들의 독서습관을 위해서는 부모가 솔선수범을 보여야 한다고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말은 순 거짓말이거나 경험적 오류다. 우리 집에서는 내가 책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이들은 책에서 멀어져갔다. 책을 읽다가 혼자보기 아까운 내용이 있어 읽어보라고 하면 엄마는 왜 이렇게 재미없는 책만 보고 있냐고 되묻는다. 좀 더 커서는 세상에는 책보다 재미있는 일이 너무 많다고 외려 가르치려 든다. 

 아이들 뿐만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은 날보고 공부하는게 그렇게 좋냐고 비아냥 거린다.  공부라고 해봐야 정말 공부하는 분들과는 체급이 다른 이야기지만 말이다. 나는 정말 할줄 아는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냥 책을 보는거다. 즐거울 때가 많지만 책을 보는 것이 언제나 즐거운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그나마 가장 즐겁고 가치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 할 것이다. 나도 하루 일과 중에 책 보는 시간을 가장 많이 할애하려고 애쓴다. 이 말은 상대적으로 따로 시간을 내지 않으면 책볼 시간이 없다는 얘기와도 같다. 직장생활과 집안살림만으로도 시간은 늘 모자란다. 책과 함께 있을때는 신간이 편안하다. 죽을때까지 책을 읽을 수 있다면 좋겠다. 아마도  어릴때 남들은 귀에 닳도록 듣는 공부하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고 자란  무의식의 발로인지도 모르겠다.  

대를 물려 듣기도 싫고 말하기도 싫은 공부라는 것을 강유원은 몸으로 하라고 한다. 아니 하라고 하지도 않는다. 공부하는 사람은 어때야 한다라거나 자신은 이렇게 공부하고 있다는 자신의 생각을 좀 다부지고 논리적인 문체로 적어놓았을 뿐이다.  그에게  책을 읽는 것은 죽을 때 후회하지 않겠다는 '인생의 알리바이' 라고 한다. 죽을 때까지 읽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것도 양에 대한 의미보다는 깊이에 천착한 '인생의 알리바이'다. 한권의 책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그 텍스트의 의미를 정확하게 읽기를 그는 권하고 있다. 그러나 『몸으로 하는 공부』라는 이 책을 읽다보면 그는 독서의 깊이 못지 않게 넓이도 갖추고 있고 읽은 책에 대해 생각하고 정리하는 공부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다  짐작할 수 있다. 원전에 입각해서 수십번씩 읽고 생각을 모으고 정리했다는데까지 생각이 미치니 참 독한 사람이다 싶다. 그는 이런 방법을 그의 스승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참 존경스러운 분이고 그것을 또 몸소 실천하고 있는 그도 마땅히 존경받아야할 사람이다.

 근대가 시작될 무렵의 시기를 계몽주의 시기라고 한다. 계몽주의의 모토는 '이성을 대중화하라'였다.  현대는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대중은 매체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강유원은 대중을 우민화하는 대중매체에 대항하여 '대중을 이성화하라'고 외친다. 그것은 지식인의 몫이라는 것이다. 그가 지식인으로 꼽고 있는 대상은 소설가와 대학에 관련된 교수 혹은 그 주변인물들이다. 그는 어떤이가 명백하게 '돈을 위해서 소설을 쓴다면, 즉 소설을 하나의 상품으로서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를 소설가가라 부를 수는 없고 기업가라 불러야 마땅하다'고 한다.  대학의 지식인들이 그들을 먹여살려주는 학생들을 위해 공부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나 이를 해결하기 위해 '쿠폰제'를 적용해야한다는 제안은 너무나 가슴에 와 닿는다.  

 강유원은 세가지 학문하는 태도를 짚는다. 그것은 현존하는 것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하는 인문학적 태도, 사태에 대한 객관적 파악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과학적 태도,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것을 찾고자하는 공학적 태도이다. 가장 좋은 학문하는 태도는 이 세가지 태도가 잘 어우러져야 한다는 것이다.

강유원은 이 밖에도 지식인과 매체와의 관계, 패스트푸드의 전체주의 등을 짚는다. 그는 매스미디어에 등장하는 지식인들에 대해 '명성에 굶주린 거지'라고 부르고 부르디외를 인용하여 '일회용 사고의 전문가들'이라고 꼬집는다. 이러한 단어들은 읽는이들에게도 자극적이지만 그가 지향하고 있는 지식인의 태도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해준다. 맥도날드는 패스트푸드의 대명사다. 맥도날드가 성공하게된 전략적 특성을 명료하게 요약 정리 한 그는,  전세계적으로 성공신화를 거둔 '맥도날드화'는  폭력과 억압, 독재자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정치적 형태의 전체주의보다 더 무서운 전체주의라는 경고를 잊지 않는다.

강유원의 『몸으로 하는 공부』를 읽으면서 나는 감동보다도 부끄러움을 먼저 느껴야했다. 무언가를 참 많이도 하고 있지만 제대로 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것 같은 자괴감이 몰려왔다. 나는 날날이 직장인이었고, 날날이 엄마, 주부였고, 순 날날이 원생이었다. 한마디로 순 날탕 인생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의 책은 무지한 나를 이성화 시키는데 단초가 되어주었다.  그가 궁금해졌고, 자신의 싸이트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www.armarius.net)  다양한 책들을 함께 읽어가는 독서클럽, 원전강독, 많은 리뷰들이 그대로 오픈되어 있었다. 내게는 버겁겠지만 자주 들러서 몸으로 하는 공부를 함께 해야할 것 같다. 한동안 강유원을 해바라기 할 것같은 불길한 예감으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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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와 불교 살림지식총서 256
오세영 지음 / 살림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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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대상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시나 소설은 인식론의 산물이다. 그러나 소설이 인간의 행위를 대상으로 하는 반면 시는 사물을 대상으로 한다. 시가 그 대상을 객관에서 찾느냐 혹은 주관에서 찾느냐에 따라 대상시와 비대상시가 나누어진다. 그러므로 대상없는 시란 있을 수 없다. 오늘날의 아방가르드 시나 포스트모더니즘 시 혹은 미래파의 시 역시 대상 없이 쓴 시가 아니라 객관 대신 주관을 대상으로 하여 쓴 시의 한 유형이다.

 

객관을 대상으로 하든 주관을 대상으로 하든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으로서의 시론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시론서들이 펼쳐놓은 몇 백 쪽에 이르는 책을 몇 권씩 읽어도 오리무중을 넘어 십리무중이 되어 한마디로 답할 수 없는 것은 나의 무지 때문인가. 작지만 매운 이 책은 무지의 더께를 한 겹 벗겨주었다. 최근 몇 권의 이 살림지식총서들이 여간 마음에 드는게 아니다.

오세영은 휠라이트의 시론과 하이데거의 시론이 불교의 세계관과 맞닿아 있음을 명료하게 정리해놓았다. 휠라이트에 의하면 대상이 지닌 실재를 기술하는데 있어 언어는 필수불가결하다. 그러나 언어는 항상 실재와 어긋나 있다. 오직 시의 언어만의 대상이 지닌 실재성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시의 언어를 만나기 위해서는 사물을 물질이나 도구로 보지 말고 하나의 실존으로 대해야한다. 즉 대상은 주체가 진실한 마음으로 타자를 향해 귀와 마음을 열고, 타아의 실존 속에서 그 자신이 스스로 타자가 되어 줄 때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휠라이트의 시론은 하이데거의 현상학과 닿아있는 것 같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현존재를 구분하고 존재는 현존재를 통해 숨겨진 자신을 드러낸다고 본다. 이 존재는 언어를 통해 개시되며 이 존재를 이해하는데 언어 이외의 통로는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따라서 시는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처음으로 현존하도록 하는 행위이다." 시인들이 같은 소재를 가지고도 전혀 다른 의미의 시를 쓰는 것이 바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그들만의 눈으로 존재를 바라보고 우리에게 '현존'하도록 하는 것일 터이다. 우리가 늘 시에 있어서의 참신성, 새로운 시각을 요구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학습으로 인해 덧씌워진 내 눈의 껍질을 대체 몇 번이나 벗어야 시의 눈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불교는 내면의 성찰을 그 핵심으로 한다. 내면을 성찰해 무아의 경지인 해탈(깨달음)에 이르고자 함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점수의 수행법이나, 선의 돈오법 등은 모두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이다. 그 깨달음은 수행을 통한 청정심의 회복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도, 순간적인 직관의 돌파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도 있다. 불교에서의 이 깨달음의 상태는 게송 혹은 오도송을 발생시킨다. 하이데거가 시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휠라이트의 시론이든 하이데거의 시론이든 불교의 게송이든 시는 내가(주체가) 사라진 자리에 비로소 온다. 더 쉽게 풀어쓰면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시인은 다만 받아 적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사물은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 사물은 온몸으로 말한다. 따라서 시인은 사물이 하는 말을 받아 적기 위해 경건하고도 진지한 자세로 기다릴 줄 알아야한다. 끊임없는 독서와 성찰과 체험을 가지고.

하이데거는 여전히 버겁다.
존재와 현존재의 의미가 헷갈려 머리 쥐어 뜯던 기억이 먹구름처럼 가슴을 짓누른다. 이후에 들뢰즈, 알랭 바디우 등에서 존재와 존재자, 사건, 우연, 주름 등 수습할 길 없이 헝클어져 있었던 기억은 악몽이다. 너무나 어처구니없게도 명사와 동사의 차이로 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준 이정우 선생의 기억이 생생할 뿐이다.

현대시와 불교의 상관성을 짚은 작가는 '선시란 무엇인가'묻고 그 의미와 종류를 분류한다. 이 책의 후반부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과 백담사 무금선원 無今禪院 에 기거하는 오현스님의 시에 대한 해설이다. 당시에 서울 장안의 종이 값을 올렸을 만큼 오독(?)되었던 <님의 침묵>은 여기에서 제대로 평가받고 있는 듯하다. 한용운이 자신의 깨달음을 인간의 가장 큰 관심사인 사랑을 소재로 한 자유시의 형식을 선택한데 반해 조오현은 시조의 형식을 사용한다. 그동안 한시의 번역본만을 읽다가 한글로 된 시조를 맛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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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10-12-13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예전에 읽은 적은 있지만 이번 기회에 다시 읽으니 새롭네요^^

반딧불이 2010-12-13 01:29   좋아요 0 | URL
제가 이런 책도 읽었군요. 저도 새롭습니다. 이때만 해도 시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나봅니다.
 
여행의 책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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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작가와 믿을만한 번역가의 글을 읽는 것은 누구와도 나누고싶지 않은 비밀의 맛이다. 명절을 앞두고 집안청소와 장보기, 음식준비 등으로 마음이 조급하고 시간에 쫓기면서도 선뜻 덮어둘 수 없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개미』로 나를 매료시켰다.이후 그의 새로운 작품들이 인기몰이를 하며 출간되었고 우리나라에 다녀간 기억도 있다.『개미』이후엔 그의 작품을 찾아읽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그는 언제나 내게 과도한 친밀감을 느끼게 하곤한다. 아무래도 베르베르가 『개미』의 행간에 오랜시간이 지나도 잊어버릴 수 없는 중독성 강한 페로몬을 뿌려놓았던게 틀림없다. 

 『여행의 책』이라고 해서 흔한 세계여행 안내책 쯤으로 치부했었다. 그러면서도 베르베르가 여행책을? 하며 미심쩍어 했었고 그래도 베르나르라면 뭔가 다르겠지 하는 심정이었다. 언제 서점에 가면 정말 그런 여행서인가 한번 들여다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같다. 잊어버려도 그만이려니 싶어 적어두지도 않았던 책이다. 우연히 어느 블로그에서 보게된 이 책이 지리적 여행 안내서가 아니라 '자기 내면으로의 여행'이라는 것을 알았다.나는 내면으로의 여행이 절실한 상황이었고  한때 마음주었던 남성작가여서 선뜻 책을 구매하게 되었다. 

 어떤 친구가 옛날 애인을 다시 만났다고 했다. 10여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두번 만날때까지 가슴이 두근거리더란다. 나는 예전에 사랑했었던... 까지는 아니더라도 알고 지내던 남자조차 길가다가 우연히 마주치는 경험도 못해본 찌질이도 운도 없는 년이다. 근데 이게 불운 맞나?

한때 마음주었던 남자를 길가다가 마주쳤다고 치자. 그 남자가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매력적이라면 내 가슴도 뛸까? 아니면 이미 자산이 되어버린 이 특유의 뻔뻔함으로 어제 만난 친구인듯 담담하게 대할까?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닥쳐봐야 알것같다.

 10여년 전의 베르베르는 서구적이고 지적이고 과학적이라는 느낌을 전해주었었다. 바쁜척 하고 다니긴 하지만 10년전에 찜해둔 남자라도 절대 그냥 방치해 둘 수는 없는 법. 간간이 눈동냥 귀동냥으로 그가『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뇌』, 『나무』 등을 출간했다는 소식 정도는 접하고 있었다. 여전히 그의 과학적 상상력을 생각해보게 되는 제목들이었다.

그러나 십년만에 다시 만난 그는 동양적이고 철학적이고 영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분석적인 것을 다 아우르고 난 후의 총체적 느낌이랄까.훨씬 더 편안해지고 여유로와진 느낌이다. 10년이라는 시간동안 참 많은 다양한 국적의 남자들과 연애질(?)을 했지만 여전히 그는 누구에게서도 느낄 수 없는 매력을 여전히 갖고 있다. 

 『여행의 책』은 독특한 느낌을 전해준다. 책이 내게 1:1로 말을 걸어오고 나를 신천옹으로 변신하게 한다. 책은 나를 데리고 시간적, 공간적 여행을 떠난다. 그것은 과거일수도 있고 또 미래일수도 있다. 그곳은 바로 여기일 수도 있고 먼 과거속의 어느 바닷가일수도 있다. 몸의 여행이 아니라 정신의 여행인 것이다. 그는 공기, 흙, 물, 불의 세계로 나를 이끈다. 

 공기의 세계에서는 육체에서 정신을 해방시킨다. 정신의 해방은 마약이나, 종교, 컴퓨터와 같은 첨단기술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 흙의 세계는 안식처다. 나 나름대로 나만의 집을 짓고 꾸민다. 안식의 집에는 나의 상징이 있고 무기가 있고 축제가 있다. 불의 세계는 싸움터다. 이곳에서 나는 내 개인적인 적과도 싸워야 하고 체제나 조직과도 싸워야하며 질병과도 불운과도 싸워야한다. 그러나 나는 이미 적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있고 체제는 공격하지 않고도 낙후시킬수 있는 창의적 능력도 있다.또 내몸은 이미 진통제나 소독약, 소염제 등을 스스로 만들어낼 줄 알기 때문에 질병 또한 더이상 적이 아니다. 불운과 맞서서 할일은 아무것도 없다. 불운이 안개처럼 덮쳐오거든 가만히 엎드려서 걷히기를 기다리며 나를 되돌아보면 된다. 불운은 나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다. 물의 세계는 만남의 세계이다. 물의 세계에서는 나 자신의 과거와 만나고, 조부모를 만난고 조부모의 조부모를 거슬러 올라가 선사시대의 조상들을 만나고 더 거슬러 올라가 나의 행성과 은하와 태초의 빅뱅을 만날 수 있다. 

 일찌기 철학자들은 공기, 흙, 불,물을 우주의 4원소로 보았다. 베르베르는 우주의 구성원소인 4원소의 세계로 각각 우리를 안내하면서 동시에 우주로의 여행을 안내한 것인지도 모른다. '여행의 책'은 또한 '책의 여행'을 암시하기도 한다.

태초의 빅뱅을 만나던 우주여행을 떠나던 여하간 10년만에 다시 만난 베르나르 베르베르. 가슴이 뛰지는 않았지만 약간 변질된 듯한 그의 페로몬은 여전히 내게 유효하며 또 다시 10년 후가 되더라도 나는 기쁜마음으로 아무 망설임없이 그를 다시 만날 것같다.  

 

p.s 오늘 아침 그가  영화개봉 관계로 또 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개미>도 우리나라 감독과 영화로 준비중이라네.. 돈 많은 남자야 부담없지만 돈 밝히는 남자는 매력없는데...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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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열정
수잔 손택 지음, 홍한별 옮김 / 이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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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잔 손택을 처음 만난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에서 만났던 것은 확실하고, 김수영의 시와 산문들에서 만났던 것도 확실한데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 모르겠다. 허긴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녀에게 마음두고 있었던 것이 언제부터였는지가 궁금할 따름이다. 얼마전 김수영을 다시 읽으면서 몇장 되지 않는 그의 사진을 오래 들여다본 적 있다. 언제나 런닝셔츠 차림인 그는 오른손으로 턱을 괴어 얼굴을 찌그러뜨린채  45도 정도 위로 시선을 두고있다. 그가 저렇게 응시하고 있는 곳은 어디일까 늘 궁금해지곤 한다. 그곳은 김수영이 지향하던 곳이지만 어디라고 딱히 규정되지 않는 곳임에 틀림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그의 포즈가 손택의 시선과 유사하다는 걸 알았다. 나는 애써 그들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도록 배치해보지만 그들의 시선은 늘 어긋나고 단 한번의 눈 깜빡임도 없이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곳만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다.  

                          인물사진 


 『은유로서의 질병』으로 손택을 처음 알게 되었지만 이 책을 완독하지 못한 채로 『타인의 고통』을 먼저 접하게 되었다.  『타인의 고통』을 읽다가 이책의 전작에 해당하는 『사진에 관하여』라는 책을 알게되었다.나는 차근차근 탐독하고 싶은 마음에 『타인의 고통』을 접고 『사진에 관하여』를 준비하면서 그녀의 또 다른 책 『우울한 열정』을 함께 구입하게 되었다. 결국 가장먼저 읽게 된 책이 되어버렸다. 내가 읽다가만 『사진에 관하여』의 표지는 아래 왼쪽의 것인데 최근 것은 손택의 얼굴을 표지모델로 삼았다. 그녀의 책 대부분이 그녀의 얼굴을 표지모델로 삼고 있는 것이 독특하다.

        

소설가, 극작가, 연극연출가, 영화감독, 문화비평가, 사회운동가 등으로 카멜레온처럼 변신해온 그녀의 수많은 이력들 중에서 문학평론가로서의 그녀의 모습과 가장 먼저 맞닥뜨리게 된 셈이다.


『우울한 열정』은 "Under the Sign of Saturn(토성의 영향아래)"라는 발터 벤야민에 관한 에세이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손택이 선택한 7명의 예술가들에 관한 에세이가 실려있다. 발터 벤야민이나 롤랑 바르트는 내게도 친숙한 이름이지만 폴 굿맨, 레니 리펜슈탈,지버베르크,엘리아스 카네티, 앙토냉 아르토 등은 손택을 통해 처음 접하게된 인물들이다. 그녀의 각 인물들에 대한 열정과 예술작품에 대한 냉철한 비판으로 인해 나는 친숙한 인물에게서는 더욱 친밀함을, 낯선 인물들에게서는 호기심과 함께 객관적 시선을 갖게 되었다.

"나는 폴 굿맨을 읽으면서 힘을 얻었다. 생존해 있거나 사망한 작가들 중에서, 나에게 작가가 된다는 것의 가치를 정립하게 해준 작가, 그리고 그 사람의 글을 내글을 평가하는 판단 기준으로 삼은 작가가 몇 명 있는데 그는 그 중 한 사람이다." 20여년 동안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미국 작가로 존재했던 폴 굿맨의 부고를 접한 수잔이 그에 대해 쓴 글에 나오는 구절이다. 폴 굿맨은 시, 희곡, 소설뿐만아니라 사회비평, 문학비평 등 지적 전문분야에 관한 책까지 썼다고 한다. 수잔은 그를 미국의 사르트르이고 장 콕토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지난 20여년동안 폴 굿맨의 책 대부분이 다 갖추어지지 않은 집에서는 한 번도 산적이 없다는 수잔의 고백을 듣는 것은 부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누군가를 미치도록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녀의 행복이 부럽다. 누군가 그녀를 우상으로 삼아 그녀의 책을 모두 갖춘 집에서 살고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이미 그런것을 알수 없는 곳에 있다. 폴 굿맨의 작품은 아직 번역이 안된 것인지 검색되는 것이 없어서 이 또한 안타깝다.

<매혹적인 파시즘>이라는 레니 리펜슈탈에 관한 글은 냉철하다. 리펜슈탈의 나치 전력에 대해 조목 조목 짚어가는 수잔은 그녀의 그런 전력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만든 영화『의지의 승리』나 누바족의 사진이 실린 책 『누바족의 최후』가 아름답다고 한다. 그것은 그녀가 나치즘의 무시무시한 선전선동가여서가 아니라 언제나 아름다움을 병적으로 추구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파시스트 미학은 절제,복종적 행동,과장된 노력,고통의 인내 등에 대한 몰두에서 나오며 이를 정당화한다. 겉보기에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자기중심주의와 복종심을 동시에 종용한다. 지배와 복종의 관계는 독특한 볼거리의 형태로 나타난다." 

"공식 공산주의 예술의 무성적 경건함과 대조적으로 나치 예술은 외설적이며 동시에 이상주의적이다. 유토피아적 미학(육체적 완벽함, 생물학적으로 부여받은 정체성)은 이상주의적 에로티시즘을 뜻한다. 섹슈얼리티는 지도자의 매혹과 추종자의 기쁨으로 변환된다. 파시스트적 이상은 성적 에너지를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정신적 힘으로 변환하는 것이다." 등 섹슈얼리티가 파시즘과 관계 맺고 있는 파시스트 미학에 대한 수잔의 통찰은 경청해두어야할 것이다.  

 <바르트를 추억하며>역시 바르트가 예순네살로 사망한 후에 수잔이 쓴 글이다. 수잔은 바르트의 작업 전체를 결국은 '자기 묘사'라는 엄청나게 복잡한 기획으로 보고 있다. 동성애자였던 바르트는 수잔의 말대로 자기 자신에 대한 연구자의 관심을 벗어나지 않았다. 『사랑의 단상』이 그랬고,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가 그랬다. 하지만 『현대의 신화』나 사진에 관한 글에서는 좀 다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토성의 영향아래>라는 제목의 벤야민에 관한 글은 가장 관심있게 읽은 글이다. 중세 생리학에서는 피,점액,황담즙,흑담즙등 의 체액의 배합정도가 사람의 성격과 체질을 결정한다고 믿었다. 배합의 정도에 따라 쾌활, 냉담, 다혈, 그리고 우울 등의 기질이 나타난다고 했다.벤야민은 스스로 자신을 우울한 사람이라 생각했고 전통적인 점성술 개념을 끌어와 "나는 토성의 영향 아래 태어났다. 가장 느리게 공전하는 별, 우회와 지연의 행성...."으로 정의했다. 벤야민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토성적 기질을 모두 자신의 연구과제에 투입했으며 그의 기질이 글쓰기의 주제를 결정했다. 

토성의 영향을 받은 사람은 어떠한지, 토성적 기질을 가진 사람을 어떤 성향을 띠는지 벤야민의 어린 시절의 경험과 그의 작품들과 관련짓고 있다. 철학자이면서 뛰어난 문예 이론가인 벤야민이 점성술을 끌어들이는 것도 재미있지만 점성술에 나타나는 우울증적 기질을 너무나 잘 이용한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꼼꼼이 다시 읽어야할 부분이다.

 작품을 읽으면서 번역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껄끄러운 번역때문에 몇번씩 다시 읽어야했던 문장들이 많다. 수잔의 작품들은 번역한 사람이 각양각색이다. 그만큼 수잔이 관심둔 분야가 다양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30페이지의 에세이를 쓰기 위해 수천 페이지를 써야했고 매 페이지마다 30-40개의 초고가 필요했다는 수잔의 글을 완벽하게 번역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물론 나는 이런 번역은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책 읽는 즐거움에 번역이 거는 딴지를 부록으로 즐길 수 있을 만큼의 번역만으로도 충분이 고마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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