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력이 아직 대부분 일어나지 않은 시간까지 다아우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앞으로 두 달 안에 구슬 같은 근사한 지구에 무슨 일이든지 일어날 수 있다. 생명체의 관점에서 희망찬 일은 하나도 없다. 떠도는 별 하나가 태양계 전체와 지구를 뒤흔들 수도, 운석 충돌로 대멸종이 벌어질 수도, 지구의 자전축 기울기가 커질수도, 궤도가 휘고 밀려나 몇몇 행성이 쫓겨날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대략 넉 달 후, 그러니까 50억 년 후에는 연료를 다 소진한 태양이 적색 왜성으로 팽창해 결국 수성과 금성을 집어삼키리라는 것이다. 지구는 그때까지 살아남는다고 쳐도 바짝 시들고 건조해져 바다가 끓다 메말라버릴 것이고, 그렇게 백색 외성 흑색 왜성 죽어가는 태양이 있는 지긋지긋한 궤도에 갇힌 잉걸불로 남을 것이다. 그러다 끝내 궤도가 쇠하고 태양이 우리까지 먹어치우면, 쇼는 모두 끝이다. - P200
이것은 국지적인 장면에 불과하다. 작은 소동, 미니드라마다. 우리는 충돌하고 부유하는 우주에 갇혀 있다. 최초의 빅뱅으로 우주가 쪼개지며 길고 느리게 퍼져 나간 잔물결 속에 우리가 있다. 가까이 있는 은하들은 서로 충돌하고, 남은 은하들은 서로를 피해 흩어진다. 그렇게 홀로 떨어지고 나면 스스로 팽창하는 공간, 저절로 탄생하는 공허만이 남는다. 그때도 존재할 우주력에서 인간이 무엇을 했고 존재했는가는 1년 중 딱 하루, 찰나에 깜빡였다 사라지는 빛이어서 누구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 P201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세상 반대편에 대한 감각이있었다. 머나멀어서 닿지 않는 그런 곳. 그런데 이제 이들은 대륙들이 웃자란 정원처럼 서로 달려드는 모습을보고 있다. 아시아와 오스트랄라시아는 하나도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사이에 있는 섬들로 이어져 있다. 러시아와 알래스카도 그렇게 맞닿아 있다. 물 한 방울도 둘을 갈라놓지 않는다. 팡파르 소리도 없이 유럽과 아시아가 만난다. 대륙들과 나라들이 잇따른다. 지구는 작지 않지만 거의 끝없이 이어진다. 유려히 흐르는 운문들의 서사시다. 상충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타래가 풀리듯 바다가 다가오고, 계속 다가오고 다가오고다가오는 동안에도, 윤기 나는 파란색을 제외하면 육지는 물론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을 때도, 아는 나라들이 죄다 우주 동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것처럼 보일 때도 다른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다른 무언가는 없기 때문이다.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다. 그러다육지가 다시 나타나면 정신을 뺏어 간 꿈에서 막 깨어난 것처럼 참, 육지가 있지, 하고 생각하고, 그러다 또바다가 나타나면 꿈속의 꿈에서 막 깨어난 것처럼 참, 바다가 있지, 하고 생각한다. - P217
해가 뜰 때마다 줄어들거나 사라지는 것은 없다. 그리고 일출은 매번 이들에게 놀라움을 안긴다. 빛의 칼날이 벤 자리에서 태양이 찰나의 완전한 별로 터져 나와 양동이를 뒤집은 것처럼 빛을 쏟아 내어 지구가 빛에 잠길 때마다, 순식간에 밤이 낮이 될 때마다, 지구가 잠수하는 생물처럼 우주로 가라앉아 깊은 우주에서 날마다 또 다른 하루를 발견할 때마다, 90분마다 돌아오는 하루, 무한히 공급되는 새날을 발견할 때마다 이들은 놀란다. - P223
선원들이 자는 동안 우주선은 꼬박 90분이 걸려 지구를 한 바퀴 더 돌았다. 오늘 열여섯 번 도는 궤도 중 열다섯 번째 궤도였다. 이제 오른쪽을 바라보면 눈 덮인 히말라야산맥이 도로처럼 쭉 뻗은 풍경이 펼쳐진다. 광활하고 탁 트인 도로가 끝없이 이어진다. 산맥 남쪽으로는 도시 라호르와 뉴델리가 있는데, 찬란한 낮의 햇살에 풍경이 하얗게 바래 사라지고 마치 인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광막한 지형에 삼켜진다. 산맥만이 계속해서 남쪽으로 이어진다. - P224
러시아는 아침이 한창이다. 지구는 날카로운 빛을 받아 또 한 번 칠흑 같은 우주 속 유리구슬이 된다. 인접한 별들과 행성들을 더는 볼 수 없게 된 지금, 지구는상실감에 빠졌고 연약해졌다. 그러나 동시에 그 반대의 존재가 되어 있다. 지구의 흠 없는 표면 위에는 깨트러질 게 아무것도 없다. 그냥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지구는 물질성이 희미해지고 환영이나 성령에 가까워진다. - P224
전 지구가 발아래를 지나갔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이들은 궤도를 한 번 돌 때마다 서쪽으로 몇 도씩 이동할 것이고 90분이 지나 궤도가 다시 북쪽을 향하게 되면 새 하루가 밝는 동유럽 위를 건널 것이다. 그렇게 새로운 나날 중 또 한 번의 새날이 시작된다. 지구는 파란 고리 모양이고 눈으로 뒤덮여 있다. 궤도는 북쪽으로 올라갈 수 있는 데까지 올라가 북극권 한계선의 아래쪽 가장자리에서 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 너머 북극점은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제 러시아에서 내려와 5000마일 간 이어지는 태평양 길로 향한다. - P225
궤도 16 달우주비행사들이 작은 골무처럼 생긴 사령선을 타고 달 궤도를 향해 가고 있다. 지금 그들은 플라이바이 첫 단계에 진입하고 있다. 지상관제 팀의 교신 담당자가 말한다. 세상에서 번개를 가장 여러 번 맞은 사람의 기록이 깨진 거 알아요? 원래 일곱 번이었는데 지난주 중국에서 어떤 남자가 여덟 번째 번개를 맞았대요. 달 임무 팀원 중 하나가 반응한다. 오, 피뢰침이라도 갖고 다녔대요? 사람들은 기록을 깨려고 그런 일들을 하지, 다른 팀원이 웃으며 말하자 교신 담당자는 참고로 번개에 맞아 죽는 사람의 84퍼센트가 남자라고 덧붙인다. 여자 팀원은 그게 당연하다고 한다. 바보짓 하다가 일찍 죽는 건 남자니까. - P223
외부에서 보면 달 우주비행사들은 회전하는 두 천체 사이에 인간이 만들어 놓은, 오랫동안 아무도 다니지 않은 길을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들은외롭게 모험을 떠난 게 아니다. 인공위성 무리와 바글바글 궤도를 도는 작은 물체들, 자리에서 밀려난 2억개의 물체들 사이를 지나고 있다. 작동 중인 인공위성들, 산산조각이 난 인공위성 잔해들, 자연위성들, 페인트쪼가리들, 얼어붙은 엔진 냉각수, 로켓 상단 엔진, 스푸트니크 1호와 이리듐 33호와 코스모스 2251호의 잔해들, 고체 로켓의 배기 입자, 누군가가 잃어버린 연장 가방, 잘못 둔 카메라, 놓쳐버린 펜치와 장갑, 시속 2만 5000마일의 속도로 궤도를 돌며 우주를 깔끄럽게 만드는 2억 개의 물체들. - P227
외부에서 보면 달 우주선이 이런 쓰레기장 사이를살금살금 지나는 게 보인다. 우주선은 태양계를 통틀어 가장 붐비고 쓰레기로 넘치는 지구 저궤도에 있다가 분사 연료를 사용해 가장 덜 어수선하면서 달로 가기에 가장 수월한 경로로 이동한다. 억만장자 로켓을 타고 최대 속력으로, 쓰레기장 밖으로, 멀리멀리 달아난다. 부서지고 불타고 폭풍이 치고 동요하는 지구에서 멀리, 범죄 현장에서 달아나듯 떠난다. 뿌리째 뽑아내고 내동댕이치는 무자비한 태풍, 도로를 덮친 집들이 급류처럼 쏠려 가고 피해를 헤아릴 수조차 없는 재앙적인 폐허에서 멀리. 비스듬한 궤도를 따라 미약하게 비틀대는, 급소에 총을 겨눈 인류에게 인질로 잡혀 있는 행성에서 멀리 벗어나 정복을 기다리는 미개척 광야로 향한다. 정복하기 좋게 무르익은 새로운 검은 황금의 땅을 향해, 25만 마일의 우주 잔디를 헤쳐 간다. - P228
매일 쏟아지는 공격을 견디며 여기저기 움푹 찌그러 진 튜브 형태 모듈에 안톤, 로만, 빌, 치에, 숀, 피에트로가 잠들어 있다. 저마다 수면실에 박쥐처럼 매달려 있다. 안톤은 뺨에 주먹이 스쳐 잠깐 잠에서 깬다. 처음이자 유일하게 든 생각은 달로 떠난 우주선에 대한 궁금증이다. 뒤이어 즐거웠던 어린 시절이 비눗방울처럼 빵터지는 날카로운 느낌과 함께 다시 잠에 빠져든다. 피에트로의 머리 근처 장비에 고정된 모니터에 무음으로 아내의 메시지가 도착한다. 메시지에는 참혹한 태풍 피해를 보도한 뉴스 링크가 있다. 메시지는 아침이 밝을 때까지 읽지 않은 채 그대로일 것이다. 숀의 모니터 화면에도 읽지 않은 메시지가 와 있다. 트램펄린에서 뛰는 염소 영상을 딸이 보내왔다. 다른 설명 없이 사랑해! 라고만 쓰여 있다. - P228
동쪽 태평양에서부터 무자비한 열기가 방향을 틀어 환하게 몰려온다. 마지막으로 하강하는 열여섯 번째 궤도에서 그것은 해체된 빛이 구리색으로 찬란히 물든 모습으로 보인다. 물도 아니고 흙도 아니다. 그저 광자들이어서 잡히지 않으며 가만히 남아 있지도 않다. 남태평양 한 자락에서부터 급격히 밤이 깊어지면 그제야 흐트러진다. 이로부터 몇 년 후, 지금 지나고 있는 태평양의 바로이 지점에서, 이 우주선은 우아하게 궤도를 벗어나 대기권을 뚫고 바다로 떨어질 것이다. 잠수함들이 잔해를 찾아 내려갈 것이다. 그러나 그건 3만 5000번의 궤도만큼 떨어져 있는 일이다. 이 궤도는 남극 대륙에서 오로라가 깜빡이고 달이 찌그러진 자전거 바퀴처럼 커다랗게 뜨는 가장 깊은 가장자리까지 도달한다. 수요일 아침 5시 30분, 달 착륙 날이다. 별들이 폭발한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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